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1 - 청소년 성장 장편소설 아사노 아쓰코 장편소설 1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해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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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관심을 갖는 스포츠는 '축구' 하나다. 그것도 월드컵같은 큰 대회가 있을 때만 '와와' 거리며 쫓아다니는 변덕쟁이 팬일 뿐이다. 올림픽이 열리면 가슴 두근거리면서 시합을 지켜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뿐, 어떤 한 종목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야구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저 멀리 있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시절 기억의 영향이 큰 듯 하다. 뜨거운 햇빛, 시끄러운 고함소리, 보이는 것은 운동장이 아니라 아이인 내 눈에 커다랗게만 보이는 어른들의 넓은 등이 고작이었다. 야구, 그것은 저 먼 우주의 이름모를 행성처럼 내게는 낯선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야구를 하는 소년들의 이 이야기를 읽고 '대체 야구가 뭐야'라며 야구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묻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야구 이야기만 꺼낼라치면 '난 야구 같은 거 잘 몰라'하며 도리질을 쳤었는데 지금은 야구가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몸이 근질근질하다. 나는 야구를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다. 야구를 하는 모습이 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언가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 아마도 그것일 게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는 나에게 이런 달뜬 마음을 갖게 한 두 사람이 있다. 오만하고 이기적이지만 천재적인 투수 하라다 다쿠미와 푸근하고 너그러운 그의 포수 나가쿠라 고. 두 사람은 배터리다. 야구에서 짝을 이루어 경기를 하는 투수와 포수. 배터리. 도시에서 전학 온 다쿠미의 공은 어른이 인정할 정도의 엄청난 힘과 속도를 자랑한다. 그런 다쿠미의 공을 한 번 받기 시작한 고는 희열에, 정열에, 다쿠미의 그 오만한 자신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의 포수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야구 자체에 세상의 중심을 두고 자신의 던지는 행위에만 관심이 있는 다쿠미와, '다쿠미의 공'을 중심에 둔 고는 부딪힐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다쿠미의 성격도 그들의 갈등에 한 몫한다. 하지만 소년들은 변화하는 법! 다쿠미는 고로 인해, 고는 다쿠미로 인해, 소년들은 성장한다. 

야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어떤 운동에나 협동심은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을 내세우기보다 팀 전체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야구 또한 단순히 던지고 치고 받는 행위 자체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와 협동하면서 진실된 마음을 배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쿠미에게 있어 야구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유'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마음 따뜻한 고는 그런 다쿠미와 단순한 친구는 될 수 없지만 그의 공을 받는 포수의 자리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다른 이에게, 주변 사물에,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무관심했던 다쿠미의 가슴을 변화의 바람이 뚫고 지나간다. 고는 다쿠미와 다쿠미의 공으로 인해 번뇌하고 방황하면서 어엿한 소년으로 성장해간다. 

 나는 처음에 '배터리'라는 제목을 보고 어째서 제목이 '배터리'인지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구 용어에 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일상에 사용하는 생활용품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처음 '배터리'의 진짜 의미를 알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처음 생각했던 그 배터리의 의미도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자기가 가진 힘으로 다른 것을 빛나게 해주는 '생활용품'배터리. 서로에게 고민과 갈등을 안겨주지만, 변화와 성장을 안겨준 '두 명의' 배터리. 모두 멋진 배터리이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든 또 다른 이유는 독특한 색을 띤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거만하지만 의외로 순수한 다쿠미, 푸근하고 너그럽지만 날카로운 고, 약한 몸이라 늘 힘드지만 내면에 강한 힘을 갖고 있는 다쿠미의 동생 세하, 장난스럽고 귀여운 친구들 사와구치와 히가시다니, 평범한 듯 보이지만 뛰어난 전략가의 기질을 갖춘 주장 가이온지, 우직하고 성실한 가도와키와 늘 실실 웃으며 본심을 숨기지만 의외로 복잡한 미즈가키까지, 이 작품 안에는 하나의 말로 포장할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 명 한 명 모두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빛나는 미래, 그들의 고민과 웃음은 끝나지 않은 야구경기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이게 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비록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그들이 부럽다. 그렇게 미치도록 무언가에 빠져들 수 있는 그들이. 같은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자신들의 열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게 아닐까 싶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좋아하는 일,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잘 모르는 야구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책을 읽어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6권이라는 분량이지만 감동적인 이야기에 빠져 6권 이상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음 속 잊고 있던 정열과 희망을 되살아나게 해 준 이야기, 사랑스러운 소년들의 이야기가 오늘밤 나를 잠 못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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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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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판단할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신문, 뉴스, 잡지, 그리고 인터넷. 범람하는 정보만큼 '진실'의 숫자도 가늠할 수 없을만큼 증가한다. 그 '진실'이 과연 '진실'인가.  확실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유통되는 정보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 '나머지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유통되었던 정보를 어리석을만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누가 나를, 이 나라 사람들을 정보를 통해 감쪽같이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 해볼까 말까였다.
 
아오야기 마사하루 또한 그랬다. 치한을 증오하는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가 있고, 물건을 배달하는 성실한 택배청년이었던 그에게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센다이에서 총리 가네다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을 무렵, 그는 친구 모리타 신고를 8년만에 만나고 있었다. 모리타는 아오야기에게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너 오즈월드가 될거야'라며 어서 도망치라고 한다. 뜻모를 소리에 어리둥절해 있던 아오야기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얼떨결에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전국민의 표적이 된다. 하지도 않은 일의 범인이 되어 도망치는 그의 뒤를, 산탄총을 쏘는 경찰과 아오야기가 나타나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그를 보았다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시민들이 뒤쫓기 시작한다. 센다이의 모든 시민들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시큐리티 포드에 의해 아오야기의 동태가 낱낱이 파악되고 그가 숨을 곳은, 안타깝지만 없다.
 
책을 읽으면서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은 '공포'다. 귀신이 등장하거나 피가 넘쳐 흐르는 엽기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공포 그 자체였다.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단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당사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은 오보와 오판에 의해 진실이 되어버리는지에 대한 공포. 곳곳에서 입수된 아오야기의 영상을 보면서 뚱한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어두운 구석이 있다느니 하며 성급하게 단정해버리는 아나운서의 말은 하나의 정보가 되어 '~라고 했대'에서 '~래'라는 포장된 '진실'이 되어버린다.
 
아오야기 사건에서 '방송'과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큐리티 포드는 범죄를 조장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범죄는 총리를 살해한 진짜 살인범을 찾지 않고, 아오야기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자들은 아오야기의 고향집까지 찾아가서 그의 부모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민다.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려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아버님'을 부르짖으며 한 마디 해주기를 외치는 기자들의 모습은 현실 속 기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기자들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사실도 아닌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으며 매달려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이사카 코타로는 아오야기의 아버지의 입을 빌어 비판한다. -이름도 못밝히는 너희 정의의 사도들, 정말로 마사하루가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걸어봐. 돈이 아니야, 뭐든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걸라고. 너희는 지금 그만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생을 기세만으로 뭉개버릴 작정 아니야? 잘 들어, 이게 네놈들 일이란 건 인정하지. 일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일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버스 기사도, 빌딩 건축가도, 요리사도 말이야, 다들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다고. 왜냐하면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각오를 하란 말이다(p450)-
 
아오야기의 도망은 그의 추억과, 그의 지인들의 추억이 얽히고 얽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 평범하고 즐거웠던 대학시절,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연인과의 이별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평범하고 소중한 시간들.  그 시간들의 파편이 아오야기가 도망치는 곳곳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더욱 작품을 읽는 사람의 가슴을 친다.
 
이 작품은 생생한 추격신과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최고의 재미와 가슴 절절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툭툭 내뱉는 말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치밀한 복선, 퍼즐식 구성, 투명한 감성, 철학적인 대화까지>로 뒷표지를 장식한 이 문구는 거짓이 아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분명히 이렇게 이 작품을 잘 나타낸 문구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나 나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겪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왜곡된 정보로 누명을 쓰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과연 내가 어디까지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마음이 먹먹해져 온다.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p210

 

깜짝 놀랄 만큼 하늘이 파랄 때면, 이 땅이 쭈욱 이어진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사람이 죽고,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다 거짓말 같아요.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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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독서클럽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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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도심에 자리잡은 널찍한 부지에 성마리아나 학원이, 있다! 유치원부터 고등부까지 같은 부지 안에 있는 이 학원은 20세기 초 성마리아나 수녀가 세웠다고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보다 나은 사람을 배출해내는 것이 목적인 학원에는 서쪽 관저라 불리는 학생회,  동쪽 궁전이라 불리는 연극부와 함께, 남쪽에는 그 두 개의 클럽과 대등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독서클럽이 존재한다. 구교사 뒤편 다 쓰러져가는 붉은색 벽돌건물 삼층에 위치하는 독서클럽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책을 읽고 홍차를 마실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 독서클럽에서 백년에 걸쳐 일어난 기상천외하고도 유쾌한 클럽일지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일지에 기록된 이야기는 총 5편이다. 오사카에서 올라와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소녀 가라스마 베니코가 어떻게, 누구의 도움으로 왕자가 되었는가를 그리는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 성마리아나 학원의 창시자 마리아나의 실종에 관련된 <성녀 마리아나 실종사건>, 세월의 변화와 함께 독서클럽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학생들이 방문한 사건을 다룬 <기묘한 손님들>, 기묘한 정열을 품은 소녀 야마구치 주고야 사건<초저녁 별>, 마지막 독서클럽 회원의 활약과 졸업생들의 새로운 독서클럽을 다룬 <관습과 행위>까지 겉으로는 조신하고 아름답게 행동하는 여학교의 숨겨진 모습들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각각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독특한 코드네임은 이 책의 또 다른 묘미이다. 

그런데 이 성마리아나 학원을 지탱해가는 것은 '가짜 왕자'에 대한 소녀들의 '사랑'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사랑을 진성S와 가성S로 구분하는데, 대부분의 소녀는 가성S에 속한다. 남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 유행처럼 그런 감정이 퍼진 적이 있었다. 나야 물론 그 때도 한창 책에 빠져 동화속 멋진 왕자님을 그리고 있었으나, 흔히 말하는 친구의 이야기로는 '누구와 누가 좋아한다더라~'라는 소문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이성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 있기 전에 동성에 대한 동경이 먼저 일어난다고 쓰인 심리학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여자는, 같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훨씬 복잡한 존재다.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도 복잡한 여자는 어린시절 사랑에 대한 동경은 가지고 있지만, 직접 사랑에 빠져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소녀들 대부분은 꿈같은 연애를 동경하면서도 현실의 남성에게는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 때문이었다. 땀과 기름 냄새 구질구질한 낭만의 냄새 때문이었다(p17)- 에서 나타내는 이성에 대한 다른 '냄새' 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이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읽으면서 주인공 '오스칼'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 책을 읽으면서 성마리아나 학원의 '가짜 왕자'에 대한 소녀들의 사랑의 감정을 이상하다 여기지 말고 그저 순수한 한 때의 감정이겠거니 여겨주면 좋겠다. 

여하튼 이 독서클럽의 일지는 참 재미있다. 어디에나 암흑의 클럽은 존재하는 법! (그러나 독서클럽 자체가 암흑적인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주목받지 못한 클럽이었을 뿐) 그런 클럽의 숨겨진 역사를 기록한 이 일지는 내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좀 더 신나고 흥미진진한 생활을 해볼걸, 좀 더 용기를 내서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볼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하지만 역시 책은 그런 나의 감정을 위로하고 보상해준다. 현실에서 맛볼 수 없었던 즐거운 클럽생활, 그리고 소녀들의 귀여운 사랑과 투정까지, 읽고 있으면 꼭 성마리아나 학원에 입학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의 유쾌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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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1 - 안드로메다 하이츠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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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은 여느 일본 작가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녀가 창조해내는 세계는 쿨함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너무 매정해서 읽는 이의 마음을 허공에 붕 뜬 상태로 만들어버리지도 않고, 너무 뜨거워서 질척거리는 마음을 한동안 안고 살아가게 하지도 않는다. 딱 정도를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읽고 나서 탁 덮은 후 ‘음, 좋았어’하고 끝내버릴 수 있는 상쾌한 박하사탕 같은 느낌이 참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세 권이나 되는 분량은 역시 걱정스럽다. 그녀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말을 그토록 장황하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인지, 그녀의 긴 이야기에 질리지 않고 끝까지 귀 기울일 수 있을지, 그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약간은 염려하면서 책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전 3권인 [왕국]을 아직 1권 밖에 읽지 않아 전체적인 감상을 쓰는 것은 무리겠지만, 1권을 읽고 느낀 것은 역시 ‘아, 좋다’였다.

이 작품에서 그녀의 글은 한층 더 서정적이다. 도시의 생활을 그리는 다른 일본소설에서 느껴지는 뿌연 구름 같은 삭막함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청아한 자연의 공기를 맡을 수 있다. 깊은 산 속에서 할머니와 둘이 생활하면서 차를 만들어 파는 시즈쿠이시. 자연을 벗하며 살아온 그녀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이다. 사람들에 의해 자연이 균형을 잃어가면서 결국 할머니와 산을 내려온 시즈쿠이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식물 선인장과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쓸쓸하고 외로웠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낸 끝에서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신비한 능력을 가진 ‘가에데’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신이치로’를 만난다.

시즈쿠이시는 어쩌면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작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아내어 함께 있고 싶어하고,  마음이 맞는다고 느끼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한다. 특히 많은 상처를 받고, 쓸쓸함과 외로움을 더 심하게 느끼게 되는 이 도시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해내는 일은 대단한 일이다. 한 사람의 위로와 체온이 때로는 많은 위로가 된다. 시즈쿠이시에게는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는 ‘선인장’이 있었다. 자연과 할머니와 소통할 수 있는 매체.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서로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사람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순수하고 독특한 시즈쿠이시와, 함께 해서 좋은 사람을 발견한 그녀의 생활이 못견디게 부러워진다.

겨우 100페이지가 조금 넘어가는 얇은 분량이라 처음에는 '그리 굉장한 이야기겠어?' 하며 살짝 얕보기도 했다. 하지만 가에데와 선인장이 시즈쿠이시에게 위로가 되었듯이, 이 책 또한 서정성과 따뜻함으로 나를 위로한다. 뒤에 남겨둔 왕국 2권과 3권은 과연 어떤 이야기로 나를 위로해줄 것인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읽은 후 한참이나 쓰다듬고 싶어지는 여운이 강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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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 끌레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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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번역가의 길을 꿈꾼다. 외국의 언어가 내 손 안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될 때의 기분이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전공한 나도 대학 때 짧은 분량의 원고를 두어번 번역한 적도 있었고, 한창 일본어 공부에 심취해 있을 때는 일본 소설책을 원서 그대로 내 손으로 번역하면서 공부하기도 했다. 때문에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번역가들의 고충을 내가 조금은 이해한다고 하면 너무 자만하는 것이 될까. 

세상이 좁아진만큼 내 책장도 이제 한국에서 태어난 책들 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도착하여 새롭게 탄생한 책들로 북적북적하다. 가끔 오탈자를 발견하거나, 문맥이 맞지 않아 읽기 힘든 책과 만날 때마다 '번역이 너무 이상해'라며 얼굴을 찌푸리기만 했지, 번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번역을 했는가를 책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책을 홍보하거나 선택할 때 번역가보다는 저자에게 비중을 두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번역의 역사라니. 나는 순간 멍해진 기분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오랜 시간을 가지고 지속되어 왔을 경우, 당연히 그 쌓인 시간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한 번도 번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번역사 오디세이] 는 번역의 탄생부터 중흥기를 거쳐 르네상스까지, 번역이 어떻게 생겨나고 오랜 시간을 보내왔는지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고대 카르타고에도 번역가 계급이 있었다거나, 그리스 시대의 문헌들이 아랍어로 번역되고 그 후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등 각 시대의 역사와 더불어 번역의 진화(?)해 가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각 장마다 주요 번역가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인데, 놀라운 것은 프랑스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앙드레 지드도 번역에 엄청난 힘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이다. 앙드레 지드가 말한  "국가는 뛰어난 작가 모두에게 시간의 일부를 외국 걸작의 번역에 쏟아 붓도록 강요해도 무방하다"(p177) 라는 부분은  외국 작품을 번역하다보면 자국어에 대한 인식 또한 깊어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그는 " 몇 페이지 안 되는 분량인데 하루에 너덧 시간씩 꼬박 3주가 걸렸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다. 난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p179) 를 통해 번역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번역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가 적어놓은 이방의 글을 그대로 우리의 언어로 옮기는 것? 아니면 저자의 글을 우리의 입맛에 맞게 맛깔나게 고쳐내는 것? 쉽게 결론지을 수 없지만, 번역이 우리 삶에 있어 얼마나 큰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익숙하지 않은 인명들과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를 내용들이지만, 번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얻은 것 같다. 번역가의 길을 꿈꾸는 사람 뿐만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좋을 멋진 교양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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