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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억
최정원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2년 3월
평점 :
표지가 복잡하고 섬뜩하다. 소설의 도입부는 상당히 낯익은 설정이다. 갇힌 사람 한 명, 그의 가족들, 강요된 선택. 그 가족은 아버지, 아내, 아들이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죽거나 자신이 죽어야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주춤한다.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왜 이런 일이 생긴거지? 누구를 선택해야 하지? 선택을 한다고 해도 선택된 인물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 정말 처참하고 잔인하고 사악한 일이다. 나라면 어떨까? 나의 죽음을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 이성은 나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까? 자신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나아가다 그의 외침을 듣는다. 아내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이 기억은 단순한 악몽일까? 아내와 다른 몸매의 여자에게 끌린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강렬한 첫 도입부를 지난 후 작가는 세 사람을 내세워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풀어간다. 기석, 유경, 정환이다. 기석은 대학교수다. 학창시절 지하철에 떨어진 아이를 구한 후 영웅이 된 적이 있다.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와 과거 행적은 지속적으로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는다. 거절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권으로 나가는 순간 그의 숨겨진 비밀들이 파헤쳐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첫 장에서 그의 선택을 강요한 것은 어떤 일 때문일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의 삶과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어린 시절의 환상과 뒤틀린 욕망이 조금씩 밖으로 드러난다.
기석의 아내 유경은 정치권 유력 인사의 딸이다.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 잘 생긴 남편이 있고, 아들은 현재 유학 중이다. 남들이 보면 화목하고 부러운 집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랫동안 섹스도 없었다. 그런데 아파트 아줌마 사이에 잘 생긴 20층 남자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고, 넘어질 뻔한 그녀를 잡아준다. 그 남자에게 끌린다. 아직 외모에 자신 있다. 이때 하나의 동영상이 도착한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외도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다. 분노한다. 누가 왜 이런 동영상을 보낸 것이지? 일주일 뒤 다른 동영상이 온다. 분노하고 심리적으로 무너진다.
영환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앞의 두 인물이 현재에서 시작한 것과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랐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친구가 한 명 있다. 지후다. 밝고 잘 생긴 아이다. 지후의 초대를 받은 후 둘은 아주 가까워진다. 영환의 엄마도 지후라면 믿는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영환은 지후를 통해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귄다. 그러다 유명한 선생님이 운영하는 캠프 참여를 신청한다. 먼저 참여한 친구들이 극찬을 한다. 아이들이 홀로 그 캠프까지 찾아와야 한다. 영환의 악몽은 바로 이 캠프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영환이 발견되고, 지후가 한참 후 토막난 채 발견된다. 영환의 억제된 기억 속에 답이 있다.
기석과 영환의 과거 속에 사건의 답이 있다. 본심을 숨긴 채 살아가는 기석의 속내와 과거 행위가 하나씩 드러난다. 영환의 기억은 봉인된 채 사실을 알고 싶어 미쳐가는 지후의 엄마와 충돌한다. 깨지고 무너진 정신과 돌이킬 수 없는 일상의 파괴가 펼쳐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누군가는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누군가는 갑자기 촉발된 하나의 동영상으로 선명해진다. 이제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유경은 남편의 외도와 첫 장면에 나온 선택 영상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20층 남자가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다. 읽다 보면 이 남자가 누굴까 궁금해진다. 나의 추리는 그 실체가 벗겨졌을 때 완전히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앞에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소설의 영향으로 나만의 소설을 쓴 것일까?
과거에 있었던 살인 사건 하나. 그 범인을 죽이면 끝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강력하게 포장된 이미지와 당시 사건을 무마한 뒷배경은 역공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한 인물을 완전히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복수심에 불타 감정대로 움직인다면 자신마저도 태워버릴 수 있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놀란다. 봉인된 기억 속에 감추어진 욕망은 또 어떤가!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많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자극적이고 불편한 묘사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장에 나온 사진 한 장이다. 왠지 모르게 강하게 머릿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