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즐거움 -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120편의 철학 앤솔러지
왕징 엮음, 유수경 옮김 / 베이직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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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단어에 담긴 이미지는 딱딱하다. 철학적인 사고라 일컬어지는 생각들은 일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이성적이고, 적어도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생각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 '철학'이라 함은 짧은 기간에 끝나지 않는 깊은 사유와 내적 성찰이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철학에 일말의 도전심을 갖기도 했는데, 대학 때 들은 철학 수업으로 생각에 변화가 있었다. 자신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주위의 사물과 사람,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현상에 관심을 갖는 것, 그로 인해 자신만의 생각을 정립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 아닐까. 

책의 표지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120편의 철학 앤솔러지>. '앤솔러지'란 어원이 그리스어()의 앤톨로기아(anthologia)로 ‘꽃을 따서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짧고 우수한 시의 선집(), 특히 여러 작가들의 시를 모은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왕징이 편저한 이 책은 <참과 진리>, <생명의 존귀함>, <고귀한 덕>, <인간의 본성>, <우정>, <사랑>, <삶의 즐거움>이라는 7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선사한다. 

다양한 생각들이 담긴 만큼 마음을 울리거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을 소개해보자면, 제일 첫 장에 적힌 이반 세르게에비치 투르게네프의 <거지> 를 먼저 언급하고 싶다.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거지를 만났다. 초라한 옷차림에 곪아 터진 상처에, 더러운 모습을 한 거지가 손을 내밀었으나 그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 길을 걷던 그 사람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두 손을 꼭 잡으며 미안하지만 지금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 거지가 이런 말을 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님. 제 손을 잡아 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히 감사드릴 일인 걸요" 라고. 

요즘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아니 '그 쉽지 않다'는 생각은 핑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리게 되고,  종이를 건네주며 자신의 힘겨운 일상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먼저 보내게 되었다. 표지에 적힌 '삶에 지친 현대인'이란 이런 나의,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그저 앞만 보며 내달리게 되는 지금, 인간에 대한 신뢰와 따스함을 회복한다면 그것이 바로 철학이 추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 적힌 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잘 적용되는 말이라, 같은 책을 몇 번은 읽어야 좋고 인상깊었던 문구가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생각'이 적힌 글은 내가 한 생각이 아니므로 더 잊혀지기 쉬운데, 지금은 이런 마음이 든다. 다른 이의 생각을 발판삼아 나만의 사고를 정립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라고. 

한 번에 읽어내려가기에는 참 아쉬운 책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모든 것을 대표하는 표지인만큼, <삶.에.지.친.현.대.인.들>이 힘겨울 때 조금씩 읽어가면서 잠시나마 위로를 얻었으면 한다.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반성도 하고, 내 생활을 되돌아도 보고, 그리고 위로받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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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로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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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아리아나 프랭클린의 전작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워낙 미국드라마 CSI에 열광하던 나였고, 그 때문에 법의학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중세의 여검시관이 주인공이라는 책의 소개글을 읽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스토리라인도 탄탄했고 등장인물들이 모두 매력적이라 이제나저제나 다음 편이 나오기를 고대했었는데, 드디어 우리의 아델리아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고전적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이야기이니만큼,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표지로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고 보인다. [죽음의 미로] 에서 독살당한 여인의 이야기에 더 잘 귀기울일 수 있을테니. 

그 동안 아델리아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만 노리는 연쇄살인범을 붙잡기 위해 시칠리아에서 온 아델리아는 사건 종결 후에도 헨리왕의 압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줄곧 잉글랜드에 남아있다. 사랑하는 연인 로울리가 청혼을 했지만  평범한 여인의 삶이 아니라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 로울리는 주교로, 아델리아는 여전히 의사로 늪지대에서 질사, 만수르와 함께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전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앨리라는 딸이 하나 있다!  그렇게 평온하고 따뜻한 나날을 보내던 아델리아는 헨리왕의 정부 페어 로저먼드가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범인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왕의 아내 엘레오노르 왕비. 고울리는 그들이 평범한 남녀가 아니라 왕과 왕비라는 점에서 내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아델리아는 하나씩 하나씩 단서를 발견하면서 위험하고도 아찔한 모험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에 흠뻑 빠졌던 독자라면 [죽음의 미로] 도 덥석 집어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죽음의 미로] 는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에 비해 약간 심심한 맛이 난다. 물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살인사건은 두 건이나 일어나고, 그 외에도 많은 생명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만 극적 긴장감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에 비해 살짝 떨어진다. 사건의 진행을 묘사하는 부분보다는 아델리아가 아기를 낳은 한 어머니로서 느끼는 불안감, 상황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범인 밝히기는 어쩐지 한 발 뒤로 물러난 듯한 기분이 든다. 

시칠리아에서 양부모님에 의해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아델리아에게 잉글랜드에서 여성으로서 당하는 취급은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 주교가 된 로울리를 따라왔다는 것만으로도 창녀 대접을 받고, 아라비아어를 할 줄 알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마녀 취급을 받는다. 페어 로저먼드와는 별개로 일어나는 또 다른 살인사건의 주인공인 엠마를 통해서도 중세의 여성의 삶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에서는 살인사건을 주축으로 하여 시대배경을 설명하고 아델리아의 여성으로서의 고뇌의 기초가 세워졌다면, [죽음의 미로] 에서는 한 명의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 잉글랜드에서 살아가는 아델리아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런 인간적인 면에 더 동질감을 느끼면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로울리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흠흠;;) 연인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3부작의 마지막인 다음 작품에서는 꼭!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죽음의 미로] 에서 사건과 연관된 사람이 한 명 더, 다음 편에서도 등장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역사 추리소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 아델리아 시리즈,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그리고 즐겁게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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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미술의 비밀 -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해부학 연구
마르셀로 G.지 올리베이라 외 지음, 유영석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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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비밀'. 이 두 단어만으로 책에 손이 가기에 충분했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 그렇지만 자꾸만 관심이 가고 알고 싶어지는 분야가 바로 미술이다. 워낙 미술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 굉장함과 부러움을 느끼고는 했다. 나에게는 그저 손 하나 데생하는 것도 힘겨웠는데, 유명 화가들은 어떻게 갖가지 색을 내고, 입체감을 나타내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명화들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미술,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속에서 호기심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그런데 그림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했던 화가들도 그림 속에 숨겨놓고 싶은 비밀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이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는 다른 화가들에 대한 독설과 뛰어난 조각 솜씨로 유명했고 회화에도 재능이 있어, 교황으로부터 끊임없이 작업에 대한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사망한 후, 그가 썼다고 하는 시까지 발표되었다고 하니 그의 심장은 오직 예술을 향해서만 뛰고 있었던 듯 하다. 그런 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이름까지는 모르더라도, 다만 그런 것이 있다더라 정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그저 책 속에 있는 도판만 보고도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저자는 그런 천장화 속에 숨겨진 하나의 비밀을 발견한다. 

저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속에는 인체의 신비가 담겨져 있다. 예를 들어 <아담의 탄생>에서 튜닉을 입고 있는 신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케루빔들은 인간 두개골의 시상 단면 해부도의 구조와 일치하며, <이브의 탄생>에 그려진 조물주의 망토가 측면에서 본 왼쪽 폐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창세기, 구약의 장면들, 예언자와 무녀들, 그리스도의 조상들로 나누어 각각의 그림에 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인체와 관련지어 그림을 보는 포인트를 일러주고 있다. 

처음에는 '오, 이렇게 그림을 볼 수도 있구나. 인체에 관심이 많고 해부학에 능통했다던 미켈란젤로라면 정말 이런 의도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겠구나' 라며 제법 감탄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워낙 많은 천장화들을 인체와 비교하여 설명하려니 약간 무리가 따르지 않았나 싶다. 포인트로 일러주는 부분에서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많았지만, 저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그림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그저 그림으로 만족하면서,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고 감탄하면서 봤어야 할 그림들을 숨겨진 비밀에 집착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한 번 보고 지나쳤을 그림들에서 이렇게 인체와 닮은 부분을 발견한 그들의 눈썰미가 부럽기도 하다.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볼 줄 아는 재주, 그것 또한 하나의 예술에 포함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다룬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마지막 장에서 다룬 <피에타>에서는 몹시 감동해버렸다. 옷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조각한 미켈란젤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와 같은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이렇게 훌륭한 조각상을 보고 감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그것마저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오랜만에 눈과 마음,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좋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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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미국의 역사
아루카 나츠키.유이 다이자부로 지음, 양영철 옮김 / 삼양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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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가 한 달째 계속되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의 생활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먹거리에 대한 걱정이 우리 삶을 온통 뒤흔들고,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폭력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정부의 태도는 미적지근한 것만 같다. 6월 6일 현충일, 이명박 대통령은 '낮은 자세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겠다'고 인삿말을 전했다. 이제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이니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도대체  갈등의 끝이 어디일지 불안하기만 하다. 지금의 이 갈등과 혼란, 두려움의 소용돌이의 정점에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는 '미국'이 우뚝 서 있다.
 
미국.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경제, 문화, 예술 등 온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이라 불리는 나라. 사실 우리나라 역사도 제대로 전부 알지 못하는데 어째서 '상식으로 꼭' 미국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인지 살짝 저항감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사람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우리보다 짧다면 짧은 역사를 가진 그들이 어떻게 세계최강국이 되었는지, 그 비결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것을 그들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 책을 펼쳐든 계기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저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책은 맺음말을 포함하여 총4부, 15장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앞쪽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국의 변화된 모습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으며, 황야에서 도시로, 신경제의 형성, 문화복권을 추구하며, 피부가 검은 우리들도 미국인이다, 만들어지는 성의 차이 등과 같은 각각의 테마로 미국의 역사를 풀어냈다. 그 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분야의 어려운 말들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책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다.
 
그러나 한편 이 책은 딱딱하다. 이 책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곳이 있다면 들고 가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쳐가며 읽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일본인이니만큼 그들이 바라보는 미국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했다면 그나마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과 내용들로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에 한 번 읽어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궁금한 사항들이 생길 때마다 들춰보다보면 역자가 말한대로 우리들만의 미국사라는 직물이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과 같은 상황에서 미국과 똑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대처법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에 역사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들여다 본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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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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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있고 유쾌한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오쿠다 히데오. 그 명랑과 익살 때문에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일본소설을 좋아하고, 꽤 유명한 작가들의 책은 거의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는 정작 그의 책을 손에 든 적이 없다. 많은 팬을 탄생시킨 [공중그네]를 비롯한 아라부 시리즈, GIRL 이 책장에 꽂혀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밀쳐지고 밀쳐져 자꾸만 책장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그런 와중에 '뭐, 유쾌하면 얼마나 유쾌하고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라고 생각하며 처음으로 집어든 그의 작품, [스무살 도쿄]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지하철에서 내내 책을 읽다가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말이다. 

재수생활을 위해 나고야에서 도쿄로 상경한 다무라 히사오, 그가 우리의 주인공이다. 작품은 모두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그의 10년의 세월을 그리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여자친구가 생긴 일, 재수를 하러 도쿄로 왔을 때 느꼈던 그 밤의 달콤쌉싸름한 감정들, 취직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며 맛보는 삶의 잔상들, 나이를 먹고 결혼적령기가 되어 처음으로 선 아닌 선을 보러 나가 만난 그녀, 그리고 서른을 코앞에 두고 일어나는 히사오의 일상들이 마치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인것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사실 작품 초반에 그려지는 히사오의 모습은 살짝 한심하다. 아무런 꿈도 없고,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그저 술을 마시고 하루하루를 가볍게 보내버린다. 막연히 '음악평론가'의 길을 꿈꾸지만, 그저 꿈만 꿀 뿐이다. 히사오의 그런 일상을 약간은 질책하며 책을 읽던 나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고, 또 부끄러웠다. 내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어땠는가를 돌이켜보았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 안에서 나 역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많이 방황하고, 남에게 티를 안냈을 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다. 나도 그런 길을 걸어왔으면서, 어느 새 나는 나만의 기준으로 그의 청춘을, 그의 젊음을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다는 건 특권이야. 너는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특권을 가졌어'라는 표지에 새겨진 문구의 진정한 의미를 어쩐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히사오도 버젓이 직장을 구하고, 의젓한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낸다. 서른을 코앞에 두고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미래를 바라본다. 지하철 안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할만큼 지나치게 유쾌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오쿠다 히데오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유쾌함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속은 알싸하면서도 땀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런 면이 오쿠다 히데오에게 열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지하철 안에서 터져버린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킥킥거리며 내렸을 때, 불안했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의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아라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책장에 꽂힌 채 고개를 쑤욱 내밀고 있을 오쿠다 히데오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조금은 기대에 찬 마음으로 만나러 가야겠다. 

덧붙이기 : 이야기들이 시간 순서이기는 하지만,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편집상의 오류인 걸까?..아니면.. 작가의 의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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