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정말 미안해 -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
김현태 지음, 조숙은 그림 / 두리미디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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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애증'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고 한다. 사랑과 증오의 관계. 한없이 사랑하지만, 또 한없이 미워하고 닮지 않으려고 하는,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엄마와 딸의 관계라고. 내가 딸이라서 그런지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우리 엄마 사이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 티격태격하고, 가끔 나중에는 후회하면서 순간을 못이겨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엄마를 떠올렸기 때문에 이 제목을 보고 쉽게 뿌리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부르기만 해도 괜히 울컥해지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제목은 [엄마, 정말 미안해]이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비단 엄마와 자식간의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삶의 이야기, 친구와 부부와 부모자식 사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을 마치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하게 그려내고 있다. 딸을 위해 쌓인 눈 사이로 길을 낸 <엄마가 만든 길>, 돌아가신 엄마가 담긴 비디오를 보며 그 그리움을 절절히 쏟아내는 <엄마, 정말 미안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할머니의 졸업장>, 크리스마스날 칼국수를 공짜로 얻어먹고 삶의 희망을 찾아내는<칼국수와 실장갑> 등의 이야기들이 이 겨울에 꽁꽁 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스르르 녹여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의식을 깨우는 듯한 글귀들은 정말 주옥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너무나 가까운 사람이기에, 너무나 쉬운 사람이기에 혹시나 소홀히 대하진 않았는지요. 소중한 것은 늘 잃은 후에 그 가치를 알기 마련입니다. 함께하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나눠야 합니다.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음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일인 줄 안 다음에는 이미 늦습니다. 지금이 가장 사랑하기 좋은 날입니다. 안아 주기 가장 좋은 날입니다.-p36

라고 끝을 맺는 <엄마, 정말 미안해>는 특히 더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내가 중고등학생 때, 이렇다 할 사춘기는 없었지만 한창 예민했던 시기에,  엄마한테 매우 소홀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엄마가 -아이고, 우리 딸 없었으면 엄마가 너무 힘들었을거야. 딸 없는 사람들은 정말 안됐어-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우리 사이가 각별하지만, 예전의 나는 그저 내 일로 머리가 한 가득이어서 주변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침 일찍 학교 가서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오면 밤 11시는 되었으니, 솔직히 얼굴 보고 이야기할 시간도 부족했던 것이다. 엄마가 한 마디 하시면 잔소리로 여기고 무척 듣기 싫어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고,  엄마가 잔소리를 해도 그저 -네~-하고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도 예전에는 내가 엄마를 봐도 본척만척 했다며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하셨을 때는 정말 죄송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티격태격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서로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에게 있어 엄마는 가장 가까운 존재지만, 우리에게서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인 줄 알았다. 엄마니까, 나는 자식이니까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때 결혼하셔서 나를 낳으셨고, 살림을 꾸려오셨다. 나는 지금 부모님이 어서 결혼해야지 하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엄마의 그 역할을 내가 엄마처럼 훌륭히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일이다. 한 사람에게서 아무 조건없이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다른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마음으로 느끼는 일이다.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기 전에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 나는 참 행복하다. 어쩌면 때로는 그 사실을 또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해내고, 또 기억해내서 영원히 잊지 않도록 가슴 속에 잘 묶어둘 것이다.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자신의 곁에서 웃어주고 있는 부모님께, 혹은 소중한 사람에게 우리 가슴 속에 자라고 있는 사랑을 내보일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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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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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커스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날까. 나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의 어떤 표정이 떠오른다. 직접 서커스를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 본 TV 안에서(명절 프로였는지, 혹은 영화였는지) 광대는 한 순간 어딘가 애처로운 눈빛을 한 채,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관객을 웃겨야 할 광대가 보여준 바람같은 표정. 금방 얼굴을 바꾸어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이 어린 내 마음에도 아프게 와 박혔던 기억이 난다. 그 때부터 서커스는 나에게 단순히 구경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이만큼 자란 지금도 명절 때가 되면 가끔 TV에서 서커스를 본다. 서커스를 보되 서커스를 보지 않는다. 현란한 묘기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몸동작을 해내는 그들을 본다. 그들의 삶을 본다. 

 제이콥은 수의과에 다니던 대학생이었지만,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빈털털이로 반 정신을 잃은 채 한 기차에 올라탄다.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 기차에.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막일을 하던 제이콥은 전속 수의사로 서커스단에 머물게 되고, 아름다운 말레나에게 점점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었다. 오거스트라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괴팍한 남편이. 어느 날 서커스단에 로지라는 코끼리가 들어온다. 오거스트가 코끼리의 훈련을 맡아 호되게 때리는 것과는 반대로, 제이콥은 사랑으로 코끼리를 보살핀다. 이미 제이콥에게 있어 코끼리 로지는 가족과 같다. 오거스트의 폭행을 계기로 폭발한 제이콥은 말레나와 도망칠 계획을 세우지만, 공연 중 동물들이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제이콥이 평생을 숨겨야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코끼리에게 물을]은 서커스라는 작은 사회의 화려한 조명 뒤에 감추어진 이면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하마가 죽었을 때 엉클 앨이 어떻게 한 줄 알아? 수조에 물 대신 포름알데히드를 채워넣고 계속 동물원에 세워놨어. 우리는 이 주 동안 하마 피클을 기차에 싣고 다녔지. 이 모든 게 다 눈속임이야., 제이콥.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냐. 사람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니까. 사람들은 우리한테 눈속임을 원해. 그게 눈속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p178
제이콥이 서커스단에 들어갔을 때 오거스트가 해 준 이 이야기는 그 단적인 예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묘기를 펼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하고 있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에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우리가 서커스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의 즐거움, 내가 해내지 못하는 경지에 다른 사람이 도달해 있다는 경이로움,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일어나는 격앙된 분위기. 그러나 우리 삶 속에서 서커스는 단번에 잊혀지고, 뒤에 남는 것은 또 다시 어디론가 옮겨 가야 하는 그들의 허탈함 뿐인 듯 하다. 공연하고 이동하는 반복적인 삶. 더구나 그 안에서조차 계급에 의한 차별이 존재하니, 책의 내용을 되뇌어 볼 수록 어쩐지 자꾸만 마음이 아프다. 물론 이 책의 내용처럼 모든 서커스단이 그러하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만약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관객의 입장에서만 그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삶은 동시에 처절하고 아름답다. 마치 서커스처럼..>이라는 구절이 자꾸 내 마음을 때린다. 겉으로 내보이기 위한 화려함을 위해 인생에 얼마만큼의 인내와 끈기와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1시간 여의 멋진 공연을 위해 어릴 때부터 수많은 시간을 훈련으로 보냈을 서커스 단원들처럼. 그리고 젊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제이콥의 인생처럼.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인생들처럼.
 
93세의 제이콥과 젊은 시절의 제이콥이 번갈아가며 서술되는 책은 대단히 흥미롭다. 손에서 책을 떼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마치 거대한 성의 축조에서부터 허물어지기까지의 한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젊은 시절의 제이콥과 나이를 먹어 뻔뻔해지고, 능글맞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커스를 사랑하는 늙은 제이콥이 여기에 있다. 여기저기 옮겨다녀야만 했기에 서커스단에서 식량과 물은 항상 부족했다. 동물들에게, 코끼리에게 물이 필요했듯이, 늙은 제이콥에게도 물이 필요했다. 서커스라는 활기찬 물이. 코끼리 로지는 곧 제이콥이었고, 제이콥은 곧 로지였음을 책장을 덮은 지금에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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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수수께끼 - 흥미진진한 15가지 쟁점으로 현대에 되살아난 중국 역사
김영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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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동양문화예술사>라는 사학과 수업에서 그림과 조각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역사를 배웠는데, 그 중에서 중국의 그림과 유물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눈에 띄었다. 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예술가와 정치가, 그리고 신비함을 감추고 있는 중국. 하지만 나에게 중국은 그저 동북공정같은 음흉한 음모나 계획하고, 빈부격차가 큰, 세계의  많은 나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그저 동북공정을 계획한 그들의 치졸함에 분노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남긴 그림과 조각에 감탄하며,  유물을 보러 여행이나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나니 그렇게 단순하게 세계를 생각했던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진다. 

 흔히 역사 관련 책이라고 하면 시대상으로 중요한 사실을 죽 나열한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나도 유구한 중국의 역사를 모두 말할 수는 없으니, 시대적으로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실만을 단순히 실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관점에서 책은 내게 새로운 사실을 차근차근 이야기 해준다. 권력이양의 방법인 선양에서부터, 중국의 황제와 우리나라 역대 왕들의 특징을 하나하나 비교한 역대 제왕의 빛과 그림자, 제왕들의 엽기 취미, 송태조 조광윤, 명군과 수명의 함수관계, 대운하의 역사, 물과 천하의 관계, 사막, 나가촌 유적,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화폐, 고대 중국 공무원, 제갈량, 동북공정에 대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내가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새로운 내용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사막과 나가촌 유적, 제갈량에 대해 다룬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사막에 물이 흐를 것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사막 밑에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를 36m 높이로 채울 수 있는 양의 지하수가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사막에도 눈이 내리고, 물난리가 나는 등 사막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모래바람, 모래폭풍 등으로 재난도 가져다준다. 당장 우리에게도 봄만 되면 황사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주고 있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장에서



사막화라는 재앙을 초래한 것은 바로 인류 자신이다. 무분별한 경작과 방목, 삼림 남벌, 수자원 남용, 지구 온난화 등 탐욕스러운 인간활동의 결과가 사막화를 불러왔다. 여기에 인구 증가, 특히 건조지대의 급속한 인구 증가도 사막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사막에 매몰된 고대 문명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p136
라며 우리에게 경고한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한낱 먼지와 같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히 사용하고, 지킬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그런 대자연에 의해 피해를 입은 곳이 '나가촌 유적'이다. 나가촌 유적은 동방의 폼페이로 불릴만큼 사람들의 유해가 그 당시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매우 자세히 보여준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유골,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유골,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를 품에 꼭 안은 어머니와 품에 안긴 아이의 유골까지..책에는 사진도 자세히 나와 있었는데, 보고 있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우리도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무분별한 자원의 남용과 자연의 경고를 무시한 탓에 끔찍한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새삼, '지구를 지키자'라는 표어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제갈량은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근하게 느낄 인물일 것이다. 그 친근한 인물이 새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바로 얼마 전 우리가 대선을 치루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책에 의하면 제갈량은 청렴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자신의 재산 내역을 보고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그의 그런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고 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로서, 또 그 지도자를 옆에서 이끌어 갈 인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은 청렴결백과 자신에게 엄격한 통제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세상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으로 남게 된다. 사람에게 장점과 단점은 있게 마련이므로, 제갈량의 좋은 점을 자신의 장점과 잘 버무려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정치가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지만, 내용은 매우 알차다. 사진과 도표로 내용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고, 새로운 시점에서 본 역사서라 그런지 신선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의 역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지구촌이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의 세계를 현명하고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고,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는 데에 역사 공부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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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 뜨거운 가슴을 잃어버린 당신을 위한 스물네 편의 사랑 이야기
김용택.정호승.도종환.안도현 외 지음, 하정민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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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과 소녀가 있다. 소녀는 병에 걸려 있지만, 소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소녀에 대한 마음을 키워간다. 소녀 또한 소년이 싫지 않다. 병을 숨기고,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소나기를 맞으며 소년의 곁에 머물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병이 악화되고, 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힐 때 입고 있었던 옷을, 자신이 죽었을 때 꼭 함께 묻어주기를 청한다.>..왜인지 모르지만, 책을 읽는 내내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24명 작가의 24편의 사랑이야기이지만, 내 머릿속에 그 24명 작가의 이야기는 [소나기]의 한 장면으로 자리잡았다. 외로움. 쓸쓸함.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애틋함으로. 

 제목 하나로 분명 보고 싶던 책이었는데, 그 책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 장소에 있는 것 같은 괴로움,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 그 이유를 나는 깨달았다. 내 영혼은 이미 24명의 작가들처럼 깨끗하지 않다. 한때는 나에게도 순수라는 것이 남아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지금의 내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인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 영혼에 흠집이 생겨서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애틋한 추억에 100% 공감할 수 없음이. 

 지금 나에게 그리움이란 없다. 그저 멍하기만 하다. 혼란스럽기만 하다. 내가 생각했던 추억이, 감정이 정말로 그리움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의 그 기억이 정말로 나중에는 그리움이 되어 찾아올까 하고. 나는 이렇게 심란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이 작가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그리움을 소근소근 전하기 시작한다. 처음 사랑을 느꼈던 사촌누나를 생각하고(정호승), 윗동네에 살던 그녀를 그리워하며(김용택), 아픔으로 가득차 있던 자신을 위로해주던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권태현). 친구를 생각하고(조은), 옆에 계신 어머니를 애달파한다(공광규). 그들이 말하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이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을 조금씩 풀리게 한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었던 것 같은 정해지지 않은 향수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서로에 대해서는 눈을 꼭 감을수록 좋았다. 그리고는 다만 같은 방향을 쳐다보아야 했다. p-98(문정희)라는 글귀에 오래도록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내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했던 것은 아닌지,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보려고 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캐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 사랑하는 이는 분명 여자, 남자라고 한정지을 수 없다. 눈을 꼭 감고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할 사람은 내 안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다. 

 책과 마주하고 떨림보다는 괴로움이,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지만, 역시 <사랑>이라는 것은 그 두 글자의 단어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처음에 책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 곳 없이 파르르 떨리기만 하던 내 마음이 어느 새 스르르 풀려간다. 곤두세우고 있던 신경이 살짝 꼬리를 내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느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아직 그리워할 사람이 많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과거의 친구도, 추억도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언젠가 나도 내 인생의 마침표를 사랑으로 찍을(원재훈)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내 심장이 떨림으로 다시 뛰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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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여행을 멈추다 - 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
메이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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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때가 되면 일을 하고, 또 때가 되면 잠을 자고 또 다른 아침을 맞는다. 그러한 날이 365일. 위험한 것은 그러한 하루하루를 아무 자각없이, 그저 숨을 쉬면서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버리는 것이다. 늘상 잠과 들러붙어 있던 내가, 내 몸만큼이나 꾸물꾸물한 서울 하늘 아래에서 인도로 날아가 버린 순간,  세상은 찰나에 변했다. 인도에 의해서. 씩씩하게 살아있는 메이에 의해서. 

 메이. 자꾸 부르니 마치 내 친구 같다. 내 친구 맞다. 그녀도 늘상 졸려병에 걸려 있었으니, 우리는 잠을 매개로 한 친구다. 다만 나는 아직도 졸려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비몽사몽이지만, 그녀는 그 잠을 떨치고 인도로 달려갔다. 인도에서 여행을 하던 메이는 인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람을 만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지니를 만나면서 변화해간다. 인도에서 골랄끼또리아라는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바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최초의 집에서 잠들면서 그렇게 그녀는 인도인이 되어갔다.


 지니는 동네 아이들도 잘 돌봤다. 지저분한 아이들을 잡아다 샴푸로 머리를 감기고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주었다. 아픈 아이들을 병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동네 개들 몸에 있는 벼룩까지 잡아주었다. 이 모든 일은 지니가 정말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람들과 섞여 그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찬사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녀를 보면서 느낀 것은 돕는다는 건 뭔가를 주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을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정말로 사람들을 좋아했다-p108
메이! 너도 그래! 너도 지니와 똑같아! 책을 읽으면서 지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메이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겁쟁이인 나는 어디로 떠나는 것조차 두렵다. 그냥 문 밖으로 가방 하나 달랑 지고 떠나면 된다지만, 나는 떠나기 전에 이것도 챙겨야 하고, 저것도 챙겨야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전부 싸 짊어 지고 가야 직성이 풀린다. "떠난다"는 건, 단어 하나로 끝나는 말이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데 메이는 이미 발길을 옮겼으니, 그 용기야말로 내가 가장 얻고 싶은 것이었다. 떠나기까지 했으면서, 게다가, 인도에 머물러 그들과 생활까지 한다! 메이, 너는 욕심쟁이야. 이미 그들과 생활하면서, 그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사람을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손을 내젓고 있잖아.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 너는 이미 지니와 똑같으면서.


 크리슈나님, 제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나요? 언덕에 길을 내고 공원을 만든다는 게 말이 돼요? 그렇게 하는 게 사람들을 돕는 게 맞아요? 나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어리석게 구는 건 아닐까요? 일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버려요. 왜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생각만큼 우리를 안 도와줄까요? 이런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p134
여행을 떠나면 나는 홀가분해질 줄 알았다. 그래서 떠나고 싶었다. 주위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나 홀로 자유롭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여행을 하면 발길이 옮겨지고, 그 발길이 닿은 곳에 무수한 사람이 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관계를 맺지 않는 건 숨을 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메이 또한 인도에 가서까지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에서나 할 법한 고뇌와 번민은 어디에서나 계속된다. 하지만 그것이 삶은 아닐까? 내가 살아있고, 숨 쉬고 있고, 다른 사람과 관계맺기가 계속되는 한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고민도 계속될 것이다. 골랄끼또리아 사람들과 웃고 울던 메이가, 때로는 그들의 따뜻함에 감동받고, 때로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에 사랑을 느끼며, 때로는 골랄끼또리와 사람들의 예상치 않은 치사함에 상처받으면서도 인도에 계속 머물렀던 건, 이미 그들이 메이의 안에서 가족이 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오르차에서 만난 사람들, 남에게 시간을 나눠주고 뭔가를 해주려는 사람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 그 사람들은 참 행복해 보였거든. 그런 얼굴을 볼 때마다 의문이 생겼지.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도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하고. 당연하지. 그 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만 시간을 썼으니까. -p224
남을 돕고, 남을 생각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윗구절을 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동안 나는 남을 돕는 그 순간도 사실은 그들을 위해 쓴 시간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만 쓴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런 일을 했어, 음, 좋아" 의 자기만족. 좋은 일을 했을 때 자기만족이 완전히 배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을 할 때의 우선순위가 남인가, 나인가에 따라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는지가 분명해진다. 메이와 람, 지니.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즐거워했고,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고 싶어했다. 나도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책을 읽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마치 전원드라마를 연상하게 하는 마을 사람들과 귀여운 아이들은 이미 내 마음 속에서 친근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면에 감춰진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이 자연스럽게 전해져왔다. 얼마 전 읽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같은 알싸함이 내 마음을 감싼다. 어려운 사람들, 어려운 아이들. 언젠가는 이렇게 글로만 그들을 애달파할 것이 아니라 나도 메이처럼 진정으로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책 중간중간의 그림과 재미있는 인도어들은 정말 좋다! 앞으로 계속 인도어만 사용할 것 같다. 이것이 진짜 여행서다. 여행서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아~나도 인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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