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사랑
전경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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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지 못해 세상엔 이토록 많은 고통과 상처가 얽히는 것이다.

멀리 남쪽에서 이 곳으로 온 여자는 단지 동생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의붓동생, 새엄마의 딸. 어린 마음에 그 아이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다 여겼고,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없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었다. 그 일이 이토록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마음을 짓누르며 그녀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될 줄은. 특별히 동생을 생각하며 산 것은 아니었으나 새엄마의 죽음은 여동생을 다시 그녀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였고 남편과 소원해지고 딸마저 자유롭게 훨훨 날아간 지금, 그녀는 동생의 집에서 동생을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첫 문장을 읽고 그 다음 문장을 읽어내리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아마도 처음부터 요양원이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주인공, 우울한 분위기, 상실의 고통. 내 마음은 아직도 어린아이라서 아프고 힘든 부분은 책이라도 쉽게 넘겨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책이기 때문에 더. 책만큼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므로 슬픔과 괴로움에 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 재미난다. 크게 자극적이지도 않고 엄청난 소설적 장치가 들어있는 것도 아닌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동생이 사는 곳에 발을 딛고 생활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그리고 종내는 만나게 될 여동생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그녀가 과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갈 지 궁금했다.

 

이 작품은 굳이 정의하자면 '치유의 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는 동생이 살고 있는 도시에 머물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자연스럽게 그곳에 동화될 뿐. 성스럽게 추앙받는 성모상은 그녀에게 죄책감의 상징이고, 마음 한 켠에 새겨진 주홍글씨이며,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벌이었다. 그런 그녀가 반짇고리 노인을 만나고, 고양이 칠월을 만나고, 세상만사 상담소의 상담사를 만나고, 동생의 지인들을 만나며 동생을 맞아들일 준비를 한다. 아무런 꿈도 없던 미래에 그녀의 흔적을 벌써부터 남겨놓은 채.

 

일본문학에서 엿볼 수 있었던 형식에 우리의 정서를 담아낸 따스한 작품이다.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제목처럼 작품 안에는 간간히 '최소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러하다. 최소한. 그녀의 인생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고,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던 대학 동기조차 과도한 표현으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으니 존재할 뿐,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정도로.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였는데, 마치 유토피아 같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할 듯한, 아무것도 아닌 듯 하나 굉장히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세상이었다.

 

최소한이라는 단어는 '아주 조금'이 아닌 '당연히 지켜야 할' 로 귀결된다. 사랑에서, 인연에서, 생활 속에서. 억지로 큰 것을 얻으려 하지 않고 최소한의 것을 바라며 최소한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 아름답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힐링은 최소한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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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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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 때만 해도 학교 수업이 오전반, 오후반 나뉘어 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 날은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저보다 엄마가 먼저 외출하시면서 문을 잘 잠그고 나가라고 당부하셨죠. 문을 잠궜는지, 아니면 그냥 열어놓고 갔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저에게 문을 잘 잠그고 가라고 했더니 오히려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크게 혼나지는 않았어요. 엄마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고 앞으로는 문단속 잘 하라고만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일이 제게는 무척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문단속에 무척 신경쓰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병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저는 제 스스로 강박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열쇠로 문을 잠그는 순간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이 정말로 제대로 잠겨있는지 몇 번씩 확인하곤 했거든요. 특히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제가 마지막으로 나갈 때는, 현관문이 떼어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몇 번씩 잡아당겨봐야 직성이 풀렸어요. 그나마 지금은 도어록으로 바뀐 덕분에 나아지기는 했습니다만. 게다가 저는 제가 아끼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과도(?)해서 혹시라도 그 물건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날은 아무것도 못하곤 했어요. 그것도 조금 나이를 먹고, 몇 번 물건을 잃어버리고 하다보니 조금 극뽁이 되기는 했습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거든요. 기억에도 남아있고요. 그런데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확인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제 안에 어떤 기준을 마련해놓고 있는 거죠. 몇 번 확인하면 괜찮아, 그 수만큼 확인하면 괜찮을거야-라는 기준. 사실 [아멘 아멘 아멘]을 읽으면서 무척 불편했어요. 애비는 자신 안에 기준을 마련해서 쓰레기를 줍고, 몇 십번씩 기도를 하고, 운전을 하면서는 누구를 치어죽이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며, 끝내는 자해까지 감행하죠. 그 시간들이 주위 사람에게는 걱정이고 두려움이겠지만 본인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와 공포였을 지 조금은 이해하니까요. 자신 안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들로 분명 피곤했을 거에요.

 

그녀의 강박증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높았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은 있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니까요. 결코 밝을 수만은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용기있게 써낸 그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녀가 겪은 강박장애는 결코 부끄럽지도, 이상한 눈으로 판단될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현실에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을테니까요. 누구나 겪는 우울증이 특별한 취급을 받지 않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이고, 아직도 우울증에 헉!하는 감정을 갖고 있는 분들도 많다는 현실은 아쉽습니다. 학교만 해도 한 반에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 심리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 적게는 두 세명, 많게는 열명 가까이 있거든요. 분명 그녀의 책이 용기있게 세상으로 걸어나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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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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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나에게 건넨 말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내가 들고 있던 책을 힐끔 보더니 -너 그런 책도 읽냐?-라고 힐난하는 듯 이야기했다. '사랑'이라는 글자만 보고 그 사람은 내가 가벼운 연애소설을 읽는다고 지레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 작품은 결코 '가벼운' 연애소설이 아님에도, 나는 그 때 책의 초반을 읽고 있던 중이라 그 힐난 비슷한 한 마디에 괜히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후로 어째서 가벼운 연애소설은 읽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높은 곳에 두는 가치는 사랑이라고 하면서 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책은 가치있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인가 궁금했다.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는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해를 품은 달]도 재미있었다. 이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연애소설이기에 좋아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옛날에,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접한 이 작품은 내게 굉장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기억이 난다. 약10년 전이었던 듯 한데, 자신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저 평범한 여고생에서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던 것이니)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 본능과 이성이라는 개념을 알았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순간의 상처가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가장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 점은 개인상담, 정신치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놓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몸이 아프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아플 때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끄럽다는 생각에 부여잡고 참기만 하면 그것이 더 큰 어둠이 되어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두 여자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발견하고 미래를 꿈꾸는 과정이 애틋하다. 이제 그녀들과 비슷한 (그래도 한참 떨어지기는 했으나) 연배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그녀들의 삶이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김형경 작가의 팬이 되었었다. 그 후 그녀의 장편, 단편소설은 거의 찾아 읽었지만, 이 작품만큼 내 가슴을 울렸던 이야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 개정되어 출간된 것이 특히 기쁜 이유다. 심리 에세이 [사람풍경], [천 개의 공감], [좋은 이별] 등으로도 유명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새롭게 주목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김형경 작가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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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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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마쓰모토 세이초. 그의 작품 중 읽은 것은 [제로의 초점]이라는 장편소설이었는데, 단편이 이만큼의 완성도를 갖는다면 이 작가는 장편보다 단편을 쓰는 편이 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로의 초점]의 전개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잠복]에 실린 단편작품들은 깔끔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물론 장편에 비해 긴장이나 스릴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거나, 장편에서 볼 수 있는 논리적인 두뇌싸움은 엿볼 수 없지만 미스터리인만큼 단편을 이만큼 써내기는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총 8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제로의 초점]을 단편화한 것 같은 <얼굴>부터, 쫓기는 용의자를 찾기 위해 그의 옛 연인을 감시하는 형사의 안타까운 심리가 고스란히 투영된 <잠복>,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아래 자식까지 해칠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그려낸 <귀축>, 도쿄에서 낙향한 한 신문기자가 심상치 않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투영>, 전화교환원이었던 여성이 잘못 건 전화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목소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닌 다른 지방의 신문을 구독하려 하는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의 사연, 남편을 살해한 여인의 숨겨진 욕망을 그린 <일 년 반만 기다려>,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했을 경우 널 하나에 매달려 있는 다른 사람을 빠뜨려 죽이고 자신만 사는 것의 정당함을 비유한 <카르네아데스의 널>까지.

 

작품집을 읽으면서 '인간, 참 무섭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타인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여인까지 마음껏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행동은 인간으로서 진화한 것의 부정적인 면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의 그런 어두운 면 뿐 아니라 정의로운 부분, 아무리 용의자라고는 해도 그 사람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 논리적인 분석력 등 작가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아낸 듯 합니다. 장편이라면 조금 늘어질 수도 있는 이야기 속에서 적당한 긴장감과 포인트를 내세워 시종일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답니다.

 

사실 저는 [제로의 초점]을 읽고 조금 실망했었어요. 시대적인 격차, 세대적인 격차를 감안하더라도 자극적인 스릴러와 미스터리에 길들여져 있던 터라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잠복]에서 느껴지는, 작가가 살아 숨쉬던 시대의 풍취는 뭐랄까, 구수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오묘한 맛을 내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드러나는 추리소설을 쓰고싶었다-는 그의 진심이 잘 반영된 작품입니다. 픽션 뿐만 아니라 논픽션 부분에서도 두드러지는 작가인 듯 한데 한 권씩 그의 작품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요렇게 독서의 재미가 증가한다는 것, 참 기쁘지 아니한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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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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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는 트위터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것이 아니라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누군가와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어요. 저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을 갖는다는 것에 거리감마저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모습일 뿐, 그런 일이 이렇게 금방 평범한 풍경이 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스마트인이 된 지 이제 2주일 째. 아날로그 인간이라 주장하는 저지만 스마트한 세계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나눈다는 건, 누구에게나 벅찬 일이니까요.

 

그런데.

 

<크리미널 마인드>는 프로파일러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미국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 중 어떤 범인이 SNS를 통해 희생자를 고르는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그 희생자의 블로그에는 그녀의 직업, 주소, 사진 등의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을 먹고있는 지 등 온갖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었어요. 블로그=그녀의 모든 것. 이었던 거죠. 사실 인터넷상에서 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범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누군가와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지만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그 드라마를 통해 새삼 깨달았습니다. 나는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속속들이 안다는 건 무서운 일이잖아요.

 

[도로변 십자가]는.

 

바로 인터넷 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지, 한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집단의식이 그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이야기를 아무 의심없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 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발언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 지 늘 생각해야 한다는 점도요. 요즘 인터넷 상에 자주 등장하는 악플로 인한 자살같은 현상은 바로 SNS의 가장 부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잠자는 인형]에서 동작으로 상대방을 꿰뚫어보던 캐트린 댄스가 이번에는 사이버 수사를 위해 돌아왔습니다. 사실 [도로변 십자가]는 스릴러로서의 긴장과 스피디함은 조금 부족한 편이에요. 다른 스릴러물에 비해 잔혹한 표현이 적은 것은 마음에 듭니다. 제프리 디버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이제 세계는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 마을'이 되었으니까요. <솔직하지 못해서>의 순기능이 있는 반면 <크리미널 마인드>의 역기능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로변 십자가]에서 작가가 심혈을 기울였다고 여겨지는 점은 캐릭터였습니다. 밖으로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고 가상공간에서야 자유로워지는 소년, 이상하다고 여긴 사람을 집단으로 모략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야 어떻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검사, 진실이라는 미명 아래 타인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블로거 등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많았습니다. 마치 각각의 사람들에 실제의 모델이 존재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그 모든 캐릭터들이 모여서 인터넷 상에서의 우리 모습과 지켜야 할 자신의 소신에 관해 꽤 심도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정작 주인공 캐트린 댄스의 비중이 조금 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형사라는 점은 변함 없으니까요. 동료 형사 마이클 오닐과 컨설턴트로 등장한 존 볼링이라는 교수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는데,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지. 개인적으로는 오닐이 좋습니다만. 으훗. [도로변 십자가]는 스릴러 작가로서의 디버가 새로운 경지를 밟은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 작품인 [XO]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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