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뉴욕을 찾아냈고, 사이는 여기가 낮일 때 왜 뉴욕은 밤인지를 요리사에게 설명하느라 애썼다. (...) 요리사는 미국보다 인도에 먼저 아침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앞뒤가 뒤바뀐 기묘한 사실이었고, 두 나라와 관련된 다른 어떤 상황에도 그 사실은 반영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안녕." 사이는 수녀원의 심술과 옹고집을 향해, 그리고 불안한 대조를 이루는 부드러운 색조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천사들과 피로 더럽혀진 그리스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 굴욕과 두려움의 무게를 배운 4년, 핑계를 대는 기술을 배운 4년, 일상적인 평범한 잘못과 혼란을 일급 범죄처럼 진지하게 다루는 규칙 앞에서 벌벌 떨었던 4년에도 작별인사를 했다.
(...) 이 방식은 순수함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지만, 죄의 독특한 맛을 규정짓는 데에는 뛰어났다. 죄와 욕망의 힘을 폭로하고 그 결과를 찌르고 쑤시는 데에는 간지러움 같은 기분 좋은 자극이 있었다. 사이는 이것을 배웠다. 이것이 밑에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절대적인 신조가 있었다. 경단보다는 케이크가 나았다. 손보다는 포크와 스푼과 나이프가 나았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밀전병을 먹는 것은 남근석을 금잔화 화환으로 장식하는 것보다 문명적이었다. 힌두어보다는 영어가 나았다.
며칠 동안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그의 목은 나오지 못한 말들로 가득차고, 그의 가슴과 마음은 둔통에 시달렸다. 나이 많은 여자들, 심지어는 불우한 사람들 - 머리털은 푸른색을 띠고 얼룩덜룩 검버섯이 피고 얼굴은 썩어가는 호박처럼 생긴 사람들 - 까지도 버스에서 그가 옆자리에 앉으면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제무바이는 그들이 무엇을 갖고 있든 간에 그가 가진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 습관은 비주를 늘 따라다녔다. 그는 인도에 틀림없이 큰 피해를 끼친 백인들을 두려워하고, 인도에 해로운 일을 전혀 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기가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안은 공중에 둥둥 뜬 것처럼 시장을 지나가면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자기 밑에서 휙휙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러자 지안은 군중과 함께 구호를 외쳤고, 그의 목소리가 거대함이나 원기왕성함과 뒤섞이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중대한 사회 문제와의 관련성을 창조하는 것 같았다.
(...) 지안은 시민 수백만 명이 봉기하여 영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거기에는 고결함과 대담함과 거룩한 정열이 있었다 - "인도인을 위한 인도, 대표가 없이는 과세도 없다. 전쟁에는 어떠한 협력도 하지 않겠다. 병사 한 명도, 1루피도 내놓지 않겠다. 영국 통치 타도하자!" 한 나라의 역사에, 한 나라의 심장 속에 그런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그 나라는 또다시 그런 클라이맥스를 갈망하지 않을까?
사이는 노니가 <죄와 벌>에 대해 도서관 사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엿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경외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황했어요. 고백과 용서라는 이 기독교적 관념은 범죄 피해자한테 범죄의 무거운 짐을 떠맡기는 거예요! 범죄 행위를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왜 죄악은 고백과 용서를 통해 없던 일로 되돌려야 하죠?"
(...)
사이가 덧붙였다.
"제일 나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건 전생에 나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니까 굶주리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예요."
비주가 계속 뉴욕에서 살면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난 뒤 전보가 도착하거나 전화가 걸려왔다. 부모는 죽고, 자식은 너무 늦었다.
또는 고향으로 돌아간 자식은 인생의 마지막 4분의 1을 완전히 놓친 것을 알았다. 부모는 사진의 음화같았다. 그보다 더 심한 비극도 있었다. 최초의 흥분이 가시면 사랑이 사라진 것이 분명해질 때가 많았다. 애정은 결국 습관일 뿐이고, 사람들은 사랑을 잊어버리거나 사랑이 없는 데 익숙해졌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들은 애정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아, 우리는 잘못 생각했어. 우리의 진정한 처지를 깨닫지 못했어. 우린 둘 다 바보였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차지하고, 도서관의 오래된 여행기에 매혹되고,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자
신을 낭만적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면 그 여행기에 묘사된 곳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까를 찾으면서 우리가 흥미진진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지. (...) 하지만 머나먼 왕국들은 무엇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 누구한테 이국적인가?
그곳이 자매에게는 중심이었지만, 그들은 한 번도 그곳을 중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비주는 자신이 텅 비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간디 카페'로 돌아갔다. 해가 갈수록 그의 생활은 공허해지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지냈어야 할 공간에서 숨쉬고 있는 것은 비주뿐이었다. 하지만 비주의 또 다른 부분은 전보다 훨씬 커졌다. 그의 자의식, 자기연민 - 오오, 그 지루함.
사이의 울음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표현하기에 충분했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인생의 목적은 단순하지 않았다. 아니, 인생의 방향조차 단순하지 않았다. 사이가 배운 것의 단순함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이는, 인생에는 하나의 이야기밖에 없고, 그 이야기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속해 있고, 자신도 이제 곧 하찮은 행복을 창조하여 그 안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두번 다시 생각할 수 없었다.
- 키란 데사이,「상실의 상속」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