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있는 계절
이부키 유키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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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청춘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1988년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연작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계속해서 나오는 인물들과 개가 있다. 인물은 유카와 고시로이고, 개는 미술부 부원인 하야세 고시로의 이름을 딴 고시로다. 사람과 개의 이름이 똑같다. 우연히 부른 이름이 개의 이름으로 정착했고, 개는 주인에게 버림받아 홀로 남았다. 어린 개는 미술부원들의 사랑을 받는다. 집에 데리고 갈 사람들이 없다. 유기견 보관소에 가거나 학교에 남아야 한다. 밖으로 내보내려는 교장과 학생들의 대화는 날카롭기보다 현실적이다. 결국 학생들이 돌보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미술부실에서 기른다. 그리고 고시로의 시선이 짧게 나오면서 다섯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첫 이야기에 나오는 유카와 고시로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는 엇갈린 시간 속에서, 다른 학생들의 기억 속에서 교차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둘의 미래를 계속 그려보게 된다. 작은 도시와 한 학교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한 학생의 이야기 속에 과거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미술부가 고시로를 돌보면서 기록한 일지는 이 연관성을 더 높여준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이 이름들이 나오면 반가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단편적이나마 그들의 삶을 따라가는 느낌이다. 이것이 극대화된 부분이 최종화다. 2019년 여름에 벌어진 모임은 아주 멋진 후일담을 담고 있다.


긴 세월을 다룬다. 이 시간들은 많은 변화를 담고 있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나오고, 일본의 대지진이 두 번이나 발생하고,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도 있었다. 실제 소설 속에서 직접 다루어지는 사건은 고베 대지진이다. 피해자 중 한 명을 이야기 속에 담고 그 참상의 일부만 보여주는데도 울컥한다. 옴진리교 사건과 고베 대지진은 모두 1995년에 발생한 대사건이다. 이런 대사건이 일어나도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그 기억은 점점 희미해진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누군가에게는 삶을 뒤흔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효율을 따지는 한 소녀가 진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춘 소설의 백미는 F1를 둘러싼 두 소년의 관람기다. 소위 말하는 전교1등과 평범한 한 학생이 좋아하는 스포츠가 같고, 우연히 얻게 된 표로 아주 멋진 추억을 쌓는 과정이 뜨거운 열정을 전해준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학창 시절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물론 다른 나이지만. 원조교제를 하는 학교 최고 미녀와 그녀를 좋아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소년이 비밀을 공유하고, 소녀가 지닌 아픈 현실을 풀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현실의 비참함과 아픔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누나가 학교 선생으로 나타났을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고시로의 감각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오래 전 본 일드와 주제가가 나오고, 그때의 나를 잠시 돌아본다.


고3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들려주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고시로와 엮이면서 과거의 흔적을 미래로 이어간다. 그 흔적들 중 일부는 고시로를 돌보는 모임, 약칭 고돌모의 기록에 나타난다. 어떤 대목에서는 부풀려진 부분도 있다. 시대의 흐름 속에 기록과 기억은 점점 쌓여 간다. 작가는 이 기억을 기록으로 기초를 닦고, 추억 속 상황을 불러와 멋지게 펼쳐놓는다. 다양한 학생들의 다양한 삶과 선택과 현실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가 어린 시절 한 무모한 행동이나 사랑했던 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순간의 아픔과 그리움들이 복잡하게 감정을 휘저어 놓는다. 그때는 죽을 것 같이 아프고, 보고 싶어 했던 감정들이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다. 지나왔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또 다른 감정들이 오겠지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재밌게 읽었는데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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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도로 퇴근한다
신재현 지음 / 처음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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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4박5일 일정이었다. 이틀은 성산 근처에서, 이틀은 한림에서 머물렀다. 두 숙소의 공통점은 미온수 수영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최소 한 시간 이상은 아이와 수영장에서 놀았다. 그 나머지 시간은 천천히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비자림을 걷거나 카터나 말을 탔다.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를 덧붙이면 해변에서 잠시 놀았다는 것이다. 가을의 찬 바람은 아이를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거의 매년 오는 제주도이다 보니 옛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처음에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생활이 나왔다. 그리고 오래 전 제주도에 있는 회사로 직장을 옮긴 후배가 떠올랐다.


한때 제주도에 갈 일이 생기면 후배에게 전화해 맛집이나 볼거리 등을 물어봤다. 덕분에 저렴하고 맛있는 횟집에서 잘 먹었다. 아쉬움이라면 가족들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아내와 제주도에 다시 왔을 때 후배가 보내준 관광지에 대한 간단한 정보다. 2박3일 일정이었는데 거의 제주도를 한바퀴 돌았다. 지금도 그때 둘러본 곳을 가거나 지날 때면 그 추억이 샘솟는다. 시간의 변화 속에, 동행자에 따라 가지 못할 때는 아쉬움을 품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다시 제주도가 생각나면 옛 기억을 들추면서 다시 가보고 싶어 한다.


이 책의 저자는 현직 교사다. 서울에서 부장 교사를 하다 제주도에 반해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흔한 제주살이나 이주기와 다른 점은 이 부부가 둘 다 교사란 점이다. 더 놀라운 점은 저자가 다시 시험을 봐서 제주도 교사가 된 점이다. 대단하다. 현재까지 그들이 제주도에 산 시간은 4년이다. 2년은 성산 근처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마 이번 제주 여행 전에 이 책을 봤다면 갈 곳이 몇 곳 더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가을 억새들을 보았지만 산굼부리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년 가을에 가게 된다면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저자의 제주 사랑이 가득하다 보니 좋은 점만 늘어놓는다. 제주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보다 타운하우스 사람들과 더 많이 어울린다. 편함과 필요함의 결합이다. 이들과 어울리고, 교류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제주에 살기 때문에 여행자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글 곳곳에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녹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내가 자란 곳도 바닷가 도시인데 사실 이 부분은 잘 인식하지 못했다. 어릴 때 누가 이런 것에 신경 쓰겠는가. 캠핑의 천국이란 단어를 보고 이번 여행에서 본 캠핑장이 먼저 떠올랐다. 서울 등의 캠핑 마니아들인가 하고 생각했다. 괜히 캠핑차 대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읽으면서 본 사진 속 풍경은 낯익은 곳이 상당하다. 아마 잘못된 기억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제주 여행에서 느낀 것은 제주도 해변 풍경이 조금씩 혹은 많이 달라 잠깐 머물다 가기 좋았다는 점이다. 해변 카페를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고, 아이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어 가지 않았다. 우도 예찬을 보면서 몇 년 전 우도에서 1박한 것이 떠오른다. 경로 우대 받을 수 있는 노인이나 어린 아이가 있으면 차를 가지고 갈 수 있는데 저자는 아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사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이 조건을 생략한 것인지 모르겠다. 우도는 작은 섬이지만 볼거리가 생각보다 많다. 과장된 먹거리도 있지만 천천히 머물고 싶은 곳이다.


제주도 사람들도 호캉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보고, 서울 사람들이 호캉스 가는 것을 떠올렸다. 코로나 19 때문에 제주도 겨울이 성수기처럼 되었는데 아쉽다. 연말에 한 번 더 가자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 책을 보면서 지난 여행에서 놓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제주에 오래 산 후배가 보기에는 별것 없는 것들이겠지만 우리에겐 신선하다. 4년 산 그들도 제주도가 이제는 이전처럼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다는 느낌을 전한다. 물론 저자는 다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주도 한달 살기를 떠올리는데 직장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늘 제주도 앓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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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 지성의 이야기
정아은 지음 / 문예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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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할 때 몰랐던 사실 하나. 이 소설이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과 독립적이면서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어떻게 이어질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마지막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보고 각자 자기만의 서사를 펼쳐나간다고 하는데 지성의 집에 살았던 그녀의 시선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일단 지성의 시선을 따라 가보자. 부제도 ‘지성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읽다 보면 내가 아는 출판사와 신문사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면서 소설 속에서 다룬 이야기의 사실 여부가 궁금해진다.


지성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다. 하나는 문학평론가였던 지성이 문화평론까지 하는 현실 속에서 마주한 출판과 진영 논리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어느 순간 우리를 집어삼킨 미투 운동이다. 개인적으로 추론하면서 읽은 문학평론가 지성의 분석과 이해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문학세상을 문학동네로 바꿔 읽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고, 신화일보는 조선일보로 당연하다는 듯이 연결시킨다. 소설가나 시인의 작품에 대한 정밀하면서 날카로운 분석은 나의 지적 이해와 상관없이 흥미롭고 상당한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여기에 나의 지적 허영 한 자락이 살짝 발을 걸친다.


지성이 숙취 속에서 잠을 깬다. 옆에 낯선 여자가 나체로 누워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나채리. 지성은 그 어떤 기억도 없다. 여자의 벗을 몸으로 그의 곁에 누워 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술집에서 취한 상태로 만나 방으로 왔다는 것 정도다. 일이 있어 나가면서 그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하지만 나가지 않는다. 이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고, 둘은 몸을 섞고, 같이 밥을 먹는다. 아내와 별거 상태에 있는데 나채리의 약간 살집 있는 몸이 그를 안정시킨다. 지성의 나이는 53세, 나채리는 스스로 35세라고 말한다. 정확한 것은 지성밖에 없다. 지성에게 나채리의 흔적이 조금씩 스며들지만 시간이 더 걸린다.


초반 문학계 내부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의 시선을 끌었다면 앞에 잠시 언급되었던 미투 운동이 지성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분위기가 확 바뀐다. 성공한 시인 민주를 강제로 성추행했다는 정보가 알려지면서 그의 모든 일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는 기억도 하지 못한 일이지만 피해 여성 민주가 죽으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질타 대상이 된다. 사실 여부에 대한 정확한 확인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락에 떨어진 지성의 이야기가 한 동안 펼쳐진다. 이런 그에게 힘이 되어준 인물이 나채리다. 자신은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지성은 진보 진영에서 글을 쓰고 평론을 했지만 진영 논리를 벗어나 사실을 두고 발언을 했다가 진보 진영에서 큰 반발을 마주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논리가 내쪽에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지성의 사건에 반전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자신들이 믿는 바가 더 중요하다. 이것은 지성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은 그가 양심 있는 지식인이란 사실을 보여주지만 그의 삶이 과거 한국 평균 남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갑자기 성추행 등으로 무너진 민주당 대선 후보 등이 떠오른다.


자신이 내세운 가치관이, 동료와 친구들이 하나의 주장 때문에 자신을 거꾸로 찌른다. 과거의 나쁜 습관들이 미투 운동의 물결 속에 그들의 반성을 끌어내고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보다 질타하고 추락시키고 모욕하기 바쁘다. 인간과 업적을 구분하기보다 하나로 묶어 쓰레기처럼 매도한다. 이 부분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돌아보게 한다. 글과 사람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간단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하겠는가. 지성의 몰락에 동참한 문인 등의 비판에 작가의 시선이 하나씩 담기고, 피해자의 주장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문제를 돌아본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현실의 사건들과 연결된 것들이 하나씩 보인다.


지성의 이야기를 읽다가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채리를 가끔 생각한다. 그녀가 왜 이 집에 따라왔을까? 그녀가 밝힌 사실 하나에 의문을 던진다. 뒤로 넘어가면서 하나의 가능성이 떠오른다. 사실 여부는 다음 이야기에서 나올까? 한 셀럽의 몰락과 기억하지 못한 대화의 기록이 반전으로 이어지지만 그 이면에 나온 또 다른 사실이 진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 사실을 떠나 자신들의 생각을 내뱉고 서로 절연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댓글에 대한 짧은 묘사는 좋게 보면 공론과 토론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냥 자기 욕망의 배설이다. 밝혀진 사실보다 자신들의 추론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또 다른 현실 사건이 떠오른다. 여러 부분에서 현실의 사건과 모습들이 이 속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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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마요
김성대 지음 / &(앤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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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놓고 보면 괜히 마요네즈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그런데 책을 펼쳐 읽게 되면 키스마요가 지명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키스마요는 소말리아 남부의 항구도시다. 이 지명이 나오게 된 데는 이곳에 외계의 물체가 나타나고, 화자의 애인이 나체로 걸어오는 것을 인터넷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시인의 첫 장편이라는 것도, SF 요소가 있다는 것도 내 예상과 너무 다르게 전개되었다. 소설을 점점 읽다 보면 소설보다 장편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주 짧은 단문과 시의 행갈이 같은 마침표의 나열들이 이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한다.


내용을 읽다 보면 지구의 종말을 앞둔 상황이 펼쳐진다. 작가는 이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약을 먹고 죽거나 강에 투신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칼로 다른 사람에게 죽는 선택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뭐지?‘ 하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종말 직전을 다룬 소설들에서 본 것과 다른 상황들이다. 쉽게 납득할 내용도 아니다. 왜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을 작가는 넣었을까? 종말을 앞두고 벌어진 풍경은 스산하고 황량하고 참혹하다. 그런데 이 장면을 너무 짧은 문장으로 풀어내면서 감정의 매몰을 막는다. 나만 그런 것인가?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고,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지구로 운석이 날아온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이 상황을 묘사하고, 이 난관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에 집중하겠지만 작가는 자신과 연인의 기억과 추억 속으로 파고든다. 쉼표 없는 문장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지속적인 감정의 흐름을 차단한다. 나의 책읽기와 맞지 않다. 어느 대목에서는 시 읽기 하는 느낌으로 문장을 끊어 읽는다. 쉽지 않다. 그가 보여준 세상의 종말이나 사람들의 행동에 다시 시선을 던진다. 나라면? 하는 물음을 던진다. 나의 선택은 그들과 다르다. 하나의 가능성에 목을 맨다.


갑자기 사라진 연인이 키스마요에 나체로 나타난 것을 보고 문자를 보내지만 답장이 없다. 상실과 추억이 하나씩 풀려나온다. 인간의 진화가 멈추었고, 외계인은 인간에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을 보낸다. 종말의 공포는 사람들의 자살로 내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터넷이나 전화는 그대로 작동한다. 그 황량한 풍경과 대비되는 기간 산업의 지속성이 왠지 어색하다. 나의 시선은 이런 사소한 것에 더 민감하다. 어쩌면 내용에 빠져들지 못하면서 이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문장에서 내가 예상한 것이 산산조각난다. 선입견과 작가의 교묘한 작업이 이렇게 만들었다. 시간이 되면 시집을 읽은 후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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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플레이어 그녀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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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루거 총을 든 할머니>의 평이 상당히 좋아 선택했다. 나의 저질 기억력은 전작을 시리즈로 착각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기억을 새롭게 했다. 책소개를 읽다 보니 <루거 총을 든 할머니>의 주인공이 잠시 등장하는 첫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번 소설에서는 베르트 할머니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작가가 하나의 세계 속에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간단하게 요약된 그 이야기를 읽고 전작에 대한 호기심이 더 생겼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포커 플레이어 그녀>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구성과 전개다. 영화감독 출신답다. 물론 모든 영화감독들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주로 두 인물을 비춘다. 작크와 막신이다. 먼저 작크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간략하게 알려준다. 생존을 위해 포커를 익힐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여준다. 황당한 육아방법이다. 그는 뛰어난 포커 플레이어가 되어 포커판을 돌아다니며 돈을 딴다. 막신의 등장은 좀더 황당하다. 포커판에서 승자가 된 그녀를 한 남자가 성폭행하려고 한다. 힘들게 자신을 방어하고, 남자를 굴복시킨다. 그녀는 늘 45구경 권총을 핸드백에 넣고 다닌다. 총구 앞에서 남자는 무력하고 비굴해진다. 멋진 등장이기도 하다.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 성폭행범을 처벌한다. 그는 발루다. 그는 작크의 포커 동료다. 둘은 친구고, 서로를 돌보면서 포커판에서 멋진 콤비가 된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조금 문제가 있다. 어린 시절 자동차 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이후 강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실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 이 감정을 풀어내는 방법 중 하나로 밤의 자경단이 되었다. 그의 등장 빈도는 둘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의 강력하고 괴물 같은 능력은 아주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활약을 더 보고 싶은데 혹시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 비중을 올려주었으면 좋겠다.


작크와 막신이 처음 만난 곳은 당연히 포커판이다. 이 판에서 작크와 발루가 사기를 친다. 이 낌새를 막신이 알아챈다. 작크가 실수했는데 그 이유는 막신 때문이다. 그녀에게 끌리면서 작은 실수를 했다. 발루가 이것을 지적한다. 둘 사이에 작은 다툼이 일어난다. 이 작은 만남 후 작가의 일상이 조금씩 나온다. 결코 평범한 생활이 아니다. 바람둥이처럼 살아가는 작크에 비해 막신은 에스코트 보이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려고 한다. 그녀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아픈 사연을 암시한다. 매춘 당시 모습을 보면 험악하고 거친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연은 마지막에 드러난다.


주변을 겉돌고, 각자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막신이 작크를 큰판 속으로 유혹한다. 거물 정치인 콜베르와의 도박이다. 판돈은 50만 유로. 작크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거액이다. 그가 도박판에서 큰돈을 땄다고 만족한 돈이 2만 유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이 한 판을 위해 막신은 열심히 포커판을 돌면서 돈을 모았다. 부족한 5만 유로를 은행에서 강탈하는데 솔직히 황당하고, 그 은행원이 불쌍했다. 이 두 사람이 발루와 함께 콜베르의 포커판에 끼어들 것이란 예상을 하는데 변수가 생긴다.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감 있고, 자극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동행이 생긴다. 엄마에게 폭행당하는 천재 소년 장이다.


솔직히 말해 인터넷서점에 올라온 책 소개에 너무 많은 스포일러가 담겨 있다. 먼저 읽지 않기를 바란다. 안다고 해도 속도감 있게 나아가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폭력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아슬아슬한 관계가 이어지기도 하고,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오락성 강한 전개 속에 이런 아픔을 가볍게 집어넣고 그들을 하나로 묶고 녹여내는 기술이 대단하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이들의 다음 활약을 기대한 독자가 나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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