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한 자들의 세상에서
전건우 지음 / 북오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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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소설만 다섯 편을 한 권으로 엮었다. 작가는 한국 호러 소설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전건우다. 개인적으로 그의 소설들을 재밌게 읽고 있다. 최근에 앤솔로지에서 자주 보지만 그의 단편집을 읽기는 오랜만이다. 어떻게 보면 좀비 소설이 요즘 너무 흔해졌지만 단순히 공포만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을 담고 나오면서 이야기가 확장되고 있다. 이번 단편집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나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실제 현실에 닥치면 몸이 마비되지 않고 제대로 움직일까 하는 의문도 있다. 팬더믹의 현실과 엮어 생각할 것도 많다.


<콜드블러드>란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트루먼 커포티의 소설이다. ‘냉혈’로 번역된 적이 있다는 것도 기억난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상태에서 청와대 지하 벙크에서 국무회의가 열린다. 좀비 바이러스를 막을 백신이 개발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백신을 대량 생산할 공장이 다른 곳에 있다. 강남역을 지나가야 한다. 헬기로 가면 간단하지만 현재 헬기 조종사도 헬기도 없다. 이 임무를 완수할 최적의 인물이 한 명 있다. 연쇄살인범 남정철이다. 그의 체온은 33도 이하다. 좀비들이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해 좀비 무리 옆에 있어도 안전하다. 이 임무를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했지만 갑작스러운 좀비의 난입으로 계획은 바뀐다. 육군 대위 최지호 등은 차로 남정철과 이동한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남정철도 믿을 수 없다.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Be the Reds!>는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2002년 월드컵이 떠올랐다. 실제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월드컵 16강이 벌어지던 순간이다. 장소는 거리 응원이 벌어지던 광화문역 근처다. 의경들이 배치되고, 안전사고에 주의한다. 그런데 거리 응원으로 노숙자들의 쉼터가 사라진다고 성토하는 시민단체가 나온다. 대규모 거리 응원에 묻혀 있던 다른 삶을 살짝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이 상황을 다루는 의경 이재호의 행동이다. 그리고 노숙자 한 명이 이상한 반응을 보여준다. 맞다. 그가 시발점이다. 월드컵 경기의 열기 속에서 노숙자에게 물린 사람들이 좀비처럼 변하고, 의경은 그 상황을 조금씩 막는다. 하지만 중대장 등이 보여주는 반응은 아주 권위적이다. 수십 만 명이 몰린 광화문과 좀비의 등장을 생각하면 멋진 공포 소설이다.


<유통기한>은 반전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소심한 아르바이트생 연지의 편의점으로 좀비를 피해 다섯 명이 들어온다. 유리창 밖에는 좀비들이 점점 늘어난다. 얇은 유리문 하나에 의지해 이들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먹을 것이 풍부한 편의점이라면 식량 걱정은 없겠다고 생각하는데 전원이 끊어지면서 상황이 바뀐다. 빨리 상하는 음식과 자신의 취향이 충돌한다. 음식의 유통기한과 편의점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한이 묘하게 엮인다. 편의점 안에서 각자의 욕망이 표출되는 장면은 아주 현시실적이다. 읽고 난 후 연극으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결>은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남자 친구는 임신했다는 소식에 도망가버렸고, 그녀는 아이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 숨어서 아이를 낳을 곳을 찾는다. 살아 남아 아이를 낳고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그런데 현실은 정말 지옥이다. 사방이 좀비로 가득하다. 병원에 몰래 들어가 아이를 낳고 탯줄을 자르려고 한다. 골프채를 쥐고 덤벼드는 좀비를 물리치면서 달아난다. 출산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녀의 출산 소리는 분명 많은 좀비를 불러 모을 수밖에 없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한다. 문밖에는 좀비 떼가 가득하다. 과연 그녀의 출산은 성공할까? 작가는 긴장감을 멋지게 고조시킨다. 마지막 장면은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낙오자들>은 고시원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자살은 실패했다. 그런데 사방이 좀비로 가득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보낸 톡을 보고 친구들이 그에게 온다. 첫 위기를 넘기는 것도 친구 철권의 도움이다. 노량진을 무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공시도, 취직도 실패한 청춘들이 생존에 몸부림치는 액션을 보여준다. 그들이 이 지옥을 벗어날 방법은 군이 보낸 트럭을 타고 가는 것이다. 7시 정각부터 10분간 기다린다. 배달용 오토바이를 타고 목적지로 간다. 쉽지 않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커플은 그들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지독한 현실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강남의 풍경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남 부자를 지키기 위해 군은 얼마나 많은 군인 등을 투입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마지막 세 친구가 보여준 우정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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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마블 1 - 비정상 시공그래픽노블
G. 윌로우 윌슨 지음, 애드리언 알포나 그림,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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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팟캐스트에서 ‘미즈 마블’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마블 세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에게 이 이야기는 캡틴 마블과 미즈 마블은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 이 그래픽노블을 읽기 전에는 이 둘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이슬람 소녀가 주인공이란 것 정도였다. 마블과 DC 코믹스에서 아시안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말이다. 아시아 시장이 커지고, 인종 차별 등의 문제가 엮이면서 일어난 일이다. 기존 캐릭터에 새로운 캐릭터까지 더해지면서 너무 복잡해져서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일단 이번에는 미즈 마블이라도 따라가고 싶다.


마블과 DC 코믹스를 조금씩 읽거나 사 모으지만 수십 년 동안 쌓인 것을 쫓기엔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 어린 시절 추억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것 우선으로 모았는데 이제는 조금 바뀌었다. 영화조차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미즈 마블>도 디즈니+에서 최근 방영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직 보지 않았다. 보고 읽어야 할 책들이 점점 늘어난다. 현재 <미즈 마블> 시리즈도 4권까지 번역되어 나와 있다. 그렇게 많은 분량이 아니라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지만 어떨지 모르겠다. 읽게 되면 간단하게 감상을 남기고 싶다. 이 만화를 읽으면서 아주 익숙한 문화를 만났기에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다.


이 만화의 주인공 카말라 칸은 어벤저스 덕후다. 팬픽 사이트에 자신만의 팬틱을 올릴 정도다. 현재 성공한 팬픽은 일반 시장으로 출간될 정도다. 카말라가 자신이 쓴 글이 많은 조회를 기록한 것을 보고 기쁘하는 장면이 나온다. 온라인과 집밖에서 그녀는 일반 미국 소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파키스탄 이슬람 가정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열여섯 소녀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식탁 풍경 중 재밌는 장면이 하나 있다. 취직하지 못한 오빠가 율법에서 금지하는 이자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아버지는 금융권에서 일한다. 율법의 방패 뒤에 숨겨진 취업하지 못한 현재가 있다. 이 만화는 이런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들이 곳곳에 나온다.


히어로 물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그들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까 하는 것이다. 그 능력을 얻게 되는 과정도 나온다. 카말라는 부모가 외출을 금지한 밤에 나갔다가 인휴먼을 각성시키는 안개 속에서 초능력을 얻는다. 이 장면에서 캡틴 마블과 캡틴 아메리카 등이 등장하지만 주로 캡틴 마블과 대화한다. 그리고 껍질을 깨고 나온다. 그녀의 초능력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외모만 놓고 보면 그녀가 바라는 금발의 미녀인 캡틴 마블을 닮았다. 그런데 그녀의 변신은 자신이 바라는 데로 이루어진다. 크기 조절도 가능하다. 아주 작아지거나 아주 커진다. 순간 ‘앤트맨’이 떠올랐다. 부분적으로 손만 커져 상대방을 손아귀 속에 잡는 것도 가능하다. 미즈 마블의 공식 첫 활동은 술에 취해 물에 빠진 친구를 커진 손을 넣어 퍼올리는 것이다.


각성했다고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는 여전히 부모의 간섭을 받고, 외부 활동은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능력에 대한 정확한 측정도 필요하다. 친구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한다. 기존 히어로와 다른 점 중 하나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활용도를 높이고, 가족의 문화 속에서 아직은 살아야 한다. 이 만화의 작가들은 이것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잘 포착해 보여준다. 아직 미즈 마블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펼쳐지지 않았고,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어벤저스와도 만나지 않았다. 다음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만화가 의미하는 바도 생각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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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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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소설이다. 천천히 읽어야 한다. 먼저 읽은 독자들의 평들 중 잘 읽히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조금 걱정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읽혔다. 실제 다른 장르 소설처럼 빠르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특정 주인공 한 명을 내세워 사건을 따라가는 구성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 관계자와 주변인들의 삶을 다양하게 그려낸다. 그 하나의 사건은 폰지사기 사건이다. 실제 모델은 2008년에 버나드 메이도프의 폰지사기이다. 피해액만 650억 달러라고 한다. 엄청난 사건이다. 소설 속 조너선 알카이티스의 실제 모델이 버나드 메이도프다. 조너선은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폰지사기가 최근에 발생한 것이 아님을 작가는 천천히 보여준다.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수익을 배당해주었다. 높은 수익은 투자자들을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된다.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사기 사건은 많다. 하지만 이 피해가 커지기 전에 막을 수도 있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까지 올 동안 그 열매를 투자자와 운영사의 일부가 잘 누렸다. 하지만 파국이 왔을 때 그들 모두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투자자들은 평생 모은 돈이 사라졌고, 사기꾼들은 감옥으로 갔다. 이 상황을 작가는 최대한 건조하게 그려낸다. 피해자들을 내세워 그들의 불행을 과장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폴인 줄 알았다. 폴이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는지 보여주고, 그의 가족들 이야기를 풀어낼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러다 카이에트 호텔로 이야기가 넘어간다. “깨진 유리 조각을 삼켜라’라는 낙서가 호텔 유리창에 에칭펜으로 새겨진다. 범인은 누굴까? 왜 이런 문구를 새겼을까? 폴이 한 일로 의심받고 그는 호텔에서 잘린다. 그리고 호텔에 대한 이야기와 투자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폴의 이복 남매 빈센트는 바텐더로 일하다 이 호텔의 주인인 조너선을 만나 그의 아내가 된다. 법적으로는 그의 아내가 아니지만 조너선이 아내라고 주변에 소개한다. 빈센트는 자신이 잡은 기회와 욕망에 순응한다. 법적 아내가 아니라고 해도 한도 무제한의 카드와 상류층의 삶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빈센트가 조너선의 트로피 와이프로 살아가는 동안의 삶은 아주 풍족하다. 조너선의 이전 아내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파국이 온 순간 그녀의 삶은 예전으로 돌아간다. 집을 떠나고, 힘들게 일하면서 하루 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선박 요리사가 되면서 뭍의 삶을 떠난다. 이런 선택을 하기 전 있었던 장면 하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그녀가 폰지사건 사건을 알게 된 순간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은 혼란, 공포, 은폐, 도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사기극에 참여한 사람들 중 단 한 명만 외국으로 도망간다. 누군가는 경찰 등에 협력자가 된다. 이 풍경 너머에 피해자 중 일부의 삶이 나온다. 그 중 한 사람인 리언은 다른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조너선은 170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그가 갇힌 곳은 상당히 비폭력적인 감옥이다. 이곳에서 그는 평행우주 같은 가상의 세계를 만든다. 카운터라이프라고 말한다. 이 속에서 그는 환상을 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환각일 수도 있지만 그의 삶과 관련된 사람들이 이 감옥에 나타난다. 죽은 자들의 유령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투자가 얼마나 의심스러운지 주장한 사람이 나온다. 금융감독에 신고까지 했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었지만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를 내세워 변론하는 장면은 황당한 일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모든 것을 물타기 한다. 피해자들이 높은 수익으로 얻었던 삶으로 그 몰락을 정당화하는 것은 과한 궤변이다.


사실 이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이란 SF소설이 먼저 나왔었다. 구해 놓았지만 아직 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번 소설이 주는 무게와 전개 방식이 아주 탁월하다고 해도 요즘 나의 취향이, 집중력이 쉽게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을 막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설정과 전개이지만 시간부족과 저질 체력은 늘 주저하게 한다. <글래스 호텔>의 마지막 장면을 읽고 머릿속에서 많은 여운과 장면들이 뒤섞였다. 파편적인 장면들이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잠시 이 소설에 빠져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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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고개 비화
박해로 지음 / 북오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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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경잡록> 시리즈 최근작이다. 이 시리즈를 열심히 읽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온 <전율의 환각>을 빼고 모두 읽었다. 올해가 가기 전 읽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가끔 자주 읽거나 낯선 작가의 경우 인터넷 서점에서 작품 목록을 확인한다. 이 작가의 경우 대부분 읽었다. 단편 중 몇 편을 읽지 않았는데 있는 책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얼마 전에도 이 비슷한 글을 쓴 듯한데 자꾸 뒤로 밀린다. <신 전래특급> 때문에 이번 출간작에 수록된 이야기가 적다고 생각했는데 이전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도 두 편이 실려 있다. <전율의 환각>도 마찬가지다. 이전 작품에 등장한 원린자들이 이번 소설에 또 등장한다, 작가의 고향 섭주는 말할 것도 없다.


<외눈고개 비화>를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 후 원래 세계로 돌아와 갑자기 늙는 사람 때문이다. SF소설 등에서는 시간의 상대적 흐름 때문에 두 사람의 외모가 확 달라지는데 말이다. 나의 저질 기억력을 탓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번에도 일어난다. 소설 속 탁정암의 <귀경잡록> 한 꼭지를 그대로 실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귀차니즘 때문에 다른 책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 시리즈가 완성되면 <귀경잡록>이란 단편집으로 나와도 재밌겠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가 파생적인 이야기이지만 원전은 첫 조우를 다루고 있고, 훨씬 고문의 느낌이 강하다.


추락한 비행선에서 나온 이상한 생명체와 그들과 싸운 한 사또 박고헌의 이야기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재밌다. 살아남기 위한 전쟁은 치열하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박고헌 측이 이긴다. 하지만 작은 실수로 이 승리는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무기는 아주 매력적이다. 정겸을 구해 외눈고개로 들어간 장군의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과 비행선 내부에서 벌어진 반란 등의 이야기는 단순한 공포 소설 너머의 상황을 알려준다. 정렴에게는 하룻밤의 무섭고 놀란 체험이 외부의 오랜 친구에게는 40년의 세월이었다. 역사의 반복이 주는 오해와 몰이해는 여운을 남긴다. 비천자라고 불리는 외계생명체가 보여주는 섬찟한 모습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 등은 참혹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얼마나 잔혹할지 미간이 찌뿌려진다.


<우상숭배>는 권윤헌이란 선비가 길을 잃고 금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두 개의 기이한 집과 한 집에서 발견된 조선의 금서들. 그 중에서 당연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다양한 판본의 <귀경잡록>이다. 권윤헌과 노비 바우는 여섯 개의 눈을 가진 얼굴에 탈을 쓴 남자 천승도를 우연히 만난다. 바우의 기지로 그를 잡는다. 그리고 지하에 갇힌 일곱 여자를 구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청아라는 절색의 여인이 혼자 달려나간다. 이후 청아의 아버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천승도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말한다. 아침이 되자 그는 산산조각난다. 빛에 약하다. 이것은 전편에 나온 비천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장면을 볼 때면 두 가지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하나는 <우주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드라큘라>다.


<귀경잡록> 속 이야기는 권윤헌이 지금 경험하는 일에 대한 작은 답이다. 천승도는 영생을 얻었지만 반쪽짜리다. 자신의 의지가 제거된 영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사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 중편에서 재밌는 대목은 권윤헌이 아니라 청아의 아버지 이야기다. 청아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나아가 만나는 불상의 존재는 아주 수상하다. 원린자의 흔적을 쫓아 추살하는 부대의 존재도 놀랍다.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원린자들이 싸우는 장면에 나오는 주문과 이야기는 조금 색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 앞에 너무나도 쉽게 변하는 마음과 자신의 지식 안에서 상황을 판단하는 장면은 아주 현실적이다. 이전 이야기에 나온 원린자들이 등장하는데 언제 인물도를 한 번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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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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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작가다. 하지만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은 늘 나의 위시리스트에 올라 있다. 2019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오버스토리>다. 워낙 두툼한 분량이라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혹시 다른 책이라도 읽은 적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본 책이 없다. <갈라테아 2.2>란 책만 보인다. 낯설다. 2021년 부커상과 전미도서상 동시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소식이 있지만 수상은 못했다. 한국 작가들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에 이름을 올리면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아직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뭐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그런 것도 있지만 말이다. 이런 문학상 수상 소식은 예전처럼 나의 관심을 그렇게 강하게 끌지 않는다. 다른 문학상에 더 눈길이 가기 때문이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의 번역 제목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이다. 벌들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소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읽지 않았다. 원래 제목은 다른 것<bewilderment>인데 바뀌었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전을 보면 어리둥절, 혼란, 당혹 등의 뜻이 보인다. 이 감정을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느꼈다. 우주생물학자 시오의 아들 로빈이 앓고 있는 병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시오가 아들의 치료를 거부하는 그 감정의 기저에 깔린 것은 무엇인지 등이다. 로빈과 함께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낯설다. 외계 행성을 자신들이 들여다보는 듯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 상상력의 대화가 내 우주와 관련해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자는 시오다. 그의 아들 로빈은 분명하게 장애가 있다. 의사에 따라 병명이 달라진다. 과학자인 아버지는 아이가 약을 먹고 멍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학교의 생각은 다르다. 약을 먹기를 바란다. 쉽게 충돌을 예상할 수 있다. 실제 학교에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서로 입을 다물어 정확한 답을 말하지 않지만 맞은 아이의 부모가 말해줘 사실의 일부를 알게 된다. 로빈의 엄마 얼리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사랑한 동물권 활동가였다. 차 사고로 죽었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없다. 추측만 가능하다. 얼리사의 죽음은 아빠와 아들에게 큰 슬픔이자 부담이다. 이 소설 속에 얼리사의 기억과 활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들과 자연으로 나아가 보고, 만지고, 느낀다. 이 여행에도 얼리사의 기억은 따라온다. 아홉 살이지만 로빈은 채식주의자다. 추수감사절에 일어난 사건 하나는 이 아이가 겪는 혼란과 슬픔을 그대로 보여준다. 짧게 묘사된 조손 사이의 화해 장면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 아이의 장애가 개선되는 상황이 생긴다. 실험 단계에 있는 ‘디코디드 뉴로피드백’ 치료를 받은 다음이다. 이 치료는 얼리사와 시오가 이전에 다른 방식으로 실험에 참여한 적이 있다. 로빈은 얼리사의 감정 지문을 자신의 뇌 속에 조금씩 받아들인다. 아이의 사고나 행동이 많이 좋아진다. 하지만 얼리사의 기억들이 아이의 말과 행동에 조금씩 묻어나온다. 이 부분은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이란 SF소설을 떠올린다. 실제 작가는 초반에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앨저넌에게 꽃을> 읽은 것이 너무 오래되어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은 것만 기억난다. 이후 이 소설은 새롭게 번역되어 많이 나왔고,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이렇게 다른 소설 속에서 이 책을 만나면 다시 읽고 싶다. 디코디드 뉴로피드백 치료로 증상이 개선되는 장면과 이 소설이 겹쳐진다. 역자 후기에도 이 부분이 나온다. 증상이 개선된 아이를 논문에 올리고, 더 많은 연구비와 특허를 받고 싶어 한다. 시오는 아이의 의사를 묻어 익명으로 영상을 올린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익명은 곧바로 실명으로 이어진다. 아빠에게는 이 문제는 혼란스럽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이는 자신의 유명세가 자신이 주장하는 생명체의 생존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정치적 사회적 모습은 가장 먼저 트럼프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기후 위기가 불러온 재앙이 나오고, 광우병 바이러스가 소들을 쓰러트린다. 밀을 재배하는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바이러스가 나온다. 집권 세력은 이런 사실들은 뒤로 숨긴다. 시오 등의 우주과학자들이 바라는 우주망원경 개발과 건설에 대한 논의도 쉽지 않다. 인종 혐오와 음모론이 판 친다. 개인의 삶과 별로 상관없는 듯한 정치권의 변화가 어떻게 이 가족에게 스며드는지 작가는 잘 보여준다. 아이가 광우병에 걸린 소가 쓰러지는 장면에 발버둥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앞을 보면 분명해진다. 가상의 미래를 다룬 듯해서 어떤 대목은 SF소설 같다. 예상한 것보다 가독성은 조금 부족하지만 묵직하고, 다층적이고, 현실적이며 사실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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