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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책방
박래풍 지음 / 북오션 / 2022년 3월
평점 :
춘천의 현대 서점에서 근무하는 사람 둘이 우연한 사고로 갑자기 16세기 조선으로 타임슬립한다. 때는 중종,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절이다. 보통의 판타지라면 타임슬립한 인물들의 좌충우돌하는 활약을 보여줄 텐데 이 소설은 책방이란 설정에 충실하다. 타임슬립한 박선우 점장과 김연희 대리는 조연으로 그곳에 머문다. 훈구파가 득세하는 시절로 간 이들은 우연히 만난 어기남의 도움으로 이 시대에 안착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군부대 도서 납품을 위해 가지고 있던 현대 베스트셀러 서적들이 전부다. 하지만 이 베스트셀러는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하고,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좋은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타임슬립물처럼 왜 이들이 이 시대로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기남이 이들을 환대한 이유는 용화사 스님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님은 훈구파의 모략에 의해 자살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아버지 어득강은 훈구파의 바람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리다가 이런 비보를 접했다. 형 어기선에게는 서로 연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훈구 세력의 핵심인 심준의 딸 민주다. 민주는 나중에 조선책방에 와서 일하고, 심준의 음모를 깨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원수의 딸이란 오명과 어기선의 죽음이 어떤 사실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아픈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지식과 정보가 특정 세력에 독점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책을 손쉽게 읽게 된 데는 활자 혁명과 교육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로 마찬가지다. 조선의 사대부는 중국을 사대하고, 자신들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자 한다. 명 나라의 서적들은 높은 가격으로 수입되고 있지만 서민들은 한글로 된 언문서적만 겨우 볼 뿐이다. 어득강이 민간에 서사를 만들어 지식을 만인에게 알리려고 하지만 시민들이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 훈구파는 이 시도를 원천봉쇄한다. 이때 선우 등의 도움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난 후 급제한 기남이 중종에게 이 책을 받쳐 신뢰를 얻고, 민간 서사에 대한 허락을 받는다. 이 책방 개설은 기남의 친구들이 큰 도움을 주었다.
민간 서점 조선책방과 대립하는 백록동이란 서점도 있다. 훈구파가 세운 국가 운영 서점이다. 작가는 이 두 서점의 대립과 대결을 그려내는 대신 조선책방에 21세기 베스트셀러를 언문으로 번역해 들여놓는다. 그리고 현대 서점의 서비스와 마케팅을 같이 진행한다. 이 행위 속에 현재 대형 서점 등이 가진 문제와 한계 등을 살짝 풀어놓는다. 우리가 무심코 보고, 지나간 곳이 어떤 고민으로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지 알려준다. 현대 서점의 서비스 등을 부각시켜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을 텐데 이 부분을 간결하게 처리한다. 대표적인 것이 저자나 추천인의 사인본이다. 이 정보를 관보에 올려 마케팅에 성공한다. 이 부분에서 역사의 자료를 사실적으로 녹여내었는데 흥미로운 지점이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등장시켜 작은 재미를 배가시킨다. 조금 낯선 인물인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나 너무나도 유명한 의녀 대장금이나 기생 황진이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이들을 등장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절의 인물들에게 알맞은 현대 서적을 추천하면서 책이 지닌 힘을 조용히 강조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책을, 죽인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에게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같은 시집이다. 물론 현대적 감수성을 조선 시대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판타지 소설이니 큰 무리가 없다.
전체적으로 치밀한 설정과 긴장감을 고조시키기보다 쉽게 타임슬림에 적응할 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16세기 조선에 21세기 베스트셀러를 판매한다는 목적에 맞는 전개와 구성이다. 그래서 아쉬운 대목도 있다. 어기남과 훈구파의 대립이나 조선책방과 백록동의 대결 등을 부각시켜 오락적인 요소를 더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현대적 택배 시스템 같은 화살배달 같은 에피소드도 하나 정도 넣었다면 어땠을까? 혹시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개인적으로 영화 제작을 밀고 싶다. 분량이나 내용 등이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터임슬립을 철학적 논제인 부분과 전체 속에서 돌아본 부분과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인식을 깨트리는 부분은 가벼운 듯한 이 소설에 무게를 더한다. 유쾌하고 흥미로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