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부츠
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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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정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다리를 구부린 채 앉아 있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지만, 어딘가 외로워보이는 그 모습에 흥미가 일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린 것일까. 그 모습이 마치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차마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사와무라 린, 아직은 생소한 이 작가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은 여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단편집을 장편소설보다 우위로 평가하는데, 이유는 짧은 분량 속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편집을 내는 작가야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작가 중에 나에게 감동과 '이거 진짜 물건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해 준 작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이 책 한 권이 읽는 내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맥이 꾼 꿈>은 3인칭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불륜 관계인 사오리와 미치오는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각각 자신이 죽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미치오가 자살을 택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가운데 사오리가 찾아와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면서 결국 둘은 아이를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났다면 많고 많은 단편들 중 그저 그런 작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1인칭으로 끝나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주머니 속의 캥거루>에서는 쌍둥이 동생 아코의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하는 다카모리의 이야기가 코믹하게 그려지고,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매리지 블루. 마린 그레이>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해 으스스한 분위기와 섬뜩함을 느끼게 해 준다. <무언의 전화 저편>은 우리가 한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대중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을 그려내지만,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기분 좋게 끝이 난다. 

여섯 개의 단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유사시>였다. 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러 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강박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는 주인공은 그 강박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허구의 친구 '루나'와 시뮬레이션을 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아이가 베란다에서 떨어졌을 때 등등의 상황을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이를 구하는 연습을 한 주인공은 조금씩 신경증에서 놓여나기 시작한다. 어느 날 남편과 간 백화점에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나고, 그 때가 유사시임을 깨달은 주인공은 시뮬레이션으로 연습한 상황을 응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유사시>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주인공의 풍경이 마지막에는 따뜻하게 변화하기 때문이었다. 주로 강박신경증은 완벽주의자에게서 나타나기 쉽다고 한다. 심각한 강박신경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스스로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시뮬레이션으로 극복하려 하는 모습이 뭐랄까..헌신적으로 보였다고 할까. 그만큼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또한 마지막에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나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했을 행동을 그녀는 훌륭하게 해냈고, 유사시에 멋지게 반응한 것이다. 

사와무라 린의 이 작품들은 모두 일상 속에 숨어있는 비일상을 재치있게 그리고 있다. [가타부츠]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사람, 또는 착실하고 품행이 바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품들과 어울리지 않는 제목 같지만, 일상 속의 비일상을 그린다는 면에서는 훌륭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내 삶에도 이러한 비일상이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까 내심 긴장된다. 무섭기도 하지만 코믹하게, 애절하기도 하지만 즐겁게 끝을 맺는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또 주목할만한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품들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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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말 워쇼 사진, 이진 옮김 / 이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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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진정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읽은 책에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때때로 게으름을 피우고, 짜증도 내며, 세상에 나에게 주어진 시련만큼 더 커다란 시련이 있을까를 괴로워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평범한'사람이기를 계속 거부해왔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평범한 인생이 뭐 어때서'.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이 그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 될 수도 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그 단순한 진리를,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깨닫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마지막 삶을.

맨 처음 나를 맞이한 것은 한 여인의 사진이었다. 너무나 평화롭게 턱에 팔을 괴고 저 멀리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조금은 늙어보이는 한 여인. 나는 그 여인이 저자인 줄 알았다. '아, 책을 낼 정도의 생각이 깊고, 유명한 사람은 이런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책을 펼쳤지만, 순간 화들짝. 그 사진의 주인공은 42세의 나이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베스라는 여인이었다. 낙타같은 커다랗고 순수한 눈망울을 한 이 여인은 병에 걸린 것을 안 후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를 쓰고, 아파트 근처 공원에서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즐겼다. 

다른 여인의 사진이 나타났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병상에 누워 있지만 행복하게 웃는 모습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병원에서 사회 복지사로 일하던 루이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강제로 퇴직 당하고, 이혼을 하게 되지만, 자신의 남은 삶을 위해 집에서 치료를 한다. 병원에서는 인간다운 모습으로 치료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집 거실에 침대를 놓고 창 밖을 바라보며 따뜻하고 행복하게 마지막을 맞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스와 루이스 외에 병에 걸린 사람들의 사진이 차례로 지나가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표정은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 한국드라마의 패턴이라고 여겨지는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만약 저런 병에 걸린다면 나는 남아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물론 처음에는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겠지만, 결국 병을 인정하고 주변 정리를 하면서 조용히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한 전부였다. 하지만 책 속의 사람들은 모두 '조용한' 삶을 누리고 있지 않다. 마치 -나는 아직 살아 있어, 나에게는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어-라는 것을 말하는 듯이 온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을 병원에서 홀로 맞는 것보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고 행복한 집에서 맞는 것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그녀가 단순한 에세이로서 이 책을 쓰고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콧방귀를 뀌며-흥, 당신이 정말 죽음을 알아? -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을 앞둔 사람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과 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죽음과 당당히 마주해서 그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드는 의문은 만약 우리 가족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과연 집안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려두고 싶은 마음에 결코 병원을 떠나게 할 수는 없다고 되뇌이지만, 그 사람이 내가 되었을 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죽음과 당당히 마주하고, 그들만의 세계로 행복하게 떠난 이들의 이야기는 순간순간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 죽음 없이는 우리 삶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사진 속 여인처럼 평화로운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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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 신전의 그림자
미하엘 파인코퍼 지음, 배수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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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했어요. 우리 개념의 일신교 같은 건 그 시절엔 없었으니까. 지방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건 보통이었고, 심지어는 신관들 사이에서도 분파가 아주 많아서 여러 형태의 밀교도 성행했지요. 그런 밀교 중 하나가 아포피스와 수코스 그리고 아누비스를 합해서 하나의 신 토트로 만들고, 경쟁자인 태양의 신 라(Ra)와 대결하는 위치에 놓은 거예요  -p323

토트는 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정의의 신으로, 이집트어 타후티(Djehuty)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이라 한다. 원래는 달의 신으로 달력의 계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생각되었으며, 흔히 사람의 몸과 이비스 새 (따오기 종류) 의 머리를 가진 서기관으로 표현된다.《사자의 서(書》의 오시리스 신화 속에서는 사자의 심판 때 명부의 신 오시리스 앞에서 사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그 무게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출처 : 네이버)  어렸을 때부터 이집트 신화에 관심이 많아 이집트 관련 서적을 몇 권 가지고 있는 터라, 이번 책은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러라고 정해준 적은 없지만, [이집트, 오시리스, 이시스, 스핑크스, 아몬 라..] 등등의 단어가 들어간 책은 무조건 나의 수집 대상이다. 게다가 신전 그림이 쾅 찍힌 표지는 나를 부르는 손짓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여의고 킨케이드 영지에서 홀로 고고학을 연구하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씩씩하며 올곧은 새라 킨케이드. 하지만 자신의 대부이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모티머 레이던 박사의 요청으로 런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떠난다. 살인 현장에 토트를 상징하는 상형문자가 피로 그려져 있어 고고학에 정통한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레이던 박사까지 괴한의 습격을 받고 납치당한다.  프랑스인 모리스 뒤 가르와 사건을 조사하던 새라는 배후에 음흉하고 막대한 토트신의 밀교가 숨어있음을 눈치채고,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토트의 책을 찾으러 이집트로 험난한 모험을 떠난다. 

 아마도 과거가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는 이유는 매일매일, 매순간 순간 우리가 과거를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11

고고학자인 새라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토트의 책을 찾아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고등학교 때 나 역시 역사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때 한 선생님이 '너는 왜 역사가 좋으니?'라고 물으셔서 '그냥 좋으니까요. 공부하고 있으면 즐거워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역사를 좋아하고, 한 때는 나도 고고학자가 되어 보겠다고 큰소리 탕탕 치던 나는 지금은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지금 선택한 길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씩씩한 새라가 열심히 발굴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문득 예전의 내 꿈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소설이라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 정신을 못차리고 덤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하지만 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하나는  새라 아버지와 새라의 과거를 계속 언급하면서도 그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무슨 이야기가 나오겠지 하면서 기대했는데도, 결국 책에서는 새라 아버지가 죽게 된 경위와 왜 새라가 그것에 죄책감을 갖는지,  새라가 잃어버린 어린시절의 기억에 숨어 있는 사건은 무엇인지 전혀 밝혀주지 않는다. 작가가 2편을 낼 생각이 아니라면, 이야기의 구조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프랑스인으로 그려지는 뒤 가르의 대사가 '리엥, 아무것도'라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프랑스어만으로 나타내고, 괄호안에 (아무것도)라고 나타내는 편이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역사 미스터리라고 선전문구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엄청난 미스터리와 스릴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숨가쁜 추격신도 물론 등장하지만,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일종의 모험 소설에 가깝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인디아나 존스] 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재미있었다. 구덩이에 빠지고, 뛰고, 총싸움하고, 또 위기에 빠지면 멋진 사막의 아드님이 나타나셔서 구해준다. 이집트에 관련된 여러 가지 신화적인 이야기가 담긴 것도 무척 흥미진진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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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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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일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에 일본문학 번창의 길을 갈고 닦은 선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그녀를 [냉정과 열정 사이] 를 통해 알게 됐는데,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그 책은 정말 좋았다. 하나의 사랑을 두 사람이 같이 써나갔던 그 이야기. 생각만해도 아련하다. 처음 읽은 작품으로 인해 기대치가 너무 높았는지 그 다음 접한 작품들은 만족보다 실망이 더 컸다. 글쎄, 사랑에 대한 일본인들의 정서는 우리와는 달리 끈끈함이랄지, 끈질김이랄지 그런 느낌이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담백한 문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너무 건드려 지독하게 앓게 하는 작품을 읽고 난 다음이면 어김없이 일본문학이 그리워진다. 그럴 때는 답답하고 복잡한 가슴을 살짝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담담하고 가벼운 문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차가운 밤에] 도 그런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깊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볍게 독서를 즐기려는 마음으로. 에쿠니 가오리하면 연애소설이 곧바로 떠올랐기에 이 책도 사랑이야기를 모은 단편집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동안 접해왔던 그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일본의 옛날 괴담을 듣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에, 내용들도 어떻게 이런 내용을 상상했을까 할 정도로 익숙치 않은 소재들로 가득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담백한 그 문체랄까. 마치 하기 싫은 작문을 해 놓은 것처럼 이런저런 수식어 없이 간결하다.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썼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야'라고 말하는 듯이. 

대부분의 작품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꽤 마음에 들었다. 죽은 개 듀크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온다는 <듀크>, 자신의 전생을 일순 기억해내는  <언젠가,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녀의 몸 속에 들어가있다가, 할아버지가 운명할 때에 함께 떠나가는<연인들> 은 어쩐지 아련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 마치 꿈결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낮보다는 밤에 책을 펼쳤을 때 그 느낌을 더 깊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책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적 상상력과 그리움을 담아내는 감각적 문장- 흠. 한국어로 번역해서 감각적인 문장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적 상상력이라니 그건 좀 과장된 듯 보인다. 에쿠니 문학의 근간이며, 동시에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지만, 나에게서 그리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는 멋지지만, 그 세계를 보다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타내는 것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아니면 이 작가를 깊이 알기 위해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 내 교감신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에쿠니 여사, 내가 그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 부디 다음 작품은 낮이든 밤이든 읽는 시간에 관계없이 내가 좀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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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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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국문학은 수사의 나열이라고 생각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상황과 감정을 될 수 있으면 길게, 복잡하게 표현하는 것이 한국문학이라고.(그 부분에 있어 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서점에서 한국문학이 정체되고, 일본문학이 급부상했을 때 그것은 시대의 한 흐름이었다. 간단명료하고 쿨하게 표현해내는 일본문학의 간결함이 소비의 주체가 되어가는 젊은이들의 바람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한 번 읽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심리적으로 복잡해지는 우리문학을 읽을 때보다, 일본의 작품을 읽을 때 좀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난 지금, 역시 난 한국인이구나, 한국 사람에게 맞는 책은 역시 한국인이 지은 책이구나를 절실히 느낀다. 일본문학에서는 이처럼 깊고 절절한 삶의 이야기를 좀처럼 맛볼 수 없다. 

공지영님의 작품은 어렸을 때 사촌언니 집에 놀러가서 접한 [착한 여자]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멋모르고 읽어내렸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학생이었던 그 때, 두 작품을 읽으면서 화가 났던 기억이 난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착한 사람인 거냐고, 이 사람은 착한 게 아니라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주인공을 비난하면서 그 당시 소설이 그려내던 한국 여자들의 비참하고 한결같은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여자의 인생이라면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빛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순간이 있을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공포마저 느꼈다. 인내하고 견디는 삶을 그렸던 것이 바로 그 [착한 여자]였다면, 조금은 달라진 현대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 바로 [즐거운 나의 집]이다. 

주인공은 재혼한 아빠와 살다가 엄마 집에서 함께 살기로 결정한 18세의 위녕. 아니 주인공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다. 엄마는 이미 세 번의 이혼을 한 상태이고 성이 다른 둥빈과 제제라는 동생이 둘이나 있다. 엄마는 발랄하고, 삶은 바로 자유라고 여기는 사람이지만, 때때로 고독감과 외로움과 싸우며 글을 쓰는 작가다. 작가로서 성공했지만, 때로는 위녕의 딸같으면서 또한 울고 고민하는 모습은 여느 집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과 재혼을 지켜보며 이미 너무나 조숙해져버린 위녕은 그러나 역시 아빠에게 이해받고 싶고,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딸이다. 작품은 이 사회에서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가정과 가족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더라.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거, 그게 좋은 가정이라는 게 아닐까. 그냥 밥 먹고, 자고, 가끔 외식하고 가끔 같이 텔레비 보고, 가끔 싸우고, 더러 지긋지긋해하다가 또 화해하고, 그런 거..누가 그러더라구,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게 흔들거리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도 없고,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 그게 집이라고. 하지만 목적 그 자체는 아니라고. 그러나 목적을 위해서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 쉴만큼은 튼튼해야 한다고. -p270
때때로 함께 웃고 함께 먹는 가족들을 보면서, 가족이란 대체 뭔가 생각할 때가 있다. 가만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항상 내 뒤에서 든든하게 나를 지원해주지만 가끔 뜻이 안맞아 티격태격 싸움도 하는 것.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욕해도 이 사람들만은 나를 감싸주겠지라는 믿음이 있는 것. 달콤하면서도 때로는 쌉싸름한 것. 가족 구성원이 누가 됐든, 설사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세 명이나 되더라도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위녕, 둥빈, 제제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 하나로 모여 사는 것. 그것이 가족일 게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편견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모두 문제아가 된다는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주일마다 성당에 가서 신부님 말씀을 듣고 오는데, 내가 무심코 들으면서 끄덕였던 말들이 이 책에 나와 있어 놀라웠다. 더 놀라웠던 것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무 비판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이다. 여성이 조금만 참고 살면 가정은 유지되지만, 참지 못하고 살면 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문제아라고 단단히 못박고 있는 부분에서 '이런 생각없는 신부님같으니'라고 욕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무서워진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일구어가는 텃밭같은 장소다. 모든 일에 노력이 필요하지만 가장 노력이 필요한 장소가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완전히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한다. -저 사람은 나와 달라, 도무지 성격이 맞지 않아.- 당연하다. 최소한 20 여년을 넘게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상대에 맞추어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일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가정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것이 또한 변해가지만 사람들 안에는 결코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나 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자신의 잣대로 재고 평가하려고 하나 보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올바르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이혼이라는 것은 안 할 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도 가족이라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줘야 한다. 어떤 평범하지 않은(사람들이 정한 평범의 기준은 어디까지일까) 이야기를 들어도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처음 공지영님이 세 번이나 이혼한 사람이라는 기사를 접했을 때 참 많이 놀랐다. 내가 그리고 있던 이미지는 어느 새 저멀리 훨훨 날아가버리고 세상 속에서 나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던 듯도 싶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 번이나 이혼한 것을 감히 내가 아픔으로 말해도 된다면,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책이 완전한 그녀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의 삶과 아픔들을 조금쯤은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지영님의 글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항상 그녀가 콕 집어 대신 해준다는 데에 있다.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그녀의 문장 하나로 간단하게 정리되어 버린다. 한 권의 책 속에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모든 말들이 다 들어 있을 수 있다니, 참 놀랍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일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공지영'씨'가 아닌 공지영'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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