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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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까지 쉼없이 달려왔는데 끝이 난 지금 가슴이 답답하다. 대체 이 책이 말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책장을 뒤적여봐도 작가후기, 역자후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이해하기는 해야하나 등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 사람 없이는 내가 살아갈 수 없겠다, 헤어진다면 나는 그저 목숨을 이어가는 것일 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 내 사람은.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해서는 안 될 가장 처절하고 슬픈 사랑', 맞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달콤하지만 죄의 향기가 나는 소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제138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과 출간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표지로 그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준고와 하나의 그 사랑이, 어렵지만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사랑이 양아버지와 양녀의 관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피로 맺어진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구성. 결혼을 앞둔 하나와 요시로, 그리고 하나의 아버지 준고. 이야기는  준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과거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지진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하나 앞에 준고가 나타난다.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마주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사이를 메우는 것은 '피'라는 질긴 인연이다. 각 장은 각각 하나와 준고, 요시로, 한때 준고의 연인이었던 고마치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되지만 그들 각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그들의 이야기이면서 하나와 준고의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바라본 하나와 준고의 관계, 그리고 그들 자신들의 눈으로 본 그들의 사랑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작품의 키워드는 '피'다. 피로 맺어진 '가족'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정이 하나와 준고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준고는 어릴 때 아버지를 바다에서 잃었고,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와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상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여자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려는 어머니의 각오가 준고의 마음속에 응어리를 만들었다고 봐야겠다. 하나 또한 온전한 가정과 거리가 멀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기 전부터 가족 안에서 느꼈던 괴리감. 자신은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 안에 속할 수 없다는 감정이 마음 속에서 점점 커졌고 준고와의 만남을 통해 충족된 소속감 혹은 사랑이 그와의 관계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가족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던 준고와 하나는 '피'에 매달리게 되었고 준고가 하나를 '엄마'라고 부르게 된 배경에는 그런 '피의 충족' 의 결여가 원인이지 않았을까. 작품 안에는 준고가 하나에게 '피의 인형'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그 단어가 그들의 저주받은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고통스러울 때 위안을 주는 포근한 하나 인형. 피로 맺어진 준고만의 인형.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이지만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도저히 그들의 사랑을 거부할 수 없다는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자꾸만 빨려들어가게 되는 치명적인 사랑.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을 사랑의 죄악. 단순히 선과 악, 옳고 그름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사랑이 살인사건들과 연관되어 더욱 지독하게 불타오른다. 읽은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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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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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이라고 대답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철학 지식은 철학이기는 하지만 교육철학에 관계된 것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공자와 맹자,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그 외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교육에 어떻게 적용했는가에 관한 지식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들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내용임에는 다름 없다.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사용한 자신들만의 철학용어와 개념이었는데 그런 용어적 장벽이 철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분야라고 해도 철학은 재미있는 학문이기도 하다. 허망한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과 깊이 관련된 학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행하는 사고의 정립과정이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생각하는 힘으로서의 철학' '생각하는 과정으로서의 철학'이 철학의 본질에 가깝다고 보고 있는데 그러한 철학을 '동사로서의 철학'이라 명명한다. 

이 책의 구조적 특성을 잠깐 설명하고 넘어야겠다. 거의 모든 철학책이 고대에서 근대의 방향으로 변화한 철학 이야기를 다룬다면 이 책은 근대에서 중세, 고대로 넘어가는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또한 철학사상과 철학자에 알맞는 12곳의 도시를 선정하여 말 그대로 철학이 도시를 디자인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서를 즐겨읽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은 철학에 보다 쉽게 다가가게 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단 여행서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많이 적다. 

만약 이 책이 단순히 철학자와 그들의 사상을 논한 책이었다면 나는 아마 이 두 권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들이 쉬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비엔나 편에서 다룬 논리실증주의, 실재와 표상에 관한 이야기,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네덜란드로 피신한 근세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와 헤겔의 이야기들은 한 번 읽어서 모두 이해하기에는 내 앎의 깊이가 너무 얕다. 저자 나름대로는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구체적인 사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념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몇 번이나 되새김을 해보곤 했다.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2권의 맨 마지막 장 '고대로 가는 길-로마' 편과 1권의 '철학의 새 천년, 1968년에 시작되다-파리' 편이었다. 고대 철학 부분은 교육철학을 공부하면서도 가장 재미있게 공부한 부분이라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파리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68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운동의 시초가 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두 도시에서 다뤄진 철학 이야기 모두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한다. 

철학과 관련해서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게 책을 읽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물론 내용을 모두 이해했는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내가 가보고 싶어하는 도시들, 그 도시들에 여전히 살아숨쉬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들. 저자는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눈'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철학이 살아숨쉬는 도시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예전' '거기'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철학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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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네이크 스톤 -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물
제이슨 굿윈 지음, 박종윤 옮김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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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이슨 굿윈의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은 제목만 들었지 읽어본 적은 없다. '환관'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어쩐지 가벼운 이미지와 표지에 그려져 있는 야심의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책을 읽는 데 표지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책의 표지는 나에게만큼은 큰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표지가 이상하면 속이 상하고, 재미없는 책이었더라도 표지가 멋지다면 어떻게든 움켜쥐고 있고 싶기 때문이다. '책은 사람에게 읽혀져야 진정한 제 기능을 하는거야'라고 말하는, 정말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면 기가 차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다, 흠흠.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표지에서 느껴지는 야심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척이나 잘난 척을 할 것 같은 사람이다.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소리없이, 때로는 촐싹거리면서 사건 속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야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 [스네이크 스톤] 에 나타난 그는 예상 외로 진중하다. 마치 물같은 느낌이랄까. 흐르는대로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정적인 느낌. 그에 대한 내 편견이 순식간에 깨지면서 이슬람의 신비로운 문화가 나를 책 속으로 이끈다. 

배경은 술탄 마흐무트 2세가 죽음을 앞둔 19세기 중반의 이스탄불. 야심의 친구 조지가 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잇달아 벌어지는 살인사건들. 책방을 운영하는 상인이 살해되고 야심의 친구 팔레브스키와 함께 그를 방문한 프랑스인 르페브르 또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한다. 르페브르가 야심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그 때 르페브르는 야심의 방에 한 권의 책을 숨겨놓고, 훗날 그 책을 발견한 야심은 '헤티라'라는 단어를 단서로 범인들을 뒤쫓기 시작한다. 술탄에게만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책이 간직한 비밀,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가운데 19세기 이스탄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미스터리 팩션을 참 좋아했지만 요즘은 어쩐지 잘 읽지 않게 된다. 별다를 것 없는 소재와 그리 크게 차이나지 않는 이야기들은 나를 질리게 했고 점차 팩션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만약 이 책이 또 성서 다시 구성하기 등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절대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끌어당긴 이 책의 매력은 19세기 이스탄불의 서민적인 모습이었다. 굉장히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을텐데도 야심이 등장하면 금새 조용해지는 듯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새롭게 알게 된 이스탄불의 역사와 문화, 그리스 비밀결사대 등의 이야기도 처음 접해보기 때문인지 흥미로웠다. 

하지만 추리소설이 흔히 갖추고 있기 마련인 숨가쁜 추격전이나 스릴은 조금 부족하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고 약간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인공 야심을 이해한다면 그런 분위기도 곧 적응이 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환관이지만 내가 가진 환관 이미지와는 영 다른 남자. 오히려 정적이고 차분한 그의 모습은 추리소설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그것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이상하게 들릴까.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에서의 야심도 한결같은 모습일지 궁금하다. 

2007년 세계 최고의 추리문학상을 수상했다는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그리고 이 책 [스네이크 스톤]. 이스탄불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야심의 사건 수사 모습이 궁금하다면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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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맘을 이기는 해피맘 - 좋은 엄마를 꿈꾸는 초보 엄마들의 공감 이야기
트리샤 애쉬워스.애미 노빌 지음, 강현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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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아이를 참 좋아한다. 길을 가다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우울했던 내 기분도 금방 풀려버린다. 통통한 볼, 앙증맞은 손가락과 발가락, 꺅꺅거리며 밝게 웃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 모든 것들이 사람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든다. 아이가 간직한 사랑스러움때문인지, 자신의 유전자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바람 때문인지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낳고 싶다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그건 결국 꿈에 그칠 일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해도 어려운 육아를 한 사람이 온전히 해낼 수 있을까. 아이가 가진 사랑스러움은 달콤한 꿀같지만 육아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전쟁이지 않을까. 

요즘 한국여자들은 슈퍼우먼, 혹은 원더우먼 컴플렉스에 걸려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여성들이 힘겨워하면서도 직장과 가정을 지켜내고 완벽하게 일하려고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서 집안에서의 위상도 높아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할 일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종종 같은 직장의 선배분들께 '분홍쟁이씨는 좋겠다, 집에 가면 온전한 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집안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잖아. 나는 애 때문에...' 라는 말을 듣곤 한다. 안타깝고 두려워지는 현실이다. 

여자들은, 엄마들은 과연 슈퍼맘이 되어야 할까. 행복하자고 즐겁자고 한 결혼이고 사랑으로 탄생한 아이일텐데 오히려 엄마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는 현실. 그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두 여자가 이 책을 썼다. 나는 아직 아이는 커녕 결혼도 안 한 사람이지만 행복한 여성이 되기 위해, 슈퍼맘이 아닌 해피맘이라는 설정을 내 직장에도 응용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다. 

저자들은 행복한 엄마가 되기 위해 완벽한 엄마의 꿈을 버리라고 한다. 현실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을 찾아내고 너무 높은 기대를 갖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육아 방식을 믿고 다른 부모를 경쟁자라 생각하지 말며 아이의 발달에 집착하지 말라고. 원하는 것을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꾸라고 조언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모두 각 챕터를 대표하는 소제목인데 이 소제목만으로도 든든한 마음을 갖기에 충분한 듯 하다. 중요한 것은 주위의 협조와 완벽해지려는 자신을 버리는 것. 

엄마의 마음이 아니어서인지 완벽히 공감할 수 없었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조언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언젠가 엄마가 될 그 날을 위해 미리 준비해보기에도 좋은 기회가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많은 엄마들이 슈퍼맘이 되려는 욕심을 갖기보다는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한다. 엄마의 행복은 아이의 행복만큼 소중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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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김선우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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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p50 <즐거운 편지>, 황동규  

시는 시험에나 나오는 시험범위의 하나로만 여겨졌던 중학교 시절, 나에게도 마음을 울리던 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중학교 3학년 친구들과 함께 보러 간 영화 <편지>에 등장한 이 시를 한동안 잊을 수가 없어서 시집을 뒤적거렸었다. 그리고 무슨 마음에선지 예쁘게 필사를 해서 다이어리에 고이 남겨뒀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때의 나는 어렸었지만,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지만 영화가 남겨준 감동 덕분에 오래도록 그 시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는 나에게 무척 어렵다.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작가의 마음과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작품에 대해 이리저리 해석을 하지만 그 소설이, 시가 어떤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 작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모든 시들이 강렬한 느낌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아니므로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이 어떤 시를 선별해서 읽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때문에 여러 작가들의 시가 함께 들어있는 모음집은 참 반갑다. 게다가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시라니, 이번만큼은 시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시에 대해 도전하는 마음을 갖다니 참 어리석다라며 스스로도 자책하며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그만 시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에 대한 시이다 보니 언어들이 말랑말랑하다. 읽으면 느낌이 확 오는 시들도 꽤 된다. 하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장석남 시인과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다. 예전에는 시 뿐만 아니라 해설들도 어려워서 시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분들의 해설은 또 다른 문학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에 마음이 젖고, 해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은 성미정 시인의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사랑으로 상대가 아닌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모습이 시와 해설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시와 해설을 돋보이게 해주는 삽화 또한 멋지다. 시의 주제와 분위기에 맞도록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그려넣어진 삽화들은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클로이라는 사람. 앞으로 삽화가 들어간 책을 살필 때에는 꼭 찾아봐야겠다.

여전히 시는 내게 어렵고 소설을 읽을 때처럼 느낌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시 모음집으로 조금씩 시에 다가가다보면 언젠가 시가 진정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시는 어른이 읽는거야 라는 핑계를 대며 시집을 멀리했던 학창시절. 이제는 시집에 눈과 손이 자꾸 닿는 것이 이미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덕분에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시들이, 좋아질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p34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성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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