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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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감동으로 적시고 탄성을 자아내게 한 예술작품들은 많고도 많지만, 나는 그 중에서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가 가장 좋다.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 를 읽을 때까지 나는 베르메르라는 화가와 이 그림의 존재조차 몰랐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나는 그 소설을 다 읽자마자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가 직접 보고 싶어졌고, 베르메르라는 화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그 후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소재로 하거나 베르메르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무조건 찾아서 읽었지만,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다. 36점의 그림을 남겼으나 그의 고향인 델프트에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고, 마지막 36번째 작품은 도난당한 후 행방조차 모른다는 베르메르의 작품들. 그의 그림들을 통해 심도있고 낯선 세상 속으로 다녀왔다. 

그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원래 천성이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분석하거나 연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책이든 그림이든 보고 읽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가 아무리 들여다보고 연구해도 그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작가의 입장에서도 그의 작품과 접하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감동해주면 충분히 만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을 천천히 읽고 나니 그림, 혹은 시나 소설 속에 담겨 있는 정보들을 그냥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은(시나 소설도) 우리를 다른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창구가 되어준다. 

이 책에 소개된 베르메르의 그림들 또한 그러하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다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인 <장교와 웃는 소녀>를 보자. 챙이 크고 넓은 모자를 쓴 장교가 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그림은 표지에도 등장한 작품인데, 여기에서는 모자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비버 모자가 큰 유행이었는데, 토종 비버의 털로 모자에 필요한 펠트를 계속 만들어내다보니, 그 개체수가 급감하게 된다. 16세기 말이 되면서 비버 펠트를 얻을 수 있는 창구로 캐나다가 대두되었고, 캐나다 비버 펠트가 시장에 소량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610년대에는 비버 펠트 모자의 가격이 양모 모자보다 10배 가까이 올라 사람들을 비버 모자를 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7점의 그림을 통해 네덜란드의 당시 사회 풍조와 시장의 모습, 국제적인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데 한 가지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이다. 당시 네덜란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중국이란 나라는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었다. 저자 또한 중국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므로 중국 이야기는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좀 더 네덜란드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소소한 일상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기있는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나의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네덜란드와 중국에 관한 이야기가 균형있게 실려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보고 느끼면 돼!'라고만 생각해서 얼핏 보고 지나쳤던 그림들을 통해 많은 사실과 이야기들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에 대해서도 더욱 애정이 생기는 것만 같다. 그림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르쳐 준 책. 사물을 보는 깊이 있는 눈까지 배우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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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카, 짖지 않는가 미스터리 박스 2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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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라는 말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날씨는 덥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이 때, 미스터리 소설은 찬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보다도 더위를 잊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여타의 미스터리 도서와는 다른 독특한 책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독특한 점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정말 독특하다. 그리고 난해하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 북태평양의 키스카섬에 군견 4마리를 남겨둔 채 주둔해있던 일본군이 떠난다. 키타, 마사오, 마사루, 그리고 미군 포로의 개였던 익스플로전.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 땅에서 마사루를 제외한 세 마리의 개들은 자유를 만끽하지만, 어느 날 미군과 만난 마사루는 그들을 지뢰밭으로 유도해 함께 폭사한다. 키타, 마사오, 익스플로전은 미국 본토로 향하는 배에 태워지지만, 배멀미가 심했던 키타만은 여정을 함께하지 못한 채 알래스카에 남겨지게 되고 얼마 후 마사오와 익스플로전 사이에서는 새끼들이 태어난다. 이후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에서 그들 자손의 자손의 자손들의 역사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읽는 책의 대부분이 '사람'이 주인공인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개'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한다. 지금까지 인간을 중심으로 쓰여왔던 세계의 역사가 키타, 마사오, 익스플로전의 새끼들을 중심으로 재탄생되었다. 인간과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진행되는데, 개의 족보(?)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 반면, 인간에 대한 설명에는 무성의하다. 작품 초반에 등장한 대주교라는 노인과, 그가 납치한 일본 야쿠자의 딸인 통통한 소녀의 이야기가 개들의 역사 사이사이에 등장하지만, 작품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정체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작품의 주인공인 벨카 또한 개들의 역사를 한참 따라간 뒤에야 등장한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과 미국 사이에 알력 다툼이 거세지는 와중, 소련이 먼저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다. 그 후 개를 대상으로 스푸트니크 2호가 발사되었고, 1960년 8월 19일에는 벨카라는 이름의 수캐와 스트렐카라는 이름의 암캐를 함께 태워 스푸트니크 5호를 발사했다. 벨카와 스트렐카는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지만, 그들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이다. 그들이 우주에 있을 때  키타, 마사오, 익스플로전의 자손들은 이따금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충만한 힘을 느끼기도 한다. 

군견들이 투입된 인간들의 전쟁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일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근대사를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본,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하다고 인식해왔던 나에게는 약간 어려운 작품이다.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문체에 차가운 얼음이 생각나는 서늘함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 위해 집어들었다가 의외로 머리를 감싸쥐고 살짝 괴로워하며 읽었지만, 읽고 읽고 읽어볼수록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훈련받은 개들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짖지 않는다. 오직 조용히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온힘을 쏟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바른 현상일까. 동물에게 짖는 기능이 있다면 짖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짖지 않고 인간의 의해 훈련받은 개들은 더 이상 자유로운 본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벨카도 짖지 않는다. 벨카가, 다른 개들이, 혹은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짖을 때를 함께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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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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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틀즈의 멤버, 오노 요코의 남편, 마음의 병을 앓는 이에 의해 사망. 이것이 내가 존 레논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아, 하나 더 있다. Let it be 라는 노래. 이제는 아주 옛날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그 때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비트]를 통해 이 노래를 알았다. 존 레논은 1970년 밴드가 해산할 때까지 멤버들과 13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그 후 그 혼자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75년 오노 요코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4년 동안의 공백기를 갖는다. 그 후 발표된 그의 음악은 예전 음악과 그 빛깔이 뚜렷하게 달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 4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4년의 공백기에 존에게 일어났던 일의 실화같은 상상이다. 

창작활동을 멈추고 주부로 생활하는 존 레논. 매년 여름휴가를 일본에서 보내는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주니어, 그리고 집안일을 돌보아주는 다오씨가 있다. 어느 날 존은 롤빵을 사러 나갔다가 어머니를 닮은 여성을 보고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다리가 웃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날부터 시작된 정체불명의 복통과 변비. 그의 변비 앞에서는 그 어떤 강력한 변비약과 관장약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고통과 씨름하는 그에게 아내 요코는 '아네모네 병원'을 소개해주고, 진료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젊은 시절 그의 기억 한 구석을 차지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그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시작된 사람들과의 조우를 통해 존의 가슴에 있던 응어리의 정체가 드러난다. 과연 '아네모네'병원은 어떤 곳이고, 안개 속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그를 찾아오는 것일까. 

이 작품은 오쿠다 히데오의 데뷔작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서 만났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약간 다르다. 무작정 웃게 만들면서도 삶에 대한 가볍지 않은 시선을 가진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으나,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약간 더 짙은 듯하다. 얼마 전 읽은 그의 책은 [스쿠살, 도쿄] 였는데 화장실에 관한 에피소드 부분에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한창 사람이 붐빌 때인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실 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참 많이 웃었다. 특히 화장실에서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다. 누가, 팝스타 존이 화장실에서 그처럼 애를 쓰리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사람의 상처는 몸에 있을 때보다 마음에 있을 때 더 치유하기 어려운 것 같다. 몸에 있는 상처는 약을 발라주고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져 새살이 올라오지만, 마음에 있는 상처에 약을 바르고 새살이 돋길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과정이다. 그 상처와 기억의 시간들은 언제 어디를 가든지 우리들을 따라다니면서 더 자주 아프게 하고 항상 느끼게 한다. 존의 변비는 악몽에응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날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지 못하고, 마음에 응어리가 되어 버린 결과가 악몽으로, 변비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고보면 상처란, 상호작용을 한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한다. 

'아네모네' 병원에서의 치료방법도 괜찮았지만, 결국 존은 자신의 상처를 그 스스로 보듬고 고친다. 상처를 통해 또 한 번 성장했고, 가족과의 사랑을 통해 그는 변화했다. 4년 동안의 공백기 후에 발표한 그의 앨범이 그 전의 음악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이 작품에 실린 것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항상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정겨움에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오쿠다 히데오의 손에서 재탄생된 팝스타 존의 파란만장 변비 해결기.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히 재미만으로 이 작품을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 웃음과 함께 인간을 향한 깊이있는 시선을 가진 작가 오쿠다 히데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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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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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달라이라마의 나라, 신비하고 성스러운 나라. 티베트 사태가 일어나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티베트에 대한 이미지다. 그 전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내가 가고 싶어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으며, '티베트'라는 단어를 발음하기만 해도 어쩐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약간의 당혹감마저 느꼈었다. 티베트사태가 보도되자, 나는 그곳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더럽혀진 것 같아 아쉬웠고 그들의 절박한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던 '티베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많은 여행서적을 보며 그들의 진짜 모습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이 작품은 내가 알지 못하는 티베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하고 중국 본토까지 열광시킨 티베트 작가의 티베트 이야기. 아라이의 장편소설인 이 작품의 원제는 [진애낙정-먼지는 결국 아래로 떨어진다]이다. 권력을 하나의 먼지로 비유하여 비록 중국이 하사한 명칭이지만 '투스'라는 제도가 티베트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잔잔하면서도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바보'는 마이치 투스의 둘째 아들이다. 만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임신시켜 '바보'가 나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만 제외하고 그가 바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거나 전쟁을 두려워해야 하는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들은 바보가 보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그는 바보이지만 귀중한 '뼈대'를 타고 났다. 태양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투스의 아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평온한 티베트에 양귀비 씨앗이 들어오면서 변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양귀비 씨앗을 둘러싼 전쟁, 재산의 축척, 중국에서 일어나는 빨간 한족과 하얀 한족의 싸움은 세상이 흔들리는만큼 티베트도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바보'는 독특한 인물이다. 평소에는 정말 바보처럼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기 일쑤지만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마치 몸에 신이 내려온 것처럼 별안간 소리를 질러 알려준다. 그런데 평소에 그가 하던 말이 과연 바보스러운 것이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모두 다르듯, 그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었을 뿐이다. 다만, 투스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좇는 것을 그만 좇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 주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바보'는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행운이 따르는 인물이었지만 변화하는 세상은 그에게 무릎 꿇기를 강요한다.

작품에는 많은 색이 등장한다. 양귀비 씨앗이 자라 열린 열매에서 나오는 하얀 액, 중국에서 일어난 하얀 한족과 빨간 한족의 싸움, 하얀 겨울을 상징하는 순결한 백색,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흘렸을 피의 붉은색.  '바보'가 물든 것은 어떤 색이었을까. '바보'는, 그리고 티베트는 '변화'라는 색에 물들었다.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풍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생활 속에 온갖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투스'라는 이름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힘없이 무너진다. '변화'를 딱히 한 가지 색으로 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가장 강력하고 유혹당할 수밖에 없는 색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티베트에 역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가 아닌 티베트의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는 충분하다. 밋밋하지만 천연덕스러운 바보의 말투 속에서 티베트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작가 아라이의 티베트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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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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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말을,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말을 나는 여전히 입에 달고 산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듯, 우리 삶의 경계도 희미하기는 매한가지다. 어떤 행동을 해야 어른이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던 상처는 자꾸만 속으로 곪아가고, 당당하리라 굳게 다짐한 결심들도 어느 한 순간 스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 

내가 경험한 상실은 익숙했던 사람이 그저 자신의 길을 찾아나선, 내 안에서만 일어난 부재였으나 열일곱 니은이가 잃은 것은 영원한 생명의 부재였다. 어디선가 한 번 만날 것을 기대하지도 못한 상실 앞에서 니은이는 그저 넋을 잃고 슬픔을 제 속에 담아둔 채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슬픔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니은이의 상실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친한 친구 나무가 가진 모든 것에, 세상 약해 보이는 사람들 모습 전부를 향해 날아가 찢고 망가뜨린다. 그런 니은이의 마음을 감싸준 것은 아빠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처용포, 왕고래집 할머니와 장포수 할아버지가 있고, 신비로운 고래의 전설이 이제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려 하는 처용포였다. 

평생을 고래만 생각하며 고래잡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늘그막에 한글 공부를 시작한 왕고래집 할머니의 모습은 상실의 고통을 서서히 희석시키며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면서 니은은 이제 자신의 시간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진정한 삶의 모습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기억은 뜨겁거나 차갑고 뾰족하거나 거칠었다. 시장바구니를 현관에 내려놓으며 숨을 고르는 엄마, 출근하다 되돌아와 서류봉투를 찾는 아빠 모습이 뜨거운 덩어리처럼 가슴에서 회오리쳤다.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란 없었다. -p97
나와 니은의 상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이란, 기억이란 그렇다. 잘 먹고 잘 지내고 씩씩하게 잘 살아내다가도 어느 한순간 소중했던 기억들이 칼날처럼 가슴을 저민다. 나는 애써 그 아픔을 무시했다.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 열심히 생각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그러니 차라리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란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랬다. 나는 귀를 막고 도망치고 있었고, 그것이 어른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바위그림이 왜 중요해요?"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 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p236
하지만 작가 김형경은 이야기한다. 잘 떠나보내기 위해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해야 한다고. 산다는 건 무엇이고, 기억한다는 건 무엇일까. 언젠가 그 많고 많은 기억에 짓눌려 여전히 가슴이 아프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나는 조금은 알듯도 싶다. 상실에 맞서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한쪽을 내주어야 함을. 그렇게 내 가슴에 품고 조용히 상실과 마주하다 보면 그 자리에 어느덧 다른 이름의 감정이 존재하게 될 것임을. 어쩌면 단순한 나의 소망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다. 

어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꼭 그리 '어른'이라는 단어에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가슴 속에 각자 다른 나이를 가진 자신의 여러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이제 내가 아이이니 어른이니 하는 그런 평가에 휘둘리지 않겠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며, 다친 내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달릴 뿐이다. 신화같은 삶의 고리들을 거부하거나 내치지 않을 뿐이다. 

작가 김형경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콕콕 찌른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이 마치 심리학책이 소설화한 것 같았다면, [꽃피는 고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끊임없는 성장을 아름다운 온정과 신비로운 고래를 등장시켜 담담하게,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위로받았으나 아팠고, 그로 인해 많이 울었다. 그러나 이 눈물이 오늘의 나를 더 빛나게 해 줄 것이다. 내 삶을 더 빛나게 해 줄 니은이가 다짐한 규칙, 나도 그것만은 지켜봐야겠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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