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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단어를 검색했다. [아메리칸 러스트], 모자란 영어 실력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번역해보자면 '미국의 녹'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아, 그래서 표지에 녹슨 못 같은 그림이 등장해있는 거구나, 하는 뒤이은 깨달음. 책의 내용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어쩐지 더 깊게 작품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아름답고 쓸쓸한, 궁극적으로 구원을 말하는 역작, [로드] 이후 미국에서 발표된 최고의 소설' 이라는 문구를 100%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코맥 매카시의 [로드] 는 꽤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지금 시대에 '구원'이란 과연 무엇일까. '구원' 은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지능이 167에 달하는 아이작 잉글리시는 지금 막 아버지의 돈을 훔쳐 캘리포니아로 떠나려는 중이었다. 사고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의 자살, 누나 리에게 버림받았다는 분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버지를 돌봤다는 자기만족 등 모든 사건과 감정을 뒤로 하고 떠난 길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친구 빌리 포를 생각한다. 자신이 어머니처럼 죽음의 늪 속에 빠지려고 할 때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해 준 단 한 명의 친구. 그 친구에게만은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 그리고 가능하면 같이 떠나고 싶었다. 트레일러에서 어머니 그레이스와 사는 포를 찾아간 아이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던 그들은 비가 오는 바람에 버려진 창고로 들어가고, 그 곳에서 예상치 못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한 포를 위해 부랑자 중 한 명을 살해한 아이작. 이 후 아이작과 포, 그리고 그들과 얽힌 그레이스, 리, 경찰서장 버드 해리스와 아이작과 리의 아버지 헨리의 시선을 통해 그들이 겪는 시간들이 공개된다.
아이작과 포가 살고 있는 마을은 쇠락한 곳이었다. 탄광과 제강소, 제강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소규모 산업들로 한 때 번창했던 밸리는 미국 철생산의 심장이나 다름없었지만 제강소가 문을 닫자 밸리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마을은 빛을 잃어간다. 가난과 젊음을 잃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인 사람들. 마을과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영화가 빛바랜, 미국 사회에서는 '녹'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 와중에 벌어진 살인사건은 여러 사람의 시간과 운명을 뒤흔들어 놓으며 수많은 선택지를 들이민다.
옮긴이의 글에 나온 것처럼 빌리 포와 아이작은 살인사건이 아니었어도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한 때는 촉망받는 풋볼 선수였던 빌리는 대학에서 장학금과 함께 입학 제의를 받지만 트레일러에서 어머니와 나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작은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괴로움을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에 능력을 꽃피우지 못하는 인물이다. 둘 다 모두 현실을 외면하고 더 나은 삶을 찾아보려는 의지 없이 숨쉬는 존재들일 뿐이었지만, 살인사건으로 인해 미래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포와 누나 리의 관계에 충격을 받고 홀로 길을 떠난 아이작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꿈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며 현실에서 도피하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죄의 무게를 깨닫고 마을로 돌아온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작과 빌리 포의 성장소설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지만 제목에서 풍기는 어둡고 낡은 기운이 가시지 않는 것은 인간인 이상 저지를 수 있는 '잘못된 선택' 들 때문일 것이다.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인물들. 그 길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 운명을 '구원'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가야 할까.
이 작품이 작가 필립 마이어의 데뷔작이라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전개가 약간 늘어지는 감이 있어 아쉬웠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내면묘사, 삶에 대한 통찰이 알맞게 버무려진 작품이다. 데니스 루헤인, 코맥 매카시, 헤밍웨이의 경지에까지 비견되는 이 작가의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