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전설 : 동양편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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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접했던 책은 '전래동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를 위해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가 나오고, 호랑이를 피해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있으며, 두꺼비가 뚫린 구멍을 막아주어 고약한 새엄마가 요구한 일들을 모두 해낼 수 있었던 콩쥐가 나왔던 전래동화 전집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작은 책장 가득 꽂혀있던 그 전집들이 나의 행복이었고 나의 자랑이었다. 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스스로 글자를 깨우쳤으며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홀로 일어나 책을 읽었다니 어쩌면 소위 말하는 그런 신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헴.
 
하지만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처럼 단지 '이야기'를 좋아했었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 권 한 권 펼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세계 속으로 떠날 수 있었던 책 속의 세상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전설이나 전래동화보다 더 깊고 환상적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때 읽었던 백두산 천지 전설, 금강산 설화 등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하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옛날 이야기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매해 여름이면 <전설의 고향> 이 방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상식시리즈에서 나온 [세계의 전설 : 동양편]에는 우리나라의 전설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몽골, 동남아시아 나라들, 이집트와 아라비아, 아프리카의 전설이 다양하게 실려있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도저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 구미호가 사람으로 변신해 해코지를 하거나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전설의 고향>에 등장할 것 같은 억울한 원혼의 이야기 등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이 읽어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전설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다른 나라의 다른 전설이지만 공통된 점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몽골의 전설 부분에서도 보여지고,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일본의 전설 부분에서 보여진다. 또한 어쩐지 [무영탑]을 생각나게 하는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와 여우가 낳은 영웅 강감찬과 여우의 아들로 태어난 유명한 일본의 주술사 아베노 세이메이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몽골과 중국, 일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각국에 어울리는 형태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던 이야기는 익숙함으로 몰랐던 이야기는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는데 그 중에서도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그래도 우리나라의 전설이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전설'이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우리나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왕의 딸과 결혼한 의인, 원혼의 억울함을 풀어준 지혜로운 사람, 여왕을 사랑한 마음이 불길로 변해버린 남자, 어린 시절 그렇게도 무서워했던 달걀귀신 이야기 등은 갖가지 전설을 나눴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푸근해진다.
 
우리나라의 전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전설을 집대성했다고 해도 좋을 [상식으로~]의 전설이야기.  [세계의 전설 : 서양편] 에서는 동양편과는 다른 어떤 매력으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줄 지 궁금하다. [상식으로~] 시리즈. 음. 역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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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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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오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조연으로 나온 배우들 중 몇몇은 내가 미드를 통해 알아온 사람들이었다. 미드에서는 주연급이었던 사람들이 조연으로 나오긴 했지만, 나는 숨겨진 사람 또 없나 하는 마음으로 꽤 즐겁게 등장인물들을 살필 수 있었던 듯도 하다. 조금 분위기가 다르지만 그건 티베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티베트는 나에게 그저 '여행'의 나라였다. 조금 독특한, 그러나 뭔가 얻을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은 고매한 성지. 사실 그 때만해도 티베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티베트 작가의 소설이라든가, 그 곳을 심도있게 여행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제야, 그 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티베트의 지나간 시간과 그들의 생활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 라는 작품의 영향이 컸다. 좋은 책들은 명확한 이유와 감정을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나에게 '난 좋은 책이야'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 작품이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번 [소년은 자란다]는 조금 더 깊이 티베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모두 열 세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평소 단편집은 그다지 잘 읽지 않아서 이 책도 단편모음집이라는 것은 책을 받아보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티베트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적당한 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촌'을 배경으로 시대의 흐름으로 핍박받는 라마승, 환속해서 양치기로 변모한 라마승, 마부, 약초캐던 소녀, 라마승을 외할아버지로 모시는 평범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감정들,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도시로 올라온 노인의 향수와 인간에 대한 그리움 등이 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색에 물들다]에 비하면 특별한 감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승전결이라 할 것도, 소설을 읽을 때면 으레 느끼곤 했던 긴장감이나 절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수필처럼, 혹은 일기처럼 티베트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나타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점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 책을 읽고나서 내가 무엇을 느끼기를 원하는가, 그냥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건이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무언가'를 쉽게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가 무엇이고, 무엇이 티베트인지를 한 마디로 명확히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단지 티베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소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듯, 프랑스와 영국, 일본이 그렇듯, 티베트도 이 세상의 한 곳일 뿐입니다. 그곳에도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꽃이 핍니다. 풀과 나무의바다에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라고 적은 작가의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시대의 흐름을 거치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라마승이 있고, 변화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누군가는 성장하면서 살아나가고, 누군가는 생명을 잃어가는 곳이 바로 티베트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심오한 명상과 고행으로 정신적인 성숙을 기도하는 현자들 뿐 아니라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취향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도 이 책을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아라이가 들려주는 티베트와 티베트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그 곳의 풍경이 보이고 그 곳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색에 물들다] 와는 확연히 다른, 소박하지만 약간은 쓸쓸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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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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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예전 그녀의 이야기들에는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라는 느낌이 강했고 그래서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가 [왕국]을 지나오면서 약간 변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아픔을 감싸안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왕국]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어쩌면 요시모토 바나나는 늘 그런 이야기를 써왔는데 내가 늦게 발견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 책 [무지개]도 [왕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안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타히티를 배경으로 은은하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줄거리에 집중하기보다는 분위기와 타히티라는 배경에 흠뻑 빠져들었으니까. 이 책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느낌들이 가득하다. 몽실몽실한 강아지와 고양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풍성한 정원, 이국적인 섬과 환상적인 레몬색 상어, 주인공과 오너의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 이야기까지 따스한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마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물결이 이끄는대로 몸을 맡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옥의 티라고 한다면 오너의 사랑고백이 약간 당황스러웠다는 점이랄까. 나는 사랑의 과정을 더 좋아한다.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설레하다가도 주저하면서 천천히 진행되는 그런 사랑의 과정을 즐기는 사람인지라 아무 예고없이 이루어지는 느닷없는 고백에 살짝 멍~했다.
 

살다보면 지칠 때가 있다. 버릇처럼 나오는 '아우, 지쳐'의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온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내 몸이 바닥 밑으로 가라앉는듯한 때가 가끔 한 번씩은 온다. 그럴 때는 자신만의 처방약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쇼핑을 하고, 또 나처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가슴 속을 재충전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좋은 일도 늘 좋을 수만은 없고, 나쁜 일도 늘 나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삶에 대해 좀 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됐지만 시련은 항상 힘들고 행복은 늘 좋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도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깔을 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임을 여전히 믿고 싶다.
 
중요한 것은 솔직하게 살아간다는 것, 그 어떤 핑계나 이유도 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느끼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소중한 사람은 언제 곁을 떠날 지 알 수 없으니. 후회없이 선명한 무지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용기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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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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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다. 모호하고 복잡해서 내용 자체가 이해되지 않거나, 등장인물들의 감정 자체가 이해되지 않거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은 후자에 해당했는데, 물론 주인공들이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안타깝게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최초의 죄를 덮기 위해 계속 누군가를 상처입히거나 늘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그들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워낙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의 포근함과 마음편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순한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나라면 일이 벌어진 다음 그냥 신고해버렸을 것이다. 미우라 시온의 [검은빛] 도 읽는 동안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등장인물들이 [백야행]에 나오는 그 사람들 같아서, 어째서 인생을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마음 아파서.  어쩌면 그것은 큰 고생 없이 평탄하게만 살아온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어둠인지도 모르겠다.
 
노부유키와 미카, 다스쿠의 운명에 최초로 폭력을 가한 것은 쓰나미였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슬프고 안타깝긴 하지만 살다보면 교통사고처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가족과 이웃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되지 않은 혼란 속에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뒤 벌어진 '살인' 에 대해서도 우리는 '절대~해서는 안된다' 라는 잣대를 들이밀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는 법이고, 때로는 그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자신일 것이었다. 아프지만 그 상처를 서로 어루만져주고 그 상처를 발판 삼아 처음 먹었던 마음 그대로만 실행했었다면 노부유키도, 미카도, 다스쿠도 어둠 속이 아니라 빛 속에서 진심으로 웃으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마음 속에는 늘 선과 악이 공존하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도, 나쁜 사람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가면서 늘 고민하고 되돌아보며 되짚어봐야 할 숙제다.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동안에는 행복해야 하니까. 자신의 아이가 늘 좋을 수만도 없는 것이고, 폭력에 의해 망가진 삶이라고 해도 항상 나쁠 수만은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인생은 그런 작은 순간순간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언제나 힘들다. 불행하다. '살인'의 기억을 잊지 못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없고, 내 눈에는 집착으로만 보이는 감정으로 다시 또 누군가를 죽이며, 자신의 입장을 이용해 사람을 이용한다. 무엇인가에 매달려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는 하지만 정말로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는 무기력함. 서로의 마음과 거짓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앞으로의 생활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그저 살아가려는 마음. 말 그대로 모두 어둠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단순하게만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거짓을 덮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며, 자신의 마음도 괴롭히면서까지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일생을 뒤흔들어버린 여러 종류의 폭력. 하지만 그 폭력에 대항할 방법이 과연 또 다른 종류의 폭력밖에 없었을까. 작가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인생에 복수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인간의 복잡함과 다중성을 그려내려 한 듯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책이 참 불편하다. 지금이니까, 그 어떤 진정한 어둠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몰아붙여진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나는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가게 했던 검은 욕망의 빛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었다고 여전히 말하고 싶다. [백야행] 의 주인공들에게도, [검은빛]의 주인공들에게도, 어디선가 검은빛만을 따라 가고 있을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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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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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홋. 요즘 들어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 예전에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나면 그 여운을 만끽하느라 책을 안고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뒹굴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이상한 웃음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히, 라거나 오홋, 이라거나 냐하, 같은. 뭔가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하고 싶지만 한꺼번에 많은 생각이 몰아닥쳐서 그 말을 요약한 것이 저런 웃음소리로 표현된 게 아닌가, 나 스스로 내 자신에게 고개를 갸웃. 어쨌거나 이 책 역시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후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유명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은 어쩐지 읽기 싫어!'라며 비뚤어진 고집으로 한참을 외면했었던 작가 중 하나인 이사카 코타로. 제작년이었던가, [피쉬스토리]를 읽고 나서 '내가 왜 이 작가를 모른 척 했던가' 를 수없이 되뇌이며 이사카 월드로 곧장 빠져들고 말았다. [사신치바], [골든슬럼버] 등 때로는 감성으로 때로는 유쾌함과 진지함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이번 작품 역시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일러스트는 보너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찰리 채플린이 등장했던 영화 <모던타임스> 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가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조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효율성과 편리함을 위해 생산되었던 기계가 오히려 사람을 조종하고 다시 생성해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기억도 함께. 이사카의 이 작품에서는 기계에서 조금 더 진화되어 형체는 갖지 않았으나 그 어떤 기계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뛰어난 '정보' 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실이 아닌 것도 진실로 만들어버리고, 쉽게 왜곡되어 사람들의 두 눈을 순식간에 가릴 수 있는 인터넷과 정보는 수십 개의 팔을 가진 괴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등장인물들의 삶을 위협했다.
 
'용기는 친정에 두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와타나베. 첫 등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남편의 바람을 의심하는 아내 가요코에 의해 고문을 의뢰받은 오카모토 다케루에 의해 손톱이 뽑힐 처지에 당해 있는 것이다. 다행히 손톱은 뽑히지 않았지만 선배 고탄다가 맡았던 일을 끝내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바람에 후배 오이시와 파견을 나가는데, 고탄다가 어떤 일에 휘말렸음을 알게 된다.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별상담을 검색하면 누군가가 '일'을 하기 위해 검색한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오이시는 치한으로 몰리고, 상사 가토는 자살을 하며, 와타나베를 고문하려 했던 오카모토 역시 끔찍한 짓을 당하고 불쾌했지만 소중했던 친구 이사카 코타로 또한 칼에 찔렸다. 자신들의 뒤를 쫓는 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으나 진상을 파악하지는 못한 와타나베와 오이시, 고탄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아내 가요코가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숨가쁘게 달린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정보'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날조된 정보는 무섭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조차 판단할 수 없다. 왜곡된 정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고 하면 시스템이, 사회가 압박해온다. 한 사람의 만화가를 도시에서 쫓아내버리기도 하고, 순진한 남자를 순식간에 치한으로 몰아가며 누군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몰고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반화되고 정형화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예외였으니까. 예외는 사회를 위협하는 바이러스같은 존재가 되어 정형화와 일반화를 흐트러뜨린다. 그런 사회로 수용되지 못하면 사라져야 하는 것, 그것이 규칙이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양심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정보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느냐,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믿으면 믿을수록 진실은 사라지고 거짓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그런 시스템 안에서 와타나베와 고탄다, 오이시와 가요코는 큰 목적을 위해 정보를 악용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눈 앞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선택으로 연결되는지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회사 고슈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할까. 물론 그들도 한 때는 고슈의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기심을 느끼고 용기를 내고 뭔가 해보겠다고 뛰어들었다는 점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그런 그들이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손에서 생동감을 가진 존재로 활기차게 움직인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넘친다. 가장 평범한 듯 하면서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와타나베와 백치미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단력도 있고 어쩌면 가장 현명한 인물인지도 모를 아내 가요코, 순수해서 많이 상처받으나 용기를 낸 순간 그만큼 당당해지는 오이시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련미를 선보이는 선배 고탄다, 그리고 과묵함과 쿨함으로 무장한 오카모토와 호색남인 친구 이사카 코타로까지. 사실 더 많지만 어디까지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하나하나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들의 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분위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내 [골든슬럼버] 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과연' 했다. [골든슬럼버] 가 정보와 관련된 사건을 묵직하고 안타깝게 그리고 있다면 [모던타임스] 는 그보다는 코믹하게, 그러나 소재의 심각성을 잃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골든슬럼버] 와 [모던타임스] 를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그 재미가 배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어느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부품일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릴 수 있는 혜안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숨통을 조일 수도, 양심없는 누군가를 웃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영화 <모던타임스>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이던 찰리 채플린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 그건 나도 이해해. 하지만 있지, 생각이야 바꾸면 그뿐이잖아. 일이라서 했어도 나쁜 짓을 했으면 죗값을 치를 순간이 와. 아니 솔직히, 누굴 상처 입혔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이라서 괴로운 일을 해야 한다면,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 해야지...응, 고민하고 끙끙 앓은 다음 그래도 일이니까 한다. 그런 거라면 이해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상처 입히고 소란을 피우는 건 안 돼. -p584 (가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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