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간다
아사이 료 지음, 곽세라 옮김 / 비에이블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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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때부터 강요받는 것이 하나 있다. 원대한 포부나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가장 흔하게 듣는 질문이 ‘너는 꿈이 무엇이냐?’와 ‘무엇이 되고 싶냐?’ 하는 것들이었다. 만화를 좋아했던 내가 한 답은 만화방 주인이었는데 원대한 포부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하나씩 그 계획을 달성하는 것도 내 성질과 맞지 않았다. 강요된 교육과 강요된 미래에 대한 설계 등은 언제나 내 삶과 충돌했다. 그렇다고 사회 바깥을 겉도는 아웃사이더도 아니다. 그냥 흔하게 우리 주변에서 보는 아저씨 중 한 명으로 살았다. 이런 나지만 살면서 고민이나 미래에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하루와 현실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하면 너무 포장하는 것일까? 제목에 먼저 꽂히고, 작가의 이력을 보고 더 읽고 싶어 선택한 책이다.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설정과 전개이지만 뛰어난 가독성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다. 책소개에 나오는 럭셔리한 두뇌에 퍼펙트한 운동신경을 가진 만년 1등 유스케와 타고난 소심함으로 무장한 오랜 단짝 도모야에 새로운 전학생 가즈히로가 전체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각 장마다 한 사람이 등장해 자신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이런 이들 앞과 옆에 유스케와 도모야가 있는 설정이다. 그리고 첫 장에서 이들과 관계없는 간호사와 그 동생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로 시작해 유스케와 도모야로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지는데 이때 유스케에 대해 받은 인상은 이후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변한다. 식물인간처럼 변한 도모야를 매일 와서 간호하는 유스케의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헤치는 역할도 한다.


가즈히로는 자주 전학을 다니는 아이다. 처음 등교한 날 이 학교에서 스키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학생인 그를 친절하게 도와주는 학생이 바로 도모야다. 도모야의 단짝은 잘 생기고 공부도 운동도 1등인 유스케다. 이 세 명은 친해져 같이 놀러 다닌다. 이때 유행하는 만화책이 있었다. <제국의 법칙>이란 전쟁만화다.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아이들은 이 영화 속 캐릭터에 열광한다. 명칭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들이 보기에 유스케 아버지 명함에 나온 이름은 영화 속 캐릭터와 닮아 보인다. 물론 이 실체가 다음 이야기에서 깨어지지만 초등학생들의 환상 속에서는 아직 그 힘이 유지된다. 이 삼총사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반이 갈린다. 유스케와 가즈히로는 같은 반이고, 도모야는 다른 반이다. 이때 유스케의 강렬한 경쟁의식이 밖으로 강하게 드러난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아야나라는 여학생이 화자다. 그녀의 절친은 유스케에 빠져 있고, 그녀는 도모야에 관심이 있다. 열네 살 소녀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과 유스케 등의 행동을 관찰한다. 학교에서 전체 석차를 붙이는 것을 금지하자 유스케는 초등학교때처럼 화를 낸다. 모든 운동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유스케가 단 하나 잘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수영이다. 도모야는 수영부의 부장까지 된다. 그 시절 소년 소녀의 미묘한 감수성과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런 구성은 유스케 등이 대학생이 된 후 다른 대학생의 시선으로 풀려나오고, 그 이후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으로 넘어간다. 자신들의 삶을 보여주고, 그 삶 속에 유스케 등이 놓여 있다. 읽으면서 그들의 삶과 생각들이 계속해서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비교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하나의 가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산족과 바다족의 대결이란 설정이다. 인기 만화와 엮이고, 도시전설과 이어지면서 이 가설은 점점 힘을 얻는다. 도모야가 식물인간처럼 변하게 된 사연이 바로 이 가설과 관계 있다. 그리고 이 가설은 두 청년 유스케와 도모야의 삶과 연결된다. 강요된 지식의 주입이 만들어낸 삶이 각자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삶의 이유를 자신의 존재감을 밖으로 드러내고 싸우는데 있는 유스케와 조용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도모야의 삶으로 말이다. 이 과정에 각각의 화자를 내세워 그 시절의 고민과 그들이 바라본 둘의 삶을 보여준다. 이때 보여지는 유스케의 모습은 어릴 때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던 모습은 사리지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행동만 부각된다. 살기 위한 이유가 아닌 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가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하나의 가설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빠진 듯한 느낌이지만 뛰어난 가독성과 마지막 설정이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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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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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께이가 “미스터리 마니아들이 원하는 요소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데 나보다 먼저 읽은 독자들의 평은 극찬 일색이다. 책을 받고 읽을 일정을 세웠는데 에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서 일정들이 꼬였다. 생각보다 늦게 읽게 되었는데 나의 마음 한 곳에서는 아껴둔 책을 읽는다는 쪽으로 위로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시간 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한 마디로 아주 멋진 미스터리 소설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네 명의 시선으로 풀어가는데 각자의 입장과 사연들이 엮이고 꼬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은 또 어떤가! 나쁘게 보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지만 실제는 촘촘히 쌓아 올린 이야기의 결과다.


네 명은 조류학자이자 탐정인 푸얼타이 교수와 전직 형사였던 뤄밍싱과 거레이 변호사와 괴도인 인텔선생 등이다. 사건은 1월1일 캉티뉴쓰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가 산책로에서 총을 맞고 죽은 것이다. 그 시간대에 산책로를 드나든 사람도, 단서도, 목격자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밀실 같다. 현장을 조사한 경찰은 그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다. 가능성이 나오면 다른 증거에 의해 소거된다. 이때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이 호텔에 온 조류셜록이라고 불리는 푸얼타이가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적한다. 호텔 조경을 담당하던 황아투라고. 살인자가 숨은 곳도 알아낸다. 그런데 황아투가 죽은 책 발견된다. 다른 누가 있는 것일까?


전직 경찰이자 현재 사립탐정인 뤄밍싱은 고도비만이 시달리고 있다. 한때 그의 정보원이었던 여인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 캉티뉴쓰 호텔에 왔다. 그가 경찰을 그만두게 된 사연이 나온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뛰어난 형사였다. 많은 사건과 중요한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다. 이런 실력이 발휘된 결과로 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 호텔에서 그가 변한 모습에 놀란 이전 친구와 아내가 등장하고, 그의 작은 실수는 결국 바이웨이둬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푸얼타이 교수가 지목한 범인 외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지적한다. 사건이 꼬인다.


거레이 변호사는 이혼전문변호사이자 뤄밍싱의 전처였다. 피살된 바이웨이퉈의 아내인 란니의 오랜 친구다. 란니의 의뢰로 바이웨이퉈의 사생활을 조사하던 중이고, 또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녀가 뤄밍싱과 이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 엇갈린 사실은 우리의 현실을 다면적으로 보게 한다. 생각하지도 못한 이유다. 그녀는 란니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치내면서 황아투에 대한 비교적 잘 안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이자 탐정의 조사는 이 사건의 또 다른 부분을 지적하게 만든다. 각자의 사연으로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새로운 사실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간다. 그녀가 지적한 범인 중 한 명은 한때 유명했던 괴도 인텔 선생이다.


마지막 화자는 신출귀몰한 솜씨로 부유층만 전문적으로 털었던 괴도 인텔 선생이다. 그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이전의 파트너가 그를 다시 도둑질로 이끈다. 거래의 대상은 바이웨이둬였다. 그가 괴도가 된 사연이 흘러나오고, 우연히 발견한 단서들이 사건의 다른 면을 엿보게 한다. 그가 도둑질을 그만 두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사회의 변화에 대해 목사와 나눈 대화다. 그가 도둑질로 사람들을 돕는다고 바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려주고, 한 신부의 오랜 세월 선교 활동의 결과로 신도가 늘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돌렸다. 그가 또 다른 범인을 지적할 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네 명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각각 완벽하지 않지만 그 과정들이 덧붙여지면서 진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셜록 홈즈의 패러디인 푸얼타이 교수가 보여준 놀라운 추리는 탁월한 직관과 통찰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이지만 이 복잡한 사건을 완전히 밝히는 것은 무리다. 다른 사실을 가지고 다가온 화자들이 보여준 진실의 한자락도 마찬가지다. 앞의 완전하지 못한 허점을 조금씩 메우면서 나아간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그들의 사연은 그 자체로 재밌고 흥미롭다. 이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가는 힘이 대단하다고 느끼게 한다. 이 정도 필력과 캐릭터 형성 능력이라면 다른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독자처럼 다음 작품을 빨리 내주길 바란다. 이미 출간된 책들이 있으니 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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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교실 - 젠더가 금지된 학교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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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일본 문학상 수상작가 중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가 무라타 사야카다. 몇 권 읽지 않았는데 강렬한 캐릭터와 재밌는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이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것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들을 뒤집어 보게 한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장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단편집이다. 모두 네 편이 실려 있는데 예상하지 못한 설정과 전개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잠시 추억에 잠기게 하고, 극단적으로 흘러간 정책의 맹점을 엿보고, 대담한 묘사와 설정에 또 한 번 더 놀란다.


<마루노우치 선의 마법소녀>은 어릴 때 본 만화의 주인공 캐릭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일상 생활에서 응용하면서 살아가는 리나 이야기다. 미라클 리나라고 부르면서 일상 생활을 스트레스를 마법소녀 변신을 외치면서 물리친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현실은 그녀의 상상력을 조금씩 무너트린다. 만화 속 세게는 간단하게 이분법으로 나누어져 있고, 마법소녀가 활약하면 모두 해결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런 그녀에게 함께 마법소녀 변신을 외쳤던 친구 레이코가 남친의 폭력과 가스라이팅으로 힘들어한다. 그녀를 구해주고 싶다. 레이코의 남친이 집 앞에 나타났을 때 마법소녀 변신과 활동을 말한다. 중년의 남자가 조잡한 컴팩트를 들고 변신을 외친다고. 가능할까? 그런데 그는 해낸다. 이야기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이 소설의 진정한 재미는 진심이 아닌 역할에 빠진 남자의 폭주와 그를 본 여친의 변신에 있다.


<비밀의 화원>도 대담한 설정이다. 초등학교부터 짝사랑한 남자를 자신의 집에 가둔다. 일주일 동안의 사육이다. 이 사육에는 상대방의 동의도 있었다. 남자가 원한다면 힘으로 눌러서도 가능하고, 아니면 집밖에 알려서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이 작은 놀이에 동의한다. 우치야마는 짝사랑을 집에 가둔 후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 첫사랑의 환상은 너무나 강렬해 정상적인 연애가 불가능하다. 극단적 상황과 설정으로 펼쳐지는 작은 일상들은 섬짓하다. 그렇지만 이 환상을 깨트리기 위해 그녀가 한 행동은 대담하고 강렬한다. 역시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재밌다.


표제작 <무성 교실>은 학교에서 성별이 사라진 세계를 다룬다. 성년이 되기 전까지 모든 학생들은 자신의 성을 알리는 것이 금지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목울대나 키 등을 참조해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성별을 알려주는 의복도 금지되다 보니 자신의 감정이 끌리는 친구와 사귀기 전에 성별을 묻기도 한다. 유토는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키가 자신과 섹스하고 싶다고 하자 달아난다. 유키는 이제 성별이 사라진 미래를 말한다. 수술로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별에 대한 의혹과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녀가 끌렸던 세나의 성별이 궁금하다. 이 확인하고 싶은 욕망과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그녀는 혼란을 느낀다. 마지막 장면은 자극적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변용>은 어느 정도 읽기 전까지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를 하면서 고객들의 분노를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는 알바들을 보면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고 감탄한다. 그런데 아니다. 이 세계의 청년들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후 이 세계에서 결혼한 남녀가 섹스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나온다. 가와나카가 세상과 단절된 기간은 어머니 병간호로 보낸 2년 전부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젊은이들만 아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이 감정을 가진 사람을 기억하고 만난다. 20년 전 자신들에게 섹스를 강변했던 여자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어와 트렌드에 대한 유행을 날카롭게 꼬집고 비틀고 섬찟하게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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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네오픽션 ON시리즈 1
신조하 외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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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다. 솔직히 말해 SF 단편 앤솔로지란 사실 이외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기성 작가의 단편에서 가끔 매너리즘이 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의 SF 불모지 이미지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좋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취향을 벗어난 경우를 자주 보다 보니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낯선 9명의 신진 작가가 쓴 SF 단편에 큰 기대는 쉽지 않다. 이런 섣부른 예측은 첫 단편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날아갔다. 나의 오만이, 착각이, 섣부른 판단이 산산조각났다. 즐거운 일이다. 이후 아홉 편의 단편들은 나를 새로운 기대로 물들게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은 신조하의 <인간의 대리인>이었다. 변호사가 쓴 법정극인데 밀도 있고 간결한 문장이 나를 훅 끌어들였다. 무뇌증이었지만 인공뇌를 이식받은 변호사가 인공지능 판사의 법정에서 인간 변호사와 대결하는 것을 다룬다.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판사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부분을 담아내면서 미묘한 감정과 숨겨진 사실 등을 뒤섞어 반전을 펼친다. 디테일도 상당히 잘 살아 있다. 유이립은 몇 권의 단편집에 이름을 올린 작가다. 물론 나에게는 첫 작품이다. 그의 <스키마 리셋터>는 타인의 의식을 조작해 의견을 바꿀 수 있는 기계 이름이다. 한 자동차 대기업의 노사관계나 하청업체 대표를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재밌게 비튼다. 관찰 보고서처럼 진행하는 것도 아주 잘 풀어내었다.


임하곤의 <나와 올퓌>는 휴머노이드 올퓌와 동행하면서 생긴 이야기를 다룬다. 이 미래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기존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로 생활한다. 나는 손녀를 만나기 위해 구형 태양관 자동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그 길위에서 만난 휴머노이드가 올퓌다. 팬더믹 현실의 미래 버전이자 인간의 혐오 범죄를 뒤섞었다. 최희라의 <영원>은 심리학자 한설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현재 세계에 대한 저항과 이 세계가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특별한 아이 영원에 대한 것이다. 이 아이들을 돌보는 로봇 인피니티와의 유대와 아이를 통해 입력된 인간 아님에 대한 정의가 로봇 3원칙과 충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살짝 철학적 고민도 필요하다.


표제작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이세형의 첫 단편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여자의 이야기에서, 그녀의 남편 이야기로, 마지막에 새롭게 바뀐 세상에서 감정을 팔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결혼식 하객 대행업에서 시작해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우리의 감정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클레이븐의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는 표제작의 제목 패러디 같다. 도덕 베타 버전 4.0 이상이 되어야 택배 업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좌절한 정수가 본 미래의 풍경은 강력한 통제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런 세상에서도 일탈은 일어난다. 그런데 화형이라니… 의도와 도덕적 행동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고, 예상하지 못한 결말과 섬뜩한 미래의 모습에 암울한 재미를 느낀다.


강윤정의 <대통령의 자장가>는 미스터리를 다룬다. 대통령의 인공자공 기계가 움시스가 납치된다. 이 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 어떻게 청와대에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이어지는 납치범의 협박과 추적과 사건 해결과 정치적 목적 등이 뒤섞인 마지막은 잘 만들어진 단편 추리소설과 같다. 이성탄의 <정신의 작용>은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해 사후에도 유지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다룬다. 인간 뇌 속에 담긴 수많은 정보와 지식 등을 업로드하는 과정에 생기는 문제를 보여준다. 마지막 설정은 왠지 과한 설정을 빠진 것 같다. 안리준의 <미래의 죽음>은 미래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아내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본 아내 미래의 죽음 후를 본 매리의 장면이다. 프로그램 제작과 확정된 미래에 대한 생각 등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온다. 자신이 본 미래의 모습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고전 SF에서 많이 다룬 시간 패러독스에 대한 작은 오마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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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책방
박래풍 지음 / 북오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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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현대 서점에서 근무하는 사람 둘이 우연한 사고로 갑자기 16세기 조선으로 타임슬립한다. 때는 중종,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절이다. 보통의 판타지라면 타임슬립한 인물들의 좌충우돌하는 활약을 보여줄 텐데 이 소설은 책방이란 설정에 충실하다. 타임슬립한 박선우 점장과 김연희 대리는 조연으로 그곳에 머문다. 훈구파가 득세하는 시절로 간 이들은 우연히 만난 어기남의 도움으로 이 시대에 안착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군부대 도서 납품을 위해 가지고 있던 현대 베스트셀러 서적들이 전부다. 하지만 이 베스트셀러는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하고,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좋은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타임슬립물처럼 왜 이들이 이 시대로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기남이 이들을 환대한 이유는 용화사 스님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님은 훈구파의 모략에 의해 자살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아버지 어득강은 훈구파의 바람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리다가 이런 비보를 접했다. 형 어기선에게는 서로 연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훈구 세력의 핵심인 심준의 딸 민주다. 민주는 나중에 조선책방에 와서 일하고, 심준의 음모를 깨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원수의 딸이란 오명과 어기선의 죽음이 어떤 사실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아픈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지식과 정보가 특정 세력에 독점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책을 손쉽게 읽게 된 데는 활자 혁명과 교육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로 마찬가지다. 조선의 사대부는 중국을 사대하고, 자신들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자 한다. 명 나라의 서적들은 높은 가격으로 수입되고 있지만 서민들은 한글로 된 언문서적만 겨우 볼 뿐이다. 어득강이 민간에 서사를 만들어 지식을 만인에게 알리려고 하지만 시민들이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 훈구파는 이 시도를 원천봉쇄한다. 이때 선우 등의 도움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난 후 급제한 기남이 중종에게 이 책을 받쳐 신뢰를 얻고, 민간 서사에 대한 허락을 받는다. 이 책방 개설은 기남의 친구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민간 서점 조선책방과 대립하는 백록동이란 서점도 있다. 훈구파가 세운 국가 운영 서점이다. 작가는 이 두 서점의 대립과 대결을 그려내는 대신 조선책방에 21세기 베스트셀러를 언문으로 번역해 들여놓는다. 그리고 현대 서점의 서비스와 마케팅을 같이 진행한다. 이 행위 속에 현재 대형 서점 등이 가진 문제와 한계 등을 살짝 풀어놓는다. 우리가 무심코 보고, 지나간 곳이 어떤 고민으로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지 알려준다. 현대 서점의 서비스 등을 부각시켜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을 텐데 이 부분을 간결하게 처리한다. 대표적인 것이 저자나 추천인의 사인본이다. 이 정보를 관보에 올려 마케팅에 성공한다. 이 부분에서 역사의 자료를 사실적으로 녹여내었는데 흥미로운 지점이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등장시켜 작은 재미를 배가시킨다. 조금 낯선 인물인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나 너무나도 유명한 의녀 대장금이나 기생 황진이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이들을 등장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절의 인물들에게 알맞은 현대 서적을 추천하면서 책이 지닌 힘을 조용히 강조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책을, 죽인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에게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같은 시집이다. 물론 현대적 감수성을 조선 시대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판타지 소설이니 큰 무리가 없다.


전체적으로 치밀한 설정과 긴장감을 고조시키기보다 쉽게 타임슬림에 적응할 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16세기 조선에 21세기 베스트셀러를 판매한다는 목적에 맞는 전개와 구성이다. 그래서 아쉬운 대목도 있다. 어기남과 훈구파의 대립이나 조선책방과 백록동의 대결 등을 부각시켜 오락적인 요소를 더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현대적 택배 시스템 같은 화살배달 같은 에피소드도 하나 정도 넣었다면 어땠을까? 혹시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개인적으로 영화 제작을 밀고 싶다. 분량이나 내용 등이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터임슬립을 철학적 논제인 부분과 전체 속에서 돌아본 부분과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인식을 깨트리는 부분은 가벼운 듯한 이 소설에 무게를 더한다. 유쾌하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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