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만드는 사람 - 개정보급판
마윤제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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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을 읽었다. 인터넷 서점 상 정보만으로는 목차 외에 따로 보이는 것이 없다. 2017 문학나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에 선정되었다는 정보가 덧붙여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선정에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왠지 모르게 다른 제목과 헷갈리면서 청소년 소설로 착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점점 쇠락하는 저질 기억력은 책 정보에 혼란을 가져온다. 노안과 체력 저하에 따른 집중력 저하는 요즘 나의 또 다른 문제점 중 하나다. 이 소설이 예상 외로 묵직한 재미를 주었지만 단숨에 읽지 못한 작은 변명을 해본다.


바람을 만드는 존재 ‘웨나’를 평생 쫓은 네레오 코르소의 일생을 그렸다. 파타고니아 고원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결국 고원에서 마무리하지만 그 속에는 한 가우초의 장대한 모험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를 판 후 공포와 두려움에 몸부림 칠 때 한 늙은 가우초가 들려준 웨나의 이야기는 평생 그를 삼킨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본 웨나의 이미지는 평생 새겨져 지우지지 않는다. 그가 고원을 내려와 세상을 떠돌 때 그 이미지는 그와 함께 세상을 여행한다. 그가 말한 그 이미지와 의미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언어로 바꿔 그에게 설명한다. 최근 많이 읽고 있는 장르소설이나 판타지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힘 있고 묵직한 소설이다.


일곱 살 여아를 죽인 퓨마를 죽이기 위해 예순여덟 살 가우초가 길을 떠난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다. 이 퓨마는 보통의 퓨마와 다르다. 영리하다. 늙은 몸은 이전처럼 퓨마 사냥을 쉽게 마무리하기 힘들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다. 고원에서 도움을 요청하려면 불을 피워야 한다. 정신이 없다. 이런 그를 고원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가려는 한 사람이 발견한다. 그는 네레오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사형수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 그의 일생이 시간 순으로 하나씩 독자 앞에 펼쳐진다. 아들을 판 아버지, 가우초로 자라 자신이 웨나라고 생각했던 존재의 갑작스러운 몰락, 웨나를 찾기 위한 도시행 등. 섬세하고 묵직한 문장으로 작가는 이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고원에서 홀로 지내야 하는 외로운 가우초가 쉽게 기대는 것은 술과 도박이다. 하지만 네레오는 술도 도박도 하지 않는다. 평생 그가 추구한 것은 바람을 만드는 사람 웨나다. 그가 간절하게 바란 것을 웨나를 찾는 것이다. 그의 이 바람을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대부분 부정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환상이라거나 착각이라고 하면서. 그의 여행은 계속 이어지고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네레오는 이 혼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단순한 가우초의 삶에 비해 도시의 삶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그의 순수함이 묻어나는 장면 중 하나는 아나와 함께 한 밤의 여행이다. 아나의 순진한 열망과 사기극은 읽는 내내 가슴 아프게 한다.


전설은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어떤 전설은 그 도중에 사라지거나 왜곡된다. 한 가우초가 간절하게 바란 웨나는 어떨까? 우연히 발견한 목상의 흔적을 좇아 간 곳에서 들은 또 다른 웨나 전설은 그에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가 안락할 수도 있는 삶을 포기하고 웨나를 찾아 떠난 것도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다. 다시 어린 시절 그 고원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길을 걷는다. 이것은 우리가 두려움에, 좀더 편안함에 젖어 남들처럼 그 길을 걷는 것과 다른 선택이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는 행복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데 두 가지 자료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인터넷 정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그곳들을 한 번씩 다녀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소설을 다 읽은 후 나에게 강한 인상과 여운은 남기는데 일조한 것은 신형철 평론가의 한 마디다.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은 그것을 간절하게 묻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조금은 달라지게 한다는 것을.” 선을 수행하는 스님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 삶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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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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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다. 공식적으로 668쪽이다. 최근 이런 두툼한 분량을 조금 힘들어 하는 편이다. 재미와 상관없이 책 읽을 물리적 시간이 줄어들면서 이런 두툼한 책들을 의식적으로 멀리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나 관심 있는 소설의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이 책도 두 가지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하나는 호러북클럽이고, 다른 하나는 뱀파이어다. 북클럽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이런 장르도 좋아하니 제목이 나를 유혹한다. 내가 얼마나 이런 유혹에 약한가. 그리고 목차에 나오는 낯익은 책 제목들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물론 읽은 책은 몇 권 없다. 모르는 책도 있다.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한다고 했을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미지는 뱀파이어를 처치하는 북클럽 회원들의 액션 활극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나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이 뱀파이어와 이웃한 시간도 적지 않다. 목차에 나온 시간은 소설 속 시간의 흐름과 이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던 논의 장면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남자 주인공을 둘러싼 논쟁이다. 그가 연쇄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억지 대목을 보면서 이전에 고상한 책으로 자신들의 기호를 속였던 장면이 떠올랐다. <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를 읽지 않고 참석한 북클럽과 달리 새롭게 결성된 북클럽은 피가 난무하는 책들이 많다. <사이코> 등은 어울리지만 달콤한 로맨스는 어울리지 않는데 왜 선택했지 하는 의문은 그들의 작은 논쟁 속에 나온다.


전직 간호사였던 퍼트리샤는 남편과 두 아이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산다. 호러북클럽은 그녀의 작은 즐거움이다. 그녀의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옆집 노부인이 그녀를 공격해 귀를 물어뜯는다. 겨우 노부인을 물리쳤는데 죽었다. 그리고 노부인의 조카라고 말하는 제임스가 등장한다. 퍼트리샤와 제임스의 첫 만남은 아주 인상적이다. 퍼트리샤는 집안에 누워 있는 제임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공호흡을 한다. 그가 놀라 깨어난다. 읽다 보면 이 소설 속 뱀파이어가 제임스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햇볕을 싫어하는 그의 성향과 증명서가 없다는 사실 등이 의심을 가중시킨다. 반면에 교묘하게 퍼트리샤의 동정을 사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씩 이룬다. 미국 남부도시 찰스턴의 올드 빌리지에 뿌리를 내린다.


제임스의 등장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인물이 있다. 치매에 걸린 미스 메리다. 그녀는 제임스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한다. 나중에 미스 메리는 금주법 시대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연을 퍼트리샤에게 말해준다. 그의 이름은 호이트이고, 미스 메리는 그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외친다. 하지만 치매 걸린 노인의 말에 신경을 쓸 사람은 많지 않다. 늙지 않는 뱀파이어는 소설이나 영화 속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트리샤를 둘러싸고 스산하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작은 공포들이 조금씩 조금씩 그들 곁에 다가와 안으로 파고든다. 직접적이고 화려하지 않지만 조금씩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우리 곁에 있는 뱀파이어는 결코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루의 절반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정체가 밝혀지면 금방 퇴치될 수밖에 없다. 그가 저지르는 행위는 호러북클럽 회원들이 즐겨 읽는 연쇄살인범의 행위와 닮아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욕망을 이어가야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만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잡을 수도 없고, 잘못하면 달아나 버린다. 작가는 이 둘을 묘하게 엮어서 한 이야기 속에 녹여내었다. 북클럽의 아줌마들이 뱀파이어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 현대 문명은 이런 협업 속에서 이루어졌다. 마지막에 제임스가 마을에 정착하게 도와주면서 교환한 2350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왠지 짠하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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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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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이먼드 조는 자기계발서 작가다. 이 분야를 잘 읽지 않는 나도 익숙한 제목의 베스터셀러 작가다. 이런 그가 제4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을 내놓았다. 이 단순한 이력만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 있지만 영상 및 문화 콘테츠 작가 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까지 들으면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설 속 장면들이 영상 이미지로 다가온 것도 이런 이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장면 전개와 캐릭터의 힘을 살린 이야기는 끝까지 시선을 놓지 않게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예전에 본 영화 <비트>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인공 바람의 나이도 19살이다.


하드보일드 성장소설을 표방한다고 한다. 낯선 조합이다. 무책임한 엄마 밑에서 자란 바람은 타고 난 싸움꾼이다. 엄마가 쓴 사채 때문에 조직 폭력배 백기를 만난다. 백기는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무서운 남자다. 그는 단순한 조폭을 벗어나 더 위로 올라가길 바란다. 그 전 단계로 조직을 만들고, 다른 조직을 무너트리고, 자신의 관할지역을 확장한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백기 밑으로 들어간 그는 탁월한 싸움 실력을 발휘해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된다. 그의 성공은 어린 조폭 유망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이 성공이 낯설다. 그가 바라는 것은 성인이 되어 군인이 되는 것이다. 성공이 보장된 조폭의 아주 이상하고 소박한 소원이다.


바람은 스스로 똑똑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배운 지식의 대부분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다. 엄마의 사채 이자를 받으러 온 조폭에게 한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바른 정보가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된다면 사회가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엄마를 위해 청소하고 밥하고 알바를 한다. 학교 짱이란 이미지는 그가 바란 것이 아니지만 알바를 잘리게 한다. 이렇게 사회를 조금씩 배워가는 그에게 백기가 보여준 세계는 또 다른 세계다. 연예인을 닮았다는 말에 화를 낼 정도의 미모를 가진 텐프로 클럽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는 영선에게 끌린다.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런 그녀가 5번 룸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보스인 백기도 사라졌다. 백기와 대립하던 혁철이 그 조직을 흡수한다. 백기가 영선을 죽였을까? 이 소설에서 재미를 주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VIP 전용 클럽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조용히 묻힌다. 범인이 백기라고 경찰이 생각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 흡수된 조직에서 바람은 팀장에서 똘마니로 전락한다. 그러다 클럽의 마담에게서 그 방에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를 찾아간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가 잠깐 도움을 준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이 잠깐의 도움이 그가 사라진 후 악몽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현실의 또 다른 이면이다. 나중에 영선의 사연이 흘러나올 때 인간의 선과 악이 얼마나 쉽게 바뀌는지 나온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짧게 운만 띄우는 방식이 더 잔혹하다. 그런 곳에서도 선의가 넘치는 곳이 존재한다. 이 희망이, 선의가 삶을 이어가게 한다.


액션으로 가득하다. 싸움꾼 바람의 좌충우돌하는 모습과 액션은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준다. 이 순수한 마음에 다른 능력이 뒷받침되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액션은 눈을 떼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혼자다. 형을 통해 세상의 일부를 배웠다고 하지만 노회한 인간들의 컴컴한 속내까지 짐작하기에는 너무 순진하다. 이 순진함이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다. 작가는 이 위기 중 하나에서 현실에서 실재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 폭력범이 재벌이라는 이유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잘난 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5번 룸에서 일어난 사건을 둘러싼 현실의 진행도 그런 식이다.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는 것도, 용의자를 데려와 질문하는 것도 막혔다.


바람은 조폭이 되면서 ‘사람은 절대 죽이지 않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의 무기인 죠스를 들고 수많은 조폭들과 용병들과 싸우면서도 살인은 저지르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전과자가 되면 군대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무언가를 지시하기보다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작은 정보는 잘 기억한다. 형의 말은 그에게 좋은 교육 자료다. 공부는 못했지만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에 보여준 모습은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반전처럼 펼쳐지는 몇 가지 사실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뛰어난 가독성과 재미를 주고, 현실의 사건을 적절하게 녹여내면서 공감할 대목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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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대한 두근거리는 예언
류잉 지음, 이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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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대만 로맨스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데 가끔 표지나 책소개에 혹해 읽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도 표지와 서점에서 책장을 넘겨 본 후 끌려 선택했다. 여기에 미스터리 판타지 로맨스란 소개와 타임슬립이란 설정이 눈길을 끌었다. 로맨스는 별로이지만 판타지와 타임슬립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청춘들의 사랑과 성장을 다루고 있다니 더 매력적이다.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읽은 소설은 상당히 가독성이 좋았다. 고등학생들의 밀당과 사랑이 눈길을 끌고, 커쉰이 꾼 예지몽이 과연 현실이 될 것인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소설의 마지막은 나의 예상은 뒤집었다.


대만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등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전교 석차를 게시판에 공지한다고 한다. 한때 한국도 이런 학교들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석차 공개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많이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커쉰은 우등반에 들어갔는데 공부보다 그림에 더 관심이 많다. 엄마는 딸이 공부에 더 집중하길 바란다. 이혼 후 혼자 열심히 힘들게 딸을 키운 엄마의 바람은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을 닮았다. 좋은 대학이 밝은 미래를 완전히 보장하지는 않지만 더 쉬운 삶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현실인 곳에서 성적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의 이런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바뀐다. 커쉰의 경우는 버스 사고다.


서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커쉰은 브레이크 고장난 차를 타고 있었다. 운전수는 브레이크 고장을 말하고 빨리 내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커쉰은 내리지 못하고 사고를 당한다. 정신을 차렸는데 1년 뒤 보통반에서 기절한 후 깨어난다. 1년 동안의 기억은 사라졌다. 그 1년 사이에 엄마는 재혼을 했고, 커쉰은 바이상환을 사귀고 있다. 상환은 그녀가 지각했을 때 몰래 담치기 하는 것을 적발한 선도부 학생이다. 우등반이 아니면서 전교 석차 3위에 늘 이름을 올린다. 사고 며칠 전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친 빙쉰과 헤어졌다. 그녀의 남친을 뺏어간 여자는 같은 우등반 신위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빙쉰의 여친은 다른 여자고, 커쉰이 상환을 사귀는 것을 질투한다. 상환도 이것을 보고 화를 낸다. 그리고 차에 치여 죽는다. 현실에서 다시 깨어난다.


불행한 꿈이다. 이 예지몽처럼 미래가 펼쳐질까 두렵다. 우등반에서 강등해 보통반으로 옮겼는데 그 반이 상환의 반이다.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가 엄마의 고등학교 남친이었다는 사실과 꿈속에서 그 아저씨가 새아버지란 사실을 알고 있다. 꿈이 사실처럼 다가온다. 꿈속 상황과 현실이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큰 흐름에서 하나씩 맞아들어간다. 새롭게 연인으로 발전하는 커플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에 한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다. 현실적인 고등학생의 일상과 풋풋한 사랑 이야기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우등반이 아닌 보통반으로 배경을 옮기면서 훨씬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소설은 작가의 학창 시절 경험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읽다 보면 한국 연예인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일본 문화도 뺄 수 없다. 예전에 읽었던 대만 소설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괜히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는 커쉰의 엄마가 경험하는 어른의 연애와 분명히 결이 다르다. 아직 순수함이 가득하고, 예지몽의 두려움이 남아 있다. 상환이 말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런 풋풋한 사랑은 언제나 즐겁다. 예상하지 못한 반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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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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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재밌게 읽는 요나스 요나슨의 신작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 번 펼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번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즐겼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유쾌하게 즐기기에 이처럼 좋은 소설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한국이 나온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 한참 기다렸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달콤한 복수를 의뢰하는 한국인이 나온다. 이 부분을 보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유난히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100세 노인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는 한 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더 복잡하다. 교활하고 위선적인 미술품 거래인 빅토르, 그에게 전 재산을 빼앗긴 전 아내 옌뉘, 갑자기 나타난 빅토르의 아들 케빈, 케냐 사바나의 마사이족 치유사 올레 음바티안, 스웨덴 최고의 광고맨에서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의 대표가 된 후고 등이 중요인물이다. 작가는 앞부분에 이들의 이야기를 한 명씩 늘어놓는다. 이전 작품들처럼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것을 웃돈다. 이 부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소설은 황당함에 멈추고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황당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예상 외의 행동들을 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행동에 빠져든다.


복수. 이 얼마나 살벌하고 달콤한 말인가. 현대 사회는 개인의 복수가 금지되어 있다. 이 금지된 것을 대신해주는 회사가 있다니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하지만 잠시 입장을 바꾸면 그 복수의 대상이 겪게 되는 일들이 과연 그 정도의 피해를 입을 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의뢰자의 입장에서는 부족할 수도 있다. 책 중반에 후고가 회사를 설립하고 몇 개의 의뢰를 처리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기발한 발상에 놀라면서도 상대방이 겪게 될 고통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잠깐이나마 의뢰자의 입장에 공감하는 나를 발견한다. 내 속에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다.


서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하나로 모이게 된 데는 빅토르의 역할이 컸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검은 색 피부의 아들 케빈을 케냐 사바나에 사자 밥이 되도록 놓아두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케빈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지나가던 인물이 아들 없는 치유사 올레다. 올레는 케빈을 아들로 여기고 마사이 전사로 키우려고 한다. 마지막 관문인 할례 의식을 앞두고 있었다. 악어가 가득한 강을 헤엄치고, 창을 들고 사자를 사냥하는 용기를 가졌지만 자신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 두려운 케빈은 아빠의 물건을 훔쳐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예전에 머물던 집에 살고 있는 옌뉘를 만난다. 둘 다 경제활동은 젬병이다.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를 발견한다. 이렇게 이어진다.


상황이 더 복잡해지고 꼬이면서 유머를 잔뜩 뿌리는 것은 올레 음바티안이 케빈의 편지를 받고 스웨덴으로 오면서부터다. 현대인의 필수품 중 하나인 신분증이 없는 상황을 황당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여기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분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준다. 신분증이 없다면 그가 그 자신임을 증명할 수 없다. 케빈의 이야기 중 하나도 이것이다. 여권의 유효기간이 만료되고, 빅토르가 사망신고를 한 지 5년이 지나면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때 발생한 이야기는 상당히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우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재밌게 웃으면서 자신의 신분증을 잘 챙기면 된다.


사건이 소용돌이 치는 것은 케빈이 올레의 집에서 가져온 그림 때문이다. 케빈은 아빠가 그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는 이르마 스턴의 작품이다. 나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상당히 익숙한 붓 터치가 눈길을 끄는 작품을 그린 현대 여성 화가다. 실제는 더 유명하겠지만 무지한 나에게 현재 그 정도의 지식 밖에 없다. 달콤한 복수를 위해 처음 그들이 짠 계획은 이르마 스턴의 모조를 이용해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었다. 단순히 작품 모조만으로 부족해서 동물과 그 짓을 하는 인물로 만들기로 했다. 이 작업은 성공을 거두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올레가 오면서 이 그림이 진짜 이르마 스턴의 작품이란 것이 드러난 것이다. 상황은 또 한 번 바뀐다. 올레가 스웨덴에서 벌이는 기이한 행동들은 또 어떤가. 유쾌하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네오나치즘 등을 표방한 인종주의와 혐오주의를 만난다. 이르마 스턴은 히틀러에 의해 탄압을 받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아들마저 부정하고 죽이려고 한 빅토르는 뼈 속까지 인종차별주의자다. 생각은 그런데 성욕은 색을 가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중적 잣대를 잘 보여준다. 점점 세계적으로 혐오와 인종주의가 심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결코 무심히 볼 수 없다. 이 경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정말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다. 보통 이런 종류의 글이라면 중간에 잠시 헤매는 순간도 있는데 요나스 요나손은 멋지게 캐릭터들을 살리면서 재밌고 유쾌하고 기발하게 이어간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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