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
황인규 지음 / 인디페이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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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작가다.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움베르토 에코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을 데리고 와 비교하면서 광고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모르겠다. 어렵게 읽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하지만 <장미의 이름>의 박진감과 비교한 부분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워낙 오래 전 읽었던 소설들이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제대로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다.

발문이 너무 화려해서 기대감을 엄청 높여 놓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란 실제 존재하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다.

작가는 실존 인물과 실존하는 책과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만들었다.

2부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포조가 게르만 내륙의 외진 수도원 장서관에 오면서 시작한다.

1부의 주 내용은 제목처럼 공의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력 다툼과 신학 논쟁이다.

중세 교황의 위치를 둘러싸고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상황과 그 정쟁의 과정을 보여준다.

포조는 교황의 제1 비서인데 교황이 몰래 도망가면서 위치가 애매해진다.

그가 좋아하는 일은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 책들을 찾아 필사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2부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필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다 이단 서적으로 몰려 양피지 속 내용이 모두 지워질 운명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한다.

스스로 인문주의자이자 책사냥꾼으로 자처하는 포조에게 이 책은 반드시 구해야 하는 일이다.

필사하는 수사에게 최신 종이를 뇌물로 주면서 그 책을 반출하려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여기서 작가는 그 당시 양피지와 종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비교한다.

필사를 둘러싼 서체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온다. 책과 관련된 지식들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훔치기 위한 포조와 조수의 모험이 펼쳐진다.


소설 속에서 신학 논쟁이 벌어지고, 얼마나 많은 고대 책들이 이단의 이름으로 사라졌는지 보여준다.

아직 인쇄술이 나오기 전이고, 책과 지식은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고 있던 시절이다.

교회의 권력이 세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생긴 문제가 고대 필사본에 대한 손실로 이어진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작가는 잘 요약해서 이야기 속에 풀어놓았다.

묵직한 문장과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훔치기 위해 펼치는 모험이 긴박해야 하지만 생각보다 조금 느슨하다.

훔친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도 생각보다 평이하게 마무리된다.


부산의 한 신부가 유학 시절 바티칸 서고에서 포조의 문서를 발견했고, 오랜 세월 이 문서를 가지고 있다가 신부직을 은퇴하면서 소설 형식으로 번역했다.

소설 속 역사적 문서라는 흔히 만나는 구성이다. 신부의 회고와 포조의 회고가 모두 들어 있다.

이 구성으로 작가는 포조의 문서에 역사성을 더하고,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문서의 존재를 알린다.

전체적으로 힘 있는 문장과 자잘한 역사 지식과 인문학의 발흥 등을 잘 엮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소설보다 역사를 잘 요약한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소설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분량을 더 늘이고, 사건을 더 만들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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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아는 사람들
정서영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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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다룬다고 했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가모우 미치루’였다.

이야기의 전개도 비슷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작가는 제목대로 희대의 악녀인 강슬지를 아는 사람들의 회고담으로 채웠다.

한 남자 고등학생과 여사감이 달아났다는 뉴스를 보고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였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슬지를 어릴 때 왕따 시킨 사람도 있고, 우연히 만나 이야기만 나눈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악의와 행동에 공포를 느낀 사람들이다.

읽으면서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강렬한 의지와 행동에 먼저 서늘함을 느낀다.


슬지의 외모에 대한 묘사를 보면 결코 못생긴 얼굴이 아니다. 아니 예쁜 편이다.

그녀의 외모에 혹한 남자가 썸을 타려고 하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놀라 도망갔다.

이런 그녀가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그녀의 잘못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친구 주주다.

슬지의 표현을 빌리면 인형 같이 예쁜 소녀였다. 그녀의 주도로 학창 시절 계속 왕따였다.

첫 이야기의 주자가 주주인 것은 그녀의 뒤틀린 삶이 이때부터였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주주의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주주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지만 제대로 된 경험이 없다.

이때 슬지의 연락은 과거를 돌아보고 소설 쓰기 소재 찾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때 슬지가 주주에게 행하는 복수는 소소하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던진 미끼를 문 그녀는 크게 당한다.


슬지는 계속해서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방법에 문제가 있다.

아주 극단적이고 무섭다. 농담과 순간적 기분에 의한 표현을 사실과 구분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할 때 정말 그 사람을 칼로 찌른다.

카페에 찾아온 손님에게 성추행하는 사장을 복수하는 법을 알려주는데 교묘한 살인법이다.

현명한 대처법이라고 말하는데 알바생에게 그 정도 극단적인 일은 아니다.

직장내 괴롭힘을 둘러싼 대처법은 또 어떤가. 또 다른 살인법이다.

재밌는 점은 이 살인법이 추리문학작가 등용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외모에 혹한 남성이 슬지의 일기를 발견하고 읽는다.

한 선배에 대한 풋풋한 사랑으로 시직한 이야기는 뒤로 기면서 점점 강렬한 집착과 악의로 가득하다.

문제는 이 악의가 그녀의 상상의 기록이 아니라 현실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은 왜 이 기록이 그에게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보여준다.

바닷가 남자 이야기와 이어진 회사에서 뒤틀린 욕망이 빚어내는 악의는 앞에 나온 주주의 이야기와 겹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주가 자신의 욕망에 흔들리면서 사건을 불러왔다면 이 핑크 공주는 아니란 점이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슬지의 삶에 전환기가 생기는 순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그네 귀신 이야기’ 속 진우와의 만남과 대화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누군가와 친해지길 바라는지 잘 나온다.

또 시골 쥐를 좋아하는 슬지에게 쥐가 되지 말라고 조언하는데 이 이후 그녀의 태도가 변한다.

그 중 하나가 남학생과 함께 달아나면서 전국적인 방송을 탄 사건이다.

그 남학생이 엄마에게 건 전화를 그대로 믿는 것도 현실성이 없지만 마무리는 더욱 그렇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연작 소설처럼 슬지 시리즈가 더 나와 우리 삶의 다른 면을 더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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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오신다 안전가옥 쇼-트 16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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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쇼트 16권이다. 15권 <푸르게 빛나는>과 세계관이 이어져 있다.

모두 다 읽은 지금 쇼트 시리즈가 아닌 오리지널 시리즈 한 권으로 묶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코즈믹 호러를 기본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전편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표제작 <그분이 오신다>와 전권의 <열린 문>이 연결된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프로듀스의 말처럼 다시 읽게 된다면 내가 놓친 부분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위기 등은 읽으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연결된 세계란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이번 쇼트에는 단 두 편이 실려 있다.

짧은 <런>과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분이 오신다>이다.

개인적으로 밀도가 더 높은 이야기는 <런>이다.

늦은 밤 친구 민아와 놀다가 지름길로 집에 가면서 경험하는 이상한 일들을 다루었다.

좀비 분장한 배우들과 잃어버린 에어팟 한 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리를 통해 거리를 지우고 공포를 늘인다.

비싼 에어팟에 대한 아쉬움과 어두운 공간이 주는 공포의 감정이 교차한다.

아주 현실적인데 낯선 곳이 아니라 늘 다니던 곳이란 사실이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단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강하게 짓게 한다.


<그분이 오신다>는 유튜브 세계를 기본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학폭과 이 학폭의 폭로, 그리고 선정적인 언어의 잔치 속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보여준다.

박종찬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학창 시절 친구들의 왕따를 당했다.

그의 잘못도 있지만 그것이 평생 왕따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담임의 대처는 또 어떤가.

현실에서 자주 보는 모습을 놓아두고, 왕따의 원인이었던 소녀의 연예인 데뷔와 성공이 나온다.

최근 자주 보는 학창 시절 학폭을 둘러싼 이슈를 그대로 가져왔다.

작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피해자 박종찬이 유튜브로 성공하게 만든다.

자신을 나락으로 민 동기를 그가 학폭 이슈로 나락으로 민 것이다. 

그 과정에 서로 잘 합의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실패한 결과다.


한 번의 성공과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서 유튜브 하이바는 승승장구한다.

연봉 1억이 넘는다. 떨어지는 외모를 수익으로 가린다. 커플매니저는 살짝 성형을 하자고 한다.

성공율을 높이고 싶어서 한 말이지만 그는 불쾌하게 느낀다. 이에 대한 과잉반응은 열등감의 소산이다.

비싼 외제차를 타고 집으로 달리는 중 이상한 일을 마주한다.

정체 불명의 생명체가 도로를 달렸다. 뭐지? 반대편 택시 기사도 봤다고 하는데 반응이 이상하다.

그는 이 기이한 생명체도 자신의 유튜브에 올린다. 새로운 영상이 없으면 수익 창출이 어렵다.

이때 자신이 폭로했던 친구이자 전 연예인이 자살한다.

이 자살이 사람들의 관심을 박종찬에게 바로 돌리게 하고, 사실과 거짓이 섞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박종찬이 본 괴생명체와 그 생명체를 촬영하다가 차로 친 소녀의 죽음이다.

고속으로 달리는 차에 친 소녀가 껍질이 모두 벗겨진 채였다는 사실은 엽기적이다.

그가 올린 영상이 조작이란 주장과 차량 사고 등이 엮이면서 혼탁한 유튜브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다.

재밌는 점은 종찬이 궁지에 몰릴수록 유뷰브 수익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슈가 그의 계정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왜 유튜브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생명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 과정까지 가는 장면들은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고, 짙은 어둠으로 뒤덮는다.

모두 읽은 지금 가장 강하게 인상에 남는 부분은 그가 배달 일을 한 식당 사장님이 한 말이다.

외모를 보고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그를 판단한 것에 대한 사과 부분이다.

‘그분’과 괴이한 사건과 현실의 학폭과 지저분하고 혼탁한 인터넷 세계가 잘 버무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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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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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집이다.

이 작가의 단편집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이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선집 <완벽주의자> 이후 처음이다.

집 어딘가를 뒤진다면 이 선집의 다른 책 한두 권은 더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소설가의 책들처럼 언제 읽을지 모른다. 이렇게 읽지 않는다면 더욱.

예전에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만큼 나의 취향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이전보다 어려웠다.

이것은 다른 장편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강렬함은 여전히 살아 있다.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은 중후반까지 좋았다.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비약으로 넘어간 부분들이 상상력을 불러오지만 아쉬움도 크다.

<미지의 보물>은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그 순간까지 가는 과정을 집중하지 못했다.

<최고로 멋진 아침>은 읽으면서 둘의 관계가 ‘뭐지?’하는 의문을 던졌다.

소녀와 관련해서 보여주는 집주인 등의 반응도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생각하게 했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새로운 삶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는 그 순간 때문이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은 새로운 동네에 이사 온 후 아이가 겪는 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단편 속에서 아이의 속마음을 잘 풀어놓았다. 그래서 그 거짓말에 가슴이 아린다.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는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과 다른 전개다.

아이의 의지보다 엄마의 의지가 더 강하고, 아이는 그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이는 5일 후 완전히 망각한 것일까? 아니면 포기한 것일까?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은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고집과 사실의 관계를 잘 표현했다.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은 병 간호와 간호하면서 경험하는 감정을 조용히 풀어낸다.

 

<엄청나게 친절한 남자>는 역겨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 남자의 욕망을 오해한 엄마의 감정이 재밌다.

<시드니 이야기>는 거미의 모험을 다룬다. 시드니를 공포에 잠기게 한 그 큰 곤충은 무엇일까?

<영웅>은 가끔 선한 의지와 욕망이 빚어내는 참극을 현실과 감정의 흐름을 통해 천천히 보여준다.

영웅이 되고자 악을 저지르는 일에 대한 과정이 심리적 표현으로 잘 드러난다.

<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마주한다.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렵다.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은 과거 학창 시절 기억 일부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은 “거침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 채로 반짝”였다는 그 문장이 강하게 남는다.

이때 감정의 다른 변형을 <마법의 문>에서 느낀다. 솔직한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달팽이 연구자>는 읽으면서 회사 직원이 달팽이를 분양해주겠다고 한 일을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이 달팽이들이 너무 잘 번식을 한다고 말해 바로 포기했다.

그냥 버리는 것은 생태계 교란이라고 한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만난 마지막 장면은 공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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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시선 477
이설야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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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77권이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나는 처음 이설야 시인의 시집을 만났다. 첫 인상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둡고 무겁다.

책소개에 의하면 “독자에게 강렬한 희망의 이미지를 발신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나의 오독일까? 아니면 나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일까?

이 시집도 단숨에 읽지 못했다. 일정이 꼬이고, 생각보다 무거워 늦어졌다.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세상의 모든 시를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란 문장에 눈길이 간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노력과 열정은 사실일 테니까.

나도 한때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싶지 않았던가. 지금은 포기한 일이지만.

 

시집을 읽을 때면 시어들이 머릿속에서 쉽게 휘발해버린다.

가슴에 강하게 남는 시는 작은 표시를 한다.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지만 흔치 않다.

점점 게을러지는 나에게 시집은 아주 잠깐 숨을 쉴 틈을 준다.

<붉은 달>에서 “달력을 찢다가 알았죠 / 내 얼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란 시어를 발견한다.

이 느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무섭다.

<밑>이란 시에서 “내가 먹던 알약들이 쏟아지는 밤”이란 문장을 보고 시인의 배경이 궁금해졌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니 인천의 배경으로 한 시들이 많은 이유를 알겠다.

하지만 “나는 안녕해 / 네 슬픔의 밑바닥을 천천히 답사하는 중이야”(<밑>부분)를 읽으면서 다시 복잡해졌다.

안녕한 나와 슬픔의 밑바닥을 보여준 너의 관계가 궁금하다.

 

이 시집에는 <마트료시카>란 제목의 시가 두 편 있다.

처음 나온 시에서는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다”란 시어에 눈을 멈춘다.

한 번도 마트료시카를 보면서 해보지 못한 생각이다.

마지막 시에서는 “나는 문의 문을 계속 열고 나갔지만 //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에 멈춘다.

왠지 악몽이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아득한 과거의 어둠과 죽음.

“매일 다른 밤이 / 같은 내일을 데려온다”(<자세> 부분)에서 아득함이 먼저 다가온다.

매일 새로운 하루하루가 같은 결과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삶에 지친, 희망이 사라진, 폭력과 죽음에 노출된 사람들이 조금씩 보인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쩐지 죄를 짓는 것만 같구나”(<웅덩이, 여자> 부분)할 때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해설을 읽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단숨에 읽지 않고 긴 시간을 들여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많은 것을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집을 펼쳤을 때는 내일까지 다 읽겠다고 다짐했는데.

<봄의 감정>중에서도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과 달리 ‘죽은 등’, ‘검은 나뭇잎’ 같은 단어와 “언젠가 당신의 장례식 같은 / 봄의 감정들”이란 시어가 “꽃이 피지 않는다”로 이어진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이미지와 다른 곳에 눈길을 주고, 어둠을 들여다본다.

언젠가 다시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이 표현도 늘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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