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번은 동유럽을 만나라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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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홀로 일본여행을 하고 온 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어디를 가든 혼자서도 잘 돌아다닐 수 있겠다는, 혼자 여행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는 자신감. 그래서인지 요즘은 자꾸 평소 가고 싶었던 동유럽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나는 서양문화보다는 동양문화에 끌리고, 서유럽보다는 동유럽 쪽에 마음이 기우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체코와 터키는 가만히 앉아서 여행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웃음이 번지는, 요즘들어 가장 가고 싶은 곳 1순위다. 내년 휴가는 체코로 가볼까 생각하던 중 동유럽에 관해 재미있는 책이 나온 것 같아 덜컥 품에 들였다. 

눈 덮인 궁전과 야경, 석양빛에 물들어가는 도시의 사진들로 가득 채워진 표지만 바라봐도 마음이 설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유럽 중 체코와 폴란드, 슬로바키아를 소개하고 있는데 다른 두 나라보다 체코의 비중이 약 2/3 정도로 가장 크다. 체코에 관심을 두고 있던 나는 무척 반가웠지만 동유럽의 여러 나라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다른 독자들은 약간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체코하면 역시 프라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바로 그 도시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카를 교이다. 하얗게 눈 덮인 프라하를 배경으로 카를 교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이 찍힌 사진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그 곳으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낭만과 신비의 색인 보헤미안 블루가 잘 어울리고 가장 유서깊고 아름다워 각종 영화와 CF 촬영지로도 유명하다는 이 다리에는 전설이 있다. 바츨라프 4세 때 여름에 군데군데 무너진 카를 교를 보수하던 인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마와 계약을 맺어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만다. 아내는 아기를 갖고 있었는데 아기를 낳은 후 아내는 곧 목숨을 잃었고, 아이는 커서 엄마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연주하는 악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도 카를 교에서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이유라고 하는데 카를 교 뿐만 아니라 체코의 곳곳에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가 숨어 있다. 

이 책은 다른 여행서와 좀 색다르게 관광명소나 맛집들만을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맛집소개는 눈에 띄지도 않고 관광명소라고 할 것도 없이 주로 저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장소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체코와 관련된 유명인들, 베토벤이나 카프카, 아인슈타인과 모차르트 등과 관련된 일화와 장소들에도 비중을 두었는데 단순한 여행서라기보다는 예술기행서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책이다. 체코의 비극적인 역사와 민주화를 일궈낸 과정, 서민들의 문화와 여행지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가 적절히 버무려져 한층 수준높은 여행예술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역시 비극적인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슬로바키아는 체코와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와 베토벤에 대해 서술한다. 이력만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는 아마 음악과 문화 전반에 걸쳐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 중 베토벤에 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군데군데에서 베토벤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을 자랑한다. 

체코에 왜 그렇게 가고 싶은 지 잘 모르겠다. 교토도 그랬다. 남들은 일본여행은 이제 안 가도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평소 교토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친한 친구가 같이 다른 곳으로 여행가자는 권유도 뿌리치고 홀로 교토로 떠났었다. 내년 여름도 올해처럼 충만한 용기가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 말은 조금 걱정되지만 가서 카를 교에 서보고 싶고 프라하성도 직접 보고 싶다. 여행서는 읽을 때 행복감을 주지만 가서 직접 보는 것보다 더 큰 충만함은 없다는 것을 이제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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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윈터
대프니 캘로테이 지음, 이진 옮김 / 시작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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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저도 발레리나를 꿈꿨습니다. 냐하하하  가녀린 몸과 긴 팔다리, 하얗게 빛나는 튀튀와 핑크빛 발레슈즈는 저의 선망의 대상이었죠. 그 때는 어렸으니 핑크빛 발레슈즈 속에 숨겨진 길고 긴 고통의 시간들을 알리 없었지만 저도 우아한 백조가 되고 싶었답니다. 소녀들을 겨냥한 소설들 중 주인공 대부분이 발레리나였다는 것도 아마 한 몫했을 거에요.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레리나를 꿈꿔보지 않았을까요? 발레를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조금 배워놓았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뻣뻣한 몸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러시안 윈터]의 주인공은 발레리나입니다. 암울했던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오직 발레만이 전부였고 사랑에 몸을 던진, 실력있는 무용수 중 한 명이었죠. 젊은 시절 그토록 찬란하게 빛났던 그녀의 몸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운신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녀가 가진 상처와 고통이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을지도 몰라요. 러시아의 시인 빅토르 엘신의 아내이자 완벽한 발레리나였던 니나. 현재 그녀는 미국에서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병든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눈에 반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빅토르와 니나. 왜 지금 니나 옆에 빅토르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니나라면 그리고리는 현재를 살고자 하는 남자,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오랜 세월 그 뿌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그는 진실의 단서가 니나에게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니나는 그리고리를 거부하죠. 니나와 그리고리, 그리고 그리고리의 부모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서히 덮여있던 장막을 거둡니다. 그 장막 뒤에 웅크리고 있던 진실은 오랜 세월을 고통과 상처, 후회와 배신감으로 몸부림쳐 온 니나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한편, 더 큰 후회를 남기게 될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주변상황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은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리기 전에 상대방에게 한 번 더 물어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오해로 인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났더라면, 내가 알고 있는 건 이것인데 혹시 내가 잘못알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더라면. 그런 후회들을 남기지 않기 위해 우리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자존심? 두려움? 오해로 수 십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두려움을 이기려는 용기가 필요해요. 

2009년 런던도서전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러시안 윈터]는 전개가 조금 느릿느릿해서 초반에 몰입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참 크네요. 인생이 대체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지, 안타까움과 애틋함으로 가슴 한 쪽이 아릿아릿합니다. 오직 사랑이 없는 곳에만 비극이 있다는, 옮긴이의 말이 무겁게 다가오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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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 키스 - 내가 선택한 금지된 사랑 뱀파이어 아카데미 시리즈 3
스콜피오 리첼 미드 지음, 전은지 옮김 / 글담노블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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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아카데미>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가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후 뱀파이어물이 속속 등장하는데요, 대부분의 작품들이 여주인공의 뱀파이어와의 사랑을 오글오글하게 그려놓는 데 그치고 말았죠. <뱀파이어 아카데미> 시리즈 역시 물론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뱀파이어를 지키는 수호인 댐퍼가 등장해서 조금 독특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의 로맨스도 등장하지만 그 오글오글한 연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점이 쪼콤 마음에 들어서 계속 주시하고 있었답니다. <트와일라잇> 이후 그 어떤 시리즈도 계속 읽어나가지 못했었는데, 이 시리즈만 유일하게 결말이 기대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세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시리즈물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들은 2권에서 정말 엄청난 사건을 겪었습니다. 특히 여주인공인 로즈는 가장 친한 친구인 메이슨을 잃었죠. 스트리고이에게 납치당한 모로이(뱀파이어) 를 구하기 위해 정말 힘겹게 싸웠지만 메이슨의 죽음을 겪은 로즈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 리사의 경호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특히 아카데미에서 드디어 실전수호 수업을 듣게 되어 있는 터라 그녀는 내심 리사를 수호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얄미워하던 리사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이 수호 모로이로 지정됩니다. 티격태격 하는 듯 하지만 어느 새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두 사람. 그 와중에도 2권에서 리사를 납치, 고문한 빅토르의 재판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등장인물들은 그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리고. 정말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죠. 2권의 일과는 비교도 안 되게요. 

기본적인 설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2권까지 속도감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3권부터는 조금 느릿하게 진행됩니다. 불필요한 인물로 생각되는 이들도 많이 등장해서 이름도 좀 헷갈렸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던 사항은 '죽은' 메이슨의 등장입니다. 유사한 뱀파이어 시리즈물 중에 <하우스 오브 나이트>라는 책이 있습니다. 역시 뱀파이어가 등장하고, 특이하게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뱀파이어들입니다. 뱀파이어들 간의 사랑과 모험을 그리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요, 이 책에서도 역시 주인공의 친한 친구가 죽음을 맞고, 그 친구가 다시 살아나는 기이한 설정이 보입니다. 저는 [섀도키스]를 읽으면서 '설마, 그 책을 따라가는 건 아니겠지' 라며 쪼콤 가슴을 졸였답니다. 4권을 봐야 알겠지만, 부디 그런 유사한 설정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 오글오글 러브신이 좀 적은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미드나 소설에 오글오글 러브신이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나마 재미나게 읽던 뱀파이어 시리즈였는데, 3권을 읽고 나니 어째 맥이 좀 풀리는 느낌도 듭니다. 긴 호흡을 이어갈 수 있는 탄탄한 구성과 탁월한 문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독서 시간이었습니다.  설마. 뱀파이어 시리즈물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일이 4권에서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 그 점이 궁금하여 4권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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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유혹 - 열혈 여행자 12인의 짜릿한 가출 일기
김진아 외 글 사진 / 좋은생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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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만큼 여행서를 많이 읽는 계절도 없는 것 같다. 한정되어 있지만 떠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쁨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1년 동안의 바람과 소망이 꼭꼭 눌러담아져 있다가, 이 계절 불꽃처럼 폭발한다. 산과 바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떠나는 많은 사람들. 그 인파 속에 섞일 수 있어서 올해 여름은 나도 행복했다. 지금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득하기만 한 그 때. 일상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씩 그 때의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그런 허한 마음을, 다시 떠나고 싶다는 열망을 달래주는 것은 역시 한 권의 여행서가 아닐까. 내가 찾아갔던 곳이 나오면 마냥 즐거워지고 새로운 곳이 등장하면 다시 마음이 설렌다. 

이 책은 열혈 여행자 12인의 여행 추억집이다. 보통의 여행서가 한 사람의 저자, 한 곳의 풍경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그들 열혈 여행자 12인이 그 동안 찾아갔던 여기 저기를 소개한다. 열혈 여행자 12인 중에는 방송 작가로 살았던 사람도 있고, 대기업의 평범한 샐러리맨도 있었다. 북칼럼니스트도 있고 저술업자도 있으며 동아일보 기자였던 사람도 있고 잡지 편집장을 했던 사람도 있다. 익숙한 가수의 이름도 보인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 만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공통점은 있다. 바로 어느 날, '덜컥' 여행을 떠났다는 것.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것을 용감하게 내팽개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이들은 정말 많은 나라를 돌아다닌다. 인도, 베트남, 러시아, 이집트, 아프리카, 인도 히말라야, 헝가리,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체코, 영국, 카파도키아, 캄보디아. 그 중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도시들이 허다하다. 그 곳에서 누군가는 길을 잃기도 하고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 음식을 대접받기도 하면서 점점 그 곳에 동화되어 간다.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 12인 중 한 명이 태국 수코타이에 갔을 때다. 수코타이에 홍수가 났던 시기에 그 곳을 찾은 여행자는 사람들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버스를 기다리며 파도타기를 하는 소녀들을 보게 된다. 심지어 튜브를 타고 이리저리 '마실'을 다니는 아저씨도 보였단다. 올여름 비가 새는 집 때문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신기했다. 그런 여유로움을, 생활의 단면에 헛점이 있어도 대범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을 나도 간직하고 싶다. 

한 여행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쑥날쑥 하다보니 초반에는 집중력이 약간 떨어졌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마치 필름을 연상시킨다고 할까. 여행을 다녀와도 그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고 단편들만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쓰여진 책. 찰나의 기억들이라 그들에게는 더 소중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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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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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작품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 로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만났던 작품 [리얼월드] 의 여파로 거의 앓아눕다시피 했던 저는, 그 뒤로 기리노 여사를 기피(?)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후 이 분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힘들어져서 안 돼. 아프면 큰일나' 라는 마음으로 피해왔었죠. 책날개 사진을 보세요. 이 얼마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얼굴입니까. 일본 하드보일드 작가 중 여성으로서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기리노 여사이지만 저에게는 멀기만 한 당신이었습니다. 특히 무라노 미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 중 한 편인 [다크] 가 '괴물같은 인간들의 악의가 두드러진다'는 평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얼굴에 흩날리는 비] 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책을 집어들었던 이유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하리만치 아무 거리낌없이 쭉쭉 읽어나갔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 작품은 권일영 옮긴이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청순하다'고 느껴지리만큼 감정의 자극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리얼월드] 에서 의도치 않게 어머니를 죽이고 도망치게 된 소년이 보여주었던 어둠. 몸 속 깊은 곳에 파고들어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늪으로 저를 끌어들일 것만 같던 그 어둠과 악의를 [얼굴에 흩날리는 비] 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물론 탐욕스럽고 잔혹한 인간들은 등장합니다만, 다 읽고 나서 앓아누울 것 같은 기운을 전달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점이 기존에 제가 기리노 여사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깰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여사의 본격 미스터리 데뷔작이니만큼 그 강도가 약한 것일 테죠. 여사의 강렬한 글솜씨에 이미 빠져있는 분들은 어쩌면 이 약한 수위가 아쉽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여사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뜻깊은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헴.

더불어 '미로'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아무리 괴물같은 인간들의 악의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라고 해도 시리즈를 다 읽어보고야 말겠다는 기분이 들어버렸습니다. 미로는 좀 복잡한 인물입니다.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아파트에서 세월을 보내는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상처에 갖혀있죠. 책날개에서 본 기리노 여사의 얼굴이 쉽게 잊혀지지 않아서 이 미로도 어쩌면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강한(척 하는) 얼굴 뒤에 숨어있는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관찰력, 그리고 용기와 행동력이 그녀의 매력을 한층 더해준답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받지 못한 한 통의 전화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죠. 일명 '친구 요코 찾기 작전' 이랄까요. 

늘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인간의 잔인한 욕망이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특히 그 잔인한 욕망 뒤에 숨어있는 것이 '돈'일 때는 더욱. 물론 저도 돈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있으면 좋죠. 지금같아서는 차도 한 대 사고 싶고, 비가 새지 않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책과 앞으로 살 책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법을 어기거나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가 좋고, 차 한 잔 즐기면서 리뷰 쓰는 시간이 즐거운걸요. 사람 안에는 늘 두 개의 얼굴이 존재하니 인간의 본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씁쓸해지곤 합니다. 

앞에서 감정의 자극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오컬트적 세계가 조금 펼쳐지고, 보기에 따라 조금 거부감을 가질만한 요소도 등장하거든요. 저 또한 그 부분은 속이 살짝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아, 힘들다' 라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 거에요. 

지금 당장 [다크] 를 읽어보고 싶지만, 저는 조금 더 기다려보렵니다. 비채에서 이 미로 시리즈가 순차적으로 나온다고 하니 쪼콤만 더 제 마음을 단련시킨 후에 도전해보려고요. 섣불리 덤볐다가 또 앓아눕는 수가 있으니까요. 흐흐. 그나저나 이 표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저 파란 색이 차가워 보이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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