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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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간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내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왜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들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걸까. 혹자는 과거를 거울삼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했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문학으로서 역사를 접한 지금 다른 생각도 품게 되었다. 역사를 배우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겸손과 존경을 인식시키는 과정이라고. 과거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듣다보면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수많은 의문과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경건함을 느끼게 된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1917년부터 1964년까지 약 50년이라는 격동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거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기생이자 배우였던 옥희와 그녀의 주변인물들,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애정을 갈구했던 호랑이 사냥꾼의 아들 남정호, 옥희가 사랑했던 가난한 고학생 한철과 각자의 신념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들, 일본 군인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한 시대를 살아나간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 안에서 작품의 중심을 잡고 있는 인물은 바로 옥희다. 작품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세대와 세대를 잇고 있는 그녀는 존재 자체가 역사이자,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향해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 소좌로 등장한 이토 아쓰시다. 그는 '일본군'하면 자연스레 떠올릴 법한 잔인함과 생생한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인물로, 옥희를 향한 연정조차 깃털같이 가벼운 남자다. 그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즐거움'.

 

빌어먹을 전쟁 따위도, 외로움 같은 것도, 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계속 살아남아.

p516

 

쾌락과 물질만을 좇아가는 듯 보였던 이 남자가 일본의 패배가 가까워질 무렵 옥희와 재회해 남긴 말이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이유는, 그 또한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했고,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생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이토 아쓰시야말로 그 어떤 인물들보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살았던 사람들의 전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는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역사소설인만큼 작품이 전달하는 시대상황을 알고 읽으면 더 깊은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의 땅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이나 산미 증식 계획에 대한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작가가 자료 조사에 들인 노고를 가늠할 수 있었다. 현재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문구를 인용해서 보여주면 더 흥미롭게 역사를 접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일제강점기 시대에 비해 광복 후 한국전쟁이나 여전히 혼란스러웠을 1960년대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그려진 점과, 옥희와 한철, 정호의 이야기가 너무 신파조로 흘러간 듯 한 점에 아쉬움은 남는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역사를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이 숨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역사이므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역사공부에 진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 때 우리 마음 속에 긍지를 일깨워주고 남아있는 불씨를 활활 불타오르게 해줄 역사소설을 읽어보자. 지나간 시간을 꿋꿋이 버텨온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을 배우고,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표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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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이드 게임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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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이케이도 준이라고 해도 '럭비'라니. 작가가 선보이는 기업이나 금융관련 작품에 이제야 익숙해진 내가, 전혀 관심도 없고 규칙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럭비라는 신세계를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케이도 준!! 럭비에 문외한인 독자들이 읽어도 거부감을 느낄 수 없게 역시 럭비의 '럭'도 모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서 느껴왔던 감동과 열정을 다시 한 번 꽃피운다.

 

이야기의 중심은 기미시마 하야토. 회사의 무리한 인수합병을 냉철한 분석력으로 저지하지만 천적이라 여겨왔던 다키가와 상무이사의 눈 밖에 난 탓에 지역 공장 총무부장으로 좌천된다. 긍지를 가지고 일해왔던 직책에서 물러나게 된 것만으로도 억울한 그에게 떨어진 또 하나의 직무는 바로 회사가 운영하는 '성적 부진'의 럭비팀의 제너럴 매니저다. 설상가상으로 팀을 이끌어왔던 감독마저 사직해 새로운 감독까지 영입해야 하는 상황. 처음에는 럭비에 문외한인 그를 모두 걱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지만, 그는 대충 하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럭비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팀의 개혁이 바로 이 남자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케이도 준의 대표작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의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는 어딘가 강철같은 느낌을 전달하는 남자다. 거칠 것 없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며 말 그대로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올 것 같은 사람. 하지만 이 기미시마 하야토는 한자와 나오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조용히 흐르는 물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 번 목표로 정한 일이라면 어떻게든 성공시키고야 마는 행동력과 집중력에 있다고 할까. 난항을 겪기는 했어도 럭비에 문외한이었기에 사고가 자유로웠고, 덕분에 럭비협회와 자신이 맡은 팀 아스트로스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까닭은 밤 늦게까지 자료를 연구하고, 비디오를 돌려보는 열정이 밑바탕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노력과 열정 없는 목소리는 묻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미시마 하야토는 온 몸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독특한 점은 이 작품에서 기미시마 하야토는 중심인물이자 주변인물이라는 것이다. 팀 밖에서 싸우는 그가 있다면 팀 안에는 아스트로스의 선수들이 있다. 새로이 영입된 감독 사이몬과 그의 새로운 훈련 방법을 묵묵히 따라가는 선수들. 처음에는 과연 자신들이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던 그들도 점차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에 가득차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팀의 가장 연장자로 경기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하마하타, 사이몬을 만나 실력이 급상승한 도모베와 사사, 부상으로 좌절했지만 아스트로스를 만나 다시 한 번 럭비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나나오, 늘 럭비에 대한 사랑으로 한결같은 기시와다와 분석가인 다에. 그들이 럭비를 대하는 자세를 보고 있으면 내 가슴 속까지 불길이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볼을 서로 빼앗는 격렬한 경기를 하다가도, 일단 종료 휘슬을 불면 적도 아군도 사라지지. 그러니까 노사이드가 되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건투를 빌어주지. 숭고한 정신이야. 이거야말로 진정한 스포츠 정신 아닌가? 여기에는 우리가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인간의 존엄성, 삶이 있지 않을까?

p 24

 

소재는 럭비이지만 이케이도 준은 자신의 장점인 기업 이야기를 이번 작품에서도 빼놓지 않았다. 회사 내의 권력다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열한 방법과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들이 럭비 세계와 어우러지며 큰 감동을 선사한다. 적과 아군이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장관.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숨이 가빠올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라서, '역시 이게 이케이도 준이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늘 기대하고 읽고, 마지막은 작가가 선사하는 감정들에 희열을 느낀다. 내게 이케이도 준은 절대 끊을 수 없는 존재다. 한 번이라도 그의 세계를 맛본 독자라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열세일 때 정면 돌파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믿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에 마지막까지 감동으로 몸부림치면서 어느새 완독해버린 책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본다.

 

** 출판사 <인플루엔셜>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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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로맨스
앤 래드클리프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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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신, 계략과 응징이 난무하는 격정 고딕 로맨스]

 

'고딕소설' 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뾰족한 탑과 기괴한 분위기 때문에 유령같은 초현실적 이야기를 기대했던 [숲속의 로맨스]. 앞서 읽은 [공포, 집, 여성] 덕분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오히려 '이번엔 어떤 공포를 마주하려나!'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예상외로 무서움은 조금, 로맨틱함과 분노와 그 분노를 해소해주는 결말로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앤 래드클리프가 어째서 '로맨스 작가들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지 완벽히 이해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갈등과 긴장, 악인에 대한 처단과 선인에 대한 보상으로 독자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채권자들과 법의 심판을 피해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피에르 드 라 모트와 그 일가. 도주 중 괴한들의 손에 잡혀 있던 아름다운 아들린을 우연히 만나 함께 하게 된다. 언제까지 도망다닐 수도 없는 노릇. 버려진 수도원에 몸을 의탁하는 일행은 서로를 의지 삼아 조용한 생활을 이어나가지만, 수도원에 감도는 음산한 분위기와 누군가가 감금된 후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두려움에 떨고, 그 와중에 아들린을 향해 사악한 뱀의 마음을 가진 자가 검은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다!!

 

앤 래드클리프는 이야기 진행 방식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들었다놓았다 한다. 어느 때는 답답해서 가슴을 쾅쾅 치게 만들다가도 '그렇지! 이거지!' 하면서 통쾌함을 맛보게 해주는데, 흡사 요즘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의 진행방식을 따라가는 듯 하기도 하다. 하지만 앤 래드클리프가 먼저이므로, 혹시 드라마 작가들도 이런 고전 작품들을 참고로 해서 대본을 작성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막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악인으로 등장하는 후작이 그 어떤 납득도 되지 못할 정도로 안하무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들린을 향한 욕망을 가진 추잡한 남자인 줄만 알았는데 뒤에 밝혀지는 악행이 폭로될수록 입이 떡 벌어지게 된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그 누구보다 섬세하게 보여주는 라 모트 백작 때문이었다. 후작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아들린을 후작의 손에 바치려 하지만, 인간적인 양심까지는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 그에 비하면 시종일관 고결한 품성에 아름답게 그려지는 아들린이나 악행만을 일삼으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후작은 너무나 단편적이라 오히려 사람이 아닌 인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고 할까.

 

대부분의 고딕소설들이 잔인하고 기괴한 것에 비해 [숲속의 로맨스]는 비록 수도원이나 비밀통로, 숨겨진 방이라는 설정은 있지만 무서움보다 로맨틱함을 더 강조하는 작품이다. 평소 '고딕소설'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쉽게 접하지 못한 독자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사랑과 배신, 격정과 로맨스와 계략이 난무하는 매력적인 앤 래드클리프의 고딕작품. 이 기회로 그녀의 작품이 더 많이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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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로맨스
앤 래드클리프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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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유령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속이 뻥 뚫리는 결말이었다.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전개하며, 악인에 대한 응징이며 선인이 받는 보상과 관련된 이야기는 현대의 작품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배경만 다를 뿐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드라마나 책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다른 독자들이 읽어도 무척 만족할 것 같다. [숲속의 로맨스]를 읽기 전에는 어째서 앤 래드클리프가 '로맨스 작가들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를 받았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납득이 된다.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을 설명 가능한 일로 풀어내는 방식을 도입했다는 앤 래드클리프. 난데없이 유령이 등장했다면 코미디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 그 모든 등장인물들과 사건을 하나로 모아 명쾌하게 풀어내는 논리적인 방식이 매력적이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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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로맨스
앤 래드클리프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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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연인들의 사랑에 나쁜 남자의 등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아들린의 아름다움에 빠져 어떻게든 제 것으로 만들려는 후작. 그런 후작에게 대체 무슨 빚을 진 건지 꼼짝 못하는 라 모트 내외. 심지어 아들린을 도망치게는 못할 망정 뱀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후작의 손아귀에 아들린을 던져 넣으려는 라 모트 내외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난다. 물론 라 모트 내외가 아들린을 구해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들린에게 억지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읽다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

 

사랑하는 테오도르의 안위조차 알지 못한 채 이제는 기력이 다해버린 아들린. 어둠과도 같은 그녀의 미래에 언제쯤 한줄기 빛이 비칠지..수도원에 사는 유령이라도 나타나 후작을 벌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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