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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고 대성통곡을 했던 그 새벽을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무엇이 나를 그렇게 울게 했는지 생각하곤 한다. 그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여기, 이 가슴에 남아 있어서, 순간 나도 모르게 쿵쿵 울려버리는 심장 부근을 지긋이 누르게 된다. 목구멍이 따가워지는 것, 저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가 뭉글뭉글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 제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은데 [저녁매미 일기]를 읽으면서 [칼에 지다]로 인해 많이 울었던 그 때를 생각했다. 요즘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쩌면 올해의 최고의 작품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1. 무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의도하지 않은 상해사건을 일으켜 도다 슈코쿠가 유배되어 있는 무카이야마 촌으로 향한 단노 쇼자부로. 슈코쿠는 에도 저택에서 측실과 밀통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시동을 죽였다는 혐의로 유폐되어 있다. 슈코쿠의 학문을 높이 산 주군은 그에게 가문의 가보(家譜)를 작성하게 했는데,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가보 편찬이 중단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시동이 죽은 후 십 년이 되는 해의 8월 8일을 할복 날짜로 정하고 가보 작성을 계속하게 했다. 쇼자부로가 슈코쿠를 만난 것은 할복까지 삼 년이 남은 해. 그리고 그의 역할은 측실밀통에 얽힌 사건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 확인해서 보고하는 것과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할복을 두려워한 슈코쿠가 도주할 경우 그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슈코쿠는 더없이 정갈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가보 작성에 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쇼자부로의 역할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생활할 뿐이다. 죽음의 시간을 선고받은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그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쇼자부로에게 슈코쿠가 말한다.
단노공,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도 겁나지 않는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사의 허세일 뿐. 나도 목숨이 아까워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합니다. 오십 년 뒤, 백 년 뒤에는 수명이 다하지요. 나는 그 기한이 삼 년 뒤로 정해진 것일 뿐. 하면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싶습니다...방금 말씀드린 것은 말하자면 설익은 깨달음이고, 나도 어떤 심정으로 취후를 맞이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p26~27
그런 그의 나날들을 기록한 것이 '저녁매미 일기'이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몸으로 '하루살이의 뜻'을 담아 지었다는 일기의 제목.
2. 죽음을 두려워하되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
측실밀통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쌓은 덕으로 여전히 슈코쿠는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가 깊다. 그러나 그는 죄인의 몸으로 마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정의로운 슈코쿠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한다. 가보 편찬에 숨어있는 진실을 밝히지 않는대신 할복을 사면해주겠다는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과 임무를 맞바꿀 수는 없다는 것. 그런 그의 굳센 마음은 최대 위기를 맞은 순간에도 빛을 발한다.
홋쇼인 님의 태생은 번이 지고 가야 할 것, 제 목숨과 맞바꿔서는 아니 될 문제입니다. 저는 이쿠타로와 단노 공을 되찾고 나면 예정대로 할복할 것입니다.
-p328
3. 살아간다는 것.
이 작품이 이렇게 뜻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죽음을 앞둔 무사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잃지 않을 수 있는 숭고함이 있고, 그런 숭고함은 대를 이어서, 혹은 옆에서 바라보는 이에게로 이어진다. 친구로 살아간다는 것,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들. 나에게 이 책은 소설일 뿐만 아니라 한 권의 철학책이기도 하다.
사람은 마음이 정하는 곳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이 향하는 곳에 뜻이 있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렵지 않다.
-P306
바보같을 정도로 우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 그런 마음들이 [저녁매미 일기]와 [칼에 지다]에는 담겨 있다. 그런 마음들이 작품 안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분명 누군가의 마음을 적시고 움직여서 그를 움직이게 해 줄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연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이루 셀 수 없을만큼 많지만 모든 사람이 다 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으로 이어진다 함은 곧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준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저렇듯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자신과 연이 있는 사람도 이 경치를 보고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살아가는 힘이란 그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p192~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