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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북클럽에 나가는 주부였다. 어머니와 그 친구들은 늘 허드렛일을 하고, 운전을 담당하고, 어린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규칙들을 강요했다. 어머니들은 그저 한 무리의 어중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당시의 내가 존재조차 모르던 일들을 그들이 얼마나 많이 감당하고 있었는지. 그들이 궂은 일을 도맡은 덕분에 우리는 망각 속에서 흐르듯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게 거래 조건이었다. 부모로서 고통은 당신이 견딘다. 당신의 아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도록.
(...)
나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식욕을 제외하고 그 어떤 책임도 질 일이 없는 남자와 삶 전체가 끝없는 책임으로 점철된 여자들을 싸움 붙이고 싶었다. 드라큘라와 내 어머니를 싸움 붙이고 싶었다. - 전자책 10-12쪽(692쪽중)
와. 다락방님이 이 부분 올려주신 거 보고 이 책에 혹한 상태에서, 마침 이 책의 전자책 기대평 추첨 이벤트가 있었고, 당첨이 되었고, 그 당첨 적립금을 보태어 샀다.
서문에서 작가가 친절하게 설명했듯, 이 소설은 북클럽으로 친구가 된 전업주부 5명이 마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다. 작가는 전업주부의 일상을 매우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교외의 단독주택에서 살림을 꾸리며 아이를 돌보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업무를 맡고 있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여성에 대한, 특히 전업주부에 대한 혐오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나선다.

무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실렸다는 '주부(Housewife)'에 대한 뜻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집안일과 그 일을 행하는 주부에 대한 후려치기가 만연했다는 사실을 1993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지금도 후려치기는 존재한다.(이건 나중에 페이퍼로 써보고 싶네)
퍼트리샤는 자신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았다. 화이트와인을 놓고 책 얘기나 재잘대는 멍청한 남부 여자 무리. 편한 청바지에 축제용 스웨터 차림의 아이들 등하교 운전수, 까진 무릎을 호호 불어주는 사람, 허드렛일 담당자, 은밀한 산타클로스 겸 시간제 치아요정. - 전자책 654쪽
그리고 그 후려치기가 여자들을 얼마나 작게 만드는지. 스스로 자신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게 만드는지. 남편들 없이 모였을 때는 거침없고 당당했던 사람들이 남편들이 함께 하는 순간 주도권을 잃고 아이처럼 더듬거리게 되는지.
"우리는 이 공동체에서 나름의 지위를 가진 남자들입니다." 베넷이 말했다. 지금껏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만큼 그의 목소리에 남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여기서 학교에 다니고, 우리는 일생을 바쳐 지금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우리를 조롱거리로 만들려 했어요. 여러분이 정신 나간 주부들인데다 수중에 남아도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죠." - 전자책 341-342쪽
북클럽 멤버 중 가장 먼저 이상한 걸 눈치채는 건 퍼트리샤 켐벨이다. 가장 먼저 제임스 해리스를 만났고 그의 매력에 흔들린 만큼 이상한 점도 가장 먼저 눈치챈다. 그러나 친구들조차 그녀의 의심이 말도 안 된다며 쉽사리 믿지 않는다. 겨우겨우 증거들을 제시해가며 친구들을 설득해 놨더니, 그 사이에 제임스 해리스와 절친이 되어버린 남편들이 들고 나서 정신나간 주부들(범죄실화소설에 푹 빠진)이 남아도는 시간에 정신나간 짓을 저지르려 했다며 찍어 누른다.
사춘기 아이들과의 엇나감, 아이들로부터의 신뢰 상실, 위험을 막지 못한다는 좌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절망 때문에 퍼트리샤는 자살 기도를 하기에 이른다. 퇴원 후 제임스 해리스 퇴치를 포기하고 나름대로 평온한 3년을 보내는 동안, 근처의 흑인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1년에 한명씩 이상증세를 보이다 자살한다. 결국 제임스 해리스의 마수가 자신의 아이들에게까지 뻗어오자, 퍼트리샤는 다시 한번 도전을 감행한다.
처음부터 퍼트리샤의 의심에 확신을 준 것은 흑인 가정부 그린 부인이다. 그린 부인이 사는 마을에서 아이들이 밤중에 숲속을 돌아다니고 낮에 계속 졸려하다가 자살에 이르는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고, 퍼트리샤는 위험을 무릎쓰고 그 마을에 가서 아이를 찾다가 결정적인 목격을 한다. 사실 건드리지 않았으면, 제임스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흑인 아이들로 그쳤을 수도 있다. 퍼트리샤와 그 친구들의 백인 아이들은 무사했을 수도 있다. 제임스는 무사히 동네에 안착해서 오랫동안 안정적인 먹잇감을 제공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트리샤는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이 점을 보면 영화 <헬프>가 떠오르기도 한다. 흑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 정의로운 백인 여성이 나서는 스토리.
그러나 이 소설은 그린 부인을 소극적인 위치에 남겨두지 않는다. 퍼트리샤를 마냥 정의감 넘치고 물러섬이 없는 여성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퍼트리샤는 수없이 망설이고, 그렇게 망설이고 물러서려는 기색을 보이는 순간마다 그린 부인의 다그침을 받는다. 그린 부인은 자애로운 백인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결국은 직접 나서서 북클럽 멤버들과 함께 제임스에게 맞선다.
"나는 그린 부인 편이에요. 모든 걸 제대로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에요."
"당신은 당신 편이죠. 그걸 헷갈리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그러고서 그린 부인은 퍼트리샤에게 등을 돌리고 그레이스네 집의 먼지를 털었다. - 전자책 365쪽
제임스에게 맞서는 일은 무슨 히어로물처럼 호쾌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들이 전업 주부로서 혹은 집안일 노동자로서 수십 년간 해온 일들이 도움이 될 뿐이다. 그렇게 한 괴물을 해치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연대감"이다. 여성친구들 사이에 맺어진 이 끈끈한 연대감이 참 좋았다.
침묵이 계속되는 와중에 퍼트리샤는 자신의 공포보다 거대한 존재를 느꼈다. 연대감이었다. - 531쪽
또 이 책의 백미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사정없이 비판하는 장면이다. 워낙 재밌어서 길게 인용한다. 하지만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이 남자가 마을에 당당히 입성하는데, 자기들 그거 눈치챘어? 남자가 아무하고도 말 안 섞는 거? 그 대신 혼자인 프란체스카를 겨냥하지. 이런 부류들이 원래 그러니까. 유약한 여자를 찾아서 '우연한' 만남을 연출해. 어찌나 부드럽고 매혹적으로 구는지 여자는 그를 집으로 초대하고 말아. 남자가 막상 여자 집에 방문할 때는 무진장 조심하면서 아무도 못 볼 곳에 트럭을 댄다고. 그래놓고 여자를 이층으로 데려가서 며칠이고 이 짓 저 짓을 해대지."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주는 교훈은," 메리 앨런이 말했다. "남자가 모든 얘기를 독차지한다는 거야. 프란체스카의 일생은 고작 한 페이지로 요약이 끝나. 자식들이 있고 이탈리아에서 2차대전도 버텨낸 여자인데. 근데 이 남자가 한 거라고는 이혼이 전부야. 그리고 어쩌면 살인, 키티의 말에 따르면. 하지만 남자는 매 챕터에서 제 인생 얘기를 하고 또 한다고."
(...)
"여자들이 할말이 있거든 그냥 할 줄도 알아야 해." 슬리크가 말했다. "꼭 누군가 판을 벌여주길 기다릴 필요는 없어. 로버트 킨케이드한테는 숨겨진 깊이가 있잖아."
"일단 남자 속옷깨나 빨아봤으면 숨겨진 깊이에 대한 슬픈 진실을 깨닫게 되는 법인데." 키티가 말했다.
- 전자책 154-156쪽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전자책으로 사면서 작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마지막에 실린 "범죄실화 이야기 목록"을 쓴 '그래디 헨드릭스'가 누군지 몰랐다. 범죄실화 소설을 잘 아는 누군가인 줄 알았지. 이 사람이 작가였을 줄이야.. 남자일 줄이야..!!!!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작가가 남성이라는 게 왜 이렇게 놀랄 일인지. 남자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와우. 새로운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