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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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그마치 2박3일이나 되는 여정이 드디어 끝이 났다. 책 한 권에 2박3일, 그것도 그 시간을 모두 바쳐 읽은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다. 장장 774페이지에 이르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지만, 읽으면서 한 순간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책장이 얼마 되지 않을수록 도대체 사건이 어떻게 풀려갈 것인가에 대해 신경이 곤두섰다. <코난 도일과 찰스 디킨스가 극찬한 서양문학사 최구의 추리소설!>이라는 선전문구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는 이 작품, 표지부터 유독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흰 옷을 입은 여인] 이다. 

19세기 영국, 화가인 월터 하트라이트는 친구의 소개로 리머리지 가(家)에서 그림을 가르치게 된다. 런던을 떠난기 전날 밤, 거리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알 수 없는 말들을 남긴 채 사라진다. 한편 리머리지 가에서 로라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월터는 그녀의 언니 마리안 할콤과 셋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로라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마리안은 로라의 월터가 떠나는 것이 로라의 행복을 위해 최선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떠나주기를 부탁한다. 사랑의 아픔을 뒤로 한 채 결국 영국을 떠나는 월터. 로라는 약혼자와 결혼하지만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그 시간 속에서 마리안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월터가 만났던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자꾸 로라의 곁을 맴돈다. 

작품은 기존의(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추리소설이 진행해가는 방식과는 달리 꽤 복잡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나뉘어진 세 부분도 각기 다른 사람의 시각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때로는 월터가, 때로는 마리안이, 그리고 작품에서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내용이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마지막의 사건 해결에 모두 중요한 힌트들을 제공하고, 이 작품을 통해 생명을 부여받은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책이 아니라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추리와 사건 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는 하나, 작가가 그리는 당대의 묘사는 감탄할만하다. 19세기 영국의 계급제도, 상속제도, 결혼제도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타임스가 극찬한 것처럼 서스펜스, 공포, 사랑, 미스터리, 탐욕, 광기, 용기 등의 모든 감정들을 맛볼 수 있는 축제의 장을 선사했다. 세심한 인물묘사, 풍경묘사, 심리묘사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악당들에게 숨겨진 음모가 무엇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를 하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흰 옷을 입은 여인에 의해 조성되는 음울하면서도 안타까운 분위기를 느끼고, 과연 어떠한 세계로 우리들을 이끌어줄 것인가를 기대하고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100년이 넘어도 변하지 않는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이 작품, 오늘 밤 꼭 만나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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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마다가스카르 - 스물넷의 달콤한 여행 스캔들
Jin 지음 / 시공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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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이 여행을 해 보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떠나기 전에 걱정되는 것들이 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좋지만 혹시..부터 시작해서 여행지의 음식은 괜찮을지, 가서 정말 즐거울지, 어디 아프지는 않을지, 무엇보다 위생상태는 괜찮을지 하는 것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족과의 여행이어도 나의 고민은 계속된다. 약간의 결벽증까지 느껴지는 내 성격, 내가 생각해도 정말 답답하고 참으로 못나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내 첫마디는 이랬다. "헉, 아프리카에 어떻게 가, 화장실은? "

24세의 나는 졸업과 동시에 합격을 노리며 빡빡한 일상에 갇혀 살고 있었다. 봄이고 가을이고, 계절의 낭만을 느껴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똑같은 24세의 봄, 마다가스카르를 향해 Jin은 떠났다. 취업을 걱정하고, 취업 이후 계속될 삶에 대해 고민했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 오지여행을 주로 하는 한비야님의 여행기를 떠올리며 그녀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궁금했다. 

여행서적과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책을 탐독하고 스스로 일정을 짜고,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면서 여행을 향한 한걸음이 시작되었다. 매일 달리기로 체력을 키우고, 인터넷의 여행자 카페에서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줄만한 사람의 정보를 얻으며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던 즈음, 드디어 한국을 떠난 Jin. 마다가스카르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P의 집을 기점으로 디에고, 피아나란추아, 포르트돌팡, 마하장가, 마나카라, 수도 안타나나리보까지 여러 곳을 여행한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과의 교감과 다양한 풍경이 그녀의 정신을 풍요롭게 변화시켰다. 딱시부르스를 타고 덜커덩거리며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고, 길을 물은 사람과 친해지며, 용감하게 홀로 간 나이트클럽에서 친구도 사귄다. 프랑수아, 카엘, 한국인 P와 그녀의 천사 렁드리까지. Jin이 이동하면 할수록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Jin은 소심한 나와는 달리 용감하다. 홀로 여행을 시작했고, 그 여행지는 누구나 다 아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위생상태, 치안, 모든 것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에게는 이국적이나 생소한 곳이었다. 부댓자루에서 튀어나온 못처럼 쭈뼛거리는 자신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전혀 쭈뼛거리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쉽게 말을 걸고, 돈을 달라는 사람들을 만나도 여유롭게 넘기면서 자유로운 삶을 즐긴다. 하지만 그녀는 또 말한다. 한국에서의 자신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고. 여행지였으니까, 마다가스카르였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이다.

나도 여행을 떠나면 지금의 내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한 번에 많이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빈껍데기 같은 황량한 마음과 아픈 가슴을 조금은 비워낼 수 있을까. 문득 정말, 진심으로, 간절하게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일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본다. 어쩐지, 이 책이 자꾸 나의 등을 떠미는 것 같다. Jin처럼 아프리카까지는 아니지만 올해가 가기 전, 겨울이 되기 전, 나도 떠나련다. 아니,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기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가 될지도 모르겠다. 

24세의 그녀의 눈으로 본 마다가스카르는 젊은 그녀의 감각 탓인지도 모르지만 유쾌하고 통통 튀고 따뜻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인생을 보는 깊은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유쾌하고 통통 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녀의 글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사진과 정성스런 Jin의 글 안에서, 나는 조금이나마 내 마음의 자물쇠를 풀어놓고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덧붙이기 : Jin, 렁드리와는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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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지음, 김석희 옮김 / 쿠오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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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 중 '여성학'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나는 전공 수업에 부전공 수업까지 있어 교양과목 이수를 많이 못했지만, 어느 날 그 수업을 들은 친구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쉬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여성용품을 숨겨 가지고 가는 모습을 교수님이 보셨어. 쉬는 시간이 끝나고 교수님이 그러시는 거야. 왜 그걸 그렇게 숨겨서 가느냐고. 월경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이런 것이 페미니즘이란 건가'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즘.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을 일컫는 말.  페미니즘을 생각할 때마다 종종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했는데,  웹진 <페미니스타>에서 선정한 '20세기 여성작가 소설 100선'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이 작품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사뭇 궁금했다. 

커다란 키에 둥글둥글한 몸매, 매부리코와 튀어나온 턱, 움푹 들어간 눈을 가진 거대한,  표지의 왼쪽 여자는 우리의 주인공 루스다. 회계사로 성공한 남편 보보는 자신의 고객이 된 로맨스 작가 메리 피셔와 사랑에 빠지고 끝내는 루스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 동안 착하게 살아오려 했던 루스는 악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복수를 위해 자신의 외모를 하나씩 하나씩 바꾸면서 보보와 메리 피셔를 궁지로 몬다. 회계장부를 몰래 조작하고, 요양원에 가 있던 메리 피셔의 어머니를 손을 써서 집으로 돌려보내버리고, 나중에는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해낸다. 

요즘 TV드라마에서 자주 다루고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불륜'이다. 남편은 바람을 피워  내연녀와 결혼하겠다며 큰소리 탕탕 치며 집을 나가 버리고 남겨진 조강지처는 괴로워한다. 하지만 버려진 그녀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반면, 사랑을 부르짖으며 떠난 남편은 결국 후회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에덴의 악녀]를 그런 드라마와 동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꾸미기만 하면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지만, 루스는 아무리 꾸며도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루스가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혀 통쾌함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안타깝고 쓸쓸한 느낌이 짙다.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악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의 마음이 아프도록 전해졌기 때문일까. 

외모지상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에서 과연 페미니즘적 성격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루스의 모습이 현재 겉모습에만 끌려 인스턴트식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꾸짖는 듯 하다.  외모, 아름다움. 물론 중요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남자들은 루스가 변화를 꾀하지 않아도 그녀의 현명한 조언과 따뜻한 품성에 이끌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루스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단 한 명의 남자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구는 그것이 바로 그녀의 비극이었음을 시사한다. 

하느님이 주신 몸을 스스로 개조하여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루스는 스스로를 악녀라 지칭했다. 악녀는, 되어도 좋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악녀이어야 한다. 시덥잖은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간과하고 진행하는 악녀로의 변신은 하나마나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적 요소도 드러내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한다. 사랑, 아름다운 말이지만 남을 아프게 하면서 진행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 마음에 못 박으면 자기 눈에서 피눈물난다는 이론을 나는 믿는다. 우정 뿐만 아니라 사랑도 의리다. 그런 점에서 루스의 남편 보보는 정말 실격이다. 메리와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루스에게 보고하면서 성적 만족을 얻지 않나, 그래도 자기 아내인데 마음 아프게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당당하다. 그것은 그의 내연녀 메리도 마찬가지다. 루스의 복수가 으스스하기도 했지만, 그 복수에 시원함을 느꼈던 것은 너무 과도한 감정이입 탓인지도 모르겠다. 

심각한 사회문제를 통속적인 스토리로 추구하여 문학성과 오락성을 함께 갖춘 품격 있는 소설을 이루어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1986년 영국 BBC의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작품,  여성의 삶과 사회적 인식, 그리고 인간 삶의 중요한 가치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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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
이민진 지음, 이옥용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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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리뷰를 올리기 위해 책검색 창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저자의 이름은 우리나라 이름인데 책은 외국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작가인 이민진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작품이 '국내'소설이 아닌 '국외'소설로 분류되는 것에 공연히 심술이 난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주인공 케이시 한이 어쩐지 그녀의 모습일 것 같아서, 미국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을 그녀를 모국인 우리가 저리 내치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안좋다. 하기야 영어로 쓰인 것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어렸을 때 나는 이민을 간다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그리 많은 수의 친구들이 이민을 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초등학교 때 한 두명은 이민을 갔던 것 같다. 그 때는 어려서 아메리칸 드림이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새로운 세상, 넓은 세상과 만나게 될 그들에게 마냥 질투가 났더랬다. 아메리칸 드림. 한국에서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도 꿈을 품고 미국으로 향한다. 우리보다 훨씬 잘 산다고 하는 선진국에 가면 지금보다 나은 인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까. 정말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더 부자가 되고, 더 행복한 삶을 누렸을까.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은 한국계 미국인이 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세 여인이다. 한국전쟁을 겪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세탁소를 하며 힘들게 살아온 전형적인 한국여자 리아, 모든 것에 자유롭고 개방적인 그녀의 딸 케이시 한, 그리고 한없이 여리고 착한 케이시의 친구 엘라 심.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문화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리아와 그녀의 남편 조셉과는 달리, 딸 케이시는 영리하며 성(性)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개방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장학금을 통해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온 케이시는 자신의 소비욕구를 온전히 만족시켜 줄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고, 남자친구의 배신과  생활고 속에서 방황한다. 한편 케이시의 친구 엘라 심은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로 테드 김이라는 한국남자와 결혼하지만, 결국 그의 외도로 파경을 맞는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케이시는 남자들과의 관계, 임신, 낙태에 있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야 고민하고 괴로워하지만, 결코 그것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번번히 보수적인 아버지와 부딪힌다. 아버지 조셉과 케이시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으며 그 옆에서 어머니 리아는 항상 남편의 눈치를 살필 뿐이다. 어쩌면 많은 이민 가정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더 잘 살아보겠다고 도착한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기술이 미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 부모는 항상 바쁘고, 아이는 외로운 가운데 또래 친구들과 사귀면서 점점 미국의 사고방식에 물들어간다. 부모자식 사이에 깊은 골이 생기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 것 같다. 작품 속에서 케이시 한은 결국 미국의 상류사회로의 진출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미국인 남자친구와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사고방식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영어를 쓰고,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에 생활터전이 있다. 그러나 완전한 미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자유롭고 싶은 케이시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그 사랑이 깨져버린 엘라도 결국에는 어디서나 혼자다. 

작년에 조승희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민자의 삶을 그린다는 이 책의 홍보문구에 마음이 동했었다. 하지만 이민자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기보다 사랑을 중심에 놓고 전개해나가는 이야기의 구조는 여느 한국소설과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작가는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이 있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사랑에 아파하고, 가족과 갈등하며,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부분을 홀로 끌어안고 괴로워하지만 결국에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백만장자의 공짜음식은 케이시가 컨 데이비스에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음식을 먹으면서 나온 이야기다. 백만장자들일수록 공짜를 더 좋아한다는<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 . 인생은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그렇게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공짜음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에 희망을 그리는 케이시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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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유령
폴 크리스토퍼 지음, 하현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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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출간된 [다빈치 코드] 를 필두로,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중 요즘들어 심심찮게 들려 오는 사람이 바로 '렘브란트'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초상화가로 유명한 그는 '빛과 어둠의 화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림에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지만, 문학과 예술을 접목시킨 책들을 만나면 새로운 관점에서 그림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아 항상 반갑다.  이 작품 또한 렘브란트의 그림 하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다.

 

미술사학을 전공하여 미술작품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핀 라이언. 그녀는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현재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고객자문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만 번드르르하지, 하는 일이라곤 차와 과자를 나르거나 경매가 있는 날 밤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고객들의 입찰가와 주머니 사정을 알아내는 일이 전부다. 슬슬 그 일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얀 스텐의 그림이라며 미술품을 감정하러 온 멋진 공작 필그림과 만난다. 핀은 그를 통해 얼마 전 실종된 피터르 부하르트가 자신의 먼 친척이고, 그로부터 필그림과 공동으로 유산을 상속받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렘브란트의 그림 한 점과 암스테르담의 대저택, 낡은 배 한 척이 그것인데, 유산들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보름 안에 세 가지 유산을 모두 찾아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있다.  

 

이야기의 전개는 복잡하지 않고 재미있다.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넘나들고, 요트가 폭파되거나,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영화와 같다. 여기저기 드러나있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도 부족한 감은 좀 있지만, 재미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어째서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항상 모험과 음모라는 전개방식을 따라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화가가 어째서 그 그림을 그렸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여 나온 발상일 수도 있으나, 거의 비슷한 전개방식을 보이고 있는 책들을 몇 권 읽었더니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가 보고싶어진다. 또한 중간중간에 여러 언어가 등장하는데, 그 옆에 해석이 달려 있으면 좋을 듯 싶다. 다양한 언어의 등장은 생생함을 느끼게는 해주지만, 어떤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금방 다른 쪽으로 생각이 빠져버릴 수도 있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매번 그렇듯 주인공들은 위기 상황에서 잘도 살아남는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서로의 매력에 끌리고 있는 듯도 하고, 몇 명씩 죽는 사람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또한 그들은 마침내 보물까지 발견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하지만 또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이야기들은 항상 우리를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들이 찾아낸 보물이 무엇일지, 어째서 작품에 '렘브란트의 유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지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렸을 때 보물섬을 찾아 헤매는 꿈을 한 번이라도 꿨거나, 그림과 문학의 즐거움을 한 번에 맛보고 싶다면 한 번쯤 펼쳐들어도 좋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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