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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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제는 <고해>다. 처음엔 원제를 모른 채 읽었다. 모두 읽은 후 우연히 원제를 알게 되면서 작가가 마지막에 들려준 이야기가 완전히 이해되었다. 이번 소설은 이전까지 읽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과 조금 다른 느낌이다. 피해자 가족을 중심에 둔 것도 아니고, 가해자에 완전히 몰입한 것도 아니다. 비 오는 날의 뺑소니 사건과 그 사건의 피해자 가족을 보여주면서 하나의 사건이 두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천천히 풀어낸다. 이 사고는 두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준다. 어느 가족이 더 큰 피해를 입었는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피해를 수량화해서 나타내는 일은 힘들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쇼타는 알바 친구들과 술 한잔한 후 집에 들어온다. 여자 친구가 ‘지금 당장 날 보러 오지 않으면 헤어질 거야’란 문자를 보내왔다. 집에 다른 가족들은 없고, 자신이 거둔 길 고양이만 있다. 차에 고양이를 태우고 여친의 집으로 간다. 비 오는 밤이고, 고양이 나나가 이동 장에서 평소와 다르게 운다. 이동 장에 손을 뻗치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 온다. 무언가를 치었다. 백미러에 비친 붉은 빛을 보고 멈추지 않고 그냥 달린다. 다음 적색 신호가 나타날 때까지. 이 프롤로그는 정말 잠깐 동안에 벌어진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적색 신호 속에 순간 쇼타의 머리 속을 지나갔을 생각은 그려내지 않았다. 다만 차안에서 쇼타가 느낀 냉기에 대해서만 말한다.


제목에 나온 도망자란 단어 때문에 쇼타가 경찰에 잡히지 않고 계속 도망다니는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작가는 우수한 경찰에 잡힌 순진한 대학생 뺑소니 사고자를 바로 알려준다. 왜 작가가 차종을 말했는지, 이 차종이 어떤 단서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쇼타는 자신이 뺑소니란 사실을 숨기지 못한다. 다만 사람을 치었다는 것을 그 당시 알지 못했고, 왜 그 늦은 밤에 나갔는지 거짓말한다. 부모가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에 들어가지만 그는 음주, 뺑소니, 살인치사 등의 죄목으로 4년 10개월 형을 받는다. 검사가 구형한 6년에 거의 비슷한 형량이다. 피해자 가족에게 이 편결은 부족한 느낌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남편은 이 재판 과정을 아들에게 녹음해서 와 달라고 요청한다. 왜 그럴까?


2장으로 넘어가면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쇼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엄마가 유일하다. 뺑소니 사고로 유명한 방송 출연 교수였던 아버지는 추락했고, 부모는 이혼, 누나는 파혼했다. 아버지가 방송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누나의 파혼 등은 솔직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산산조각난 가족의 현재를 보여준 후 엄마와 함께 살고 특이한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하지만 쇼타는 파혼한 누나를 보는 것도, 자신의 뺑소니 사고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가석방의 기회가 있었지만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그 기회를 차 버린 적이 있었다. 엄마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구하고, 일용직으로 겨우 살아간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항상 망령이 떠돌고, 그의 과거를 아는 누군가가 지적할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하다.


작가는 쇼타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변호사가 피해자 가족을 만나 분명하게 사과할 것을 말하지만 황금 같은 20대의 거의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생각에 이를 거부한다. 제대로 된 반성이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뒷담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알게 된다. 그가 죄의식을 가지고 평범한 일용직으로 건실하게 보낼 때 옆에 다가온 인물은 쇼타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는 자칭 사고사 출소인이다. 그는 아주 조금씩 쇼타에게 다가와 그의 마음에 사회에 대한 불만의 씨앗을 심어둔다. 이 소설에서 쇼타가 과연 어떻게 이 인물을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도 재미 중 하나다. 쇼타를 보면서 범죄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이고 일괄적인 거부감과 선입견을 돌아보게 된다.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은 쇼타에게 죽은 피해자 가족이다. 그 중에서 피해자의 남편은 쇼타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탐정 사무소를 통해 쇼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의 아내가 늦은 밤 빗길에 나간 것도 당시 그의 고열 때문이었다. 5년이 흐른 후 그는 치매가 있어 가끔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다른 누군가의 표상이 되었기에 후배 선생이 자주 찾아온다. 탐정의 얄팍한 상술은 치매 노인의 조사를 더 연장하고, 쇼타가 사는 곳까지 가게 한다. 그가 쇼타에게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복수일까? 그의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속죄는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뛰어난 가독성 속에 의문의 씨앗들은 하나씩 꽃을 피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왔을 때 원제의 의미가 드러나고, 죄의식과 진정한 의미의 속죄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 순간의 실수를 이렇게 풀어내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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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 축 당첨! 여름휴가 팡 그래픽노블
필립 베히터 지음, 김영진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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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몇 가지 나의 무지와 선입견에 대한 고백부터 하겠다.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 볼로나 문학상 정도로 생각했다. 그림체만 보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프랑스 작가라고 생각했다. <토니 : 티끌 모아 축구화>의 후속작이란 것도 생각도 못했다. 책 마지막까지 프랑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재밌게 읽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작가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나서 독일 작가란 사실을 알았다. 나의 이런 착각은 다른 만화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길지 않은 만화이지만 내용은 결코 적지 않다. 여름 휴가를 가고 싶지만 경제적 문제로 갈 수 없다고 하는 엄마와 다툰다. 여름 휴가 취소에 절망하면서 시까지 짓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열심히 잡지의 이벤트에 응모한다. 그러다 아주 멋진 최고급 호텔 숙박권에 당첨된다. 아주 행복한 소식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에 간다. 화려하고 멋진 호텔이다. 그런데 이 호텔은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토니가 놀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수영장에서 첨벙첨벙 놀고 싶은 토니에게 어른들이 눈치를 준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여름 휴가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득한 휴가가 되었다. 이때 엄마가 근처에 사는 친구 크리시에게 연락을 한다. 그들은 쿨하게 하루만 자고 그 멋진 호텔을 떠난다.


작가는 이후 토니의 즐거운 하루들을 보여준다. 엄마 친구 집에서 그 집 아이들과 강에서 놀고, 그 집에서 빌린 차와 캠핑 용품으로 바다에 간다. 바다는 사람으로 가득하지만 아이들도 많다.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논다. 축구를 하고, 수영도 하고, 보트도 타고, 게임도 하면서. 작가는 이 장면들과 상황을 많지 않은 분량 속에 착실하게 그려 놓는다. 수많은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스마트폰을 가진 아이가 한 명 밖에 없다고 했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랐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그 아이와 함께 조가 된 후 일어나는 일들이다. 스마트폰의 위력과 그 위력을 숨기기 위한 노력들이 만들어낸 작은 행위들 말이다. 이 아이들이 게임에서 이겨 받는 것은 큰 빙수 한 그릇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과 사람들의 표정, 생략된 감정들이 눈길을 끈다. 토니는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엄마는 자신만의 휴가를 즐긴다. 아이는 일이 있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엄마에게 달려온다. 흔한 장면들이지만 그 흔한 장면이 우리의 행복이자 일상이다. 행복한 시간이 지나가면서 토니는 언제 돌아갈지 묻는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며칠 더 있을 거란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연장되고, 토니의 여름 휴가는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뒤에 남은 것은 즐겁고 행복한 추억과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다. 화려함보다 일상의 연속성과 즐거운 놀이로 가득한 휴가가 얼마나 두 사람을 행복하게 했는지 보여준다. 내가 아이와 이렇게 놀아주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읽으면서 그 뜨거운 햇볕에 살이 벗겨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여름 해변에서 내 피부가 얼마나 자주 피부 물집이 잡혔던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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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비 - 금오신화 을집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9
조영주 지음 / 폴앤니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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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조영주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집에 작가의 장편이 몇 권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상당히 늦게 읽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 책소개만 보고는 읽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작가의 이름을 보고 선택했다. 책을 읽기 전 <금오신화 을집>이란 후기를 우연히 먼저 보았다.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은 고전 <금오신화>를 생각하면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 낯선 이야기와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설정들이 나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이라 끝까지 읽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 다시 <금오신화>에 대한 관심만 높아졌다.


제목이 한글로 <비와 비>다. 이 ‘비’는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두 인물 이비와 박비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왕비 공혜왕후를 의미한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금호신화 속 이야기를 끌고 와 엮었다.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을 상상력으로 한곳에 모아 조선 초기 정쟁의 결과를 새롭게 풀어낸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박팽년의 후손이다. 사육신 박팽년의 일가는 삼족이 멸족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는 항상 이 힘든 시기를 벗어난 후손들이 등장한다. 실존인물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복원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일이고, 이 시기는 아직 압구정 한명희가 살아 있던 시절이다. 박팽년의 손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를 살리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다.


전라 감찰사 이극균의 딸 이비, 전라감영의 관노비 박비. 이 둘은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나중에 밝혀지는데 이 소설의 핵심과 이어져 있다. 이비는 수양딸이지만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아주 활발하게 살아간다. 그녀의 곁에는 박비가 있다. 박비는 외모가 아주 출중해 많은 양반집 마나님들이 탐낸다. 자신의 사노비와 교환하자는 요청이 많다고 한다. 이 시기에 사노비와 관노비를 바꾸는 것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박비는 노비이지만 말을 타고 활을 들고 다닌다. 말을 타는 이유는 이비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주인과 노비 관계이지만 마음이 아주 잘 맞다. 하지만 신분의 벽은 쉽게 감정에 휘둘리게 하기에는 너무 높다.


전라감영에 한명희가 보낸 어사가 오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극렬을 어떻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왔다. 어느 날 이비를 본 어사가 깜짝 놀란다. 돌아가신 왕비 공혜왕후가 복숭아 나무 아래 있는 것이다. 귀신인가? 환생인가? 이 일이 두 비를 떠나게 한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다. 오세 천재 김시습. 놀라운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머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천천히 움직인다. 이비와 박비는 감영을 떠난다. 매월당이 준비한 주막에서 주모의 욕심이 사건을 만든다. 둘은 헤어지게 되고, 이비는 매월당의 제자가 된다. 이제 이야기는 한양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몽유도원도’와 엮인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에 있다.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우린 진품을 보려면 일본에 가야 한다. 그림도 유명하지만 그 속에 든 시문도 중요하다. 조선 초기 명필 안평대군의 발문도 있다. 이 그림이 수양대군에게 꼬투리가 잡혀 안평대군은 죽었다. 시대를 건너 성종 초기 성종의 형 월산대군은 유명한 화가에게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같은 ‘몽유도원도’을 요청한다. 이 그림 속에는 성종의 죽은 왕후의 얼굴이 들어가 있길 바란다. 인물화로 이름난 화가도 월산대군의 설명만으로 그 얼굴을 그리는 것은 힘들다. 왕비의 소문이 있는 무계정사를 찾아가 영감을 받으려고 한다. 이때 남자로 분장한 이비를 만난다. 전라감영에서 사라진 그녀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롭게 진행된다.


성종은 죽은 비를 잊지 못해 시름시름 앓는다. 우연히 남장한 이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죽은 비와 닮았기 때문이다. 남장을 했지만 그의 입술은 이비를 덮는다. 뭐지? <커피프린스 1호점>의 설정이 떠오른다. 박비와 닮은 이에 끌리는 이비. 연락이 두절된 박비. 이 모든 판들은 매월당이 조금씩 준비한 것이다. 물론 이 준비가 완벽할 수는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비다. 이야기는 엮이고, 꼬이고, 뒤틀린다. 닮은 외모와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하나로 묶인다. 이 사이사이를 채우는 이야기는 <금오신화>의 오마주와 한시이지만 이 부분은 낯설다. 아마도 <금오신화>를 잘 기억한다면 더 재밌을 것이다. 읽으려다 시작도 못한 많은 한국 고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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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월드 영 월드 1
크리스 웨이츠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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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미국의 각본가, 프로듀스, 감독이다. 솔직히 말해 최근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영화 제목을 보면 아주 낯익다. 그리고 이 책소개에 나오는 <헝거 게임>이나 <메이즈 러너> 등은 영화로 본 적이 없다. 소설도 읽은 적이 없다. 집에 책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관심이 생긴 것은 전염병으로 어린이와 어른은 모두 죽고 청소년만 살아남은 세상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굉장히 범위를 좁혀 놓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소설의 설정대로라면 인류는 몇 년 안에 멸종할 수밖에 없다. 실제 도입부에 워싱턴스퀘어의 리더 워싱턴이 나이가 차면서 죽는다. 아주 암울한 세상이지만 이 암울한 세상에서도 작은 희망과 각자 자신들만의 삶을 꾸리는 무리들이 나온다.


형 워싱턴이 죽으면서 제퍼슨이 워싱턴스퀘어의 무리를 이끈다. 형이 죽는 날 업타운의 무리들이 돼지를 끌고 와 여자 둘과 바꾸자고 한다. 이 무리에겐 황당한 일이다. 업타운 무리와 실랑이가 벌어지고, 돼지는 죽는다. 업타운 무리는 떠나고, 워싱턴스퀘어 무리는 이 고기로 오랜만에 파티를 한다. 즐거운 일이지만 워싱턴의 죽음이 그들의 현실을 일깨워준다. 제퍼슨은 미래를 꿈꾼다. 이 무리의 브레인인 브레인박스가 전염병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논물에 대해 알고 공립 도서관에 가봐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라면 지하철이나 버스 등을 타고 쉽게 갈 수 있지만 이젠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수많은 집단의 위협 속에 놓인다. 조각 조각 나누어진 무리들이 자신들만의 구역에서 암울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간다.


소설은 두 화자가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두 시점은 제퍼슨과 제퍼슨의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인 돈나다. 제퍼슨은 이야기꾼이자 적은 희망도 버리지 않는다. 돈나는 총을 든 저젹수이자 활발한 소녀다. 브레인박스는 뛰어난 과학 실력을 바탕으로 워싱턴스퀘어의 전력 등을 만든다. 그의 지식이 이 무리에 큰 힘이 되지만 미래까지 책임질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지식으로 바꾸어 나가는 현실의 몇몇 장면들은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 기반 시설이 무너진 세상에선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필요 지식이다. 실제 전투 등에서는 거의 무력하지만 그의 지식이 빛을 발할 때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청소년들이 모르는 과학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른들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는 과정을 보면서 어떤 대목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코로나19 팬데믹이 떠올랐다. 2014년에 출간된 소설임을 감안하면 초기 미국 뉴욕의 대처와 상황이 이 소설 속 장면 일부와 맞닿아 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보여주는 장면은 각각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선택에 의해 나누어진다. 공립 도서관에 사는 유령 같은 아이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은 참혹하다. 강력한 무기도 없고, 농사 지을 땅도, 힘도 없는 이들이 선택한 생존 방식 중 하나가 드러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서관에 도착한 제퍼슨 일행을 공격하는 이들이 나오는데 바로 업타운 무리다. 이들의 공격으로 제퍼슨이 타고 온 차량은 불탄다. 이제 이들은 도보로 움직여야 한다.


이후 제퍼슨 일행이 걸으면서 처음 이 전염병이 퍼진 섬으로 가려고 한다. 160킬로미터다. 과거 차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이젠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가는 도중에 만날 무리들이 얼마나 호의적일지도 생각해야 한다. 실제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곳곳에서 만나는 이 무리들이다. 각각의 무리들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무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퍼슨 일행 각자의 능력과 개성도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녹아들면서 소소한 재미를 만든다. 미국의 현재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재밌는 점은 제퍼슨 형제가 혼혈이고, 피터는 혼혈이고, 시스루로 불리는 작은 소녀도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경험하고 말하는 과거와 현재는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1권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다음 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어떤 식으로 이들의 미래가 이어지고, 변화가 생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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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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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1952년에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낸 소설이다.

다른 이름으로 낸 이번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현재 나온 책은 개정판이고, 이전과 달라진 것은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는 것 정도다.

세부적인 번역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절판된 책이 새로 나오는 일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왠지 연극 무대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앤의 집을 배경으로 상당히 많은 일이 벌어지고, 대사나 행동 등이 연극적으로 다가온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이란 문장은 상당히 편협적이다.

아들인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딸과 엄마의 관계가 분명히 있겠지만 모든 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 데 시간의 흐름과 그들의 상황과 엮여 있다.

1부는 엄마 앤 프렌티스가 딸 세라를 스위스로 3주 동안 여행을 보낸 후 이야기다.

딸을 그리워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앤은 외롭게 살고 있는 리처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감정에 빠져 당연히 딸도 그녀의 결혼을 축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세라는 리처드의 외피만 보고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리처드 또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고 싸우는 두 사람에 사이에 낀 앤은 고통받는다.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서고, 자신의 미래 하나를 포기한다.

2부에서 변한 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외모도 바뀌고, 집의 인테리어도 바꾸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바쁘기만 할 뿐 내면은 공허하다.

이 내면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파악한 인물은 데임 로라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세라의 결혼이다.

위험한 남자이자 결혼을 세 번 했고 아주 부유한 남자의 청혼이다.

돈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행복일까?


작가는 복잡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앤과 세라의 상황을 보여주고, 그들의 선택을 알려준다.

이 선택 이면에 놓인 감정을 3부에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딸과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상대방의 선택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개인적으로 감초 역할을 하는 하녀 이디스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집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이 두 모녀를 도와준 그녀의 통찰력은 놀랍다.

친절하지 않지만 자신이 할 일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그녀다. 퉁명스러운 그녀가 어느 순간 사랑스럽다.

연극적으로 갈등을 만들고, 이 갈등을 키우고, 해결하는 과정을 거친다.

애거사 크리스티란 이름을 생각하고 읽으면 조금 밋밋하지만 상당히 가독성이 좋다.

그리고 상류층의 삶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약간 거부감이 생긴다.

그들이 노동이나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 보여주는 시각 때문일 것이다.

소설 곳곳에 통찰력을 보여주는 문장들이 나오고, 공감할 대목들이 보인다.

한동안 손 놓고 있던 추리소설에도 눈길을 주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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