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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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 이 아이를 읽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에휴. 거의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은데요, 책의 두께는 그렇다쳐도 이 벨아미라는 녀석이 웬만큼 밉살스러워야 말이죠. 재미는 있지만 어쩐지 손이 잘 안가더라구요. 살짝 길게 기른 듯한 콧수염을 멋스럽게 옆으로 휘날리고 자못 심오한 눈빛으로 정면을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는 표지의 이 남자, 진중한 듯 하지만 속은 능구렁이 몇 마리는 들어가 있는 바람둥이입니다. 벨아미-미남자를 가리키는 이 프랑스어에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정이 무엇이고 사연이야 어떻든 바람둥이는 싫어요. 뭐 그 바람둥이도 그닥 제가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말이에요. 뒤루아가 바람둥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데 계속 힘이 죽죽 빠졌어요. 작품 안에서 캐릭터가 갖는 힘은 굉장한 거니까요. 

퇴역군인인 조르주 뒤루아. 우연히 만난 친구 덕분에 신문사에 자리를 하나 얻었습니다. 글이라고는 전혀 쓸 줄 모르는 그이면서도, 앞으로의 생활이 윤택해지리라는 점 하나로 미래를 굉장히 낙관적으로 보는 이 남자. 하지만 곧 머리를 감싸쥐다가, 종이를 집어던지다가 친구 집으로 조언을 얻으러 갑니다. 매우 아리따운 여인이자 친구의 부인인 마들렌에게 글쓰는 수업을 살짝, 아주 조금 받은 뒤루아는 금방 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지만 감히 친구의 아내라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사랑스러우며 여성적인 매력을 풀풀 풍기는 드 마렐 부인과 묘연의 관계를 갖게 되죠.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능력이 출중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뒤루아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신문사에서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더니,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아리따운 마들렌까지 차지하는 것입니다. 

입술에 침을 바르지도 않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찬사만 바치던 뒤루아의 결말은, 그러나 제가 생각한 것처럼 패가망신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명예, 권력을 추구하며 여자에게도 쉽게 빠져드는 이 남자는 결국 또 다른 여인과 함께 훨훨 날아갑니다. 그에게 있어 여자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던 걸까요? 그 때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여자를 바꾸고, 전에는 사랑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말로 쉽게 그녀들을 떠나는 그에게 사랑과 여자는 한낱 전리품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집니다. 신분상승과 명예를 얻기 위한 그만의 수단인 것이죠. 

하지만 작품설명을 보면 그 시대의 프랑스에서 뒤루아와 같은 사람들은 보편적이었던 듯 보입니다. 당시 파리에서 자행됐던 문란한 성도덕과 귀부인들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 꽤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어쩌면 뒤루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남자들에게 있어 출세란 사랑보다 소중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바꿔 생각한다면 여자들도 그런 남자들을 이용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런 남자들의 품안을 자유(?) 롭게 돌아다니며 남편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자유롭게 여러 남성들과 사랑을 나눴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뒤루아의 부인이 된 마들렌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남자들 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제 머릿속에 각인된 모파상의 이미지는 '어둡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가 쓴 단편모음집을 읽고 그 어두운 기운에 사로잡혀 몸이 아픈 적이 있어서요. 하지만 이 작품은 뒤루아라는 바람둥이로 인한 불쾌감만 전달했을 뿐, 유쾌하기도 하고 코웃음이 나기도 하는 등 조금 색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저처럼 모파상의 어두운 날개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부담없이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한 사회의 모습을 객관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 [벨아미]. 어쩌면 이 '벨아미' 라는 칭호조차도 조롱이 섞인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 <트와일라잇>의 주인공인 로버트 패틴슨이 현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영화 <벨아미>를 찍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생각한 뒤루아의 모습은 약간 샤프한 타입인데, 로버트 패틴슨의 각진 얼굴이 과연 작품 속 뒤루아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표현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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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지구에서 7만 광년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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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짐보,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로이. 로이 가르팅 덴들. 넷츠? 조르너...스푸드베치!"  그들은 단순히 짐보가 정말 전학 가게 된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교무실에 무전기를 설치한 후 그저 선생님들이 짐보의 전학에 대해 논의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한 후 교무실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들. 피어스와 키드 선생님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이제 찰리와 짐보는 선생님의 뒤를 쫓고 집을 염탐하고 급기야 피어스 선생님의 집에서 팔찌와 묘한 쪽지를 발견한다. 곧이어 벌어지는 찰리의 실종과 의문의 남자들의 방문. 짐보는 찰리를 구출하기 위해 누나 베키와 함께 머나먼 길을 떠난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으로 유명한 마크 해던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SF 작품으로 돌아왔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그리드즈비 스푸드베치!!]. 아무도 뜻을 모르던 이 책은 결국 스물 세 명에게 팔렸고 작가마저도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던 어느 날, 성 필립 앤 제임스 학교의 앨리슨 윌리엄스라는 선생님에게서 편지가 도착한다. 몇 년 동안 학생들에게 그 책을 읽혀왔고, 학생들이 모두 좋아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작가는 새 제목으로 다시 이 작품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 재미난 작품을 읽게 해 준 앨리슨 윌리엄스라는 선생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비록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지만. 

찰리와 짐보의 모험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어른들이라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라 합리화하며 그냥 넘겨버렸을 일에 대해 찰리와 짐보는 그야말로 목숨 걸고 진실을 알아내고자 한다. SF 작품이라면 빠질 수 없는 외계인의 존재는 이 책에도 등장한다. 그런 소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이 과연 얼마나 재미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외계인의 존재가 아니라 그 과정과정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려낸 작가의 엄청난 상상력이다. '쾅!' 소리가 들리는 웨프 빔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7만 광년 떨어진 털썩 행성, 말하는 거미, 뚫어펑을 들고 찰리와 짐보를 추격하는 거미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흥분을 안겨준다.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다양한 캐릭터들이다. 실직하고 집에서 요리를 만드는 아빠와 누구보다 씩씩하게 직장에 나가는 엄마, 데스메탈을 들으며 조금 이상한 남자와 사귀는 베키 누나, 꼬마 과학자를 연상시키는 찰리와 순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엄청 용감해지는 짐보와 배꼽이 없고 털투성이 꼬리를 가진 외계인들의 모습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작품의 초반에는 서로를 악당으로 여기던 베키와 짐보 남매가 찰리를 구출하는 모습은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한다.  베키가 웨프 빔을 통과하는 외계인들의 머리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부분은 너무 웃음이 나서 어쩐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내 책장에는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이 꽂혀있기는 하다.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구입해두었지만 다른 많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펼쳐보지는 못했다. 그가 이렇게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SF 작품을 쓸 줄 아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읽어둘 걸. 분명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그 책에서도 벌어졌을 것 같다. '악동들은 지구를 구했고, 작가 마크 해던은 드라마에 빠진 어른들과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들을 책 앞으로 불러 앉혔다! ' 옥스퍼드 타임스의 찬사에 걸맞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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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치 체포록>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시치 체포록 - 에도의 명탐정 한시치의 기이한 사건기록부
오카모토 기도 지음, 추지나 옮김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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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울~'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저는, 특히 에도를 배경으로 한 으스스한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공포감으로 몸부림을 치면서도 어쩐지 빠져들고 마는 것이지요. 특히 모 출판사에서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에도 시대 시리즈는 딱 저의 취향이랍니다. 그런 미미 여사의 시대물에 영향을 미쳤다 하는 이 [한시치 체포록]. 시대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런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의 풍취를 담뿍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 12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는 한시치라는 오캇피키, 사건을 수사하고 범인을 체포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미 노인이 된 한시치가 '나'라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답니다. 그런 면이 마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이런 이런 무서운 일이 있었단다' 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한층 꿀맛같은 이야기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꿀맛이어도 이야기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잔인한 모습들은 영 불편하죠.  

살고 있는 장소가 어디든,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든지에 상관없이 사람 사는 일은 거의 비슷한가 봅니다. 보통은 옛날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더 순박하고 착하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시공간을 뛰어넘어 가장 끈질기고 위험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에도 시대의 '괴담'이라 하면 으레 귀신이나 유령, 원혼을 떠올리게 됩니다만 그런 존재들도 사실은 인간의 어두운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이야기는 언제나 으스스한 괴담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집에서 누가 죽었다더라, 목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유령이 나타났다더라, 누구의 딸이 갑자기 사라졌다더라, 가마 속에서 죽은 고양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더라 하는 괴담이요. 하지만 의심스러운 그런 괴담들 뒤에는 늘, 괴담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는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주인집 아씨를 손에 넣기 위해 마나님과 일꾼을 자살로 위장하여 해치기도 하고, 행복하고 잘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름모를 질투와 분노를 느껴 무조건 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하는 범인들의 모습이 그 어떤 원혼보다 무섭게 다가옵니다. 특히 이 책에는 삽화까지 곁들여져 있어 한밤중에 읽으면 저절로 오싹한 기분이 드실 거에요.  

단편소설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만큼 그리 큰 감동이나 긴장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에도의 풍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괜찮은 작품인 듯 합니다. 다만, 미미 여사의 에도 시리즈물보다는 조금 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긴 했습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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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죽지마 사랑할거야>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울지 마, 죽지 마, 사랑할 거야 - 지상에서 보낸 딸과의 마지막 시간
김효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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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것 만큼 애닳아 죽을 것 같은 일은 없을 거에요. 저는 아직도 가끔 가족 중 한 명을 잃는 꿈을 여전히 꾼답니다. 어렸을 때 크느라고 꾼다는 그 꿈이요.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꼭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해서 울면서 깨어나곤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 방으로 찾아가 확인을 한 뒤에야 다시 잠들 수 있어요. 꿈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이라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거에요. 숨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죽음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앞에서 주저앉게 되는 것이겠죠. 

저는 아이는 커녕 아직 결혼도 안 해서 자식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분명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듯한 고통이겠죠. 며칠 전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장병의 어머니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어서 방바닥을 이리지러 기어다니며 통곡하는 어머니의 슬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 슬픔에 제 가슴도 찢어지 듯 아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장면을 찍는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기자들이야 직업상 이런 사연도 있다, 저런 사연도 있다고 전하고 싶었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슬픔을 존중할 줄 아는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한 게 아닐까요. 

이 책은 저자의 딸이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고 세상을 뜨기까지의 힘겨웠던 시간을 그린 수기입니다. 꽃다운 고등학교 2학년 소녀 서연이가 백혈병을 앓으면서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책에 담겨 있어요. 고통과 허망함,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가족들을 향한 사랑과 배려를 잃지 않았던 소녀 서연양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어머니가 딸을 생각하며 쓴 이 책에 대해 독자들이 과연 뭐라 말할 수 있겠어요.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가슴 아팠다가 대부분이 아닐까요. 

제가 작가였다면, 저는 이런 책을 쉽게는 내보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슬픔 한 두가지씩은 있다고 생각해요. 세월이 지나면 희미한 미소로 기억할 수 있게 될지라도 그 일이 일어났던 순간에는 자신을 둘러싼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 그런 자신만의 슬픔이 글로 나타내거나 입밖으로 내뱉어졌을 때 얼마나 인위적이 되고 볼품없어지는 지 저는 조금 알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소중히 하라는 단순한 진리도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보다는 저자 자신이 남은 가족들과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이런 과정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 아무리 상투적이고 그냥 눈물 한 번 찍어내면 될 이야기라도 마음에만 담아두고 계속 살아가기에는 슬픔이 너무 컸던 겁니다. 저자가 책을 쓴 이유와 기자들이 남의 눈물을 찍어대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거죠. 

그러고보면 건강이 제일이다 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이런 저런 병을 의심하는 저로서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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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결혼시대
왕하이링 지음, 홍순도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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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중국소설을 잘 읽지 않습니다. 느낌이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것이 도통 저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의 편견이겠지만 중국작품을 읽고 나면 괜히 우울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도 조금 망설였어요. 평소 잘 읽지 않는 중국소설인데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작가에, 하필이면 소재가 또 결혼이라니! 작년부터 심하게(?) 압박을 받으면서 부모님과 몇 번 소소한 말다툼까지 벌였던 저로서는 이 책을 읽는 모습을 혹여라도 부모님이 보실까 마음을 졸여야 했답니다. 으흑. 그런데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어요.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샤오시와 젠궈의 끊임없는 말다툼이 심각하게도 느껴졌지만, 너무나 현실적이라 더 재미있었다고 할까요.

샤오시와 젠궈는 그야말로 드라마에 자주 나올법한 인물들입니다. 샤오시는 자아도 뚜렷하고 직업도 있는 베이징의 현대적인 여성인 반면, 남편인 젠궈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들어맞는 사람이에요. 허자춘이라는 시골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혼자만 대학을 나왔습니다. 형의 뒷바라지로 인해 무사히 공부를 마쳤고 집 안의 대들보라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어 가족들의 부탁을 선뜻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가족이 그 동안 자신을 위해 희생했으니 이제 자신이 가족의 원하는 바를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심성은 곱지만 여자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갑갑스러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샤오시와 양 어깨에 가족이라는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젠궈가 결혼했으니 그 결과가 어땠겠습니까.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젠궈의 가족으로 야기된 문제들로 샤오시와 젠궈는 끊임없이 다투고 점점 지쳐만 갑니다. 급기야 아이를 그토록 원하는 젠궈와 그의 식구들의 바람과는 달리 연달아 유산을 겪는 샤오시로 인해 갈등이 증폭되어 가죠. 

저도 한 때는 사랑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어떤 사람들이든, 그의 집안 배경이 어떻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 참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거죠.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문제가 막상 현실로 닥치자 덜컥 겁이 났더랬습니다. 지금도 결혼에 대한 환상을 모두 접어버릴 수는 없지만, 환상만으로는 같이 살아갈 수 없는 게 결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샤오시는 만류하는 부모님의 충고를 무시하고 젠궈와의 결혼을 강행합니다. 그리고 절감하죠. 젠궈와 그의 가족을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과 집안 갈등은 서서히 샤오시와 젠궈를 지치게 만듭니다. 

샤오시와 젠궈 외에도 결혼을 앞둔 젠자와 샤오항, 이미 결혼해서 몇 십년을 부부로 살아온 샤오시의 엄마 아버지 커플이 등장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기준을, 그 남자가 여자와의 결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로 알 수 있다는 젠자는 류카이루이라는 거대 기업인과 사랑에 빠졌었지만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다 결국 관계를 청산합니다. 그리고 샤오시의 동생 샤오항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죠. 가진 것은 없지만 용기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샤오항을 만나면서 젠자는 미래를 꿈꾸지만, 사랑 하나로 젠궈와 결혼한 샤오시는 그 둘이 걱정될 뿐입니다. 또 빠른 은퇴로 인해 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샤오시의 아버지와 유명한 외과의인 어머니의 갈등도 결혼이라는 것에 깊이 생각하게 만들죠. 부부란 뭘까, 결혼은 뭘까, 또 사랑은. 참으로 어렵고 어려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휴우. 

하지만 샤오시와 젠궈의 그 싸움이 갑갑하게만 느껴진 것은 아니었어요. 어쩌면 그런 과정은 두 사람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서로 다른 환겨에서 몇 십년을 살아온 남녀가 결혼했다고 해서 갑자기 에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죽이 척척 맞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완전한 타인이었던 사람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정성을 다해야 하는 관계, 어렵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사랑을 믿는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은 믿지 않는다. 사랑은 그것이 '가족애'로 바뀌는 단 하나의 경우에만 영원할 수 있다' 라고 말한 작가의 말에 어쩐지 공감이 갑니다. 

다툼의 반복으로 심각하고 단조로울 수 있는 샤오시와 젠궈의 결혼생활은, 그러나 작가의 청산유수같은 글들로 인해 오히려 웃음을 자아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중국어들이 귓가에 막 들리는 것 같기도 해요. 결혼 소설의 대가라고 불려지는 왕하이링. 그의 [중국식 이혼] 은 어떤 이혼일지 한 번 뒤져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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