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 알마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의사는 꿈많은 어린 아이들이 한 번쯤은 그려봤을 희망의 직업이다. 아파서 정신도 못차리고 자신의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와서 돌봐주면 큰 병이 아닌 이상 얼마 안 가 훌훌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힘들기는 하지만 때때로 큰 병을 고쳐주기도 한다. '생명'을 구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하얀 가운과 너무 잘 어울려서 나는 어렸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을 천사라고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의사라는 직업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물론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고 어려운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어쩌면 순전히 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욕을 가장 많이 먹는 직업 중 하나가 됐다.  불친절한 의사와 간호사, 막대한 병원비, 찾아가면 기분이 어떤지,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검사부터 하라고 내모는 병원.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얻어오는 것은 나을 수 있다는 희망 (물론 감기나 증세가 심각하지 않은 병은 제외하고) 이 아니라 자신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는 병원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되어버렸다. 

이 책은 비록 우리나라의 의료계는 아니지만, 어떤 나라에 가든 엿볼 수 있는 병원의 모습을 낱낱이 파헤치고 고한다. 환자의 컴플렉스를 함부로 발설하고, 환자가 자신의 의견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위급한 사람을 그냥 두고 떠나버리며, 환자를 위해 존재해야 할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제 그들을 귀찮아한다. 심지어 사보험과 공보험을 구분해서 치료받을 수 있는 서열을 정하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를 다용도실에 방치하며, 환자를 불안하게 하는 말들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과연 그들이 의사인가. 사람을 살리겠다고,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의료과실로 인해 멀쩡한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내놓고도 사죄의 한 마디는 못할망정, 나는 책임이 없다고, 환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 둘러대며 목숨과 맞바꿀 수 없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쥐어주며 적당한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예전 그런 기사를 보면서 나는 만약 우리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렇게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더러운 수법으로 일을 덮어버리려는  비열한 의사를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절대로 복수하겠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적이 있다.  의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수술을 잘 하느냐, 몇 분만에 어떤 수술을 끝냈느냐가 아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순수와 깨끗함, 고결함을 상징하는 그 하얀 가운을 입을 자격이 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병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도 좋지만, 그보다는 많은 의사, 간호사들이 읽어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쁜 의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사다운 의사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부디 이 책을 계기로 의료사고로 인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거나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환자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연민. 제목부터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그 위에 부제처럼 적힌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라는 문구가 없었다면 그렇게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동정심,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추운 겨울 지하철역 입구 계단에 손을 벌리고 앉아있는 아기엄마나, 커다란 가방을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비틀비틀 걷고 있는 노인분들을 볼 때 내 마음이 꼭 그랬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그 모든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yes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감정이 향하고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그 사람의 온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민이냐 사랑이냐의 차이는 그것이 아닐까. 

허울 뿐이고 자기만족적인 감정은 결국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입힌다. 이 작품의 주인공 호프밀러의 불행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군인이었던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용감하다고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은 '나' 가 그의 이야기를 옮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호프밀러는 새 주둔지에서 우연히 케케스팔바라는 귀족을 알게 되었다. 케케스팔바에게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딸, 에디트가 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파티에서 에디트에게 춤을 청한 호프밀러는 사죄하기 위해 꽃을 들고 찾아간 것을 계기로 매일 오후 시간을 그녀와 그녀의 사촌 일로나와 함께 보내게 된다. 오직 연민이라는 감정 하나로 저택을 방문하는 그에게 에디트는 사랑을 느끼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매달리지만, 호프밀러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게다가 케케스팔바마저 딸 곁에 머물러주기를 간청하는 상황 속에서 호프밀러는 명예와 희생, 그리고 연민이라는 복잡한 감정 안에서 괴로워한다. 결국 망설이고 에디트의 사랑을 모욕한 그 앞에 떨어진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전부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도움을 준 이는 나에게 대부분 고마워했고, 나도 도움을 줌으로써  '누군가에게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섣부른 동정과 위로는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에디트에게 있어 호프밀러가 그랬다. 그녀는 사랑이란 감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주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상대는 오직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호프밀러가 애초부터 책임지지 못할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에 취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케케스팔바 노인을 웃게 만들 수 있고, 자신의 방문이 한 소녀에게 기다림과 설레임을 가져다 준다는 그 사실에 그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도움을 베풀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것인가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프밀러의 경우처럼 어설프게 베풀었던 친절이 화살이 되어  '무거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프밀러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모두 어쩌면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지만 정작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일테니까.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렇게 어렵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해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준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갈수록 그 죄가 잊혀질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양심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지막 부분은 정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해부당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 어땠나, 내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느 순간에는 호프밀러가 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에디트가 되어 책을 손에 쥔 순간부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았다. 향할 수가 없었다. 추리소설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분위기와,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면서 숨가쁘게 읽어내려간 [연민].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 오래도록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보면, 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걸까를 생각하며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책이라면 그냥 탁 덮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책은 그러기도 쉽지 않다.  소리가 잘 안 들려서 답답하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흑백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모스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살인현장에서 물을 달라는 생존자의 말을 뿌리치고, 그 곳에 있던 거액의 돈가방을 들고 자리를 피한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모스가 하룻밤이 지나 물을 가지고 살인현장을 다시 찾지만 이미 생존자는 목숨을 잃은 뒤다. 돈가방을 노리고 살인자가 자신을 뒤쫓고 있음을 느낀 그는 아내에게도 몸을 피하게 한 뒤 이 곳 저 곳으로 피신하지만 살인자의 그물망을 피할 방법은 없다. 다른 한편에는 경찰을 죽이고 도주한 살인자 시거를 쫓는 보안관 벨이 있다. 모스가 살인자에게 쫓기고 있음을 안 벨은 어떻게든 모스를 도와주고 싶어하지만 잔혹한 시거를 멈출 방법이 과연 그에게 있을까. 

거의 모든 스릴러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킬러에게 쫓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조금 색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을 달라는 생존자의 말을 못들은 척 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돈가방을 훌쩍 들고 떠나버린 모스는 결코 선인이라 불릴 수 없다. 오히려 비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며 킬러인 시거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잔혹하다.  모스가 시거에게 쫓기게 된 불행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경찰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분위기는 더욱 숨가쁘다. 난무하는 총싸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두지 않는 시거의 냉혹함 앞에서 과연 모스가 위기를 뚫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 긴장감이 실이 끊기듯 툭 풀려버리는 순간이 있다.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문체가 진행되다가 벨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부분이다. 한 쪽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숨이 가쁜데 벨은 테이프가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느릿느릿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을 털어놓기도 한다. 벨의 존재는 이 작품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벨과 시거를 선인과 악인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계속 괴로워하는 벨은 전세대(혹은 노인), 양심의 가책도 죄책감도 없이 동전으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거는 현재의 세대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이제 학생들이 숙제를 안 해오거나 복도에서 뛰는 것 같은 소소한 일이 아니라 약물중독, 살인, 강간, 낙태 등의 끔찍하고 비인륜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작품이 나타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인간적이고 양심적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시거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은 더 이상 벨이 존재하고 싶어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이미 세상에 그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대화를 나타내는 따옴표도 하나 없이 줄줄  문장이 나열된 책은 참 읽기가 힘들었다. 보통 책들과는 달리 내면묘사가 적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황폐함과 몰인정성을 그리기에 훌륭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황량한 분위기를 잘 살렸는지 궁금해진다. 언젠가 조용히 이 흑백 무성영화같은 책을 다시 펼치고 진정한 '노인을 위한 나라'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부터의 내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름들의 기원'이었다. 책상은 왜 책상이고, 의자는 어째서 의자이며, 하늘은 무슨 이유로 하늘로 이름 붙여진 것인지,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고  지금도 도저히 풀 수 없는 신비라고 생각한다. 각 사회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자의성'으로 설명된다. 자의성이란 강아지를 우리는 강아지로 부르고 영어에서는 Dog, 일본어로는 いぬ(이누) 라고 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즉 뜻과 기호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명사 뿐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부르고 불리는 이름 또한 그러하다. '이름'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이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주인공 주제씨는 중앙 호적 등기 보관소에서 일하는 사무보조원이다. 52세를 앞두고 있는 그는 낮에는 등기 보관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등기 보관소 옆에 붙어있는 작은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데, 남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취미를 하나 가지고 있다. 유명 연예인들의 기사들을 스크랩하는 일이 그것인데, 어느 날 주제씨는 추기경의 기사를 스크랩하다가 그가 세례받은 성당, 대부 등의 기록이 알고 싶어 한밤중에 등기 보관소에 잠입한다. 그 과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한 여인의 기록을 같이 가져오게 된 주제씨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가거나 그녀의 대모를 만나기도 하고, 한밤중에 그녀가 다닌 학교에 몰래 들어가 기록을 빼내오기도 했다. 비를 맞고 독감에 걸리고 사람들의 미심쩍은 눈초리를 견뎌내면서 주제씨는 힘들게 힘들게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그녀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다는 것을 알아내고야 만다. 

'그녀'의 행적을 찾아가는 길이 주제씨에게 왜 그리 중요했던 것일까. 사실 주제씨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작품 안에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녀 뿐만 아니라 주제씨의 주위 사람들인 등기 보관소 소장, 조사를 하다 만난 1층에 사는 노부인, 세탁소 주인, 직원들의 이름은 한글자도 나오지 않고, 심지어 주제씨까지 그의 풀네임이 아닌 그저 '주제씨'라고만 명기되어 있다.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 발견(!) 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름은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제일 처음 하는 일이 명함을 교환하는 것이고, 자기 소개를 할 때 먼저 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일이다. '이름'이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고, 그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무게감있게 다가가는 일종의 도구로 사용된다.  하지만 도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이 시가 계속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가 나에게 와서 꽃이 된 것'처럼, 이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관심과 애정의 표현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은 것은, 그들 사이가 그만큼 삭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때가 되면 출근하고, 밥을 먹고, 몇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회색빛 도시를 연상시킨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이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혹은 '관심이 없다'라고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알지 못하는 여인의 행적을 조사하는 주제씨의 좌충우돌 조사기록 과정은, 자신의 고독을 나타내는 몸부림, 혹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어지지 않는 노력처럼 보여 안타깝다. 

사실 책의 내용을 100%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직도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게다가 긴 문장과 쉴새없이 이어지는 쉼표들의 나열은 그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나를 충분히 당황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라는 글자가 마음과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간이 지나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그리하여 내 존재를 기억해 줄 이가 이 도시에 한 명이라도 있을 것인지 문득 두려운 기분이 엄습한다.



이 사람아,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웠듯이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배워야 해.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암스테르담]으로 발을 내딛었고, [속죄]를 통해 푹 빠져버린 작가 이언 매큐언은, 책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다. 작가 본인은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툭툭 던져놓는 화제들이 사실은 우리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가슴 절절함을 느끼게 만드는지 그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이게 뭐야'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그의 세계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느낌을,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번번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서머싯 몸'상을 수상했다는 이 작품집은 나뿐만 아니라 그의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편안하지 않다. 편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쾌하고 끈적끈적하고 읽고 난 순간 내 몸 어디 한 군데가 아파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첫사랑이라는 단어와 표지의 여성 때문에 아련하고 몽실몽실한 사랑의 느낌을 생각했다면 기대와 크게 어긋날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영상 뿐 아니라 글자에서도 자극에 약한데,  글자를 따라가며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을 상상하다 보면 꼭 울렁증이 느껴진다. 그렇게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그는 일본작가 '기리노 나쓰오'다. 이번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기리노 나쓰오' 정도는 아니었지만, 읽고 있다보면 어쩐지 어둠에 내 몸이 잠식당하는 기분이 들어 참 힘들었다.는 것은 밝혀둔다. 

8편의 이야기는 작가의 개성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냉소적이고, 저 위에 우리들 머리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놀라고 불쾌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낄낄대고 있을 듯한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이 이리도 쉽게 상상되면서도 멀리 피해가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러한 분위기는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희소성을 중시하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증조부의 일기를 바탕으로 존재를 사라지게 만든다는 입체기하학, 근친상간을 그리고 있는 가정처방, 어느 여름날의 사고를 평화로운 수채화처럼 그린 여름의 마지막 날, 단어를 사용한 유희 극장의 코커씨, 살인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묘사한 나비, 벽장 속에서 살게 된 남자의 생의 발자취를 그린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청소년들의 사랑이야기지만 어쩐지 쓸쓸함과 고독감이 느껴지는 첫사랑 마지막 의식, 그리고 가장무도회까지 읽고나면 몸서리쳐지는 이야기들로 가득찬 이 작품집은, 그러나 결국에는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완성되지 않은 인격체들이 겪는 혼란스러움이 때로는 경악으로, 때로는 잔잔하게 다가오면서 감정의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넘나드게 만드는 그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집이 발간되었을 때 영국의 '옵서버'지는 구식 안경을 걸친 이언 매큐언의 지적인 용모를 빗대 '학교 선생처럼 생긴 사람이 글은 악마처럼 쓴다'라는 글을 실었다고 한다. '악마적인 글쓰기'. 그에게 이렇게 어울리는 수식어가 또 있을까. 악마처럼 우리를 자신의 글세계로 끌어들이고, 우리의 경악과 당황스러움에 그 어떤 대답 없이 침묵하는 이언 매큐언. 그래, 한 번 빠져든 이상 내 당신의 작품은 피하지 않고 읽어드리겠소~!!  그가 다음에는 어떤 주제로 나를 끌어들여 놀라게 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