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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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출간작이다. 7년 만의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모두 읽고 작가의 작품들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장편을 거의 읽지 않았다.

작가의 대표작인 <새의 선물>을 제외하면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기억에 의지하면 주로 단편들을 읽었다. 대부분 무슨 무슨 문학상을 통해서.

한때 한국 소설을 멀리하는데 일조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너무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인기를 얻고, 문학상을 수상하고, 수많은 주례사 비평에 질렸었다.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내용들이거나 취향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이런 취향이 바뀐 것이 다양한 분야를 작가들이 풀어내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희경을 비롯한 그 당시 인기 작가들의 소설을 사 모은 것은 나의 허영이 한몫했다.

2010년대에 다시 만난 한국 소설은 예전과 달랐다.

어쩌면 문학이 바뀌었다기 보다 내가 더 변했을 것이다.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에 호의를 표하고, 기존 작가도 새롭게 다가왔다.

몇 년 전 오랜만에 읽었던 전경린은 소설은 과거 작가들에 대한 호의를 불러왔다.

<빛의 과거>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책을 받고 상당히 묵혀 두었다.

하지만 펼쳐 읽으면서 내가 잘 모르는 1977년 여자대학교 기숙사 속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대학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위치 등이나 작가의 출신 학교를 감안하면 숙명여대다.

소설은 1977년을 기본으로 2017년 현재의 모습을 그려낸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오간다. 그 중심에는 화자가 있고, 그녀의 친구인 작가 김희진이 있다.

김희진의 소설<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는 화자 김유경이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기폭제다.

유신의 칼날이 시퍼런 시절 사감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 또한 하숙할 때 만났던 선배 형들이 생각났다.

그 시절 청춘들이 얼마나 많은 허세를 부렸는지, 미숙한 감정에 휘둘렸는지 엿볼 수 있다.

당연히 이 장면들을 보면서 내 학창시절, 아니 불과 몇 년 전 내 모습을 발견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개성 강한 여대생들의 모습은 흥미롭다.

그들의 후일담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마지막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나도 저런 식으로 요약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 곳곳에 그려지는 그 시대의 풍경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작가가 소설 속 작가 김희진을 통해 소설가 주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윤색되는지 알려준다.

불과 몇 년 전 지인의 이야기를 너무 노골적으로 소설 속에 풀어놓아 문제가 된 적이 있지 않은가.

김희진이 자신의 소설 때문에 동창들을 잘 만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소설의 독자들 대부분은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것이다.

삶의 한 순간, 그 중에서도 일 년의 기록은 동창의 소설에서 비롯한 회상이다.

이후 삶의 궤적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흔적도 제각각이다.

빠르고 간결하게 요약된 김유경과 김희진의 과거는 현재 우리 삶의 요약이다.

그 시절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순수한 열정과 감정은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현실만 남은 현재를 돌아보면 그 당시 그들의 열정 등은 어쩌면 시대의 유행을 따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욕망에 충실한 김희진을 보면서 나와 주변 사람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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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하인후 옮김,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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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 여행을 가보고 싶은 나라가 이탈리아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야 할 도시들이 너무 많다.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시치리, 밀라노, 폼페이, 카프리, 피렌체 등 수없이 많다. 이 중에서 메디치 가를 떠올리면 피렌체를 가야 한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가문 중 하나가 메디치 가이지 않은가.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이 시기에 태어났고,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받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이드 역할을 맡긴 마키아벨리조차도 메디치 가에 잘 보이려고 여러 작품을 쓰지 않았던가. 그리고 읽다 보면 혼란스럽기만 했던 메디치 가의 가계도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아! 물론 이 책은 메디치 가의 역사를 다룬 책은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하인후 역자의 도움 요청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인후는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저작인 <피렌체사> 완역본을 출간하고 싶어 저자에게 연락했다. 이 책 속에 나온 <피렌체사> 인용은 그의 번역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두 사람의 협업 속에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은 마키아벨리다. 저자가 가이드를 맡겨 피레체의 열세 곳을 돌아다닌다. 베키오 다리에서 시작해 루첼라이 정원으로 끝나는 여정 속에는 수많은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피렌체의 역사가 곳곳에 녹아 있다. 귀족과 귀족, 귀족과 평민, 평민과 평민, 평민과 하층민, 하층민과 하층민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이후 메디치 가를 포함한 가문들의 권력 투쟁이 있었다.


1216년 베키오 다리에서 암살이 일어난다. 귀족 가문 사이의 권력 다툼이다. 귀족 사이의 권력 투쟁은 아직 성장 중인 피렌체에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금화 플로린을 주조하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 권력 싸움은 더욱 강해진다.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누어져 싸운다. 황제파에 귀족들이 몰려 있다. 교황파가 승리하고, 이것은 다시 백당과 흑당으로 나누어진다. 나중에는 귀족과 평민이 싸운다. 이런 분파와 투쟁의 연속은 제대로 공화정이 성숙하지 못한 피렌체의 문제다. “피렌체에서는 평민이 승리하자 귀족은 정부의 요직에서 철저히 배제당했다.”라고 한다. 이 결과 귀족들은 평민처럼 평민이 되거나 평민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저자는 로마와 이 상황을 비교한다. 귀족의 평민화 과정은 “귀족 안에 있던 관용의 정신과 군사적 미덕은 사라지고 말았고, 결코 한 번도 이것들을 가져본 적 없는 평민의 내면에서 다시 이것들을 살려낼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로마에서 지배하려는 자는 타협할 줄 알았고,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지배하려는 자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법을 알았다.”고 말한 것과 대배된다.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피렌체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결코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의결 기구를 만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외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세를 불러와 더 큰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외국인 경비대장 야코포 데 가브리엘리가 횡포를 부리거나 임시 통치자 발테르 공작이 폭압적인 통치를 벌인다. 이런 순간마다 평민과 하층민들이 일어났다.


광장에서 바카가 울리면 평민들이 무장을 하고 모인다는 대목을 보고 자체 군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렌체는 자신들의 군대가 없었다. 군대가 없으면서 생긴 문제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외교의 힘으로, 돈으로 산 용병으로 피렌체를 방어했다. 화려한 피렌체의 역사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무력한 방어 방식이다. 마키아젤리 시절 잠시 군대를 유지했지만 간단하게 무너진다. 자체 군대가 없으면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은 앞에서 말한 가브리엘라나 발테르 공작 이외에도 많다. 저자는 특별히 자체 군대의 존재 여부를 풀어내서 들려주지 않지만 읽다 보면 계속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더 비싼 돈으로 고용한 용병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라니 얼마나 불안한가.


열세 곳의 장소, 그 장소와 엮인 역사가 가이드의 특성에 따라 흘러나온다. 바탕이 되는 참고서는 역시 <피렌체사>다. 중반 이후 메디치 가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다. 집에 사 놓은 메디치 가문 책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역사적 관계가 있다. 저자는 2부를 메디치 가문의 시대로 정했지 않은가. 피렌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놀랍지만 그 자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생긴 문제들은 보면서 아쉬웠다. 그리고 가이드의 특성 상 예술품이나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 것도 아쉽다. 읽으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혼란스러운 정보와 지식들이 조금 정리되었고, 피렌체를 다시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도 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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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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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로 더 유명한 소설이다. 예전에 뮤지컬과 영화로 본 것 같은데 메인 주제곡을 빼면 나머지 기억은 가물가물한다. 워낙 간결한 내용으로만 기억에 남아 있는데 책을 받고 읽다 보니 생각보다 분량이 상당히 많다. 얼마 전 읽은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였지만 너무 유명한 고전의 경우 왜곡되고, 편집된 영상 이미지 등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뭐 원작을 읽고 영화를 뒤에 봐도 이런 현상은 자주 일어나지만 말이다. 그래도 원전을 읽으면 한정된 시간에 연출하면서 생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 부분에 있기도 하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의 기억은 소설 속 두 주인공에 대한 사랑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 뮤지컬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 기억의 착각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오페라의 유령과 크리스틴이 연인이 되어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읽으니 아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오페라의 유령이 존재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 유령은 믿기 힘들다. 당연히 이 극장을 물려 받은 두 단장이 계약서에 표기된 오페라의 유령의 조건을 대충 훑어봤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과 사고는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사실 이 부분은 이야기의 곁다리다.


영상 등으로 요약된 부분의 핵심은 오페라의 유령과 크리스틴의 관계다. 이 소설 속에서 유령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극장을 어둠속에서 지배한다. 크리스틴을 훈련시켜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만들어낸다. 그 자신도 아주 탁월한 음악 실력을 보여준다. 왠지 모르게 라울 드 샤니 자작은 존재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기억 속에서 크리스틴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기존 배역의 벽을 뚫지 못해 실력 발휘하지 못하는 가수였는데 원작을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실력은 오페라의 유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일취월장했다. 라울과의 인연 이야기도 원작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나오고. 크리스틴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페라 등에서는 오페라의 유령인 에릭의 사연을 너무 간결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원작은 페르시아 인을 등장시켜 그의 불행했던 과거를 자세하게 되살린다. 더불어 그가 얼마나 뛰어난 건축가이자 마술사인지 알 수 있다. 나이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면 속에 숨겨져 있는 추악한 외모에 대한 묘사는 결코 영화 등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외모라니. 첫 생일 선물이 가면이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의 뛰어난 건축술이 어떤 공부를 통해 얻은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타고난 천재라는 듯 말하지만 건축이 그렇게 쉬울 리 없다. 그렇지만 파리 오페라 극장 건설에 그가 참여했고, 이 참여 속에 그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돌아다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무서워한 이유도 바로 이 은밀함에 있다.


사랑.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크리스틴을 놓고 오페라의 유령 에릭과 그녀의 어린 시절 친구 라울이 경쟁한다. 크리스틴은 처음에 에릭의 이름도 몰랐고, 수호 천사 정도도 알고 있었다. 그의 교습으로 실력이 올라갔지만 한 남자로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어린 시절 바다에서 스카프를 건져준 라울이다. 라울도 당연히 크리스틴을 사랑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페라의 유령 에릭이다. 그는 크리스틴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이 감정은 평범함에 대한 갈구이자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왠지 모르게 읽으면서 <미녀와 야수>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어쩌면 내가 바란 것은 크리스틴이 외모의 공포를 넘어 에릭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작을 읽고 나면 그곳에서 파생한 영화나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긴다. 원작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과 내가 상상한 장면을 연출자가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공간인 지하는 뮤지컬에서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고문실로 알려진 곳에서 그들이 경험한 환상과 심리적 고문 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번 번역은 기존과 조금 다르다. 좀더 현대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처음 책으로 이 원작을 대하는 사람들이면 좀더 가독성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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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청년, 호러 안전가옥 FIC-PICK 3
이시우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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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단편들도 <밀리의 서재>에 연재되었던 소설들이다. 이 플랫폼을 구독하지 않아 이런 작품들이 있었는지 몰랐다. 리디북스에서 단편들이 올라오는 것을 봤지만. 제목에 나오는 세 단어를 보면 이 앤솔로지에 참여한 작가들처럼 나의 20대를 떠올리게 된다. 읽다 보면 내 시절과 다른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남자란 것이고, 전세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학력 차별이 덜 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있었는데 내가 다닌 회사가 적었거나 내가 잘 느끼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친구나 후배 등은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집에 대한 공포를 가지거나 보증금 돌려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첫 문을 연 이시우는 처음 만난 작가다. 황금가지에서 주로 장편을 낸 모양인데 이번에 단편에 참여했다. 처음 읽다 보니 작가의 성향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래쪽>이란 제목처럼 맨홀 밑 지하 관로를 공포로 조금씩 채워가는 과정은 상당히 서늘했다. 약 1년 전 경험을 털어놓는 형식인데 무서운 이야기 형식이다.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조금씩 풀어내고, 우리가 눈 감고 있는 다른 존재를 조금씩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작가가 창조한 지하 관로 세계가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꼭 주인공일 필요도 없으니까.


김동식의 <복층 집>은 혼자 사는 낭만을 공포로 바꾼다. 외관과 달리 여성 취향의 인테리어가 혜화의 눈을 사로잡는다. 좋았던 것은 이때뿐이다. 친구들이 와서 툭 던진 말들과 집안의 이상한 느낌이 점점 고조되면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한다.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 등이 가슴 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집에 나갈 때 집 안 사진을 찍고 돌아와서 사진을 비교하는 일상을 산다니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멋진 심리물인데 마지막 장면은 왠지 불필요 없이 과한 듯하다.


허정의 <분실>은 고시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싼 가격 때문에 들어간 석진은 낡은 방에서 사람 크기만 한 얼룩이 침대 쪽 벽에 있다. 왠지 신경 쓰인다. 다른 방을 찾지만 없다. 인강도 불펌으로 듣는다. 문제는 얼룩 부근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지우개로 지우고, 커터 칼로 긁어본다. 가장 호율적인 방법은 다른 방 아저씨가 준 약을 사용하는 것이다. 얼룩이 잘 지워진다. 그런데 실수로 약을 엎질러 자신의 기록 등이 지워진다. 그리고 늦은 밤 카드 대금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전화가 온다. 사기 전화가 분명하다. 이때부터 상황은 꼬이고, 이성은 마비된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흐려진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장면은 흔하지만 서늘하다.


전건우의 <Not Alone>은 학벌 때문에 사내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앱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쌓다가 겪는 이야기다. 경찰서에서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다고 자백하면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드러낸다. 앱으로 상대방을 어떻게 하려는 욕망이 넘쳐나고, 진짜 친밀한 관계를 쌓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가 수상하다. 왠지 모르게 스토킹을 당하는 느낌이다. 경찰에 신고해도 실체가 없다. 생명의 위험에 빠지거나 사건이 발생해야만 경찰이 움직인다. 하지만 진자 이야기는 마지막에 나온다.


조예은의 <보증금 돌려받기>는 생각보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경험한 일이다. 전세가, 월세가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는 데 집주인들은 새로운 입주자가 없다는 이유로 보증금 반환을 늦춘다. 대낮에도 해가 들지 않고 한밤에도 가까운 유흥가 때문에 시끄러운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보증금이 있어야 새로운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집의 환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젓는다. 빨리 보증금을 빼 동생 학원비로 써야 한다. 엄마의 독촉 전화가 오고, 새롭게 이사할 집 이사 일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집 밖에서는 문제가 있는 듯한 학생들이 머물고 있다. 상황은 꼬이고, 앞은 깜깜하다. 작가가 의미 없는 듯한 설정을 쳐내고, 무심코 보고 지나간 설정 하나를 무섭지만 약간 통쾌하게 그려낸다.


남유하의 <화면 공포증>은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간결하게 보여준다. 남자친구와 영화관에서 본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의 증상이 이상하다. 화면 스크린을 머리로 들이받고 피범벅인 채 쓰러진다. 외국 네티즌의 정리에 따르면 ‘화면 공포증’이다. 작가의 말을 보면 그가 지하철이나 삼성역에서 본 것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다. 화면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처절한 노력과 우리 일상 주변에 얼마나 화면들이 많은 지 보여준다. 갑작스럽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난다. 화면 공포증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이 좀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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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도시 속 인형들 1 안전가옥 오리지널 19
이경희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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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시기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미래의 메가시티 평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이버펑크 범죄수사물이다. 왜 평택이란 도시를 지정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책 속에 나오지 않는다. 이 도시를 이미 다르 작품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읽은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은 두 번째다. 다른 앤솔로지에서 단편으로 만난 적이 있을 뿐이다. 작가 목록을 보면 낯익은 제목과 낯선 제목들이 교차한다. 생각보다 많은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연작소설집이다. 메가시티 평택의 샌드박스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 중 한 권일수도 있다. 작가와 프로듀서의 말에 의하면 가능성이 아주 높다.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χ Cred/t>는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에 당선되어 <대스타>란 앤솔로지에 실렸던 이야기다. 아직 <대스타>를 읽지 않아 재밌게 읽었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유튜브 같은 플랫폼의 극단적인 모습과 경계가 무너진 인간 복제 및 유전자 조작 등의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에 ‘χ Cred/t’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되었는데 작가가 친절하게 카이 크레디트라고 말해준다. 카이는 넷 소아이어티 사상 최고의 수퍼스타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아이가 아니다. 유전자 조작 등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다. 놀라운 것은 이 카이를 100개나 복제해 방송을 만든다는 것이다. 방송 중 카이들 중 한 명이 죽이고,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 수사를 진강우 검사와 주혜리가 해결한다. 실제 현장에서 고생하는 인물은 주혜리다.


<저 디지털 세계의 좀비들>들은 좀비들에게 쫓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잠시 과거로 돌아간다. 힘든 알바를 하고 있는데 강우 검사에게 연락이 온다. 시간 의뢰다. 의체를 사용하고 있는 노인들이 다른 노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하란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미래의 노인들도 현재의 노인들처럼 자식들에게 등골을 빼먹히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의해 의체를 단 노인 등이 다른 노인들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프로그램 언어다. 너무나도 쉽게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쉬운 일 뒤에 숨겨져 있는 욕망이다. 미래에 이런 좀비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흥미진진하다.


<파멸로부터의 9호 계획>은 음모론자들의 해킹으로 생긴 문제를 다룬다. 사건 해결을 위해 해커를 쫓던 혜리는 범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문을 열고 나가면 되는데 열림 화면이 없다. 방법은 하나, 화면에 나온 게임을 클리어하면 된다. 고전게임 둠이다. 갇힌 공간 속에서 둘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음모론을 배경으로 한다. 대표적인 음모론 중 하나가 지구평평설이다. 샌드박스 속 고속엘리베이터가 폭주하고, 충돌 직전까지 간다. 긴박한 과정 속에 터져 나오는 작은 유머는 살짝 웃게 한다. 작은 소품이지만 재밌는 캐릭터의 등장으로 아주 흥미진진했다.


<슈퍼히어로 프로듀서>는 예상한 설정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정이 겹쳐 있다. 이 단편 속에 주혜리의 과거가 조금 흘러나오고, 한국 교육시장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만들어진 슈퍼히어로 스위치와 빌런의 존재, 여기에 방송이 곁들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슈퍼히어로가 필요 없는 사회가 가장 좋지만 현실의 부폐와 비리는 오히려 자신들의 욕망을 대신 해소해 줄 히어로를 갈망한다. 연출과 사실이 교차하고, 성적 제일주의에 빠진 한국 부모를 구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씁쓸한 것은 그렇게 나쁜 교육 현장을 경험한 부모들이 자신의 성공에 취해 자신의 아이들을 아동학대로 내몬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란 이름으로.


마지막 단편 <트윈플렉스>는 휴머노이드와 또 다른 안드로이드의 학대를 다룬다. 실제 인간의 유전자 복제 등을 통해 만들어진 이 안드로이드는 그 본체의 시선 등을 공유한다. 텔레파시가 통하는 쌍둥이 같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이 단편 속에는 성차별, 성 취향, 강요된 폭행과 학대 등을 넣고, 뒤틀린 욕망과 권력이 만들어 낸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법 위에 올라선 부유층의 존재는 읽는 내내 불편했고, 이것이 미래의 상상만이 아니란 사실에 조금 암울했다. 그리고 작가가 소개하는 몇 가지 놀라운 무기 등은 앞으로 펼쳐질 액션 등에 멋지게 활용될 것 같다. 과연 어떤 식으로 이 세계를 키우고 가꿀지 궁금하다. 더 읽고 싶은 작가가 또 한 명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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