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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저는 이상하게 여름이 다가오면 하루키의 책이 읽고 싶어져요. 소설이든 에세이든, 저에게 여름은 하루키의 계절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루키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 여름이었나-싶으면 그것도 아니고, 하루키의 책이 여름에 많이 출간되었었나-생각하면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에요. 여름은 더워요. 비라도 한 번 내리면 다른 계절과는 달리 시원함보다는 눅눅함이 느껴지죠. 하지만 한 번 비가 내릴 때마다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나 초록색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늘 일본을 찾게 되는 계절도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걸까요. 제가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기 전부터 만난 하루키의 문학. 어쩌면 저에게는 하루키=일본=여름이라는 이미지가 새겨져있나 봅니다. 전 올 여름도 일본에 가요~10박 11일의 홋카이도, 야호!! ^0^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의 세 번째 무라카미 음성입니다. 이미 첫 번째 음성인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도 출간되어 <무라카미 라디오>가 완간되었답니다. 두 번째 음성인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대여섯권 구입해서 학교 동아리 아이들에게도 읽으라고 나눠주었는데, 글쎄요, 얼마나 읽었으려나요. 으훗. 하루키의 글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에헹, 이게 뭐야, 무슨 이야기야-하는 내용들도 더러 있어서 그저 휙휙 넘겨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나름 하루키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옆에는 수박이나 빙수, 주스 등을 가져다놓고 돗자리에 눕거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창가에 기대 앉아서 하루키의 글을 읽다보면 제대로 된 여름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마치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모습?! 그것이 저의 로망입니닷!!
역시 이번 책에서도 오하시 아유미씨의 (응?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그냥 하루키이고 오하시 아유미씨는 '씨'가 붙게 되는 걸까요 @.@) 일러스트와 함께 합니다. 오하시씨의 일러스트가 좋은 이유는 그림들이 뭐랄까, 이런 말을 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림의 대상들이 마치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표지의 사자를 한 번 보세요. 평소 용맹하고 사나운 이미지와는 달리 멍~한 표정으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먹고 있잖아요. 혹시 고기가 아닌 샐러드를 먹으라고 주었기 때문인 걸까요. 으흠. 그런 느낌은 일러스트들이 -꽉 차지 않는다-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우리의 동양화가 여백의 미를 살렸던 것처럼 오하시씨의 일러스트들도 숨 쉴 여유를 만들어주는 듯한 편안함을 전달해주거든요.
대체로 편안하게 쓰인 글이에요. 한가롭게 눕거나 앉거나 뒹굴어다니면서 술술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헛소리(?)라고 느껴지는 것도 있고, 무릎을 탁 칠만한 문장도 있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게 기발한 부분도 있어요. 그 중 몇 가지를 발췌해보면.
평소에는 특별히 눈초리를 추켜올리지 않고 온화하게 넘기던 일도 하필 화나는 시기에 걸려버리면 화를 낸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화를 낸다. 말하자면 '지뢰를 밟은' 것이다......상대가 화를 내면 방어는 단단히 하되, 얌전히 샌드백이 되는 수밖에 없다. 자연재해에 정면으로 맞서봐야 어차피 이길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뱃사공처럼 그저 목을 움츠리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며 무지막지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불테리어밖에 본 적 없다 中>
여행을 수없이 하다보면 약간의 철학이 생겨나는데, '편리한 것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불편해진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내가 좋아하는 가방 中>
세상 사람 대부분은 실용적인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맞장구를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가, 좀처럼 잘 안 되네 中>
다른 우스운 문장이나 좋은 부분도 많지만 나머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또 역시 이번 책에서도 맥주 이야기와 먹는 이야기, 음악 이야기는 빠지지 않네요. 만약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빠졌다면 -이건 하루키가 쓴 책이 아니야!-하며 버럭 했을지도. 음. 역시 좋네요. 마음의 엔진이 잠시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사자는 역시 사자 칫솔로 이를 닦을까...-같은 요상한 질문을 던지는 작가라니, 매력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