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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ㅣ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평점 :
냉동 인간을 소재로 이야기의 탑을 겹겹이 쌓아올린 소설이다. 냉동 인간을 해동하는 기술이 보편화된 미래 사회를 바탕으로 냉동 인간, 냉동 인간의 가족, 냉동 인간 기업 관계자 등의 사연을 하나씩 풀어내면서 천천히 엮어 간다. 처음 이 책을 선택할 때 예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풀어나가 혼란스러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도달하면 앞에 쌓아두고, 엮어 둔 이야기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서로의 관계가 이어진다. 앞에 나온 사연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이름을 잊는다면 그 연결 고리를 찾아 관계도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해법이다. 이렇게 관계가 복잡하게 엮이고 꼬인 것은 냉동 인간의 해동 시점과 그들의 과거 때문이다.
규선이 B-17903의 해동에 대한 정보를 얻을 때만 해도 낭만적인 사연이 펼쳐질 것 같았다. B-17903은 무려 50년 동안 냉동되어 있었다. 그 시간을 정한 이유는 그가 꾼 꿈 때문이다. 그는 예지몽을 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꿈은 한 장면을 보여줄 뿐 그 장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다. 그 장면은 맞지만 왜 그런 상황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예지몽은 B-17903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꿈의 대상이 규선과 결혼할 예정인 가은이란 것은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규선, B-17903, 가은 등이 엮이고 꼬이면서 상황을 만들고 긴장감을 고조시키지만 이 소설은 그런 방식과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규선은 냉동 인간 회사에서 일하지만 냉동 인간에 호의적이지 않다. 회사 안에서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도 아니다. 가은과 결혼 준비를 하면서 모든 일을 맡겨두고 있다. 8년을 만났지만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 미래의 삶을 꿈꾸는 그에게 결혼은 또 다른 불안감을 준다. 신혼집을 사면서 생기는 대출과 혹시 지금은 각광받고 있는 사업이 사양 산업으로 바뀌어 일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집 계약을 위해 그녀에게 연락을 했지만 혼자 하라고 말한다. 가은이 이렇게 반응한 이유는 그녀가 냉동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가 살고 있는 집도 같이 해동된 사람이 싼 가격에 세를 주었기에 가능했다. 작가는 이 주부의 사연보다 주부의 쌍둥이 남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엄마 없이 자랐다가 갑자기 나타난 엄마를 대하게 된 남매의 반응 말이다.
쌍둥이 남매처럼 비교적 쉽게 그 관계를 알게 되는 사람도 나오지만 갑자기 동떨어진 사람의 이야기도 나온다. 은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냉동 인간 관련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데 취재 과정에서 궤변과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만 둔다. 이 과정에 무속인이 끼어 있는데 자식이 생길 것이란 예언을 듣는다. 은태 부부는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길 바랐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연결 고리가 이어진다. 냉동 인간을 가족으로 둔 채 살아간 사람들이 겪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와 다른 지점을 이 이야기에서 다루는데 궤변과 이기심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면 혹시 앞으로 오게 될 미래가 더욱 암울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사람들의 사연을 한 명씩 던져 놓는다. 그 당시의 감정을 각 인물의 시점에서 풀어내는데 이 부분이 사실을 교묘하게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 속에 벌어지는 두 개의 큰 사건은 모두 가은과 이어져 있다. 가은이 왜 냉동 인간이 되었는지, 해동된 후 만난 규선에게 자신의 냉동 인간 사실을 알리지 못했는지 알려주는 시점도 가장 나중에 나온다. 그리고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빚어낸 비극은 그 당시 시간을 벗어났다고 해도 그 대상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자신이 그 대상을 극복할 수 없다면 현재진행형임을 알려준다. 읽다 보면 답답함도 느낀다. 망해버린 이번 생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변하지 않은 사회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모습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이 소설에서 SF요소라면 냉동 인간을 해동해서 미래에 데려다 놓은 것 이외는 없다. 과학 발전의 풍경을 그려내는 장면도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시간이 흘렀지만 전철로 출퇴근을 하고, 배달 직원을 고용해 음식을 배달한다. 부동산 문제는 여전히 삶을 짓누르고, 실직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기대한 미래의 이미지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냉동 인간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사연을 엮고 꼬면서 가독성을 유지한 부분에서는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한다. 아직 이 소설 속 이야기를 모두 끝내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데 후속작을 써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