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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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아마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작가입니다. 네, 저도 들어보기야 했지만, 이 작가의 책은 재미있으나 어렵다는 분들도 꽤 많아서 살짝 망설여지는 점도 있었어요. 그의 [바람의 그림자] 나 [천사의 게임] 모두 그래서 저를 망설이게 한 책들이지요. 하지만 이 [9월의 빛]은 표지의 색감도 무척 마음에 들고, 또 그의 초기작이라 하니 조금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래! 읽어보자!'하고 결심한 것이죠. 책 내용이야 어떻든 표지와 제목,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라는 그의 명성만으로도 어쩐지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요 책은 참 독특한 소설입니다. 오랜 시간 지켜온 숭고한 사랑이나 10대들의 사랑을 그리는 로맨스,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기괴한 분위기의 판타지,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는 모험 등, 평소 우리가 흥미로워할 만한 요소들이 모두 들어 있거든요. 거기다 밤에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펼쳐서는 안 될 것 같은 공포감까지, 모든 감정을 맛보게 하는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기괴함과 공포감은 저로 하여금 엄청 혼란스러운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라자루스 얀이 만든 인형들과 동상들이, 섬뜩한 모습으로 저택 크레븐무어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기계인형의 끼기긱거리는 몹쓸 마찰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요. 이 이야기는 노르망디에 위치한 한 저택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를 잃은 이레네와 동생 도리안, 엄마 시몬은 크레븐무어라는 저택을 돌보는 일을 해주는 대가로 나름대로 풍족한 생활을 약속받고 라자루스 얀이 마련해준 집에서 생활합니다. 그 중 시몬은 라자루스로부터 다니엘 호프만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는 절대 뜯어보지 말 것과 몇 개의 방에는 들어가지 말 것을 경고받죠. 딸 이레네는 수다쟁이 친구 한나와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사촌 이스마엘과 사랑에 빠지고, 동생 도리안 또한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로운 생활을 맘껏 즐기지만, 불행이 시작됩니다. 어떤 '그림자'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한나. 저택에 숨겨진 비밀과 그림자의 정체, 오랜 세월 그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랜 세월 갇혀 있던 어둠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이레네와 이스마엘은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서 정체 모를 악당과 험난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저는 이 책을 보는 내내 팀 버튼 감독의 영화가 생각났어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독특한 소재와 감히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의 세계, 표지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고요한 어둠의 냄새가 어쩐지 그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또 [파우스트] 가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그 이유는 직접 책을 읽어보면 아마 아시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 만난 사폰은 괜찮았어요. 팀 버튼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 일단 점수를 주고 싶네요. 내일 어디선가 그의 작품 하나를 반값 할인을 하던데 한 번 장바구니에 넣어볼까봐요. 으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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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주의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분홍주의보
엠마 마젠타 글.그림, 김경주 옮김 / 써네스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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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본 순간부터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야!'라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쓰는 닉네임은 분홍쟁이. 이 책의 이름은 '분홍'주의보이니까요. 분홍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쩌면 지극히 여자아이다운 색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분홍의 포근함을 좋아해요. 한창 제 마음이 스산할 때 지은 분홍쟁이라는 닉네임. 단순히 분홍색을 좋아해서라기보다 늘 포근하고 따뜻하고 가득 찬 마음으로 살고 싶은 기분을 반영해 지었답니다. 으훗.  

그래서인지 저는 유독 물건들도 분홍색으로 구입하는 편이에요. 제 남동생은 '누나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남자들이 분홍을 싫어하는 거야!'라며 폭언을 퍼붓고 저에게 걷어차이고는 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마음의 따스함과 넉넉함은 중요하잖아요.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움을 전해줄 수 있는 이 기분좋은 색 덕분에 저의 텀블러, 침대 시트, 자주 사용하는 볼펜 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분홍색으로 입혀져 있답니다. 좋아하는 색으로 주변이 채워져있을 때 저는 힘이 나거든요.  

그런 제가 이 책을 만났으니 얼마나 흥분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말못하는 소녀 벙어리 발렌타인이 사랑에 빠지면서 느끼게 된 감정과 생각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랑을 시작하면서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변화들을 나타내고 있어요.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묘사되는 마음의 불안함과 충만함, 그 모두가 '분홍주의보'인 거죠. 저도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분홍색만큼 적당한 색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요렇게 저의 마음을 반영한 책이 나올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별은 세개냐, 궁금하시죠? 그림과 글이 같이 있는 책을 저는 아주 사랑해요. 이 책도 그런 점에서는 괜찮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책을 읽는 내내 그림과 글이 구조적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즉, 한 페이지의 글과 그림이 다음 페이지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할까요. 내용이 구체적이 아니라 조금 추상적인 점도 저에게는 잘 맞지 않더라구요. 한 마디로 표현해보자면 '이 책은 대체 뭐야?' 라는 의문점만 남겨두었다고 해야할까요.  각각의 글 중에는 마음에 드는 글들도 꽤 있습니다만. 

다시, 또, 봄이 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분들이 사랑을 하고 계실까요. 그 감정이 삶을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지 저도 잘 알아요. 한 해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아무리 바쁜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해도 우리, 가슴 속의 분홍주의보를 느끼는 일은 소홀히 하지 말아요. 으훗. 내용을 떠나 이 제목은 정말 마음에 듭니다. 분홍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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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몸값 1>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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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부 의사 시리즈로 유명한, 그 오쿠다 히데오의 최근작입니다. 저는 사실 아라부 의사가 등장하는 이야기보다 [스무살 도쿄]와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를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유머의 강도도 이 두 작품이 훨씬 강하고, 또 제가 재미있어 하는 유머코드와 잘 맞았다고 할까요. 저는 원초적인 유머를 좀 좋아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우훗. 어떤 분은 오쿠다 히데오의 대표작은 [남쪽으로 튀어] 라고 하시던데 그 책은 아직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할 책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요, 정말 행복한 고민입니다. 

유쾌하면서도 따스한 감성을 지닌 오쿠다 히데오의 이번 작품 [올림픽의 몸값]은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매우 심각하면서도 긴장된 분위기, 이야기의 방향을 과연 어디로 끌고 나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만들어요. 앞의 작품들과는 달리 가볍게 읽어넘길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을 보세요. 올림픽의 '몸값'이잖아요. 저는 처음에 사람도 아닌 올림픽에 대해 어떻게 몸값을 요구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더라구요. 또 제목만 보고서는 어떤 테러리스트가 단순히 올림픽을 치르지 못하도록 협박하는 범행에 대해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이 짜자잔~하고 나타나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만으로 '현 시점에서 나의 최고 도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작가가 강하게 어필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소설은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64년을 배경으로 시간과 시점이 교차하면서 전개됩니다. 우선 올림픽 경비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스가 저택에서 폭탄이 터지고 경찰학교 기숙사 또한 공격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는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한편에는 올림픽으로 인해 들떠 있는 스가 다다시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곱상한 외모에 도쿄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던 학생 시마자키 구니오가 있습니다. 아키타의 촌마을에서 올라와 노동자로 일하던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던 구니오는 형이 하던 일을 한 번 체험해보고자 노동현장에 뛰어듭니다. 그 곳에서 겪에 되는 삶의 부조리함과 생각의 변화는 그를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게 되죠. 

전쟁에 패배한 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일본의 활기가 책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올림픽 개최를 발판으로 경제와 정치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도약을 이루려는 일본. 많은 국민이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성곡적으로 올림픽을 치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그런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전쟁의 패배와 함께 화족 계급이 몰락했다고는 해도 부자인 사람은 여전히 부자로,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었을 겁니다. 올림픽으로 인해 활기와 흥분에 가득 차 있는 도쿄 사람들과 달리 아키타의 촌마을 사람들은 그저 먹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테죠. 도쿄에서 가장 힘들게 일하는 많은 극빈자들에게도요. 구니오가 느끼는 삶의 부조리함은 스가 다다시로 대표되는 부유층과 노동현장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의 대조로 한층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올림픽의 몸값, 과연 치뤄질 수 있을까요. 

1권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과정을 비교적 세세하게 묘사하는 터라 아마 어떤 분들은 지루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과정을 충분이 느낄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라 만족스러웠지만요. 2권에서 대체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벌써부터 마음 한켠이 옥죄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모두 다 행복할 수 있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불안 때문일까요. 나머지는 2권을 읽은 다음 또 이야기 나누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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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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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로 인해 고립된 뉴욕 버펄로 시에서 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 자리에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으로 눈에 대한 글들이 가득한 노트가 발견됐다는 기사로 시작하는 이 책은, 말 그대로 눈에 관한 백과사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노트의 내용은 Angel(천사), Blindness(설맹), Crystal(결정)등의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눈에 대한 정의, 시, 유명 작가들의 고전에서 발췌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눈에 대해 그렇게 많은 글들과 그렇게 많은 이미지가 정립되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생전의 그 남자가 도저히 고백할 수 없었다는 절절한 사랑의 기록이라니, 이 정도면 수많은 여심을 흔들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책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책을 읽어도 당췌 이게 무슨 소설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더이다. 한 5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는 아직 초반이니까 뭐, 라는 기분이었고 10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도 좀 나아지겠지, 라는 기분이었는데 그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기분은 결국 마지막에까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좋았다, 나빴다, 재미있었다, 재미없었다로도 설명해낼 수 없는 이 미묘하고도 찝찝한 기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작가의 의도를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또 처음입니다. 

한 번은 추리소설로, 한 번은 연애소설로 읽힐 수 있다는 이 작품을 아무리 뒤적여봐도 대체 추리소설의 요소는 무엇이며 연애소설의 요소는 어디에 등장하는 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해요. 그래도 버터플라이와 모스로 이름붙여진 사람들이 그 중 가장 연애에 적합한 편지를 쓰고 있기는 했는데요, 작가는 그들의 사랑을 그렇게 감춰두고 싶었던 것일까요. 책 속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사고로 사망한 남자와 그의 사랑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문득 듭니다. 생전에 고백하지 못할 정도의 사랑을, 노트에서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만 찾아낼 수 있도록 일부러 이런 구성방식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얼핏 보면 눈에 대한 사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자신의 사랑을 숨겨둔 작가. 로맨틱한 점도 없지 않지만, 저처럼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어리둥절한 작품입니다. 

어디가 기적같은 연애소설처럼 보이는지, 어떤 부분이 추리소설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건지, 아시는 분은 부디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책아, 이해하지 못해 미안해. 너에 대한 감상은 그야말로 눈처럼 백지 상태구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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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의 책 읽어주는 남자
이화경 지음 / 뿔(웅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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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뭘 했다더라,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이야기. 예전에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자신에게 몰두하지 못하고 주위에 관심을 쏟아붓는다는 의미인가, 그래서 이야기만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가난해진다는 말이던가. 처음에는 가난하게 산다는 그 말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은 본래 이야기를 품고 있는 하나의 세상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되었던 듯 하다. 그런데 여기, 가난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잡아보고자 했던 남자가 있다. 검은 놈, 김흑. 

이야기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적막하고 외로워졌을까. 문득 이야기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김흑이 이야기를 통해 주름잡고 싶었던 세상을, 어떤 왕은 고통으로 살아내며 이야기를 억압하고자 했다. 절제되고 깨끗한 글에 비해 저잣거리에서 읽혀지는 '소설'이라는 것은 그에게 글이 아니라 풍기문란을 주도하는 또 다른 적군이었다. 그래서 한없이 외로웠을 군주. 이 책은 그렇게 김흑과 어떤 군주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마음을,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이야기가 여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에 비해 턱없이 자유롭지 못했을 시절, 기생으로 보낸 세월을 통해 사랑과 인연의 덧없음을 깨달았고, 남편에게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삭여야 했으며,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남편에게 정인인 남정네가 있다는 그 비밀을 눈물을 흘리며 지켜내야 했고, 걷지 못하는 다리로 인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꿈조차 꿔볼 수 없는 여인네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 속으로 김흑이 들어간다. 빗장 걸린 문을 열게 하고 상대의 입장을 절실히 이해하며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손길을 가진 그. 이야기란 한낱 쓸 데 없는 유흥거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소통의 수단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이야기의 속성이 이 책에는 잘 녹아들어 있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작가는 김흑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의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이야기'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확연히 다른 삶을 이야기해보고자 했던 것인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글의 방향은 결국 그의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했다고 평가하고 싶었다면 김흑은 여인네들의 마음만 헤집고 다녀서는 안 되었다. 그의 이야기가 여인들을 통해 바깥으로 퍼져나가고 또 그를 통해 세상에 혼란이나 반향을 일으켰을 때에야 진정으로 세상을 희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흑은 세상을 희롱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사랑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가기 위해 수 많은 여인의 마음만을 희롱했을 뿐이다. 

덧붙여, 문장 또한 내가 좋아하는 맛이 모자랐던 듯 하다. 깔끔하지 못하고 어딘가 질척질척한, 단순하고 극명하게 묘사할 수도 있는 부분들을 너무 길게 늘여버려 오히려 책을 읽는 재미가 떨어졌다. 문장의 탓인지 방향을 잃은 주제 탓인지 모아지는 한 점이 부족하고, 기승전결의 묘미를 느낄 수 없는 무덤덤한 책이었다. 작가가 이야기꾼이 되기에는, 이야기로 세상을 희롱하기에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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