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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프 도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평점 :
애파타프를 검색하면 묘비명이란 해석이 먼저 나온다. 실제 이 소설 속에서 묘비명을 여러 번 말한다. 도쿄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다니면서 상당히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에 겨우 몇 번 내려 가는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도 스쳐 지나간다. 지금의 도시 모습과 비교하면 그때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자주 가지 않는 도시는 그냥 지나가고, 현재 살고 있는 서울에만 한정해도 그 빠른 변화와 다른 모습에 놀란다. 고속 성장하는 도시의 변화는 한 해 한 해 다르다. 여기에 올림픽 개최는 그 속도를 높인다. 작가의 2020 도쿄 올림픽에 대한 글은 그 아쉬움을 담고 있다.
기존의 온다 리쿠 소설과 많이 다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소설보다 에세이 같이 느껴진다. 도쿄를 기점으로 교토와 오사카, 고베 등을 다루는 작가 K의 시점을 다룬 piece와 자칭 흡혈귀라고 말하는 요시야의 시점을 다룬 drawing과 K의 희곡인 [에피타프 도쿄]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은 절대적으로 piece가 많다. 낯선 지명과 낯익은 지명을 돌아다니면서 도시의 역사를 탐방하는 K의 이야기는 아주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도 나와 반갑지만 그 역사란 것이 결코 좋은 사건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사실들은 기억을 새롭게 하고, 지식을 덧붙이기에 충분하다.
오래 전 도쿄를 한 번 여행한 적이 있다. 짧은 기간 머문 것이라 대표적인 지역만 둘러보았지만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등에서 늘 마주한 곳을 눈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어쩌면 내가 영상 등으로 기억하는 도쿄가 그 사이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사람들이 도쿄타워가 아닌 스카이트리에 몰린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였을 것이다. 도쿄 전망대의 대명사였던 도쿄타워가 그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스카이트리가 나오는데 전망대가 아닌 미술전시실이다. 내가 간 당시의 복잡함을 생각하면 조금 낯선 모습이다.
읽다 보면 반가운 이름을 자주 보게 된다. 대부분 작가나 작품명이다. 이 작품들에 나온 도쿄의 풍경이 어쩌면 내 머릿속 도쿄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지명보다 작가 이름이나 작품이 더 낯익다. 기억을 환기시키는 작품도 나온다. 내가 놓친 곳들이 나올 때면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순간 순간 다른 소설이나 영화 등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걸었던 곳은 더 분명하게 떠오르는데 이것이 나의 경험인지, 단순한 이미지의 연상인지 궁금하다. 작가가 한국과 중국과 도쿄의 공기와 냄새가 다르다고 한 부분을 보면서 이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한 내가 둔감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 묻혀 있다 보면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흡혈귀라고 말하는 요시야다. 햇볕 속을 걸어다니고 특별히 피를 빠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데 이전 기억을 유지한다고 말한다. 티벳의 달라이라마가 연상되는 설정이다. 요시야의 불사는 환생이다. 그가 K의 미행을 알아 챈 대목에서 도시에 많은 것으로 거울을 말하는데 공감한다. 고전 스파이 영화처럼 누군가를 미행한다면 너무 쉽게 그 정체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아베 고보의 소설 한 권을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관심이 생긴다. K가 쓰는 희곡 [에피타프 도쿄]의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이 떠오른다. 뭐 잠시 이 작품에 대한 언급도 있었지만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갔다가 신선한 전개와 구성에 잠시 혼란을 느꼈다. 동일본대지진을 다룬 이야기가 나와 기록을 확인하니 2011년 3월이다. 소설 속 3월 모일의 기록은 이때 있었던 일을 다룬다. 수많은 이야기 중 한 편에서 괴수가 도쿄를 침범한다. 고질라를 떠올리게 하는데 왜 핵 실험을 한 미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오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의문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희곡 [에피타프 도쿄]를 읽으면서 상당히 매력적인 설정이라 한 편의 소설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왠지 존 콜트레인의 <My Favorite Things>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