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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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이보다 더 유치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말 번역본보다 원서를 찾아 읽고 싶어지기도 해요. 그 어떤 장르보다 연애소설일 때 우리말로 옮겨진 단어들을 보며 오글오글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요, [스토리셀러]는 그 오글오글함의 법칙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오글오글함이 전혀 싫지가 않은 거에요. 그것은 순전히 남자주인공의 공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성 독자들이라면 조금 반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에게 이런 남자, 차~암 괜찮거든요!

 

작품은 독특하게도 두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두 글을 쓰는 여자와 글을 읽는 남자의 러브 스토리에요. 글을 쓰는 여자의 재능을 만나 기뻐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도움을 받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여자.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 둘의 행복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병에 걸린 여자와 또 병에 걸린 남자. 한 쪽의 이야기는 결말이 꽤 정확하지만 다른 쪽의 이야기는 확실하지가 않아 좀 더 미련을 남기게 되는 이야기였어요. 두 편 모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한 번쯤 꿈꿔봤을 내용이죠. 저는 글을 읽는 사람이라 남자 주인공들에 더 감정이입이 되더군요. 내 앞에 만약 재미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작가로 데뷔해서 그 글에 영향을 주며 살 수 있다면, 참 재미있는 날들이 될 거에요.

 

유치하게 느껴지면서도 남자 주인공들, 여자 입장에서 참 바람직합니다. 글을 쓰는 여자를 옆에서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심지어 아침이라도 챙겨주려고 부시시 일어나는 여자에게 '너는 글을 잘 써야 하니까 내 아침일랑 챙겨줄 생각 말고 네 생활 사이클이나 잘 지켜!'라며 엄포를 놓습니다. 요리도 잘 해, 청소도 잘 해, 여자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때로는 정의롭게 때로는 음험하게 복수도 해줘, 사랑하는 방법도 용감하면서 섬세해, 도저히 현실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남자들이랍니다. 여자인 저는 속으로 이런 남자가 있을 리 없어!-를 외치면서도 대리만족이라도 했지만 남자들에게 공공의 적이라 불릴만한 그런 사람이에요. 넝쿨당의 귀남이같은?!

 

아리카와 히로는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요, 쉽게 이해되는 문장과 내용이면서도 감동을 줄 줄 아는 그런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토리셀러]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독특한 플롯으로 마음을 사로잡았고 소설임에도 부디 그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만들었어요. 와글와글 깨물어먹고 싶은 표지만큼이나 오글오글한 러브스토리. 아리카와 히로 특유의 유머와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오늘밤만은 전 세계 사랑하는 연인들이 행복하기를~*참고로 월간 <다빈치> 선정 올해의 연애소설 1위, 2011 일본 서점대상 10위를 차지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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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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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년 내내 스릴러와 미스터리를 끼고 사는 저이지만 무차별 살인은 좋아하지 않아효. 제가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건을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가장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사람들의 심리 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회와 진실의 빛]은 손가락을 잘라간다는 사건의 소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머지 조건에서 굉장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터넷의 익명성과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의식의 팽배,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 여러 생각할 점을 제시하거든요. 사건전개가 스피디하지도 않고 영미스릴러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부족하지만 영미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특유의 매력으로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몇 편의 형사소설을 읽어왔는데요, 대부분의 형사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된 삼총사처럼 주인공을 필두로 으샤으샤하며 범인을 검거하죠. 물론 삐딱선을 타는 인물이야 간혹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런 인물도 성향이 조금 다를 뿐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해서 결국에는 주인공과 하나가 된다는 스토리라인이 대부분이었던 듯 합니다. [후회와 진실의 빛]도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여느 형사소설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그 주변인물들이 좀 더 입체적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인공 사이조 고지는 한마리 고고한 학과도 같은 인물이에요. 공로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사건을 해결하는 일에만 매달릴 뿐인데, 명석한 두뇌와 사건해결에 대한 열의가 남달라 주위 사람들의 오해를 사죠. 그런 그의 능력을 시기질투하여 자격지심에 그를 증오하는 와타비키같은 인물이 있는가하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있다가 사이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묻어두었던 감정을 터뜨리며 모른 척 하는 누구도 있고, 심술궂게 그를 곤경에 빠트리는 누군가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이조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는 않죠. 오히려 그를 오해하고 미워하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범인을 검거하여 공로를 세우는 데만 급급한 인물들입니다. 정의, 범인검거라는 이름을 좇는 건 같지만 하나가 되기보다는 '자신'만 되려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현실감을 느꼈다고 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래도 그런 편에 속할테니까요.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에 씁쓸하기도 했습니다만.

 

작가가 문제시하는 또 다른 모습은 인터넷의 익명성과 그를 통한 생명경시, 현실과 가상세계의 허술한 경계, 엄청난 이기주의입니다. 작품 속 범인은 자신의 범죄와 범죄예고를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데요, 그런 범인의 모습보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충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범행예고에 언제 죽일건지, 어떻게 할 건지 댓글을 달고 범행완료 글에 다른 누군가도 없애달라며 달려드는 모습에서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우리 사회에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검증되지 않은 보도와 그로 인한 악플, 자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어둠입니다.

 

이 작품만큼 주인공 형사를 곤경에 빠트리는 작품도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곤경을 통해 비로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 사이조. 마지막 장면을 보면 후속편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여러 인물들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우행록]이나 [통곡]보다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드네요.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할만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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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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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고 습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공기가 일본문학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하루키. 이상도 하지. 그의 문학을 전부 읽은 것도 아니고 그의 세계를 온통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키는 내게 일본 그 자체였고 나의 추억이었다. 때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나도 단 한 권이면 충분했으니까. 모든 것이 심각해지던 그 때, 사랑과 추억이라는 단어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온 하루키였으니 나는 그를 더 잊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설령 읽지 않더라도 차곡차곡(!) 쌓아두는 기쁨이라도 누려보고 싶은 것일지도. 어쨌든 그의 작품은 나를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특별한 힘이 있다. 오로지 나만 맡을 수 있는 냄새와 감성.

 

이번 에세이집은 [잡문집]보다 훨씬 더X 100 정도로 마음에 든다. 적당한 두께와 아기자기한 그림들, 훨씬 더 힘을 빼고 쓴듯한 소소한 일상 이야기. 게다가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끄적여 놓은 앙증맞은 메모라니! 또 이상도 하지. 누군가가 쓴 소소한 일상 에세이는 콧방귀를 뀌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이가 쓰는 글에는 무작정 마음을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있으니. 이것은 엄청난 편애-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채소의 기분'과 '바다표범의 키스'라니 제목만으로도 마음의 벽이 스르르 무너지는 걸.

 

하지만 <채소의 기분>이라는 귀여운 제목의 글은 제목처럼 귀엽지만은 않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에서 등장한 '채소의 기분'은 이렇게 인용되고 있으니까.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

귀여운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대사에 순간 '아니, 채소가 뭐 어때서! 당신이 채소의 기분을 알기나 해?'라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물론 하루키가 아닌 영화 속 인물에게. 그런 기분을 하루키 또한 느꼈는지 그는 이렇게 이야기해준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게 "그런가?"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그의 이런 세심함과 엉뚱한 것처럼 느껴지는 역정이 좋다. 살면서 꼭 꿈을 좇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꿈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면 어쩌려고. 나는 그저 하루하루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지금 이 삶이 참 좋다. 최대 숙제가 하나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걱정해봐야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유유자적. 오늘 하루 충실하게 보냈다 싶고, 잠자리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면 그걸로 만족.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한량인생 모드로 행복하다. 그러니 꿈을 좇지 않는다 나무라지 마시길. 유익한 채소도 깎아내리지 말고.

 

<바다표범의 키스>는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그 반전의 묘미는 선물로 드릴게요. 쪽.

 

소제목 하나하나도 그의 유쾌함을 대변하고 있지만, 그 중 <앵거 매니지먼트>는 제목도 글의 내용도 전부 마음에 든다.

 

 무슨 일인가로 확 열이 받아도 그 자리에서는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숨 돌렸다가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에 '이 정도라면 화내도 되겠어' 싶을 때 화를 내기로 했다. 이른바 '앵거 매니지먼트'다.

나는 화가 나면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풀가동시키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오랜 시간 찬찬히 곱씹으며 내가 그 일로 화를 내도 되는 건지, 화가 났다면 어떤 부분에서 났는지, 해결하려면 무슨 말로 상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할지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조금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도 '나중에 얘기하자'며 아이와 즉각적인 상황을 피하고 한 두 시간 지난 후에야 불러서 내 마음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감정에 치우쳐 아이를 다그치는 일이 없어지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는 듯. 아무 일면도 없는 하루키와 내가 한 가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 방법 나도 알아'라는 마음에 괜히 뿌듯해졌다. 크흐.

 

소소한 일상 에세이를 잘 쓰려면 힘이 빠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남을 감동시키려 하지말고, 오글거리는 말로 상대에게 부담주려하지 말고. 그저 마음에 넘쳐나는 진심을 다해서 진솔한 이야기를 펼쳐낸다면 누구나 그 마음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니까.

 

여름이 왔다. 비도 자주 오고. 하루키를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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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망의 리스트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김도연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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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로또에 당첨되길 기원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로또에 당첨되어 많은 돈이 생기면 뭘 하면 좋을까를 상상하며 행복한 공상에 빠지곤 하죠. 저의 욕망 리스트는 때때로 바뀌는데요, 건물을 한 채 사서 평생 세를 받으며 생활을 유지하고, 여행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 사는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피어오릅니다. 엄청 큰 집을 지어서 집 전체를 모두 책으로 채워놓는 것도 좋겠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만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대박이를 건졌습니다. olleh! 결코 길지 않은 분량이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여인이 로또에 당첨된 후 남편에게 배신당하는 단순한 내용을 이리도 아름답게 서술할 수 있다니, 문학은 거룩한 것입니다. 암요. 만일 문장이 아름답지 않았거나 감정이 절제되지 않았다면 저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란 단연 중요한 것임에도 독자에게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는 둥의 평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돈에 휘리릭 눈이 뒤집혀서 그렇지 사랑하는 가족과 평화로운 일상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생활이고, 그 생활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작가의 임무일 겁니다.

 

주인공 조슬린은 상당히 절제된 어조로 담담히 자신의 상황을 표현해냅니다. 어찌보면 답답해보일 수도 있는 캐릭터지만 저는 이런 소재에는 조슬린같은 인물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과장된 감정표현, 수다스러운 성격의 여인네였다면 그녀의 감정이, 그녀의 슬픔이 이렇게까지 와닿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문장도 긴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짧고 간단하죠. 군더더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필요한 것만 딱딱 표현해내고 있다고 할까요. 요즘 '적확하다'는 표현이 눈에 많이 띠는데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라면 이 작가의 표현법이야말로 '적확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작가는 남성임에도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그 심리를 섬세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유를 원하지 않거나 꿈을 전혀 꾸지 않는 것이 아닌 여인이 지금 느끼는 행복으로 인해 로또에 당첨된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남편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랑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미묘한 떨림과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떠날까 고뇌하는 모습은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만 했습니다. 또한 남편의 모습은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지.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을 걷어찬 후 맞이하는 그의 안타까운 모습은 -죽음의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행복했다-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가 반한 문장들은 이래요. 다 적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이들의 육체는 메시지를 던지며, 이들의 한숨은 편지를 담아 바다에 던진 유리병이 된다. 때로 그 병을 집어드는 남자가 있다. 덧없는 약속과 환멸의 시간이 든 그 병을.

옛날에 조는 내가 그의 목에 키스하는 걸 좋아했었다. 남편의 얼굴에 드러난 세월과 꿈에서 멀어지게 하고 침묵 속에서 우리를 가깝게 만든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과거에서 온 모든 건 전혀 낡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무언가 굉장히 아름다운 걸 소유하고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예, 모든 게 너무 빨리 간다고 생각해요. 너무 빨리 말하고, 생각할 때조차 너무 빨리 생각해버려요!

제 가슴 속에 있는 말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저 읽어보시라는 말밖에는. 저는 이미 두 번이나 읽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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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의 신
린지 페이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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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뉴욕의 모습을 잘 나타낸 작품 중 하나로 칼렙 카의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를 꼽고 싶습니다. 읽은 지 꽤 되어 세세한 묘사까지는 떠올릴 수 없지만 읽으면서 19세기 뉴욕의 모습에 꽤나 매혹되었던 기억이 나요. 저는 워낙-사라진 것들에 대한, 흘러간 시간들에 대한 동경-이 강한 편이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좋아합니다. 특히 뉴욕은 범죄의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어쨌든 저에게는 또 하나의 로망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뉴욕의 19세기라니 당연히 빠져들 수밖에 없죠. 많은 작품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묘사와 분위기 구성 등 19세기 뉴욕을 그린 작품하면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가 떠오른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고담의 신]을 선택한 이유도 딱 하나, 1845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뉴욕에서 최초의 경찰국이 출범한 모습을 그린다니 굉장하잖아요! 마치 'NYPD, Open up!'을 외치는 CSI의 선조들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물론 CSI와 뉴욕경찰은 엄연히 구분되겠지만요). 어린 시절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한 남자가 그 또한 순간의 화재로 얼굴 반쪽을 잃고 경찰이 되어 연쇄아동살인을 해결하는 이 작품은, 뭐랄까, 거친 남자들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서로 주먹을 날리고 거친 욕설을 내뱉고, 지금같은 과학기술이 없어 직관과 행동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그 시대의 거침과 생생함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고 종교의 대립이 극심했던 뉴욕의 모습은 마치 암흑과도 같았습니다. 사건도 처음에는 종교적 대립, 인종적 갈등의 양상을 보입니다만, 범인은 의외로 찾기 쉬웠습니다. 느낌이 확 오거든요. 분위기도 그렇고 원치 않았음에도 경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그려낸 것도 저는 좋았습니다만, 저 만족스럽지 못한 별의 이유는 번역 때문이었습니다. 나름 유명한 분이시던데 이번 번역은 좀 어렵게 된 것 같았어요.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있는가하면, 가끔 이를 부득 갈며 포기한 문장도 있었거든요. 복잡한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똘똘 굴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읽기 힘겨운 문장을 앞에 대하니 조금. 또한 작품의 두께에 비해 사건의 진행이 조금 더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매력을 꼽으라면 주인공 티머시 와일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아둔 돈과 사랑하는 여인을 통해 빛나는 미래를 꿈꾸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얼굴 반쪽을 잃고 원치 않는 일을 시작했음에도 재능을 발견한 남자. 사건은 해결하지만 사랑을 잃었고, 잃은 줄 알았던 가족을 되찾게 되는 남자.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가장 비슷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시리즈로 발전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계속 읽을 의향은 있습니다. 주인공도 괜찮고 무엇보다 19세기 뉴욕은 매력적이니까요. 단, 번역은 이번보다 이해하기 쉽게 해주시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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