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미스터리 컬렉션
홍정기 지음 / 북오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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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가의 단편집을 한 권 읽었는데 새로운 단편집이 한 권 또 나왔다. 요즘 부쩍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검색했더니 그렇게 많은 책이 아니다. 단기간에 자주 보다 보니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이번 단편집에는 여덟 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호러와 미스터리가 섞여 있는데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의 상실 등을 다루는 이야기가 많은데 상당히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엽기적이라 읽으면서 살짝 불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편을 읽은 후 일본 호러물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분위기의 소설 같았다. 나의 착각일까?


<쓰쿠모가미>는 일본 전래 민간신앙으로 시간이 지나 오래된 물건에 신이나 정령이 깃든다는 의미다. 작가는 사드의 희귀본을 끌고 와 이야기를 섬뜩하게 펼친다. 헌책방에서 훔친 사드의 책에 깃든 악령이 가족을 파괴하는 모습은 아주 잔혹하다. 한때 헌책방을 돌면서 포스팅하던 작가의 블로그가 떠오른다. <Low Spirit>은 하나의 캡슐로 극상의 쾌락을 느끼는 약 이야기다. 한 회사원의 불만에서 시작해 사회 현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 빠르게 펼쳐진다. 부작용이 없다는 평가 속에 자판기에서도 팔린다. 과거 술, 담배 자판기가 떠오른다. 이 약을 다량으로 먹고 식물인간처럼 된 사람이 나온다.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계를 다루기보다는 현실을 축소해 반전을 보여준다. 분량을 더 늘여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슬럼프>는 첫 소설의 성공 이후 후속작의 실패와 좌절을 다룬다. 새로운 작품을 도저히 쓸 수 없는 현실에 그가 존경하는 작가가 한 장소를 소개해준다. 작품만 쓸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할까 하는 생각이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공간에서 얼떨결에 계약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모른 채. 그 계약 내용은 너무나도 섬뜩하다. 참혹하다. <조난>은 육아의 고통 때문에 아들을 학대한 아내와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산행을 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야기다. 읽으면서 아빠의 욕심과 산행에 이질감이 조금 느껴졌다. 추락한 후 일어난 사건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의 존재는 모두 읽고 난 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다. 사실인지, 아니면 단순히 뇌내 망상인지 말이다.


<미안해>는 아빠의 교통사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 고등학생이 엄마를 죽이겠다고 마음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엄마의 학대를 견디면서 엄마를 죽이고 집을 떠나려고 한다. 엄마를 죽이는 장면에서 사실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데 얼마 전 비슷한 단편을 다른 곳에서 읽었다. 현대 사회의 비극 중 하나다. <크리스마스의 유령>은 화재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남편 이야기다. 가족을 잃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후 일용직과 술로 전전한다. 죽을 용기가 없어 힘들게 세상을 정처없이 떠돌다 옛 동네에 온다. 그리고 분노한다. 예상하지 못한 처참한 행동을 하는데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가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벌어진 그 사건은 서늘하고 무섭다.


<떠도는 아이>는 불임과 난임 부부라면 공감할 부분이 나온다. 힘들게 어렵게 성공한 임신이 어이없는 사고로 죽자 이 부부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윗집에 노부부가 사는데 부부행위 도중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멈춘다. 그리고 이 부부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이의 손자국이 TV에 찍혀 있다. 이때 내가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심란하다. <번식>은 두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작가가 책 마지막에 주석을 붙여 두지 않았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공한 친구의 초대, 멋진 만찬, 여자들과의 즉석미팅, 원나잇 등이 빠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날 이후 성기 주변에 생긴 이상한 증상은 흔한 성병이 아니다. 읽으면서 괜히 사타구니를 긁게 된다. 단편 속에 깔아 둔 복수극 하나는 요즘 일어나는 일들과 연결된다.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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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
로라 데이브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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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간단한 책소개를 읽고 리안 모리아티의 <허즈번드 시크릿>을 떠올렸다. 남편의 비밀이란 키워드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펼쳐 읽자마자 다른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남편의 비밀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출근한 줄 알았던 남편 오언이 남긴 쪽지를 받았고, 남편의 딸 베일리는 학교에서 60만 불이 든 가방을 들고 나온다. 여기에 남편이 일하는 회사의 회계부정 문제가 터진다. 머릿속은 빠르게 오언의 잠적이 이 사건과 관계 있고, 그가 남긴 돈은 부정한 방법으로 아내와 딸에게 남긴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이 추측은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하나씩 무너지고,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로 나를 혼란으로 몰아간다.


물론 내가 혼란스럽다고 해도 소설 속 주인공 해나와 딸 베일리만큼은 아닐 것이다. 남편의 상사가 FBI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오언을 오해하기 딱 좋은 수준의 이야기다. 실제 FBI 요원들이 그녀를 찾아오긴 한다. 그 흔한 수색영장 한 장 들지 않고 말이다. 그 이전에 텍사스 법원 직원이 찾아온다. 수상한 일 투성이다. 그의 잠적이 온갖 상상을 다 불러온다. 그리고 의붓딸 베일리와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도 않다. 하지만 둘은 힘을 합쳐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런데 베일리는 열여섯 살로 한참 예민한 소녀다. 자신의 아빠를 빼앗아 갔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믿고 따라야 할 어른이다. 불안정한 둘의 여행이 시작한다.


그 여행의 시작은 베일리의 어릴 적 기억이다. 텍사스 오스틴에 있었던 결혼식 장면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둘은 오스틴으로 온다. 베일리의 기억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아주 부정확하다. 성당에 가서 자료를 요청한다. 개인 정보이다 보니 거부가 먼저다. 그리고 둘은 오언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도시 곳곳을 뒤진다. 그러다 오언의 학창 시절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너무 형편없는 성적 때문에 벌어진 이야기다. 그런데 해나의 전 남친이자 변호사에게서 오언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온다. 오언의 공식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대학교나 고등학교나 학력 등이 모두 거짓이다. 이때 과거 그를 본 한 남자와 있었던 일이 펼쳐진다. 그의 정체는 무엇이고, 왜 공식 기록은 가짜이거나 없을까?


상당한 가독성을 가지고 있다. 잘 읽힌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라진 남편의 과거를 좇아 그를 찾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실체를 찾아갈수록 더 알 수 없다. 베일리와의 작고 섬세한 갈등이 현실적으로 펼쳐진다. 둘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이 감정들을 풀어놓고, 그가 잠적한 이유를 계속 생각하게 한다. 해나가 사랑했고, 결혼했던 남자는 과연 누굴까? 베일리의 아빠는 맞는 것일까? 작가는 여기에 과거 이야기를 중간중간 끼어 넣는다. 그런데 그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가 아닌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역행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종점에서 오언이 진짜 감정이 드러난다. 이보다 더 뜨거운 부성애가 있을까! 뭉클하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잔잔하다. 놀라운 사실들이 계속 나오지만 장면들만 놓고 보면 자극성이 거의 없다. 살인이나 심리적 스릴을 강조하는 장면이 없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금 밋밋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천천히 풀어내는 진실과 잘 짠 구성은 계속 책에 눈길을 주게 한다. 화려한 연출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가슴 한곳으로 파고드는 장면과 섬세한 심리 묘사는 아주 멋지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남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 그림자의 일부를 잠시 보았을 때 그 마음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혀진다. 오언이 해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많고 중요하지만 그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진솔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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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집을 샀어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최하나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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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강남이 성공의 기본이 되었다. 오래 전 방송에서 강남에서 산다고 했을 때 연예인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욕이 나왔다. 대본에 있는 말이라고 해도 최고의 MC에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과 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송을 보고 아주 놀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나의 감각은 조금씩 무디어 갔다. 솔직히 말해 강남이라고 통칭하지만 진짜 노른자 부분은 한정되어 있다. 사람들의 욕망은 이 한정된 부분을 확장하고, 그 확장된 공간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환상을 사랑한다. 강남이 부와 성공의 상징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환상을 아주 빠르게 다룬다.


주인공 건동은 10년을 공시생으로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 높이는 점점 낮아졌지만 시험에서 계속 떨어진다. 집에 손 벌리기도 무섭다. 10년 동안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회의감이 생긴다. 이때 잡은 일자리가 학원 실장이다. 학원 실장이란 이름이 좋아보이지만 현실은 온갖 잡일을 하는 사람이다. 급여는 겨우 200만원 정도.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그를 유혹하는 목소리가 유튜브를 통해 흘러나온다. 소위 말하는 부동산 갑부가 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동영상이다. 자신의 성공담을 멋지게 포장해서 말하니 현실이 암담한 독자들은 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건동은 부동산 성공 함정 속으로 빠져든다.


사실 건동의 탐욕이 아주 거대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중산층의 꿈을 꾸고 있지만 현실은 갑질하는 원장과 저임금의 노동뿐이다. 유튜브에서 부동산 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건동 같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돈을 번다. 그 유혹은 현실의 삶이 비루할수록 더 강하다. 부동산 물건을 보기 위해 걸어간 그를 부동산 중개사무소 사장이 그를 어떻게 봤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그가 왜 허세를 부리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실수령 2백만 원도 되지 않고, 고시원에 살면서 벤츠를 리스해서 타고 다닌다. 옷도, 신발도 비싼 것 비싼 것으로 바꾼다. 사람들이 그보다 그가 타고 온 차와 옷차림 등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에 기반했다. 당연히 삶은 더욱 퍽퍽해진다. 하지만 그에겐 꿈과 희망이 있다.


가용할 돈이 부족하고, 부동산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그는 갭투자로 작은 집을 산다. 얼마 전 같은 부동산 부흥기라면 이 갭투자가 돈을 벌어주었겠지만 그가 산 물건은 결코 좋은 물건이 아니다. 부엌을 만들면 안 되는 불법 건축물이 되면서 벌금을 내거나 부수어야 한다. 분노의 망치질은 그의 삶을 더욱 나락으로 이끈다. 이때 다가온 사기꾼의 손길은 너무나도 달콤하다. 젼형적인 사기 수법이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결코 보지 못한다. 그를 속이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그 과정에 떡고물이 그에게 떨어진다.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작은 실수가 파국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건동에게 초점을 더 맞추었지만 실제 삶이 더 불행한 사람들은 그의 명의로 된 빌라 등에 사는 입주자들이다. 자신들이 힘들게 모은 돈들이 공중으로 사라진 그들의 삶은 또 어떤가. 모두가 부동산 사기꾼의 피해자들이다. 소설은 피해자들보다 건동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니 그의 삶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가 학원 등에서 당하는 모욕과 폭력 등은 그를 이런 상황 속으로 더 몰아간다. 그 적은 월급마저 없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부모의 갑질을 그대로 따라하는 딸을 보면서 또 한 번 놀란다. 결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갑질과 부동산 사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도 있다.


소설 첫 장에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은 건동을 두고 임산부 남편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내뱉는 ‘강남에 집을 샀어’라는 외침이나 강남에 집도 없는 것들이 애들을 낳는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야기 후반으로 가면서 서서히 이해가 된다. 긴 장편이 아니다 보니 아주 빠르게 몰락으로 넘어가는데 살짝 아쉬운 대목도 있다. 그리고 높아지는 이자율에 무리한 대출로 고생할 것이 뻔한 사람들의 삶이 살짝 보인다. 이 시기가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고, 누군가는 또 나락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번에 카카오페이지와 책을 동시에 번갈아 가면서 읽었는데 역시 가독성은 책이 좋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 날 때 책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카카페는 좋은 읽을 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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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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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언제나처럼 생각한 것만큼 시집을 읽지 못하고 있다. 시에 대한 욕심을 내어 보지만 쉽게 손길이 나가지 않는다. 쌓여 있는 시집을 보면서 가끔 한두 편 읽지만 한 권을 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혹시 한 권을 다 읽게 되면 다시 시인의 시에서 내가 찾은 것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어떤 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이미지도 그려지지 않고,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소리 내어 시를 읽는다. 집중력도 키우고, 내가 놓친 시의 소리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시인들이 운율에 신경을 덜 쓴다고 하지만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나의 작은 이해 방법 중 하나다.


거창한 제목에 먼저 끌렸다. 앞에 말한 시에 대한 관심과 이해 부족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얕은 기대도 있었다. 목차를 보면서 낯익은 시인의 이름들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작가들의 이름도 올라와 있었다. 저자는 40개의 꼭지로 시인들을 나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시작해 최근에 알게 된 ‘알젤루’까지 서양의 시인들을 길게 늘어놓는다. 역자는 그 시대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면서 원문을 같이 놓아두었는데 솔직히 말해 대부분 그냥 지나갔다. 나의 짧은 영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고어를 그대로 쓴 부분도 보였기 때문이다. 영어의 운율을 잘 모르니 그 묘미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유럽으로 넘어오면 정말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하지만 모르는 시인들이 더 많다. 워즈워스 이후 시인들은 낯익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일과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두 사람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바로 괴테와 푸시킨이다. 아주 오래전 허영심에 들뜬 내가 <파우스트>를 그냥 읽은 적이 있었다. 그냥 글자만 읽었다. 당연히 그 매력은 하나도 몰랐다. 푸시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이 이 두 나라의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언제 시간되면 집에 있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정독해보고 싶다. 절판된 푸시킨 전집도 구할 수 있다면 사고 싶다.


윌트 휘트먼과 T. S. 엘리엇은 내가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시인들이다. <풀잎>을 몇 편 읽고 이해하지 못해 그만 두었고,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구 때문에 <황무지>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었다. 파운드의 시집은 시작도 못했다. 그냥 고히 모셔두고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전의를 불 태웠다고 하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소설 등을 읽으면서 알게 된 시인들의 이름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 성적 취향 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놀라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한 동성애자들이 많았다. 인종차별주의자도 있지 않았던가. 저자는 시인들의 삶을 간결하게 녹여내고, 시들을 발취해 짧은 이해를 돕는다. 천천히 음미할 때 가슴에 와 닿았다.


휴즈의 시를 극찬하지만 그의 시집은 나의 취향도 맞지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타고르 시에 대한 번역을 걱정하게 만드는 글을 보고 약간 주춤한다. 각 장에서 다루어지는 시인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집중하지 않으면 앞의 시인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생긴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가독성을 생각하면 높은 집중력은 필수적이다. 방대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한 시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이해가 부족하다. 하지만 대략적인 흐름이나 그 시인의 특징을 간략하게 알아보는 데는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읽다가 내가 착각한 시인들이 눈에 들어오고, 겉멋으로 읽었던 시집들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좀더 깊이 읽고 이해하는 독자라면 시의 변화하는 역사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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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는 코코아를 마블 카페 이야기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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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소설이다. 그런데 이 얇은 소설 속에 열두 개의 이야기 담겨 있다. 무심코 목차를 볼 때는 색과 지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어느 순간 색과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색깔은 열두 색이지만 지역은 도쿄와 시드니 단 두 곳이다. 도쿄 동네에 있는 작은 카페 마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각 단편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어받아 다음 이야기를 간결하게 들려준다. 몇 개의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이 구성이 상당히 낯설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아는 것도 아니다. 뭐 한 다리 건너면 서로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다.


마블 카페는 조금 특이하다. 일단 점장이 커피를 내리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직원을 뽑은 후 그냥 떠난다. 자신의 로망이 실현되었다면서. 화자는 2년 동안 홀로 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목요일마다 오는 여자 손님 한 분이 있다.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화자는 그녀에게 끌린다. 코코아 씨란 애칭으로 부른다. 손님과 점원의 사이.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런 어느 날 다른 여성이 그 자리에 앉는다. 늘 앉던 그녀는 바에 앉는다. 미묘한 순간, 어쩌면 일상적인 카페의 풍경이다. 그러다 그 지정석에 앉아 있던 여성이 떠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 지정석에 앉았던 워킹맘으로 넘어간다.


워킹맘은 가정일에 서툴다. 남편이 자신의 그림을 그리면서 가사를 돌본다고 할 때 내심 좋아했다. 그 그림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전시회에 가면서 생긴 하루를 보여준다. 달걀말이를 자꾸 실패한다. 그녀나 우울해하는데 아이는 멋진 유채꽃 밭이라고 말한다. 제대로 해보지 못한 일이니 당연하다. 출장 간 남편의 전화는 따쓰함이 가득하고, 훈훈하다. 다시 이야기는 어린이집 교사로 넘어간다. 한 아이가 그녀가 지우지 못한 손톱 매니큐어를 보고 감탄한다. 원래는 지워야 하지만 아이가 좋아해 지우지 못했다. 그러다 선배 선생에게 혼난다. 그녀의 마음은 호주에 살고 잇는 선배에게 간다. 워킹 홀리데이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이 환상은 선배가 알려준 사실에 의해 스르르 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는 도쿄에서 자연스럽게 시드니로 넘어간다.


시드니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은 호주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있다. 마녀가 되고 싶어 마음이 가는 남자에게 마법을 걸어놓고 떠난 여자. 그 여자에 빠진 샌드위치 가게 주인, 시드니에서 번역가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여성과 일본 친구와 종이 편지를 주고받는 여성의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흘러나온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마블 카페의 마스터가 살짝 모습을 보여준다. 고난과 어려움의 순간에도 믿음과 작은 희망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마블 카페로 돌아온다. 이제 화자는 코코아 씨다. 이 이야기의 고리를 따라 흘러가다 보면 가슴 한곳이 따스해진다. 왠지 모르게 이 무더위에 핫코코아 한 잔을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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