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가 모이는 밤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격전이의 살인>을 읽은 힘들게 읽은 적이 있다. 내 회색 뇌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대표작인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책장에 몇 년째 고이 모셔 두고 있다. 작가의 다른 책을 검색하니 낯익은 책들이 보인다. 절판된 책들이 많은데 사 놓은 책들이 보인다. 다행이다. 물론 없는 책도 있다. 작가 후기를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조인계획>의 설정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 이 소설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설정이 비슷한 부분은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주 다르다. 이 소설이 훨씬 어둡고 엽기적이고 황당하다.


1996년 작품이다. 아직 휴대전화가 일상화되기 전이다. 출판사가 친절하게 이 부분을 앞에 적어 놓았다. 시작부터 6명을 죽였다는 마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같이 온 소노코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 마리는 소노코를 죽인 범인을 찾아 그에게 나머지 6명 살인 혐의를 씌우려고 한다. 자신이 죽인 여섯 명의 이름이 나온다. 모두 숫자가 들어가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자신의 정당방위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소노코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 한다. 살인자의 추리가 시작되다. 이야기는 이 저택에 오기 전 상황부터 하나씩 흘러나온다.


마리가 어떻게 카즈노리 교수의 별장에 오게 되었는지 먼저 설명한다. 소노코가 카즈노리 교수에게 매혹되어 있다. 신문의 운세난을 보고 그 별장으로 가야 한다고 우겨, 편도 3시간 길은 나섰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이 별장 바로 위에 유명한 호텔이 새롭게 개장했다. 처음엔 이 호텔에서 살인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마리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카즈노리 교수의 별장에 어떻게 여덟 명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는지 나온다. 이들이 모이게 된 사연도 어떻게 보면 황당하다. 수상하다. 누구 하나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뭐 여섯 명을 죽인 마리도 그렇지만.


별장의 살인과 다른 살인 무대가 하나 더 있다. 호스티스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 중인 미모로라는 형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는 수사하는 중 토모에라는 호스티에게 반해 그녀 집을 찾아갔다가 그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본다. 당연히 들어가서 말려야 하지만 막지 않는다. 왜 막지 않았느냐 하는 변명이 구구절절 흘러나오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는 일이다.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이 살인사건으로 연락이 온다. 피살자가 이전에 그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잇고, 그의 집이 근처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다른 사체 한 명을 더 발견한다. 이 의문의 여인이 토모에를 죽이고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고 수사를 종결하려고 한다. 실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미모로는 진범을 쫓고 싶다.


소설은 두 살인무대를 배경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두 시간이 미묘하게 다르게 흘러가는데 어느 순간 이 사실이 드러난다. 별장으로 가는 길과 호텔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주장이 수상하다. 이 길 막힘이 수상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카즈노리 교수의 별장을 지키는 이오스미도 마찬가지다. 소노코가 분명히 아침에 오늘의 운세를 보고 카즈노리 교수와 통화를 했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마리는 스스로 자신이 카즈노리 교수와 밀월관계라고 말한다. 교수의 부인과 만난 적도 있다. 소노코의 요청 때문에 별장에 전화했을 때 교수 부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시간들이 미모로 형사의 수사와 연결되면서 기억이 새롭게 재정립된다.


수상한 사람들의 모임, 우발적으로 이어지는 연쇄살인, 예상하지 못한 친구의 사체와 다른 살인무대 등이 엮이고 꼬였다. 기이한 살인 사건과 상해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가 미모로를 통해 알려진다. 마리가 여섯 명의 사람을 죽이는 과정은 한 편의 코미디 같다. 잔혹 코미디다. 이 살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겠다는 의도도 정상이 아니다. 뒤틀린 상황과 심리가 강하게 바닥에 깔려 있다. 제목 그대로 살의가 모인 밤이다. 그리고 이 밤에 모인 사람들의 정체도 의심스럽다. 뒤에 가면서 밝혀지는 진상과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은 선입견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작가의 트릭에 완전히 당할 수밖에 없다. 모두 읽고 앞으로 돌아가 확인할 것이 많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멋진 날
정명섭 외 지음 / 북오션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낯익은 작가들이 참여한 고3을 주인공으로 한 앤솔로지다. 이 앤솔로지 속 고3은 나의 고3과 많이 다르다. 시대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세 명의 작가는 낯익지만 홍선주 작가는 나의 기억이 맞다면 처음 읽는다. 매년 주변에 고3 수험생이나 재수생들이 있다. 그들의 하루 일과를 들으면 더 심해진 일정에 놀란다. 그리고 살짝 의문을 품는다. 그 일정 내내 그들은 얼마나 집중해서 공부할까? 하고. 나이가 들면서 학벌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낮아진다. 바뀌고 있는 세상을 생각하면 기존의 학벌이 아이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 앤솔로지 속 네 명의 고3은 솔직히 말해 기성세대의 고3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와 생각에 더 빨려 들어간다.


범유진의 <겨울이 죽었다>는 첫 문장도 ‘겨울이 죽었다’이다. 쌍둥이 동생의 이름이 겨울이다. 겨울이 죽은 이유는 한때 언론에 잠시 나왔던 현장실습생 자살과 연결된다. 통신사 콜센터에 배정되어 부당한 지시와 감정 노동으로 겨울이 자살했다. 같이 나간 친구들은 미안하다 말만 하고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이 부당한 현실에 부모들의 대응도 원인 파악보다 합의로 넘어갔다. 고3인 가을은 수능시험장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 사건을 다시 되살리려고 한다. 읽다 보면 너무 현실적인 상황들에 먹먹하다. 성적과 학교의 취업률 때문에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린 청소년들을 보면서 나의 마음을 다잡는다. 붕어빵을 파는 서점 아저씨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혀진다.


표제작 <어느 멋진 날>은 정명섭의 소설이다. 고3이 된 고동철은 16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키에 몸무게 80킬로그램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학교에서는 앗싸다. 집은 어머니가 겨우 집안을 유지하고 있다. 불안불안한 상태다. 이런 고동철의 유일한 친구 범진이 전학을 간다. 그런데 범진이가 학교 일진 연성이에게 삥을 뜯기는 영상을 가지고 있다. 연성은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들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읽고 써 준 독후감으로 상을 받을 예정이다. 범진과 동철은 교육 도서관으로 가서 연성에게 한 방 먹이려고 한다. 성공할까? 성공한다고 해도 앞으로의 학교 생활은 또 어떻게 될까? 제목대로 멋진 하루가 펼쳐진다.


홍선주의 <비릿하고 찬란한>은 한국이 무대가 아니다. 프랑스 학교로 전학 온 정윤의 이야기다. 정윤이 전학 온 이유는 친구를 옥상에 밀어버린 기억 때문이다. 작가는 화자를 정윤이나 전지적 시점이 아닌 정윤의 마음으로 설정했다. 전학 온 프랑스 학교도 인싸와 앗싸로 나누어져 있다. 정윤도 앗싸다.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영국 전학생 마르셀이 있다. 그는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다. 사실은 아니다. 정윤은 이 사실을 알지만 귀찮아질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이 정윤이 한국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려준다.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한국 학생들의 내면을 솔직하게 그렸다. 홍선주의 소설은 처음 읽는데 아직 장편은 보이지 않는다. 아쉽다.


김이환의 <오늘의 이불킥>은 가끔 아이와 채널 돌리다 보는 <마계학교 이루마군>이 떠오르는 소설이다. 특이하게 마계의 포털이 열린 후 마법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서연의 편지로 가득 채웠다. 인간이 마계 고등학교에 가서 경험하게 되는 부끄러운 일들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보여준다. 대마왕이 용사에게 죽은 마왕성이 학교로 바뀌었다는 것이나 다양한 판타지의 종족들이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설정은 낯익지만 재밌다. 가벼운 전개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마계 고3의 현실과 고민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소소한 곳에서 작은 웃음을 터지게 하는데 캐릭터의 특징을 잘 부각시켰다. 시리즈로 내놓아도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츠지무라 미즈키의 소설을 읽었다. 상당히 두툼해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일본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인데 가끔 이름을 헷갈려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작가가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작품들을 검색하니 읽은 책들이 보인다. 생각보다 많다. 읽으려고 사 놓고 묵혀 둔 책들도 보인다. 이 소설에 대한 재밌는 소개가 하나 있다. 무려 열한 개 신문사에서 동시 연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대단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던지는 문제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야기의 구성 또한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다. 처음에는 몰입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순간 빠르게 빠져들었다.


대안학교 미래 학교의 옛 터에서 어린 소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골 시체가 발견된다. 노리코는 이 시체가 미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미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미래 학교 유치부의 미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보여준다. 미래 학교에 대한 두루뭉술한 윤곽은 독자로 하여금 오해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하는 미카의 모습은 이 학교를 나의 경험으로 판단하게 한다. 노리코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이 미래 학교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하지만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후 그 소녀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노부부가 등장한 후다. 미래 학교가 판매한 샘물이 문제를 일으키고 노리코가 방문한 학교는 문을 닫았다.


노리코가 미래 학교 여름방학 캠프에 간 것은 반 친구 유이의 엄마가 이 학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가 ‘문답’인데 이것이 아이의 공부에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미래 학교에서는 문답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자유로운 사고와 발표가 특징이다. 홍보 영상의 샘과 학교 생활은 아이를 매혹하기 충분하다. 반의 최고 인기인 유이와 함께 간다는 것도. 학교로 가는 길은 험하고 힘들다. 현장에 도착해서 마주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친해지고 싶은 유이와 다른 반이 되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때 그녀 곁에 미카가 나타난다. 유치부의 소녀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미카와의 만남은 노리코가 이 캠프를 재밌게 즐기게 만든다.


노리코가 이 캠프에 참여한 것은 모두 세 번이다. 두 번은 미카를 만났지만 마지막에는 만나지 못했다. 사고가 생긴 것은 두 번째 참여 후에 일어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진다. 이후 노리코는 변호사가 되어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한 워킹 맘과 다를 바 없다. 남편은 같은 변호사이지만 다른 사무소 소속이다. 나이 마흔에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이제 그 어린이집을 나와 다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야 한다. 국공립에 지원하지만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이 경험과 미래 학교의 교육과 조금씩 대비되고 맞물려 진행된다. 현실과 이상의 육아와 교육이 이야기 속에 녹아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두께가 부담된다. 담고 있는 이야기도 결코 가볍지 않다. 30년 전 있었던 한 어린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은 읽는 내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죽은 아이의 정체가 궁금하고, 미래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과 소송도 흥미롭다. 샘물 사건 이후 원래 있던 학교와 생수 공장은 폐쇄되었지만 다른 곳의 학교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 교육체계에 대한 불신이 한몫 했다. 나쁘게 해석하면 한 사이비 종교 단체의 행위로 볼 수 있지만 노리코가 경험해서 들려준 캠프의 모습을 보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샘의 물이 그렇게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보면 종교적 기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을 떠올렸다고 한 부분은 묘한 설정이다.


하나의 사건과 여러 개의 소송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우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이 각각의 입장을 말하게 놓아둔다. 특별하게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미래 학교 여름 캠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여향을 미칠지 돌아보는 장면들은 아주 인상적이다. 그리고 남편과 이 소송 대리인으로 참여하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 남편이 말한 대목은 일에 대한 애정과 깊은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미래 학교가 어린 아이들을 부모와 떨어트린 후 생활하게 하고, 자신들의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 모습은 나에게 낯선 설정은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에서 가끔 나오는 설정이다.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이런 설정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기억과 선택의 문제다. 담담하고 서늘한 문장과 표현들은 이것을 잘 드러낸다. 곳곳에 놓아둔 묵직한 문제는 깊이 생각할 거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한때 가장 즐겨 읽었던 문학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좋아하는 문학상들이 조금씩 바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문학상 수상작에 눈길이 간다. 문학상 수상과 함께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장례식장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진짜 우리의 밤이 시작된다는 소개글이었다. 20대 남녀의 방황과 성장, 죽음의 의미를 깊고도 무겁지 않게 그린 작품이란 소개는 눈길을 확 끈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왠지 모르게 긴 시간 집중을 하지 못했다. 어렵고 난해한 문장이 있거나 지루한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다. 체력 저하로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도 아니다. 단순히 취향 탓을 하기엔 궁금한 점도 많았고, 잘 읽혔다. 왜 그랬을까?


이 소설 속 두 남녀 재호와 마리는 모두 정규직을 바란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수많은 아르바이트 이력이 나온다. 공채도 넣어보고, 공무원 시험도 보지만 그들의 형편상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고 경쟁도 치열하다. 이 두 남녀가 장례식장 알바를 끝내고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에 간다. 이 밤의 풍경은 결코 낯설게만 보이지 않는다. 장례식장은 서대문 근처인데 마리의 집은 동인천이다. 택시 타고 가면 알바비의 반 이상이 날아간다. 첫 전철을 타고 가는데 이때 맥도날드는 좋은 휴식 공간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재호가 마리 곁에 있어 준다. 그리고 밤의 도시를 거닌다. 이 밤의 풍경은 내가 술을 마시고 차를 기다리던 그 풍경과 다르다.


이들이 밤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지역은 대부분 광화문과 종로 일대다. 나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공간을 확장하지만 마리의 집에 가는 전철이 1호선이다 보니 그곳에서 계속 돌아다닌다. 그리고 재호의 집은 서대문에 있다. 그의 기억과 추억이 강하게 묻어 있는 곳이다. 밤의 도시를 돌다 재호는 마리가 잠든 줄 알고 자신이 누나를 목 졸라 죽였다고 고백한다. 위험한 목 조르기 게임을 하다가 죽였다고. 자신이 목 졸릴 때 느낀 희열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날 이후 그는 흰 뱀을 본다. 장례식장 나무에서도, 집의 나무에서도, 환상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살인에 대해 의문이 생기지만 나중에 풀린다. 딸의 죽음은 부부를 헤어지게 한다.


재호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줄여서 ‘아죽사’라고 부른다. 은행 지점장을 은퇴한 후 이 모임을 이끌면서 사람들의 죽음을 돕는다. 상조회사 천국상조의 팀장이 아버지를 좋아한다. 재호가 밤 거리를 돌아다닐 때 이 상조회사의 옷을 입고 다닌다. 이혼한 부부이고, 엄마가 재혼해서 다른 아이를 낳았지만 옛날 집에 가끔 온다. 전처와의 관계 때문에 팀장과의 관계가 나아가지 못한다.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재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일본인 히로시는 고베 대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한국에 머물고 있다. 아죽사 멤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과거의 죽음이 이야기 속에 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밤의 도시는 낯과 다르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이 밤의 도시를 묘사한다. 한때 내가 즐겨 다녔던 공간들이 나와 반가웠다. 물론 낯선 곳도 있다. 재호와 마리의 가족 풍경은 흔히 말하는 보통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재호는 이혼한 엄마가 재혼 후 낳은 아들과 함께 오고, 마리의 아버지는 도박 중독이라 딸에게 돈을 강탈해간다. 마리가 이런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하다. 이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꿈꾸지만 취업난으로 이것도 쉽지 않다. 취업난이란 단어를 볼 때와 구인난이란 단어를 볼 때면 늘 이 어울리지 않는 비대칭에 의문이 생긴다. 단순히 고강도, 저임금 문제만 있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다. 더 자세히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밤의 풍경 속에 환상적인 장면도 나오고, 낯의 결심을 다룬 장면도 나온다. 과거의 흔적을 따라가 예상하지 못한 만남과 사연을 듣는다. 여기도 죽음이 관련되어 있다. 재호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도시의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살면서 발로 걷고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는 변화다. 알바 동료인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지진이 주는 공포가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올려주었다. 히로시의 부모님이 고베 대지진으로 죽은 것과 대비된다. 소설은 많은 공백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설명이나 상황은 생략되어 있다. 가끔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다. 정규직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앞날에 좋은 결과가 오길 바란다. 괜히 밤의 종로가 그립다. 너무 변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새소설 11
류현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이다. 가족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다. 누군가에게 가족은 따스함과 위안의 상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제목 같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 가족이다. 가족의 좋은 점을 부각한 소설도 많지만 가족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살다 보면 우리에게 강요된 가족의 이미지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느낀다.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하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 때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을 읽거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정말 다양한 모습의 가족을 만난다. 이 소설도 그런 가족의 모습 중 하나다.


한국은 노령 사회로 진입했다. 65세 노령 인구가 16%를 넘어갔다고 한다. 늙으면서 생기는 병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치매와 중풍 등이다. 사회가 이 노인들을 돌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가족들이 노인들을 돌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그 상황을 극단적으로 풀어냈다. 가족 간병이란 예민한 소재를 다루면서 각각의 입장을 풀어낸다. 작가는 네 명의 자식들을 한 명씩 화자로 내세우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부모를 내세운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상황과 입장에 몰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너무 적나라한 현실에 불편한 감정도 수없이 느낀다. 머릿속에 옛날 속담도 오간다.


찰떡에 질식하는 아내와 칼에 찔린 남편 이야기로 시작한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그들이 낳고 키운 아들딸 넷은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이후 이들의 시선에서 이 가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들 보기에는 부럽기만 한 가족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가족이 만들어내는 문제와 충돌하고, 각자 다른 속내와 현실이 엮인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엄마 이정숙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순간부터다.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면 자식들이 조금 더 편하겠지만 요양병원의 부정적인 모습을 본 노부부는 거부한다. 결국 차녀이자 셋째인 김은희가 부모의 집에 들어와 간병한다. 다른 자식들은 부모를 간병해야 하는 부담감을 덜어낸다.


오랜 간병 생활은 서로를 지치게 한다. 부모의 입장은 이혼하고 아들과 함께 힘들게 사는 딸을 자신들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딸은 부모의 고압적인 태도와 길어진 간병 생활에 정신적으로 지친다. 서로가 상처주는 말과 행동이 늘어나지만 집밖에 머무는 다른 형제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은희는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다른 쪽으로 푸는데 이것도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대상이 동생의 친구이고, 그의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어머니의 생일날이다. 다른 형제들은 제때 오지 않고, 큰딸만 떡을 몇 개 사서 올 뿐이다. 쌓였던 감정이 이때 폭발한다. 나중에 첫 장면의 사건이 벌어진 날이란 것을 알려준다.


김현창은 의사다. 부모의 자랑이지만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아버지가 질책을 한다. 의사인 너가 왜 몰랐냐고? 이성보다 감정적인 표현이다. 신문에 칼럼을 쓰는데 좋은 리뷰를 받지만 병원에서는 좋게 보지 않는다. 그의 글과 병원의 이익이 충동하기 때문이다. 그가 의사가 되었을 때 엄마는 의사 며느리를 원했다. 그런데 간호사와 결혼했다. 아내는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모시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엄마가 암 4기라고 하니 집에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상황과 입장의 차이가 만들어낸 이 장면은 현창을 분노하게 한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은 김인경의 남편 이야기로 넘어가면 더 심해진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짜증나는 상황이 나열된다. 읽으면서 나도 그런 적이 없는 지 돌아보았다.


학교 선생인 큰딸 김인경의 문제도 심각하다. 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친다. 나이 든 자신이 교사 생활을 하는 것을 뒤에서 욕하는 교사도 있다. 형제자매 없고, 좋은 대학 나온 남자라 결혼했는데 이것이 결혼 생활의 문제가 된다. 이 남편이 보여준 행동은 욕을 내뱉게 한다. 아들의 사고로 스트레스가 가득한데 동생 은희가 성질을 낸다. 서로 다른 상황과 입장이 충돌한다. 각자의 힘든 위치에서 볼 때 서로가 더 편한 것처럼 보인다. 이해보다 자기 입장이 우선이다. 은희가 보는 것과 달리 그녀의 삶도 힘들다. 남편 욕이 절로 나온다. 막내 현기와 그 부모의 이야기는 이 가족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자신들의 바람과 다르게 흘러가는 삶의 모습은 참으로 잔혹하다. 서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 사회의 뒤틀린 단면을 보여준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잔인한 현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