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한 날들 안전가옥 오리지널 20
윤이안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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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오리지널 20권이다. 이 시리즈도 벌써 20권까지 나왔다. 중간중간 읽지 않은 책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고 있다. 윤이안이란 작가는 낯설다. 검색하니 이 책 포함해서 4권이 보인다. 2권은 앤솔로지다. 개인적 감상이지만 글을 참 재밌게 쓴다. 낯익은 설정이나 상황이 보이지만 장면 곳곳에 풀어놓은 이야기들이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식물의 소리를 듣는다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을 등장시켰는데 이 능력의 한계는 분명하고, 이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하지만 이 능력을 얻게 된 이유를 알게 되면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소설은 시리즈로 만들어져야 한다. 매력적인 등장인물과 능력 때문이다.


모두 네 편의 연작 소설이 실려 있다. 단편으로 읽어도 되지만 마지막 이야기에 이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장편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4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은 평택이다. 최근 이경희 작가의 소설 속에서도 평택이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한다. 오래 전 친구가 결혼하고 생활한 곳이 평택이라 몇 번 다녀온 것이 전부인 나에게 평택은 익숙한 듯하지만 낯선 곳이다. 작가들이 이 공간을 특별하게 다루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읽으면서 잠시 든 생각이다. 이번에는 이 공간을 생태학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에코시티란 이름으로 말이다. 신소재 플라스틱 시범 사용 도시의 탄생은 기후 변화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역대급 폭우를 생각하면 기후 변화는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킨다.


연작 단편으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박화음과 해준이 사이비종교의 기도원 앞에서 만난 이후 둘의 협업이 이어지지만 앞의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화음이 가진 초능력인 식물의 소리를 듣는 것과 식물 생태 법의학자를 꿈꾸는 해준의 만남은 최상의 결합이다. 이 둘은 각각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나온다. 화음이 해준을 만나게 된 데는 오지랖이 큰 역할을 했다. 칼국수집 외국인 아내와 아이가 사라진 것을 듣고 그들을 찾아나섰다가 기도원 앞에 잠복 중인 해준을 만났다. 해준이 탐정 면허를 취득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해준은 기도원에 들어간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 때문에 잠복 중이었고, 화음은 식물의 사념을 좇다가 이곳에 왔다. 뻔한 사이비 기도원의 풍경을 보여주고, 신념이란 이름으로 가족을 구속하는 사람과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종교 단체의 모습을 그린다. 재밌는 점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도구 중 하나가 기후 변화란 점이다. 이후 이어지는 사건은 화장한 애완묘를 묻고 왔는데 그 장소를 모르겠다면서 그 납골함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식물의 소리를 듣는 화음에게 최고의 의뢰이지만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함점이다. 발품을 팔면서 열심히 숲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것은 살해당한 유골이고, 이 발굴로 경찰과 인연을 맺는다. 이렇게 작가는 화음이 탐정 사무소 조사원으로 일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세계가 확장된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식물학 표본이자 독버섯이 사라진 것과 한 인물의 죽음을 연결했다. 이 독버섯을 먹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목을 조른 흔적이 있다. 살인 가능성이 있다. 그 독버섯은 해준이 도둑맞았다고 한 것이다. 탐정 사무소 직원이 나와 갇힌 해준의 모습을 사진 찍으면서 신나게 웃는 장면은 이 탐정사무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갇힌 해준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동안 둘은 단서를 찾아 피해자 집 주변을 탐문한다. 이때 드러난 몇 가지 사실은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지고, 몇 가지는 웃음을 자아낸다. 얼마나 허술한 탐정 기술인가! 결국 밝혀지는 사연은 씁쓸하다. 이때 나온 해준의 과거사는 잔인하고 참혹하다.


에코시티. 땅에 묻으면 썩는 플라스틱. 이 플라스틱만 사용하는 화음의 커피숍. 이런 화려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거대한 탐욕과 거짓은 예상하지 못한 테러를 일으킨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맞닿아 있다. 우연히 터진 맹장으로 화음이 입원한 병원에서 병원 이사장에게 테러가 일어난다. 경찰이 출동하고, 수사가 이어지지만 이 범인을 잡는 것은 화음이다. 그 사건 이면을 들려줄 때 씁쓸한 현실을 마주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 이후다. 앞에 풀어 둔 이야기와 이어지고, 다음 이야기를 암시한다. 암시는 아닌가? 조금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그 무게를 가볍게 걷어내고, 경쾌하게 풀어낸다. 이 경쾌함 속에는 아직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성장하는 화음과 앞으로 더 많이 해결할 사건들을 생각하면 벌써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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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 개정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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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낸 소설이다.

얼마 전에 읽은 <딸은 딸이다>보다 몇 년 빠르다.

1944년 작품이고, 1930년대 말 영국 등의 유럽인들이 히틀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이것과 별개로 소설 속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상당히 재밌다.

조앤 스쿠다모어의 삶을 반추하는 소설인데 많은 생각이 오간다.

막내 딸 바버라가 아파 바그다드로 서둘러 왔고, 딸이 안정되자 집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 학창시절 숭배했던 블란치 해거드를 만난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이야기는 도덕적이고 완고한 그녀에겐 불쌍해 보인다.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알려주는 대목들 몇 곳이 나오지만 진짜 삶의 모습은 기차역에 갇힌 그 순간부터다.

폭우로 이스탄불로 가야 하는 기차가 연착되고, 읽으려고 들고 온 책들을 모두 읽은 후에 일어난다.

황량한 사막과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그녀가 오랜만에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많은 선지자들이 사막에서 수련해 자신의 삶을 바꾸었듯이.

이 한가로운 시간 속에서 바쁘게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산 그녀의 삶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한 삶들이 이전에 그녀가 생각한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단단하게 벽을 쌓아 올린 삶의 다른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각성의 순간들이다.

이 이전에 있었던 조앤의 삶을 보면 현재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극성 엄마들의 삶과 닮았다.

자신의 삶을 다 받쳐 자식의 성공을 바라면서 온 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는 엄마들 말이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서 현실의 모습에 눈을 가린 조앤의 삶은 상당히 행복해 보인다.

자식들이 엄마는 모른다고 할 때도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온 그녀가 신기루 같은 삶의 이면을 살짝 엿본다.

무심코 본 장면과 무심코 나눈 대화 등에서 그녀가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이 줄줄이 드러난다.

이 각성은 사랑하는 남편 로드니를 만나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관계를 바란다.

하지만 이 각성이 현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가는 조앤이 각성한 장면들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에필로그를 통해 알려준다.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항상 행복했던 그녀.

그 세상이 깨어지길 바라지 않는 남편 로드니. “휴가는 끝났어.”라고 몰래 한숨을 내신 그.

개인적 취향은 먼저 읽었던 <딸은 딸이다>보다 이 소설이 훨씬 마음에 든다.

자신이 속인 현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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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삶은 하나의 이야기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이은선 옮김 / 늘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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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한나 아렌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선택했다. 이 책의 저자가 줄리아 크리스테바란 것도 큰몫을 차지한다. 그녀가 쓴 소설들이 집에 고이 모셔져 있다. 아직 읽지는 않았다. 소설가가 쓴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라면 조금 쉬울 줄 알았다. 나의 큰 오산이다. 2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인데 아주 힘들게 읽었다. 번역이 난해하고, 교정도 그렇게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어려운 철학 용어들이 나와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집중력을 조금만 흩트리면 난해한 문장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냥 단어만 따라간 곳도 많다.


가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악을 다룬 소설 등에서 항상 인용되는 문장 중 하나다. 이 책에서 악 그 자체와 ‘위반들’을 구분해서 사용한다. 이런 구별이 중요한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에 둘을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것보다 의도적인 악을 행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는 부분을 읽고 우리가 얼마나 한쪽으로 매몰된 사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가끔 이런 부분들이 나와 나의 사고의 틀을 깨트리고 확장시킨다. 그리고 제대로 읽지도 못할 한나 아렌트의 저서에 눈길에 준다. 좋은 번역과 높은 집중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책들임을 감안하면 읽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시선을 끄는 문장 중 “사유하는 것과 온전히 살아았다는 것은 동일하며, 이는 곧 사유하는 것을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를 읽고 점점 생각의 힘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 문장은 나를 일깨워준다. 관성과 타성에 의해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온전히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어떤 대목은 단순 반복일 뿐인 경우도 많다. 이것을 “정치적 삶이 없이는 어떤 삶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과 연결하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냥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에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붙이는 작업은 항상 있어 왔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사용하는 ‘용서’란 단어를 예수의 언어로 치환하면서 그 의미가 바뀐다. 물론 이 단어의 해석을 보면서 번역이란 과정을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한나 아렌트가 의미한 것의 엄밀한 관련성을 말이다. 오래 전 단어의 미묘한 차이에 관심을 둔 적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이 부분에 둔감해지고 있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면 잠깐 그때 감각이 살아나지만 일시적이다. 그리고 늘 철학 번역서를 볼 때면 어려운 문장과 난해한 해석 때문에 금방 지친다. 만약 나의 시선을 끄는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완독하는데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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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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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K-스토리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최근 이런 공모전이 늘어났다.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겐 좋은 일이다. 이 소설의 설정 자체가 놀랍고 신선하다. 아주 큰 주택이 지옥의 리모델링 때문에 빈방을 임차했다고 하니 대단한 발상이다. 당연히 일반 주택이라면 집 주인이 지옥에게 방을 내줄 리가 없다. 하지만 이 집은 아주 낡았고, 세입자도 겨우 두 명 뿐이다. 집 주인 할머니는 건강에 문제가 있고, 어릴 때부터 이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서주는 세 주는 일에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는다. 할머니와 전혀 혈연 관계가 없는 서주는 하숙 일을 도우며 살아갈 뿐이다. 대학을 휴학하고 현재는 식당에서 알바를 하면서 등록금을 모으는 중이다.


지옥에 세를 주면 어떻게 될까? 그 첫 장면은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망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가 먹고 있는 음식들은 오래 전 거지들이나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다. 그는 지옥에서 생전에 남긴 음식을 먹는 중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나 장면에서 놀라고 기겁하겠지만 서주는 깜짝 놀라는 수준에서 멈춘다. 다른 빈방에서는 지옥의 형벌을 받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린다. 정상적(?)이라면 견딜 수 없는 현실이지만 집을 떠나면 갈 곳도, 돈도 없는 서주에겐 유일한 쉼터다. 그리고 집 없이 떠돌던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주고 키워준 할머니가 사는 집이다. 저녁 알바를 나가는 그녀를 할머니는 취직할 줄 안다.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서주를 좋아하는 연하남이 있다. 그의 노골적인 대시를 서주는 거부한다. 현실이 삶이 버거운 그녀에게 연애는 어쩌면 사치다. 식당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면서 누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이 사는 집이 어떤지 알기에 더욱 거부한다. 어느 밤 늦게 집에 가니 대문이 잠겨 있다. 담을 넘는다. 다른 문도 잠겨 있다. 어떻게 들어갈까? 고민 끝에 방법을 하나 발견한다. 그 문으로 들어가니 지옥도가 펼쳐진다. 악마가 사람을 고문하는 중이다. 기겁할 일이지만 그냥 인사하고 지나간다. 이때 본 악마가 출근하기 전 미숫가루를 타 놓았던 의문의 인물이다. 그 미숫가루를 먹고 뱃속에서 탈이 났지만 말이다.


우연한 기회에 서로 안면은 튼다. 뿔을 단 악마가 계약할 때 부엌을 사용해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미숫가루미 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알고 있던 악마가 자꾸 마주치다 보니 조금 가까워진다. 집밖에서 싸움이 나면 악마는 맛있게 그 싸움을 먹는다. 그의 존재는 나중에 서주를 짝사랑하는 승빈이 억지로 바래다줄 때 연적처럼 보인다. 승빈의 마음은 서주를 향하지만 그녀는 일상의 힘겨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식당가를 배회하는 의문의 사람은 서주가 생각할 때 할머니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할머니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첫째 아들이 집으로 숨었을 때 경찰이 와 잡아간 후 집에 경찰을 들이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만약 둘째 아들이 집에 쳐들어와도 서주는 경찰에 쉽게 연락하지 못한다.


할머니는 말한다. 지금 세상이 지옥이라고. 세 준 지옥의 풍경보다 현실 세계가 더 지옥 같은 모양이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현실이 더 지옥 같을 것이다. 서주는 집 안팎에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아들과 할머니의 건강 때문이다. 할머니의 건강검진을 위해 알바로 모은 돈을 쓸 생각도 한다. 착하다. 어쩌면 외로운지 모른다. 홀로 남겨진 외로움 때문에, 갈 곳 없는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에게 더 애정을 쏟는지 모른다. 그녀 주변에 있는 모카 언니나 짝사랑 연하남 승빈이 있지만 쉽게 그들과 친해지지 못한다.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정체도 밝힐 수 없는 현실이라니.


지옥이 나온다고 해서 참혹한 장면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문안으로 보이는 지옥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지옥을 그대로 재현했다. 하지만 그 지옥을 벗어난 사람들이 집에 나타나고, 그를 데리고 다시 들어가는 악마가 있다. 그런데 그 악마가 서주와 이상한 관계를 맺는다. 집주인 가족에 대한 호의라고 하기에도, 그녀의 결핍을 먹는다고 하기에도 이상하다. 그리고 서주도 이 악마가 현실의 사람보다 더 마음이 간다. 악마의 유혹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의 예상은 심사평에 나온 것처럼 조금씩 빗나간다. 웃픈 현실을 보여주면서 시선을 계속 끌어당긴다. 황당하지만 코믹하고 아련한 소설이다. 소설 후반부 악마의 존재는 예상한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를 매혹시킨다. 미니 시리즈로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지옥 풍경 때문에 공중파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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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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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 수 없는 이스라엘 판타지 소설이다. 작가의 전작 <우연 제작자들>을 보지 않았지만 좋은 평을 받은 것을 봤기에 선택했다. 이 책을 펴기 전까지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쉽게 빗나갔다. 생각보다 더딘 초반 전개에 약간 곤혹스러웠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문장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단계를 넘어가자 소설이 나에게 문을 살짝 열어주었다. 왜 나는 출판사 소개글처럼 초판 몰입도에 깊게 빠지지 못했을까? 솔직히 말해 이런 도입부는 그렇게 아주 기발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나에게는.


내 이름이 나오는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면 어떨까? 소설 속 주인공 벤은 서점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들고 나온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은 그렇게 산 책을 펼쳐 읽는 자신을 묘사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현실과 책 속 내용이 같다. 그리고 그가 이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이 흘러나온다. 울프라는 친하지만 친밀하지 않은 노인이 남긴 위스키 두 병을 유산으로 받고, 책을 사고, 집에 온다. 집밖에 수상한 누군가가 있지 않았다면 책 속 내용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내용이 현실이 되고, 술병에 적힌 이름을 찾아 ‘바 없는 바’라는 술집까지 온다.


‘바 없는 바’의 오스나트는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일했다. 가끔 이상한 이름의 술을 찾는 사람이 찾아오면 주인 벤처 부인에게 데리고 간다. 그녀가 일하는 밤 중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낯선 남자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술은 마신 후 갑자기 둘은 연인처럼 대화를 나눈다. 이 상황이 나에겐 너무 이상했다. 나중에 이 상황을 이해할 이야기가 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설의 핵심인 ‘경험’의 강렬함을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간단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 둘은 연인 관계가 아니었고, 남자가 넣은 경험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이다. 만약 스테판이 넣은 양이 많았다면 평생 그 경험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 경험이 가짜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 나오고, 벤처 부인에게 이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간 이야기의 문이 나에게도 열렸다.


경험과 기억은 다르다. 작가는 이 부분을 강조한다. 울프는 사람들의 경험을 축출해서 술에 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행동에서 경험한 것을 뽑아 술에 넣는다. 이 술을 마신 사람은 경험자들과 똑 같은 경험을 한다. 이 경험 속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녹아 있고, 그 강렬함은 경험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 설정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가상현실이나 대체경험 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실제 그 사람이 한 것을 경험한다. 조금 황당한 설정이긴 하지만 벤이 다양한 무술 등의 경험을 마시면서 뛰어난 실력자인 스테판과 싸우면서 절대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여준다. 경험이 근육의 기억까지 새롭게 재구성해주지 않는 한 사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울프가 개척한 경험의 축출과 실제적인 대리 경험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진다. 위험한 곳으로, 자신이 원한 곳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혹은 시간 문제 등으로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 술 한 잔으로 그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다. 당연히 더 자극적인 경험을 찾는 사람이 생기고, 자신만의 경험을 만들어오길 바라는 사람도 나타난다. 이 경험 대리가 하나의 사업으로 발전하고, 거대한 부를 이룰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아직 현실의 권력을 실제 권력자들이 쥐고 있고, 이들의 성장은 생각보다 빠르지 않고, 경쟁도 치열하다. 이런 현실 속에 이들을 죽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스테판이다. 그가 왜, 어떻게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오스나트를 홀린 술의 원천도.


울프가 남긴 술병을 우연히 얻은 벤, 그 술병을 얻었지만 방치한 오스나트, 그 술병을 뺏으려는 스테판. 이렇게 세 명의 남녀들은 서로 엮이고 꼬인다. 악역의 스테판에게 대항하는 벤과 오스나트. 하지만 오스나트의 경험 속에는 아직 스테판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남아 있다. 술이 약한 벤. 그는 경험이 가득 든 술의 힘으로 놀라운 실력을 얻는다. 이전에 묘사한 삶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들이 울프의 유산을 둘러싸고 벌이는 싸움은 강렬한 액션을 동반하고, 반전을 품고 있다. 여기에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다. 제목 그대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안내서다. 벤과 오스나트는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작가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책 속에 넣어 여운을 남긴다. 초반과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작가의 다른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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