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편집팀이 2004년 12월을 마지막으로 감감무소식이었던 '내맘대로 좋은 책 그리고 음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아무 일 없던 듯 조용히 재개하려 했지만 인사조차 않는 건 너무 능청맞겠지요. 한번 바쁘다고 넘어가니 서로 눈치만 보면서 계속 그렇게 되더라,는 게 변명입니다.
반년간의 좋았던 책과 음반과 영화를 돌이켜 적어보니 새록새록 떠오르는 생각들에 지나간 시간이 뿌듯하게도 여겨집니다. 이우일씨가 <옥수수빵파랑>에서 권한대로 일부러 멈춰서서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일, 역시 즐겁군요.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의 마음에도 어떤 책들 떠오르고 있는 중일까요? ^-^
"2005년 상반기, 한국에서 출판된 최고의 외국 소설"
상반기 최고의 소설은 단연 <바람의 그림자>였다. 근래 외국에서 무슨무슨 상을 수상하고, 세계 몇십개 국에서 몇개 언어로 출간 예정이며, 100만 부 정도야 가볍게 팔아치웠고, 영화로 제작 중이거나 제작 예정이며, 누구누구 유명 작가가 격찬했다는 소설이 너무 많이 나온 탓에, (헉헉) 웬만한 수식엔 마음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의 그림자>는 "2001년 스페인에서 출간된 직후 101주 동안 베스트셀러 상위에 머물렀으며,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 30여 개 국에서 20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소설. 아마존닷컴에서 단시일 내에 100만 부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고, 스페인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0년 스페인 '페르난도 라라 소설 문학상' 최종 후보작, 2002년 스페인 '최고의 소설', 2004년 프랑스에서 그해 출판된 '최고의 외국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라는 소개글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만한 멋진 소설이다.
이 책의 내용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한 소년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오래된 헌책방에 가게 된다. 거기서 '자신만의 책' 한 권을 얻게 된 소년은, 그 책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아픈 운명에 얽혀 들어간다. 내부에 수많은 미니어처를 담고 있는 '러시아 인형'같은 이야기. 책의 운명과 저주에 대한 소설처럼 시작했다가 추리소설인가 갸웃거리게 하고, 사건 속에 스페인 내전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져 있되 결국엔 죽음도 가라놓을 수 없었던 어떤 연인들의 이야기로 마감된다.
인물들의 운명은 소년과 책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반복되고 또 변주된다. 인생이란 결국 그러한 것. 반복과 변주를 통해 생은 조금씩 빛깔을 달리하고 아름답게 채색된다. 그때 그들 사이에 오가던 감정, 각자의 사연을 그 누가 온전히 되살릴 수 있을까. 소년은 흩어졌던 지난 인생의 조각들을 모으고, 그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된다.
풍성한 내러티브, 경쾌한 전개, 지적이면서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다. 주변에 권해준 모든 이들 중 단 한 명도 실망했다 말하지 않은, 추천도 100%의 멋진 작품이다. 지극히 복고적이고 낭만적이며, '매혹'이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적인 소설. (책을 다 읽고 나면 전쟁 중에도 도시에서 꽃을 팔았다던 낭만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 p.s. 2005년 상반기에는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재간되어 많은 이를 기쁘게 했다. 최고의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재출간되었으며, 고려원에서 나왔던 미하엘 엔데의 훌륭한 단편집 <자유의 감옥>과,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가 출간됐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들을 찾아 헤매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 (그러나 유감스러운 건 지금까지의 예를 볼 때, 이렇게 재출간된 책들의 스코어가 썩 좋지많은 않다는 것이다.) 추리소설이 지나치게(!)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이 여름이 지나면 가을엔 또 어떤 멋진 책이 나올까, 기대 반 걱정 반 가슴이 설렌다. (요즘엔 매일 추리소설만 읽어대서 정신세계가 날로 각박해지고 있다.;;)
문학.예술담당 박하영
(zooey@aladin.co.kr)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한 명의 동료를 떠나보냈다. 고개를 들어보니 계절은 늦여름이다. 반년간 읽은 책을 궁리하다가 <바람의 그림자>를 꺼내들고 가만히 바라본다. 이 책에는 향기가 있어서 지금 주인공들의 운명은 다 잊었을지라도 향기만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운명, 우연, 사랑, 인생, 고통을 낭만으로 견디는 것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인생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통까지 자초하는 인간들에게는 운명이나 시대가 친구인 셈이다. 어떤 리뷰어께서 "소설과 원수지지 않았다면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정말이다. (혹자는 지나치게 영화 시나리오 같다고 평하기도 했지만 좌우간) 그 어떤 이야기가 기척을 알리며 읽는이의 마음에 접어드는 것은 대단한 일. 묘하게 후각적인 이 책은 소설 읽는 재미를 상기시켜준다. (편집자 모씨는 책을 읽고 이상형이 '페르민'으로 바뀌었다고 토로하셨도다. 그이가 잊지 말라고 내가 여기 적어둔다.)
올 여름을 화끈하게 총정리해준 것은, 그런데, 주간지인 '한겨레21' 8월호 별책부록 '추리소설 가이드'다. 일부러 주간지를 사볼만한 재미가 있다. 아아 어느새 저 매미 울음 부쩍 시끄러운 것은 가을이 올 신호인가.
편집장 김명남
(starla@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