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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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범인이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나에게는 그를 처단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잃은 사람의 슬픔과 분노, 법의 이름으로 심판받지 못한 범인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이나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해답은 없는 듯 하다. 직접적으로 복수하지 않는 한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놓여진 선택지는, 범인을 용서하거나 가슴 속에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담은 채 죽은 이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선택지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일곱 번째 맞은 딸의 생일날, 사랑스런 딸 지니의 시체를  확인해야 했던 팀 랙클리의 슬픔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총 735페이지에 이르며 두께가 3.5cm는 되어 보이는 이 무거운 이야기는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다. 딸 지니의 죽음으로 비롯된 팀과 아내 드레이의 고통과 괴로움이 1부, 증거가 모두 갖춰져있고 유죄임이 분명한데도 풀려난 범인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모임 '위원회'와의 접촉과 그 안에서의 팀의 활동이 2부, 지니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쥐고 있는 위원회와 팀의 대립, 사건 해결이 마지막 3부. 그리고 이야기의 줄기는 다시 위원회의 활동과 지니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로 나누어진다.
 
삶과 죽음, 법과 정의, 그 안에 내포된 인간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법'이라는 것이 있고 질서있는 생활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 더 크게 인간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때도 있다. 이야기 속에서처럼 가해자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을 때 상처받은 유가족의 마음은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가해자가 벌을 받아도,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남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기억은 생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텐데.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그것이 위안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주위 사람'이니까. 답은 당사자만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팀이 자신만의 답을 발견한 것처럼.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 복수한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정의라는 것은 그게 뭐든 간에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 (p558)
 
보통의 스릴러가 사건-복수-해결의 구성을 보이는 데 반해, 이 작품은 팀과 드레이의 슬픔과 갈등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어떻게 고통받는지, 그 고통 속에서 서로는 커녕 자신조차 껴안을 수도 없을만큼 얼마나 슬퍼하는지, 그 상실과 괴로움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이 때문에 책의 진행이 더디게 느껴질 정도지만 그런 묘사가 오히려 고뇌에 찬 팀의 행보에 안타까움을 더하는 듯 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이 비명과 절규, 고통과 분노로 채워져 있다면 [살인위원회]는 그에 비해 좀 더 이성적이고 냉철하다. 물론 팀과 드레이의 고통이 비춰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사회제도와 범죄, 잘못된 법적 판단, 죄를 지은 자들의 개심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할까. 제목과 핏빛 표지로 자극적으로 다가오지만 절대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스릴러.
 


     
   
"속죄라고요. 젠장. 난 지금까지 내가 그런 걸 시도하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
"아무튼 그건 좋아요. 그렇지만 아저씨 역시 연구를 좀 더 하는 게 낫겠어요. 속죄라는 것 말이에요. 왜냐하면 아저씨가 나를 직접 본 뒤에 "이런, 이 녀석은 내가 확실히 생각하던 것만큼 나쁜 놈은 아니군. 나와 별로 다르지 않잖아'하고 생각하셨다면 아저씨는 조금도 배운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속죄라는 건 완성할 수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죠. 그리고 전 속죄라는 게 뭔지 몰라요. 단지 내가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렇게 해온 거라고요." -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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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 도둑 - 김주영 상상우화집
김주영 지음, 박상훈 그림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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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전히. 동화책을 좋아합니다. 글쎄요. 어디가 어떻게 좋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또 그냥 좋아!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저는 좀 그런 편이에요. 무작정 좋고, 무작정 마음에 들어하죠. 누가 '넌 그 사람이 왜 좋아? 넌 그게 왜 좋아?'라고 물으면 '그게 꼭 이유가 필요해?' 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건 이를테면 누가 손을 확 끌어당기는 느낌과 비슷해요. 마음이 그렇게 이끌리는걸요. 그렇게 좋아하게 된 것들의 특징은 거의 포근하고 따뜻하다는 데 있어요. 아이 참, 잔혹동화는 제외하구요. 제가 좋아하는 동화나 고전들은 뭐랄까,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넘실넘실 타고 올라오게 만들어요. 어쩌면 그런 느낌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해요. 히. 

동화나 우화, 그림이 있는 책을 좋아하게 된 건 가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해서일 거에요. 글자들이 빼곡한 책들은, 물론 예전에도 지금도 그런 책들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여유를 갖지 못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숨이 가빠져 오기도 하거든요. 그림이 있고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책의 맛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건 이렇게 나이를 먹고나서야 가능해지나 봅니다. 

혹시 [똥친막대기] 읽으셨어요? 전 [달나라 도둑]을 읽기 전에 작가의 그 책을 먼저 읽었습니다. 나뭇가지가 어떻게 똥친막대기가 되었는지,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치는지를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이야기랍니다. 노란빛이 섞인 표지 때문인지 희망적인 느낌도 들어요. 그런데 그런 기분으로 이 [달나라 도둑]을 펼친다면 아마 '어라'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달나라 도둑]은 우화집으로 <길>, <소년과 소녀>, <이야기>, <인생>, <꿈> 이라는 다섯 가지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챕터 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져 있습니다. 총 62가지 이야기이지만 책의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으니 아마 또 한 번 '어라' 하실지도. 저는 책을 읽을 때 ' 이 작가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를 생각하곤 해요. 그건 추리소설이든 단순히 오락을 위해 읽는 책이든 변함이 없죠.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으로 내놓은 게 아닐까-라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건 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되니 어쩐지 책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물론 뭔가를 느끼게 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이 책을 읽는 최고의 방법은요, 그냥 작가의 상상력에 몸을 맡기는 거에요.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이야기, 그럴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온갖 이야기 속으로 두둥실 떠서 슉슉 맛보고 다니는 겁니다. 

가끔은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황된 이야기,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툴툴대기보다 '상상력'이라는 즐거운 세상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작가의 손길을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물론 우화집인만큼 무언가를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배우고 느낀 것이 없으면 어때요~이 책과 함께 나는 상상력의 바다를 마음껏 헤엄쳤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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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의 싸움 -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위로의 심리학
앨버트 엘리스 지음, 정경주 옮김 / 북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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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잡생각이 많은 사람이랍니다. 일어날 가능성이 어쩌면 10%도 되지 않을 상황을 설정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형태로요. 그 중에는 좋은 공상들도 있지만 들여다보면 좋지 않은 생각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그럴 땐 이렇게 하면 될까? 저렇게 하면 될까?' 를 생각하면서 저를 마구 괴롭히는 거지요. 그것은 좋게 말하면 위험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나쁜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는 '그래, 그럴 줄 알았어'라며 납득하게 되어버리는 근거가 될 때도 있어요.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순순히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지요.  

저란 사람은, 강해지려고 발버둥을 치는, 약한 사람이에요. 겁도 많고요. 스스로에게 '난 강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몇 번은 고민해야 하고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한 후에야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생각과 말이 좀 느린 편이랍니다. 경험으로 그런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무작정 어떤 일을 밀고 나가기에는 불안하다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불안이에요. 실패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불안, 상처에 대한 불안, 내 삶이 불행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요. 아마 여러분도 이런 불안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겪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늘 불안을 안고 살아왔던 걸까요. 

[불안과의 싸움]은 '불안' 중에서도 '부정적인 불안', 즉 우리 삶을 결코 경쾌하고 밝게 이끌어가지 못할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살면서 어느 정도의 불안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불안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성공으로 이끌며, 도덕적 가치관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고, 우리 삶을 어둡게만 바라보게 하며, 폐쇄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는 불안은 우리가 잘 다스려야 할 숙제일 거에요. 

이 책의 저자 앨버트 엘리스는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합리적 정서-행동 치료 REBT를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역경과 결과 사이에는 우울과 불안에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생각이나 신념이 있기 때문인데 어떤 신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지요. 역경에 관한 신념, 즉 역경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부정적 신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해로운 부정적 정서를 갖게 되고, 또 거기에 깊이 빠져들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척 힘이 들겠죠. 저자는 이 REBT를 주축으로 불안을 이겨내는 충고를 계속합니다. 그가 치료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실례가 같이 실려있으니 이해하는 데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저는 교육학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어서 조금 더 쉽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답니다.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는 제 마음이 아주 불안한 시기였어요. 제가 실수를 했거든요. 저는 그다지 큰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위 사람들의 격한(?) 반응에 깜짝 놀랐고, 급기야는 살짝 우울해져서 내가 무사히 여름을 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이르렀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책 내용이 쏙쏙 들어오더라구요~물론 책을 읽고 실행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어느 때는 그저 이런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또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들여다 보는 데도 도움이 되었답니다. 제 일이 일인지라 '그 행위를 한 사람을 그대로 판단하지 말고, 그 행위만을 판단하라'라는 말은 조금 생각해 볼만 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불안'이란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렇지만 이 몸의 주인은 나, 이 감정의 주인은 나. 그런 생각으로 불안을 다스리며 힘차게 살아갈 수는 있을 거에요. 우리 모두 '불안과의 싸움'에서 승자가 되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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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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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끔 잊을 때가 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행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행복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괴로움을 조금 참아야 할 때는 있다. 하지만 그 괴로움조차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이 아닐까. 소박하고 따뜻한 감정들, 지금 가진 것이 전부이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시간,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듯 했던 그 추억들이 이 작품에서는 돈 앞에 무참히 깨어진다.

제목 그대로 계획은 간단했다.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4백 40만 달러의 돈을 발견한다-조종사는 죽었고 아무도 비행기가 추락한 사실은 모른다-돈을 숨기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 나눠서 각자 멀리 떠난다. 단순하게 보였던 시작은 어느 새 얽히고 설켜서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엄청난 피를 부른다. 아, 정말 밤에 읽었다면 기분 나쁜 꿈을 계속 꾸면서 잠을 설쳤을 것 같다. 
 

나는 세상 일에는 반드시 주고 받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간단히 말하면 '댓가'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로또에 흥미를 갖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돈이 있으면 살짝 즐겁기야 하겠다. 책도 많이 살 수 있고 예쁜 옷이랑 구두에 엄청난 크기의 책장까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물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 갑자기 굴러들어왔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사람 자체가 소심해서인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늘 생각한다. 나라면 도저히 하지 '못'했을 일들을 너무나 담담하게 저질러 버리는 주인공 행크는 계속되는 죄의 무게가 너무 많이 쌓여 이제는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크가 '평범'이라는 글자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죽인 후에도 자신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아내인 사라마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그의 모습은 혹시 나도 행크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저렇게 돌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임신한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는 장면은 오히려 쓸쓸하고 기괴하다.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나 자신도 나에 대해 장담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이 작품에서 오싹오싹함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다.

행크가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저지르는 모습에는 긴장감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지만 어쨌거나 이 책은 재.미.있.다. 한동안 손에 든 책들이 잘 맞지 않는 듯 해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다시 시동이 걸릴 듯. 하얀 눈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눈이 가진 깨끗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어둡고 사악하다. 행크가 진창으로 자꾸만 더 빠져들어 갈수록 하얀 눈 또한 어둡고 슬프게 변해가는 느낌이다. 멈춰야 할 때를 모르고 계속 나아가고 말았을 때, 어쩌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가장 빠른 시기임을 이 책이 증명한다.

스콧 스미스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결말을 보고 '최고야!'라고 외치고 말았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돈을 잃는 것보다 더 잔혹한 운명이 무엇인지, 살아있는 지옥이 무엇인지 작가는 완벽하게 보여준다. 사건이 전개되면서 변화되는 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냈고, 그 덕분에 나까지 목에 올가미가 걸려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의 것은 바라지 않고, 엄청난 돈벼락도 바라지 않고, 그저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 그리고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돈을 발견한다면, 누가 뭐래도, 당장 신고해야지. 밤에 침대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편안하게 다리를 오므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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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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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엄청난 속도와 흡입력을 지닌 작품이 끌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천천히, 쉬엄쉬엄 편안하게 읽을만한 이야기가 끌릴 때도 있다. 요즘처럼 햇빛이 간지럽고 기분이 붕붕 뜨는 때에는 특히. 그럴 때는 동화책이나 그림이 많은 책, 혹은 연작소설집을 읽으면 좋다. 그래서 조금은 기대를 품고 편안하게 누워 배 위에 올려놓고 읽기 시작한 [유코의 지름길].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자. 몇 년 전부터 일본 작가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나 또한 좋아하는 작가가 하나 둘 생겼고, 그 작가의 작품이라면 앞뒤 살피지 않고 일단 구입부터 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출간되는 작품 중에는 장편소설의 수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유난히 연작소설집의 수가 증가한 것 같다고 하면 나만의 착각인 걸까.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일단 주어는 '나', 생활 속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편안하게, 혹은 코믹하게 그리는 이야기들은 언뜻 보면 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는 듯도 하다. 실제로 작가가 그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문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접하다보니 담백함과 편안함이 장점이었던 작품들이 빛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선하고 아기자기하게 느꼈던 분위기를 '에이, 또 요런 거야? 생활이야기라고 해도 뭔가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그릴 수는 없을까?'라며 심드렁하게 생각해버린다. 물론 작가들이 어떤 한 작품을 내놓기 위해 얼마나 머리털 빠지게 고민할 지 짐작은 가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완벽한, 최고의 작품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뭐랄까, 새로운 소재와 구성을 간직한 작품의 소개가 절실해진 때라고 할까. 

[유코의 지름길]의 내용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과거도 나이도, 심지어 이름도 알 수 없는 정체 불명의 '나'가 서양 골동품 전문점 후라코코에서 아르바이를 하면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느긋한 하루하루를 만들어간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매일매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 상상만으로도 따스한 매력이 넘칠 것 같지만 이 책은 조금 독특하다. 표지그림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람의 이미지보다 장난감병정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등장인물들로 아기자기한 맛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문체가 담백하다 못해 넘쳐흘러서 건조함까지 느껴진다. 과연 원서에서도 이런 문체로 쓰여졌을지 그 어떤 때보다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수상식장에서 'あいまいな日本の私(애매한 일본의 나)’ 라는 제목으로 수상 연설을 한 오에 겐자부로. 그 오에 겐자부로상을 수상한 데다 일본의 순문학을 열어갈 이야기라 해서 어떤 작품일지 궁금했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응, 하기는 나오키상이라든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한 작품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봐야지. 이 기다림이 기쁨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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