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구기종목 관람을 즐기는 나지만 축구만은 별로라 2002년 월드컵 때도 거리에 나간 적 한번 없었다. 붉은 악마들이 모여 응원하는 걸 보면서 저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군 하며, 약간은 시니컬하게 바라보았던듯 싶다. (이건 출신학교의 영향도 크다. 대학 때 워낙 비슷한 풍경을 많이 봐놔서.)
월드컵 때의 그 경험이 이후 확실히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쇼비니즘으로 번질 우려도 있으나.)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와 같이 즐기는 문화. 특정 집단 소속이 아닌 그 누구라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모여 즐기는 축제의 경험. 여중생 사건 때의 촛불시위나, 오늘의 광화문을 보면서 새삼 떠올리는 생각이다.
같은 목적,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모두 친구가 된다. 평소 같으면 무심히 스쳐갔을 시선이 따뜻해진다. 서로서로 촛불을 나누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낑기고 밀리지만 누구 하나 심하게 화내는 사람이 없다. 촛불을 들고 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연 경건하고 차분해진다. 수천, 수만 개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뭉클,해질 수밖에. 모인 이유는 불행하나 어쩌면 축복일 수도 있다. 이런 날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으나.
어린 아이부터 나이많은 어르신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 귀찮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와 크게 상관없다는 이유로, 다시는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 크게 어긋났지만, 역사는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잊지도, 용서하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