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송곳
조동신 지음 / 북오션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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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앤솔로지를 통해 자주 만나는 작가 중 한 명이 조동신이다. 이 단편집에 끌린 이유는 작가 이름이 가장 크지만 한 군관의 눈으로 본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엮은 미스터리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처음 소개 글을 읽을 때 한 군관은 그냥 무시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 군관인 장만호다. 이순신 장군이 첫 사건부터 그를 수사관으로 임명해 살인 사건을 해결하게 한다.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씌워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상당히 재밌다. 물론 간단하게 범인을 짐작할 수 있는 단편도 있지만 한 발 더 나아간 단편도 있다.


네 편이 실려 있지만 분량은 <편전>이 가장 많다. 다른 세 편을 합친 것보다도 길다. 다른 세 편이 단편이라면 <편전>은 중편 이상의 분량이다. 최근 경장편으로 나오는 소설과 비교해도 분량에서 뒤질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 장만호와 임진왜란 이야기를 더 풀어내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에 몇 편의 단편이나 중편을 더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느낀 감정들이 아주 현대인의 시각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곳곳에서 사료를 정밀하게 조사한 흔적들이 보여 잠시 잊고 있던 역사의 재미를 일깨워주었다. 이순신 장군이 주연이 아닌 강렬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도 재밌다.


첫 단편 <칼송곳>은 대장장이 시체가 바다 그물에 걸려 올라온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좌수영 선소 소속 대장장이다. 왜군 간자가 거북선의 정보를 빼내려고 하다가 그를 죽인 것처럼 보인다.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장만호에게 이 사건 해결을 명령한다. 경찰처럼 그는 사건 현장과 주변 사람들을 탐문한다. 그러다 사건의 단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에 발생한 것이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부폐하고 나태해진 조직의 기강을 어떻게 바로 세우는지 간략하게 보여준다. 기존 좌수사와 다른 그의 업무 처리 방식과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가장 긴 분량의 <편전>은 사건의 무대가 다대포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이 중편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한 명은 다대포에서 관비로 살면서 첨사 윤흥신에게 활을 배우는 나해고, 다른 한 명은 당연히 장만호다. 윤흥신은 장만호의 스승이다. 나해가 활 쏘기에 재능을 보이고, 그녀를 탐내는 첨사가 주장한 혐의로 벗는다. 선남선녀인 만호와 나해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는 엄연한 신분사회다.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작가는 곳곳에 둘만의 에피소드를 집어넣는다. 만호가 어떻게 혼인이 깨어졌는지, 왜 자신의 집이 아니라 윤흥신에게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는 임신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다.


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의 군장들이 보여준 행동은 몇몇을 제외하면 처참할 정도다. 적선을 격침하기 위해 나가야 할 배를 스스로 침몰시키고 도망간다. 병력을 결집해 왜군을 막아야 하는데 도망가기 바쁘다. 그렇게 짧은 시간만에 왜군이 한성을 함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이런 대국적인 이야기는 빼고, 국지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백성과 함께 왜군을 싸운 사람들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여기서도 왜군 간자를 등장시키는데 쉽게 알 수 있다. 이 중편에서 나해가 보여주는 활약은 이전에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박해일이 보여준 것과 비슷하다. 편전이 모양이 궁금해 인터넷 검색하니 그 영화에서 박해일이 쏜 활이다. 이 중편을 영화나 몇 부작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은혜 갚은 두꺼비>는 첩보 담당 장만호가 거제 현령을 만나기 전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현령의 방에서 죽은 군관의 살인자를 찾는 이야기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 이후 섬으로 달아난 왜구를 같이 토벌하자고 부탁하려고 간 것인데 오히려 그가 살인자로 의심을 받는다. 의심을 풀고 진짜 범인을 찾는 데 씁쓸함이 가득하다. 원균의 후퇴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연과 그 이후 일어난 일들 때문이다. <보화도>는 원균의 처참한 패배 이후 이순신이 복직한 후 이야기다. 영화로 제작되어 더욱 유명해진 명량해전 이후 이야기다. 전라 우수영의 한 군관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순신 장군은 이 사건 해결을 장만호에게 명령한다. 과학적 추론으로 범인을 한정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지적을 들은 후 진짜 범인을 찾아낸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아쉬운 마무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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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질량
설재인 지음 / 시공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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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쇼-트 <사뭇 강펀치>로 처음 만난 작가다. 이 단편집을 재밌게 읽었기에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 자살한 사람들의 사후세계라는 판타지적 설정까지 갖추었다고 하니 더 관심이 갔다. 이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전개는 정말 판타지 같은 장면들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고, 기이한 존재가 나와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그런 장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웹 판타지 소설과 다르다. 자살한 남녀의 힘겹고 즐거웠던 삶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곳에는 지독한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을 벗어나 죽은 사람 앞에 다시 그 존재가 나타난다. 전 남친과 전 남편 말이다.


서진과 건웅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한다. 서진은 이 기이한 사후세계에서 남들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간다. 자살한 사람들만 모인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뒤에 있는 매듭을 모두 풀어야 한다. 매듭을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타인과 스킨십을 하면 된다. 얼마나 많은 매듭이 있는 지 모르지만 서진은 다른 사람과의 스킨십을 거부한다. 이런 그녀 앞에 전 남친 건웅이 나타난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찼지만 아름다운 연애를 한때 한 사이다. 건웅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 서진은 그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다. 그녀가 죽은 후 장례식장 풍경을 말해주고, 그녀와의 행복했던 사랑을 말한다.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그의 과거를 통해 펼쳐진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삼수생과 학원 상담 조교였을 때 이루어졌다. 동갑이지만 건웅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 삼수를 하고 있었다. 건웅은 서진을 처음 만나 펑펑 울었다. 그리고 반했다. 열심히 그녀에게 대시했다. 흔한 드라마의 문장처럼 서진은 거절한다. 건웅이 서진의 대학에 들어가서도 달려들었다. 건웅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첫사랑의 열정에 빠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순수한 모습은 서진의 마음도 움직인다. 둘의 연애는 돈 없는 청춘들이 흔히 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서진의 열악한 자취방은 그들에게 좋은 쉼터다. 사랑에 빠진 건웅에겐 그랬지만 서진의 말 속에는 그녀의 지난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햇볕 잘 드는 방에 대한 열망도 그 중 하나다.


건웅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연애담으로 밝게 빛날 때 서진의 과거사와 힘겨운 일상은 다른 방향에서 빛을 삼킨다. 작지만 예쁜 외모였던 그녀에게 손을 내민 남자들의 추행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넘어가면서 왜곡된다. 둘만의 공간에 있을 때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소설 속에서 말했듯이 그녀가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녀가 온몸으로 이 성추행을 고발하는 대자보에 부채감을 느낀 것은 이런 상황을 자신이 끊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이런 행동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많은 연대가 필요한지. 왜곡되고 거짓으로 점철된 비난도 얼마나 힘들게 견뎌야 하는지. 매일의 생계를 걱정하고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일인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 시선은 다르다. 생활에 치인 서진과 편안하게 부모의 영향 아래에 사는 건웅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서진의 취직이 어려워질수록 삶은 더 무거워진다. 여기에 자신과 여동생을 버리고 지방으로 도망간 부모가 그녀에게 도움을 바랄 때 그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 이 무거움을 홀로 견뎌야 한다. 안타깝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울 때, 무서울 때 가끔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녀에게 학교 선배이자 전 남편이었던 장준성이 그런 경우다. 그냥 사후세계에서 모른 채 지낼 수 있지만 건웅과 함께 돌봐주는 중학생 선형의 사연이 엮이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 기이한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뛰어난 가독성을 가지고 있다. 달달한 연애담은 또 다른 재미다.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다 하나의 사건이 다루어지는 순간 시점이 바뀐다. 새로운 사연이 흘러나오고, 이 기묘한 사후세계의 설정이 눈길을 잡아끈다. 매듭이 모두 풀린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과 이 공간을 떠나지 않기로 한 사람이 피해야 할 것들이 나온다. 영원히 죽지 않기에 어떤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고통이다. 잔혹하지만 통쾌하다. 하지만 씁쓸한 장면들이 더 많다. 자신의 질량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올 때 그들이 지금까지 본 것은 자신의 질량뿐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경우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다고. 이 특별한 공간을 다른 사연으로 채워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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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아내
세라 게일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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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인상적인 문구로 나를 유혹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내 복제인간과.” 이 문장을 보면서 머릿속에는 의문 부호가 생겼다. 아내가 있는데 왜 복제인간과 바람을 피웠을까? 표지처럼 복제인간을 쉽게 만들어낸다면 이 자체가 엄청난 산업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전자는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니 뒤로 넘기자. 후자의 경우 소설 속에도 나오지만 복제인간을 만들어 의료용 등으로 이용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내용을 주로 다룬 소설과 영화가 많으니 그쪽을 참고하는 편이 더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복제인간의 감정이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 아내의 복제인간과 바람을 피웠을까? 띠지에 나오는 “그의 꿈을 비추는 수단일 뿐이었다.”에 답이 있다. 현실의 아내에게서 얻지 못한 것을 그가 만든 복제인간을 통해 얻으려고 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내의 복제인간은 그가 만들기 쉽고 관리하는 것이 편하지만 다른 여성의 경우 그 유전자를 얻고, 기억을 업로드하는 등의 일이 힘들다. 현실 아내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 아내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하고,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자 숨겨진 과거를 파헤치는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서늘하고 잔혹하다.


뛰어난 여성 과학자 에벌린 콜드웰은 복제인간 연구 성과로 바라던 과학상을 수상한다. 그런데 이 과학상에 기록될 성은 전 남편의 성이다. 자신의 복제인간과 바람을 핀 남편의 성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틴이다. 남편이 바람 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머리카락을 실험할 때다. 실제 마르틴을 만났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란다. 복제인간 마르틴이 임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복제인간이 임신하지 못하게 프로그램했다고 한다. 어떻게 한 것이지? 이 만남 이후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마르틴이 남편 네이선을 죽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네이선이 그녀에게 폭력을 가했고, 마르틴은 우발적으로 그를 죽였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이 살인을 숨기고, 알리바이를 만들고, 실종 사건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통해 긴장감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복제인간을 다루는 SF소설이다. 남편이 사라진 후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이선의 복제인간을 만든다. 몰래 만들려고 실험실에 들어가지만 연구 조수 세예드가 그곳에 있다. 이유는 실험 재료를 훔쳐 팔기 위해서다. 그녀의 뛰어난 연구 성과는 수많은 지원자들을 불러오지만 세예드는 그녀와 마음이 맞는 좋은 조수였다. 이 사실이 둘 사이에 은밀한 비밀 유지로 이어지고, 네이선 복제인간을 만드는 일에 협력한다. 이 과정은 단순히 복제인간을 배양해서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실패한 복제인간을 처리하는 부분도 같이 다룬다. 읽으면서 섬뜩했던 대목 중 하나다. 인간을 닮은 존재를 죽이고, 해부하고, 폐기 처리하는 과정이 너무 건조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네이선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기억을 다루는 장면들이다. 혹시 DNA에 각인된 정보가 클론을 통해 발현되는 것일까? 생각했는데 연구자가 하나씩 입력하는 것으로 나온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과학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두 여성, 에블린과 마르틴이 알고 있는 네이선을 복기하는 순간이란 점이 중요하다. 이전에 네이선이 보여준 행동 등을 프로그램 과정에서 삭제한다.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 등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이 어떠했는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나올 때 다시 복제인간과 윤리문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에 대응하는 여성들의 은밀한 반격을 다룬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가능한 좁혀 놓고, 그 문제의 일부를 정원 밑에 묻어둔 채 넘어간다. 자신의 복제인간 마르틴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릴 경우 생기는 윤리적 도덕적 문제보다 자신의 연구 성과가 파묻히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장면은 아주 현실적이다. 관계나 공간을 좁혀 네이선 살해와 복제 문제를 비교적 가볍게 처리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나오는 고백들은 아주 의미심장하고 무겁다. 분명 이 소설의 자양분들이다. 많은 소설의 흔적이 보이는 작품이지만 다른 작품에 아이디어를 제공할 부분도 많은 소설이다. 가독성도 상당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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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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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할 때 두 가지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하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원작이란 것과 미국의 첫 라틴계 계관시인이 말한 “불완전함에 관한 완벽한 책”이란 엄청난 평가였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한 소설은 생각보다 가독성이 좋았다. 죽은 언니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씩 풀어나가는데 그 속에서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고 국경을 넘은 멕시코인들의 현실적인 삶을 마주한다. 시카고의 저소득계층이 사는 곳에 살면서 저임금의 힘든 노동을 하고, 힘겹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멕시코인들의 삶을 말이다. 그리고 태어나고 자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산 훌리아의 생각들이 기존 가치관들과 충돌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라틴계 소녀의 성장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훌리아에게는 언니 올가가 있었다. 올가는 휴대폰을 보다가 신호가 바뀐 것을 보지 못하고 차에 치여 죽었다. 이 사고는 가족을 아주 힘들게 한다. 특히 엄마가 더 심하다. 올가가 얼마나 가족을 위해 살았는지 말할 때마다 훌리아와 비교된다. 항상 조신했고, 부모님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았다. 부모가 보기에는 이상적인 딸이었다. 복장에 대한 설명을 보면 촌스럽다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 이런 올가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언니 방을 뒤지다 예상하지 못한 속옷을 발견한다. 언니의 노트북을 열어 그녀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지만 비밀번호를 모른다. 화려한 속옷은 훌리아가 몰랐던 언니의 삶을 추적하게 만든다. 단서는 언니의 친구들이 우연히 내뱉은 말들에서 시작했다.


가난으로 언니나 자신에게 성인식을 해주지 못한 부모가 언니의 죽음으로 성인식을 하기로 한다. 이미 나이가 지났는데도. 이 성인식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데 이 가족에게 부담되는 일이다. 훌리아는 시카고를 떠나 뉴욕으로 대학을 가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그녀가 이 동네를 떠나는 것을 반대한다. 훌리아가 언니처럼 순종적이고, 순결한 채로 멕시코인과 결혼하기를 바란다. 훌리아가 보기엔 이 모든 가치관이 구태이자 지독하게 편협하다.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아직 알지 못하는 소녀에게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다. 다른 과목보다 영문학을 더 좋아한다. 상당히 많은 책을 읽고, 헌책 냄새 맡기를 좋아한다. 코너를 만난 곳도 바로 헌책방이다.


방송에서 화려한 부자들의 사소한 고민이 그녀에게는 한달 집세가 되기도 한다. 엄마와 함께 백인들의 집 청소를 하러 갔을 때 마주한 백인들의 시선과 말투는 현실적이다. 훌리아의 시선 속에 부유한 사람들이 한 작은 액세서리 등은 항상 신분의 벽처럼 다가온다. 이 소설 속 멕시코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알려주는 대목 중 하나가 집안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 등이다. 어떤 부유한 백인은 아주 깨끗해 보이는데도 엄마를 불러 청소를 시키는데 말이다. 물론 아주 지저분한 집도 있다. 이 짧은 경험은 그녀의 생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부모님들로 하여금 자식들이 사무직을 하길 바라게 한다. 육체 노동의 힘겨움과 낮은 임금에 비롯한 바람이다.


이 소설 곳곳에 라틴계들이 가진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들이 살고 있는 미국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고 겉돈다. 교육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범위를 한정한다. 훌리아는 영어 교사 잉맨 선생님의 도움으로 새로운 기회를 붙잡으려고 한다. 두 가치관의 충돌은 결국 문제를 불러온다. 일시적으로 부모의 권위로 딸을 묶어 둘 수 있지만 그 권위가 지속적이는 않다. 그리고 훌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적인 말들을 쉽게 내뱉는다.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상처다.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 주변에서 자주 보는 모습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이고, 억눌렸던 감정이 한 번에 터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다.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미스터리 요소도 하나 살짝 던진다. 바로 올가의 사연이다. 올가의 노트북 비밀번호를 우연히 발견한 후 메일을 뒤져 그녀를 비롯해 가족 누구도 몰랐던 올가의 다른 삶을 발견한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릴 것인가 하는 고민은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밀입국 당시 일어난 일에 대한 사실 하나도 삶 속에 파묻힌 수많은 아픔 중 하나다. 훌리아가 멕시코에 가서 경험하게 되는 갱들의 폭력은 그곳의 삶 또한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지 잘 보여준다. 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면서 국경을 넘는 이유 중 하나다. 한 소녀의 성장을 다룬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현실의 수많은 문제들이 드러나고, 그 문제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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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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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둔 소설을 낸 작가다. 나의 위시리스트에 올라 있는 <고독한 늑대의 피>를 쓴 작가다. 물론 이런 사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소설을 빨리 읽고 싶었다. 이 소설에 대한 극찬을 봤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언제나 책 읽기는 나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참 묵혀둔 채 읽어야지 생각하다 다른 책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읽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단숨에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며칠 나누어 읽었다. 읽는 동안 그 가독성에, 예상을 뛰어넘은 전개에 빠져들었다. 섣부르게 결말을 예상하고 읽으면 예상하지 못한 설정에 깜짝 놀란다. 그리고 한 여성의 삶과 그 삶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열정과 노력에 매혹된다.


첫 장을 읽을 때만 해도 평범한 사기극 정도로 생각했다. 두 번째 장에서 형사 하타가 등장하면서 살인 사건을 마주한다. 평범한 주부 후미에와 형사 하타가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후미에가 어떻게 중학교 동창 스기우라 가나코와 만나 사기극에 빠지는지 보여준다. 살인 사건 수사에 뛰어든 하타의 수사는 피해자를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구나 후미에가 만난 남자와 살해당한 피해자가 같은 인물이란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 둘을 이어주는 선글라스를 쓴 여자의 존재는 의문을 불러온다. 후미에가 해리성 이인증이란 정신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여성의 존재는 후반부로 가면서 가장 중요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의 핵심이다.


초반 후미에의 존재는 학교의 왕따와 육아의 어려움 등을 잘 드러낸다. 두 딸을 키우면서 살이 찐 그녀의 삶을 보여주고, 과거 살 찐 모습 때문에 왕따당한 모습도 같이 보여준다. 살을 뺀 후 아름다워졌고, 바뀐 외모가 남자들의 관심과 찬양을 불러온다. 예상하지 못한 임신과 결혼과 육아는 그녀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살찐 그녀를 모독하는 딸 친구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녀의 삶과 나란히 엮인다. 이런 인생의 돌파구가 된 것이 중학교 동창 가나코와의 만남이다. 이 만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이전처럼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가나코 대신 대표가 되어 오프라인 화장품 판매에 성공한다. 성공적인 재기이자 밝은 앞날이 보이는 것 같다.


하타를 통해 보여주는 경찰의 수사는 전형적이다.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하면서 용의자를 넓혀간다. 확대된 용의자는 조사와 수사를 통해 줄어든다. 이 과정을 하나씩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현실의 수사는 이런 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은 단서 하나를 쫓아 출장을 가고, 이 출장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쌓아간다. 읽다 보면 결국 후미에와 의문의 선글라스 여성에게 다다를 수밖에 없다. 하타와 한 조가 된 나쓰키는 처음에는 희미하지만 뒤로 가면서 그 비중을 조금씩 넓혀간다. 일본 형사물에서 여형사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가끔 여형사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나오지만 이들도 다른 남자 형사들에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은 많은 것들을 주변에 뿌려 놓는다. 하타의 사연이나 나쓰기의 등장도 그 중 하나다. 중반 이후 중심인물이 바뀌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이야기의 진행은 더 빨라진다. 단서를 쫓아가면서 마주하는 인물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하지만 형사 하타는 멈추지 않는다. 그의 육감은 이 살인 뒤에 다른 사건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후 펼쳐지는 사실들은 다단계, 종교 사기, 갑을 관계 등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이어진다. 이런 사건들은 언제나 비극을 불러온다. 그리고 작가는 일본 경찰의 놀라운 병폐 하나를 말한다. 사연 있는 죽음을 정확하게 파헤치지 않고 자살 등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 사건의 첫발을 딛게 하지만 그 탐욕을 더욱 거대하게 키운 것 중 하나가 경찰의 안일한 수사라고 말한다. 진실을 파헤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찾기까지 과정이 바로 형사의 일이다. 초동수사의 중요성과 좋은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을 잘 보여준다. 멋진 사회파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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