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 복수하는 여자들
한수옥 외 지음 / 북오션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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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우울증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앤솔러지다. 산후우울증의 위험성에 대해 처음 인식한 것은 후배가 자기 친구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후다. 아이를 낳고 우울증을 앓다가 큰 사고가 났다는 것이었다. 남자로 살면서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모를 철부지 시절 이야기다. 물론 지금도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정도지 그 정도가 얼마인지는 피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후 굉장히 조심하고, 주변 사람에게도 이 우울증에 대해 강조하는 편이다. 이 앤솔로지가 산후우울증을 소재로 한다고 했을 때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얼마나 사실적이고, 내가 놓친 부분들이 나올까 하는 기대였다.


이 앤솔로지는 네 명의 여성 작가가 참여했다. 두 작가는 이전에 장편 등으로 만난 적이 있고, 다른 두 명은 이번에 처음 만났다. 개인적인 취향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수옥과 김재희다. 다른 두 작가의 경우는 나의 취향과 너무 떨어져 있다. 한수옥의 <과부하>는 맞벌이 부부와 독박육아를 동시에 보여준다. 육아의 힘겨움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진짜 반전은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너무 현실적인 상황을 보여줘서 재미는 살짝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설정으로 재미를 확 올린다. 언제부터인가 친정엄마가 아이를 돌봐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는데 요즘은 또 분위기가 바뀌는 모양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직원의 ‘엄마 만세’란 말이 떠올랐다.


박소해의 <네메시스>는 영화 <기생충>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는 소설이다. 베이비시터 한 여사가 재벌 집안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그곳에서 32년 전 버린 딸을 만난다는 설정이다. 딸은 히키코모리처럼 아이와 함께 방에 살면서 나오지 않는다. 남편은 그 방에 있는 무언가를 빨리 찾아야 하는 모양이다. 쉽게 생각하면 문짝을 뜯어내면 될 텐데 생각하는 순간 특별한 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점점 한 시터에게 마음을 여는 아이 엄마가 문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때 예상하지 못한 관계와 비밀들이 흘러나온다. 과도한 설정과 전개다. 자신이 엄마라고 밝히는 순간과 그 이후의 모습에 살짝 의문이 들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답은 마지막에 나온다.


한새마의 <Mother Murder Shock>는 세 여성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는 살인자다.’라는 충격적인 도입으로 시작해 혼란과 뒤틀린 욕망과 예상하지 못한 관계를 만난다.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엄마, 돈 많은 남자를 유혹해 편하게 살려는 여자, 끔찍한 시어머니의 반전 등이 차례로 펼쳐진다. 기괴한 상황들이 펼쳐지고, 살짝 의문의 상황을 만든다. 그냥 평범해 보였던 한 가족의 이면을 이렇게도 파헤치고 뒤틀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혜서가 차안에서 겪는 심리적 불안과 공포 등은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작품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 중 한 명 김재희다. <한밤의 아기 울음소리>는 낯설고 힘든 육아로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경험하는 해주와 강동서 여성청소년과 형사 강아정의 어린 시절을 나란히 놓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소설에서 해주의 사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특히 남편의 존재는 불명확하다. 해주가 아이의 좋은 아빠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는 대목과 그 대상이 된 남자들의 놀람이 엮인다. 강아정 형사에게 신고한 남자의 의도도 나중에 새롭게 드러난다. 해주의 심리 묘사보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에 더 비중을 둔 부분은 조금 아쉽다. 육아에 지쳐 우는 수많은 엄마들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남편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작은 행동이, 소소한 관심이, 무엇보다 사회적 인식과 제도의 보완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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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없는 맛집 한국인의 소울 푸드 맛집 1
안병익 지음 / 이가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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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신 앱을 바탕으로 맛집을 크게 다섯 꼭지로 나누고, 다시 세부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안병익은 맛집 정보 서비스 식신 앱의 대표다. 저자에 안병익과 식신이 같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빅데이터 분석과 식신 앱 사용자의 후기를 같이 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앱을 통해 맛집을 잘 찾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여행을 가게 되면 몇 가지 앱이나 검색을 통해 맛집에 간다. 맛집의 신뢰도는 개인의 취향에 달렸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른 앱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워낙 이런 정보가 넘치다보니 식당에서 높은 점수를 주면 작은 선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 혹은 인스타 등에 게시하는 조건이 붙는다. 정말 과도한 정보의 홍수다.


지금은 잘 가지 못하지만 한동안 열심히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냥 우연히 들어간 집이 맛있어 계속 갔는데 알고 보니 만화 <식객>에 나왔다거나 아버지 해장을 위해 검색한 집이 나의 단골이 되었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냥 동네 맛집이었던 것이 방송에 나오면서 쉽게 가기 힘든 집이 된 경우도 여러 번 봤다. 나만의 소중한 식당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맛집들을 아주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미 내가 다니거나 다녔던 식당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맛집 대부분이 서울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광대한 맛집들이 존재하는데 왠지 이 집들만 맛집인 것처럼 다가온다. 오히려 책에 서울판이라고 하면서 서울 식당만 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먼저 다루는 음식은 국밥이다. 순댓국, 해장국, 곰탕, 설렁탕, 육개장 등이다. 순댓국은 이 책에서 가장 서울 분량이 적다. 해장국으로 넘어가면 나의 단골 무교동북어국집이 나오는데 괜히 반갑다. 제주도에 갈 때면 한 번 가야지 하면서 대기 때문에 늘 못간 우진해장국이 생각난다. 곰탕을 보면서 주차 때문에 가지 못하는 맛집의 근황이 궁금해졌고, 그 집이 빠진 것이 놀랍지는 않다. 이렇게 기억들을 타고 넘다 보면 다양한 국밥집들의 기록과 기억이 뒤섞이면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문배동 육칼이 너무 맵다고 잘 먹지 못한 직장 동료 때문에 자주 가지 못한 것은 늘 아쉽다. 이제 그 지점도 이전한 것 같다.


면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 한때 냉면에 꽂혀 서울에 유명한 냉면집 투어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그 육수의 차이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집 근처에 있어 늘 여름이면 가던 장충동 평양면옥을 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을지면옥의 차고 쫄깃한 편육은 지금도 생각난다. 의정부 평양면옥의 후손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보다 또 다른 직계가 하는 하남 스타필드에 있는 평양면옥이 입맛에 더 맞다. 입맛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그날의 몸상태가 다른 것인지. 언제 시간되면 막국수 투어도 한 번 해보고 싶다. 칼국수는 이미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 별로 당기지 않는다. 콩국수의 경우 너무나도 유명해진 두 집을 유명해지기 전에 먹었는데 지금은 가기 힘들 것 같다.


골목 터줏대감을 다룬 식당을 보면서 반가운 이름을 많이 발견한다. 한때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던 닭한마리 식당이나 유명해지기 전 주말에 간 대성갈비나 후배 집에서 간단한 술과 함께 먹던 성수족발, 친구와 함께 먹었던 평안도 족발집 등이다. 솔직히 말해 닭한마리를 제외하면 그냥 동네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당이라고 생각했는데 방송에 나오면서 이제는 갈 수도 없는 곳이 되었다. 종로 닭한마리 식당 골목에 있는 생선구이집들은 요즘 어떤지 궁금해진다. 한때 나의 단골식당이 그곳에 아직도 있을까? 동명항 생선 숯불구이로 예전에 가 본 듯한데 정확하지 않다.


찌개를 좋아한다. 몸에 이상이 생긴 후 국물을 많이 먹지 않는 쪽으로 조금씩 식성을 바꾸지만 그래도 한국인은 국물 아닌가! 우연히 청국장을 먹은 후 단골이 되었던 식당 이름이 사직골이란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오랫동안 그 식당을 가지 않아서 더 그런 모양이다. 예전에 맛집 책에서 밥이 맛있다고 해서 간 식당이 부산식당이다. 된장찌개만 먹었는데 생태찌개가 유명한 모양이다. 고기를 다룬 장으로 넘어가면 낯선 이름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고기를 그렇게 즐겨 먹지 않다 보니 가보지 않은 식당이 많다. 동네 근처도 보이는데 한 번 가보고 싶다. 웨이팅이 길다는 글은 아이와 함께 가야 하는 나의 의지를 꺾는다. 이런 책을 읽으면 가고 싶은 식당이 늘어난다. 잠깐 소개글로 대리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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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나의 세계
뫼비우스 지음, 장한라 옮김 / 교양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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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낯익은 이름이라 이 작가의 작품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집에 사 놓고 묵혀 두고 있는 책 중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절판된 책만 보인다. 그리고 그가 삽화로 참여한 소설들이 나온다. 대부분 읽은 소설이거나 가지고 있는 책이다. 이런 사실보다 먼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책소개가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일리언]과 [블레이드 러너],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어비스]까지 그가 직접 참여했거나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영감은 받았다고 말한다. 이 영화들을 재밌게 본 나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장 앙리 가스통 지로(Jean Henri Gaston Giraud, 1938~2012)는 평생 동안 ‘지르(Gir)’와 ‘뫼비우스(Moebius)’라는 두 개의 필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뫼비우스는 조금 낯익지만 지르는 완전 낯설다. 이런 정보는 사실 책을 읽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400쪽에 달하는 이 두툼한 그래픽노블은 읽기 시작하자마자 혼란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에데나의 세계>는 〈별 위에서〉, 〈에데나의 정원〉, 〈여신〉, 〈스텔〉, 〈스라〉까지 전체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그래픽노블 시리즈의 이름이고, 뒤에 다른 이야기가 몇 편 더 첨부되어 있다. 작가 자신을 그려낸 부분도 있는데 재밌게 읽지만 복잡한 이야기 구조 때문에 책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이 복잡하다. 현실과 초현실이 교차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바이블>을 떠올리는 장면도 나온다. 이 작품을 소화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다.


이 시리즈의 재밌는 부분은 1983년 시트로엥 사로부터 우주 이야기를 담은 6쪽짜리 홍보용 만화를 뫼비우스가 제안받아 시작한 것이다. 실제는 39쪽으로 늘어났고, 이 만화는 독점 판매권자들에게만 배포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이때 책자를 잘 보관하고 있다면 얼마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에데나의 정원>이 1988년에 발표되었고, 다른 작품들도 순차적으로 나왔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나왔지만 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기분 좋은 일이다. 만약 한 편씩 읽었다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함과 뭔가 찜찜한 듯한 마무리에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바뀐 주인공의 외모에 전작을 열심히 찾아보는 수고를 해야 했을 것이다.


주인공 스텔과 아탄은 아주 먼 미래에 지구가 아닌 행성 출신이다. 처음에 이 둘을 동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어진다. 스텔은 남자로, 아탄은 여자로. 이 둘이 이렇게 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에데나의 열매다. 그들이 우주선을 타고 다닐 때는 원료를 합성해서 음식물을 섭취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라미드를 통해 이 행성에 온 이후는 자연에서 나온 열매 등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중성적인 모습이 남자와 여자의 몸매로 바뀐다. 재밌는 장면은 스텔이 아텔의 외모가 바뀌면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작은 충돌 후 둘은 헤어지고, 이 둘이 이 행성을 여행하면서 경험하고 만나는 일들이 다음 이야기에서 펼쳐진다.


에데나(Edena)의 철자를 잘 보면 성경의 에덴이 떠오르고, 중성에서 남녀로 나누어진 스텔과 아탄은 아담과 이브가 연상된다. 하지만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르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서로 만나길 갈망한다. 여기에 환상이 끼어들고, 현실이 뒤틀린다. 가상 현실을 다룬 듯한 장면도 나온다. 아탄이 아타나로 불리고, 여신으로 취급받는 이야기도 나온다. 둥지에 잡혀간 아타나가 겪는 이상한 일들은 이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코쟁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얼굴이라고 부른다. 실제 사람의 얼굴이나 머리카락 등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때 나오는 이야기와 장면들은 상당히 낯익지만 가장 재밌다.


이야기 자체로 재밌지만 그림도 대단히 뛰어나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다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단순히 화려한 그림이라고 치부하기엔 세부 묘사나 구도가 눈길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시간과 공간이 혼합된다. 아주 뛰어난 연출이다. 상상을 그림으로 구현하는데 나의 인식이 모두 따라가지 못한다. 언제 다시 읽게 된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천천히 읽고, 더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언제 새로운 책이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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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11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그래픽노블은 영화의 장면을 연상하게 해요
 
저승 최후의 날 1 - 2022년 문학나눔 선정도서 안전가옥 오리지널 15
시아란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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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앤솔로지 <대멸종>에 실린 단편 ‘저승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을 장편 소설화한 결과다. 이때 쓴 글을 보니 장편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감상이 있는데 생각한 것보다 몇 배나 늘어났다. 3권을 합치면 거의 1500쪽에 달한다. 단행본 출간 전에 카카오페이지에 웹소설로 먼저 연재를 했고, 한국SF어워드 웹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단하고, 축하할 일이다. 단편을 장편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생존자들의 분량을 저승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더 현실적인 설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장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요즘 개인적으로 소설이 두 권을 넘어가면 조금 버겁다. 그런데 이 소설은 무려 세 권이다. 단편을 재밌게 읽었다고 이렇게 달려들다니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이런 생각과 달리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빠져들었다. 교통 사고로 죽은 호연과 예슬이 저승에 도착한 그 날 지구는 알두스의 천체 폭발로 발생한 감마선에 의해 순차적으로 대멸종을 겪게 된다. 그 흔한 핵폭발이나 운석 충돌이 아니라 감마선이라니. 다른 sf소설처럼 이런 일에 대한 대비를 했다면 생존을 위한 인류의 노력을 보여줄 텐데 갑작스럽게 이 일이 일어난다. 지구의 자전속도에 맞춰 인류는 강력한 감마선으로 죽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곳에 머문 사람들이다.


시왕저승의 세계에 도달한 영혼들은 평소 이 세계를 믿고 있던 사람들이다. 강하게 다른 종교를 믿은 사람들은 그 종교의 사후세계로 넘어간다. 염라대왕이 사후를 다스리는 이 세계는 망자를 받아 그들이 저지른 이승의 죄에 따라 처벌한다. 쉽게 가려고 했다면 작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후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면 되지만 작가는 시대의 변화를 저승 속에서 녹여내고 있다. 현대의 문물들이 저승에서도 재현되고, 이승의 철학이나 가치관 등이 조금씩 반영된다. 저승의 최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더불어 나의 시선을 가장 끈 부분은 바로 이 바뀐 저승세계다. 단순하고 자극적인 고대의 지옥 대신 작가가 보여준 지옥의 풍경은 그 지옥을 방문한 망자들의 첫 반응처럼 낯설고 거부감이 생기지만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갑자기 죽은 자들이 저승에 도착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보여주고, 망자들이 사출산 도산지옥에서 다칠 경우 영혼에 상처를 입고 원귀가 될 수 있다고 한 부분과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역사들을 동원해 칼로 된 나무 등을 모두 제거하는 행동을 한다.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저승이 아니다. 그리고 갑자기 망자들이 늘어난 상황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전쟁이나 재난 상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승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거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인물이 천문학 박사과정에 있었던 채호연이다. 하나의 과정을 내놓았고, 다른 천문학자들의 의견이 모이고, 이승에서 일어난 정보가 모이면서 사실로 판정된다. 이때 살짝 빌런이 이 모임에 끼어든다. 정상재 교수다.


방송에 나와 인기를 얻은 천문학자 정상재 교수의 첫 등장에서 작가는 살짝 속내를 드러낸다. 방송과 강연 등으로 나열된 문제 등을 요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날카로운 통찰과 뛰어난 직관력을 보여주는 호연이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지만 이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인류의 종말에 대한 것과 함께 그녀가 낸 또 다른 문제는 저승에 사람들이 오게 되는 과정을 들으면서 생긴 것이다. 저승의 기반이 이승의 믿음에 기반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 이 저승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의 제목처럼 저승이 최후가 펼쳐진다.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 정상재 교수가 보여주는 교묘한 언변과 논리는 박사과정 호연의 감정과 엮이면서 예상 밖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장대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작가가 설정한 종말의 모습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사고실험은 가능하다. 감마선이 지구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설정 중 일부를 보면서 <삼체>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가는 상상력을 우주로 보내기보다 저승의 모습을 최대한 현실의 반영으로 그려내면서 몰입도를 높였다. 저승이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이승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도움을 바란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데 전문가로 뽑힌 사람들이 상당히 한정적이다. 의도적인 설정인 듯한데 살짝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너무 많거나 권위적인 인물들이 모인다면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읽고 난 후 마지막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기독교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가 한정적인 것도 조금 아쉽다. 생존자 그룹 중 하나였던 솔개부대 대위 인영이 시왕저승의 사자에게 보여주는 종교적 반응은 살짝 반발감이 생긴다. 오해와 이해 부족이란 단어가 나오지만 그의 반말과 함께 눈에 거슬린다. 독자적 사후세계를 이루고 살아가던 망자들이 나중에 너무 쉽게 이승에 나타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살짝 균형이 깨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재밌어졌다. 작가는 곳곳에 권위주의를 무너트리는 장면을 넣었다. 현실에 대한 반발이 아닐까? 이 글을 쓰는 지금 마지막 장면과 더불어 혹시 하는 기대를 품는다. 시왕저승의 최후 이후 다시 만들어지는 시왕저승의 모습을 그린 소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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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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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발표작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024년부터다. 기후 변화로 폐허가 된 미래를 설정하고 그려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겨우 2년 남았지만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미룬다면 생각할 거리가 많다. 핵 전쟁이나 외계인의 침입 등보다 훨씬 현실적인 설정이란 생각이 든다. 읽다 보면 의문이 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소설 속에서 해결되거나 생략된 것들이다.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국가가 존재하지만 공권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약탈을 저지르고, 경찰이 약탈자처럼 변한 것들이다. 그리고 마약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면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초공감자들의 존재다.


책을 펼치면 만나게 되는 낯선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지구종’이다. 이 단어를 만들어낸 인물은 바로 주인공이자 기록자인 로런이다. 소설은 로런의 2024년부터 2027년까지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열다섯 살 생일날의 기록으로 시작한다. 일기라고 해서 매일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사건에 따라 각각의 분량도 다르다.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했던 소녀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사이에 그녀의 성장과 고난과 현실에 대한 참혹한 묘사와 설명은 그 단순한 요약 이상을 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한 듯이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이 무너진 후의 삶을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생각할 거리를 쉴 새 없이 던져준다.


로런의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다. 목사라고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대학에 강의를 나가야 한다. 로런의 엄마가 죽은 후 새로운 여자와 결혼했고, 로런 밑으로 동생이 네 명이나 있다. 어릴 때 로런의 초공감증후군은 아주 심했다. 피까지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다른 대상의 고통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는 증후군인데 옆에 누군가가 없으면 이 무시무시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자신도 똑같이 그 고통을 느끼니 상대가 둘만 되어도 목숨이 위험하다. 이야기 도중에 그녀가 명사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누군가가 즉사하지 않으면 그 고통 때문에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목사의 딸이란 설정은 소설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장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자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장벽을 쌓은 이유도 부랑자나 도둑들이 침입해서 훔치고 약탈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혼자 집을 지키기는 너무나도 무력한 시대다. 기후 변화로 물과 식량이 귀해졌다. 물의 경우 우물이 없다면 사서 먹어야 한다. 비라도 자주 온다면 좋겠지만 비도 거의 오지 않는 환경이다. 삶이 너무나도 힘들다 보니 사람들은 좀더 좋은 환경을 가진 것처럼 알려진 캐나다로 달려간다. 캐나다도 이런 사람들을 막아야 한다. 이 부분은 현재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중남미 사람들과 대비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안전하게 노동을 제공하고 먹고 사는 것이다.


일상의 기록은 혼란의 시대일수록 가치가 있다. 그 시대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로런은 이 시대를 보면서 하나를 깨닫는다. 그것은 세상의 변화다.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믿고, 변화의 힘을 믿는다. 이 부분을 보면서 불교의 ‘무상’이란 개념이 떠올랐는데 나중에 살짝 이 지적도 나온다. 변화는 세상 속에서 그대로 순응하면 그 변화에 휩쓸려 들어가지만 그 변화의 힘을 자신들로부터 시작한다면 어떨까?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동과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생존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튼튼한 것처럼 보였던 장벽이 무너지고, 아버지의 생존을 알 수 없는 현실이 일어난다. 이런 가능성을 늘 대비했지만 그 충격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황폐해진 환경 속에 사람들의 삶은 각자도생이 된다. 부모가 자식을 팔고, 새로운 노예 제도가 생긴다. 거대 기업들은 자본의 힘으로 시대를 뒤로 돌린다. 야생 개들이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먹고 산다. 그런데 장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 개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미 다른 곳에서 식인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개를 인간의 친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아직 그런 허기를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국가가 존재하고, 바닷물을 담수화해서 보급 가능하고, 우주선을 우주로 보낼 수 있는 시대이지만 눈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야만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갑자기 생각이 문명과 야만의 충동이란 판타지로 빠진다.


이 우화 시리즈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겨우 반이 지났다. 소설 곳곳에 깔아 둔 몇 가지 이야기들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새로운 대통령의 등장이나 대기업의 공격적 식민화나 인종 차별 등의 문제 등이다. 살짝 보여준 캐나다 국경 지역의 설명도 더 필요하다. 다음 이야기에서 어디까지 나올지 모르겠다.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유민들을 조직해서 기업 등을 공격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는데 국가가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는 내용을 보고 생각을 접었다. 아직 완전히 국가 권력이 해체된 것이 아니다. 경찰이 시민을 약탈해도 문제가 없는 시대라는 것도 무섭다. 지구종의 씨앗이 어디까지 뿌려지고 싹을 틔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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