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호텔 살인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1
아니타 블랙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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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발표된 고전 추리다. 언제부터인가 고전 추리를 잘 읽지 않는다. 한때 아주 열심히 읽었는데 최근 작품들에 집중하다 보니 점점 뒤로 처진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도 사놓고 묵혀 두고 있는 것이 많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반장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전집이 그대로 쌓여 있다. 그래도 고전 추리에 계속 눈길이 간다. 이 소설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잔혹 코믹극이란 분류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느린 템포로 시작하는 전반부는 왠지 취향에 맞지 않는다. 중반을 넘어가면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개인들의 숨겨진 사연들이 나오면서 그 재미가 급격히 늘어났다.


애들레이드 애덤스는 리슐리외 호텔에 장기 거주 중인 독신 여성이다. 이 소설에서 애들레이드는 호텔에 머무는 투숙객들에 대한 관찰자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자신의 기준으로 투숙객들을 관찰하고 나눈다. 오랫동안 머물면서 관찰한 것이라 개인의 애정도에 따라 평가가 조금씩 엇갈린다. 각자 비밀을 가진 채 이 호텔에 머문다. 첫 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이 비밀은 그냥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애드레이드의 방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 후 이 비밀은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이전까지는 이 호텔 투숙객들의 일상과 미묘한 관계들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애들레이드가 처음 시체와 접촉했을 때 장면은 아주 섬세하고 압축적인 서늘함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나의 몰입도는 높아졌다. 시체에 대한 묘사도 아주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이 사건 이후 경찰이 도착해서 수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게 투숙객들의 정보를 파악한 채 심문을 한다. 죽은 사람의 정체가 탐정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무슨 일로, 왜 그는 이 호텔에 투숙했고, 어떤 일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그리고 첫 번째 용의자가 나온다. 그 용의자는 달아난다. 호텔 안을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 그녀가 떨어져 죽은 채 발견된다. 목이 졸려 죽은 후 떨어졌다. 확실한 처리 방법이다.


첫 살인이 있은 후 애들레이드는 방을 바꾼다. 사건 현장이니 어쩔 수 없다. 5층 방으로 옮긴 후 그녀에게 쪽지 하나가 온다. 협박이다. 천 달러를 주지 않으면 어데어 모녀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한다.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범인을 기다리지만 실수로 총을 발사한다. 총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온 인물은 의외로 스티븐 랜싱이다. 잘 생긴 화장품 영업사원이자 바람둥이다. 늦은 밤인데도 그는 정장을 입고 있다. 정체가 수상하다. 경찰도 수상하게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애들레이드의 현실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발에, 틀니를 낀 그녀의 모습을. 스티븐의 표현에 의하면 장대한 기골까지. 이 사건 이후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진다.


이후 애들레이드와 스티븐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바람둥이의 유들유들한 표현이 조금씩 먹혀 들어간다. 그리고 의문 하나를 던진다. 왜 탐정은 애들레이드의 방에서 죽은 것일까? 그 방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죽음도 마찬가지다.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투숙객들의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이 비밀 속에 엇갈린 관계가 드러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최근 소설 같은 긴박감이나 속도감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반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아주 흥미롭다. 마지막 진범이 나타날 때 즈음이 되면 홈즈의 명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단서들이 모여 애들레이드에게 번뜩임을 줄 때 사건이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은 더 복잡하다.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비밀이 욕망과 뒤엉키면 어떤 식으로 번질 지 모른다. 이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의 비밀은 은밀하고, 아주 탐욕적이다. 과도한 탐욕이 이성을 뒤틀고, 연쇄살인으로 이어진다. 이 살인 속에서도 사랑의 기운은 곳곳에 스며든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맴돌거나 주저한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안다. 안타까운 장면도 나온다. 이런 와중에 멋지게 중심을 잡으면서 사건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애들레이드의 존재는 추억 속 할머니 탐정을 떠올린다. 그 할머니처럼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지만 유쾌하고 섬세한 마음이 읽는 동안 잔잔한 재미를 계속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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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 - 사르담호 살인 사건
스튜어트 터튼 지음, 한정훈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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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다. 600쪽이 넘는다. 최근 이런 두툼한 책이 조금 부담된다. 하지만 재밌는 책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이 책을 선택할 때 2021 CWA 대거상 최종 노미네이트와 ‘터튼의 밀실 미스터리는 <보물섬>을 거쳐 마이클 베이의 영화와 만났다.’란 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보물섬>도, 마이클 베이의 영화도 좋아한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1634년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란 점이다. 왠지 모르게 요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손이 잘 나가지 않는다. 재밌게 읽는 책들도 많은데 말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 책도 재밌게 읽은 책에 속한다.


탐정이 처음 나온 것은 언제일까? 1634년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세계 최고의 탐정 새미 핍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인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송된다. 처음 소개글을 읽고 새미가 주인공으로 활약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새미의 경호원이었던 아렌트 헤이즈와 총독의 아내 사라 웨셀이 주인공이다. 아렌트는 새미가 무사히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수 있게 그를 지키고, 사라는 폭압적인 남편이자 총독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배를 타기 전 혀가 잘린 문둥병자가 저주를 쏟아 내며 불에 타 죽은 사건이 생겼을 때다. 이 첫 만남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항해 중 이 둘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한다.


혀 잘린 문동병자가 저주를 쏟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정체도 처음에는 모호했다. 사라는 승무원을 돈으로 유혹해 그의 이름을 알아낸다. 과학적 사고를 하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저주와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사르담호에는 총독이 원하는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다. 이 때문에 배가 8개월 동안 항해하면서 먹을 음식이 충분히 실리지 못한다. 인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새미는 총독의 명령에 의해 배의 가장 낮은 곳에 갇힌다. 그의 죄명은 아직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작고 더러운 선실에 갇히는 것을 새미는 두려워한다. 아렌트는 총독에게 말해 수감된 방을 바꿔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완고한 총독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동병자의 저주는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악마 올드 톰의 표시가 하나씩 나타날 때만 해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불빛이 나타나고, 배의 동물이 잔혹하게 죽으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이 올드 톰이란 악마는 기이하다. 왜냐하면 악마의 표시는 아렌트의 팔에 난 흉터와 닮았고, 그 표시를 처음 사용한 것도 아렌트였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난 상처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갔다가 혼자 살아온 후 정신을 잃었고, 그때 생긴 것이다. 혼자 살아온 그를 마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멀리하자 그가 어린 마음에 그에게 밉보인 사람의 집 문에 이 표시를 새긴 것이다. 이 작은 장난이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왔다. 올드 톰이라고 불린 사람이 죽기도 했다.


이 소설의 진정한 장점은 17세기 선박과 항해의 현실을 잘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원들과 군인들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에 이르면 왜 그렇게 많은 선상 반란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계급으로 나누어진 구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해적과 무시무시한 태풍의 위협 등은 하나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올드 톰이란 악마의 존재는 항해와 미스터리 속에 초현실적 두려움을 풀어놓는다. 올드 톰이 배에 탄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을 때 그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순간적으로 나의 이성에 잠시 눈을 감는다. 초현실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고.


두툼한 만큼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힌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17세기의 마녀사냥꾼 이야기가 엮이고, 올드 톰과 인간의 욕망이 뒤엉키면서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포세이돈이란 불리는 물건의 존재가 나왔을 때 인류의 항해술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물건 하나가 생각났다. 그런데 작가는 이 물건을 십대 천재 소녀 리아가 만들었다고 가정한다. 리아는 아주 뛰어난 발명가이자 천재다. 여자 아이의 이런 능력을 시대는 마녀로 간주한다. 남성들의 기득권과 시대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항해 도중에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선원과의 대결 등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재미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소설이다. 작가의 또 다른 장편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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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 제4의 벽 에디션 세트 - 전8권
싱숑 지음 / 비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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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말해 이 웹소설이 비채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다른 판타지 웹소설처럼 다른 판타지전문 출판사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이 판타지를 원작으로 한 웹툰이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다. 처음 한동안 이 웹툰을 따라갔는데 매주 한 편씩 나오는 이야기 때문에 어느 순간 멈추었다. 어느 정도 쌓이면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원작은 워낙 길어 조금 주저하고 있었다. 이번 출간본도 이전처럼 시간이 넘쳐난다면 Part 1 정도는 2~3일이면 충분할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갔고, 또 한 권씩 읽었다. 모두 읽은 지금 9권을 기다린다. 아니 전자책으로 가야 하나?


웹 판타지를 가끔 읽지만 지식이 풍부하지는 않다. 다른 독자들이 읽은 감상을 본 후 읽을 소설을 선택한다. 웹툰을 보다 원작으로 넘어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이전에 좋아했던 작가들의 무협 등에 더 눈길을 준다. 그런데 시장의 흐름이 바뀌면서 판타지 시장이 더 커졌다. 장르가 뒤섞인다. 실제 <전지적 독자 시점>도 판타지의 외형 속에 무협의 요소를 곳곳에 녹여 놓았다. 지식이 미천한 나는 이 소설이 성좌물의 시초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대박 이후 많은 아류작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장에서 흔한 일이다.


일단 작가의 필력이 좋다. 최근에 판타지 소설가들의 뛰어난 필력에 빠져 정신없이 읽은 적이 많다. 설정에서 허점이 보이지만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좋은 작가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하지만 하나 같이 장편이라 손을 데기 힘들다. 이 소설도 처음엔 그랬다. 웹툰으로 어느 정도 본 소설이라 웹툰의 이미지가 나를 조금씩 잠식했다. 내가 그린 이미지가 아닌 웹툰의 이미지가 나를 삼킨다. 웹툰의 김독자 이미지를 생각하면 극 중에 나온 ‘못 생긴 왕’이란 별명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한 장면들을 그 이상으로 표현한 그림을 보면 감탄한다. 한국 판타지 웹툰에 폭풍을 몰고 온 <나 혼자만 레벨업>이 바로 떠오른다.


설정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서울 시민들이 어느 날 시나리오 속으로 들어가고, 이 시나리오를 끝내야 살아남는다. 시나리오는 난이도, 제한시간, 보상, 실패시 등의 조건이 나온다. 메인인지 서브인지도 표시된다. 히든 시나리오도 있다. 첫 번째 시나리오부터 잔혹하다. 생명체를 죽여야만 살 수 있다. 여기에는 작은 트릭이 숨겨져 있다. 사람이 아닌 생명체란 것이다. 그런데 이 시니라오의 결말을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주인공 김독자다. 그는 3149회가 넘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끝까지 읽은 유일한 독자다. 이 장편 판타지의 주인공은 유중혁이란 회귀자다. 독자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유중혁이 죽으면서 이 상황이 사라지는 것이다. 독자는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서 유중혁이 죽어서 회귀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원작을 끝까지 읽었고, 원작의 텍본을 원작자에게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작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실제 웹툰도 원작에 없는 성좌들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독자가 알고 있는 미래는 세부적인 곳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시나리오를 끝까지 깨트러야 하지만 각 시나리오의 단계가 그의 예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4의 벽’이다. ‘책갈피’ 스킬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두 스킬은 특별한 능력 없는 평범한 회사원을 최고의 화신으로 만든다. 화신은 수식언을 가진 성좌의 힘을 빌려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다. 이 수식언을 보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가끔 바로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장대한 이야기의 초반부를 이제 읽었다. 김독자의 모험은 이제 시작이다. 원작에 기대 조금씩 바뀐 시나리오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멋진 모험극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찾아본 서평들의 몇 부분을 이번에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이 설정과 긴장감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정말 대단한 판타지가 될 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이 소설의 확장 가능성을 더 높인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수영이다. 초반에 한수영을 보고 빨리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의 예상과 다른 전개다. 냉혹하고 잔혹한 환생자 유중혁의 조금씩 변하는 심리는 또 어떤가? 제4의 벽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도 계속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간이 되면 바로 끝까지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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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드 오브 퓨처 안전가옥 FIC-PICK 1
윤이나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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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옴니버스 픽션 시리즈 FIC-PICK의 첫 번째 책이다. 다섯 명의 여성 작가가 쓴 가까운 미래의 로맨스를 다룬 단편소설집이다. 안전가옥에서 나온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로맨스는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닌데 sf소설이란 소개에 혹했다. 그리고 이 다섯 작가들이 나에겐 낯설다. 이름에 대한 저질 기억력 때문에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니 첫 작품이거나 단행본은 익숙하지만 읽지 않았거나 동명이인이었다. 안전가옥의 성향을 보면 이 다섯 작가의 다른 단편 등을 앞으로 다시 볼 가능성이 많다. 아마 그때도 인터넷 서점에서 열심히 검색할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성향이 가장 강한 단편은 한송희의 <사랑도 회복이 되나요?>였다. 기분영양제 비타무드를 복용한 후 연결되는 두 남녀의 결말이 예상되는 소설이다. 비타무드란 이름을 보면 어디에서 빌려온 것인지 바로 인식할 수 있다. 재밌는 설정은 예술가들의 빌라 거주다.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은 예술인 빌라에서 살 수 있다. 비연애주의자 영화감독 소혜가 비타무드를 먹은 이유는 잠을 자지 못해서다. 앞집에 이사온 서준은 늘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준도 비타무드를 먹는데 이유는 울고 싶어서다. 그는 배우지망생이기도 하다. 기분영양제의 부작용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는 이 둘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만 끌리는 모습은 전형적이다. 이 둘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장면과 상황은 재밌다. 아! 이 소설의 제목은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패러디 같다.


오정연의 <유로파의 빛을 담아>는 가장 sf소설 같다. 유로파로 떠난 우주인 정현의 이메일에 회신하는 현우의 이메일과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엮여 있다. 물리적 거리가 빚어내는 시차와 기억 속에 자리잡은 몇십 년 만의 연락이 상당히 흥미롭게 진행된다. 119안전센터 센터장인 현우가 자신의 일상을 말할 때 정현은 기억 속 상황들에 더 집중한다. 길지 않았지만 강렬했던 한 순간의 추억은 띄엄띄엄 전해져 온 소식과 이어져 있고, 이 연결은 강렬했던 첫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앤솔로지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 소재 중 하나다.


윤이나의 <아날로그 로맨스>는 통역기 란토와 리얼리티 연애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란토 덕분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소통하는데 문제가 없는 근미래가 무대다. 연애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10개국 남녀를 선발했는데 자국어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당연히 통역기 란토도 사용불가다. 손짓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준은 예전 애인 올리를 만난다. 의도적인 참여다. 이 방송에 참여한 후 올리와의 연애를 떠올리고, 란토 없는 현실에서 그 당시 자신이 놓친 것들을 깨닫는다. 언어, 표정, 몸짓 등과 사랑을 엮었는데 뒤로 가면서 재밌어졌다.


이윤정의 <트러블 트레인 라이드>는 인간의 기억과 인공지능을 연결해 죽은 가족이나 애인을 만족시키는 근미래를 다룬다. 이 소설 속 주인공 지은과 은수 등은 모두 AI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기억이나 감정 등을 한꺼번에 올려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과 남겨진 사람들의 감정과 결합해 만들어진 AI다. 이 AI가 다른 AI에게 끌리고, 다른 삶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상황을 그린다. 그리고 완성된 AI는 안드로이드에 들어가 주문자와 함께 살게 된다. 인공지능의 로맨스를 이렇게 그려낸 부분은 아주 신선하다. 이런 인공지능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우리 주변을 채울 때 우리 삶은 또 어떻게 변할까?


김효인의 <오류의 섬에서 만나요>은 가상현실에서 정신을 치유하는 근미래 이야기다. 전직 축구선수 서이와 전직 수험생 도현이 오류가 난 섬에서 만난다. 원래대로라면 로그아웃해서 현실로 나가야 한다. 오류에 휘말린 두 사람은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만난다. 이 과정에서 둘은 계속 만나고, 작은 위안을 주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자신들을 우울과 무기력 속에 집어넣은 현실을 보여주는데 아주 특별한 일들은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옆으로 돌려 찾는다면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조금씩 조심조심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오류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이 앤솔로지를 읽다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성별을 표시하지 않거나 동성애를 편하게 그려낸 것을 발견한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미래도 보여주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동성의 끌림을 표현한다. 인공지능의 사랑도 있으니 미래에 펼쳐질 사랑의 다양성은 더 넓어진 것 같다. 안전가옥의 이 시리즈도 계속 관심을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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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시선 468
심재휘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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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22년) 두 번째 읽는 시집이다. 매년 년초가 되면 한 달에 시집 한 권은 읽자고 다짐하지만 권수를 채운 적은 없는 것 같다. 작년과 올해도 시집을 몇 권 구해 놓았지만 욕심만큼 읽지 못했다. 그리고 시집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의 감수성 부족과 감정이 메마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서평을 쓰려고 하면 읽은 시들이 갑자기 증발한다. 난감하다. 언제부터 인가 시집 마지막에 나오는 해설을 읽지 않다 보니 시 해석이 더 어렵다. 한 자리에서 다 읽지 않고 며칠에 나눠 짬을 내어 읽다 보니 시집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읽으면서 좋았던 시나 문장을 기록해 놓았다면 좋았을 텐데 게으름이 그것을 막는다. 시집을 뒤적이면서 읽고 난 후 놓아버린 시어들을 다시 찾는다.


모두 3부로 나누었다. 장소를 배경으로 나누었는데 그 장소들은 서울, 런던, 강릉이다. 시인의 근황을 잘 알지 못하다 보니 시만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이 세 장소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런던에 대한 시를 읽다 보면 그렇게나 비가 자주 왔는지 묻고 싶어진다. 사흘째 가는 비가 왔다는 소식보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창문의 발견>에 나온 관찰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창문을 말하려네 / 빗소리는 비가 내는 것이 아니라 / 창문이 내는 아픈 소리 / 그러니까 내 방에 기대인 창문은 / 내 곁의 먼 곳이었네”(부분) 비와 창문의 결합을 아픈 소리라고 불렀는데 왜일까? 창문에 비가 와서 부딪히는 소리를 듣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1부 서울에서 “맹물 마시듯 /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행복>의 부분) 라고 말한다. 바쁜 일상을 넘어 존재의 인정을 받고 실다. 사람들이 얼마나 의미를 찾고, 잘 살려고 애쓰는 지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어떤 면접>은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면 요양원들을 다니면서 / 집 나간 아버지를 찾겠단다”. “국영수보다 어려운 가족이라는 과목의 등급”은 평범한 가정을 대상으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 가족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린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지원자의 말에 “질문도 대답도 머뭇거린다.”


3부 강릉의 첫 시는 <외할머니의 허무>다. 허무는 호미의 방언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허무다. 이 이중적 의미를 시 속에 녹여내었다. 이 3부의 시들은 그의 유년의 기억들이 녹아 있다. 행정구역의 변경(<주문진, 조금 먼 곳>, <묵호>)을 알려주고, 친구들과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불멸의 동명극장>을 읽다 보면 내 고향에서 사라진 만남의 장소였던 극장이 떠오른다, 예전에 남대천에서 멱 감다 아이들이 빠져 죽는 교각에 대핸 말할 때(<철다리의 일>) 방송에 나온 저수지, 강 등에 빠진 사람들 뉴스가 생각난다. 물론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임당동 장칼국숫집 광고>란 시는 그가 살던 집에 대한 추억을 다룬다. 아버지가 팔 수밖에 없었던 그곳이 남아 있어 다행이란 감정 속에 ‘매워서 눈물 나는 맛’이란 시어가 가슴에 파고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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