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카드 1 와일드카드 1
조지 R. R. 마틴 외 지음, 김상훈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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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리즈 1권 <와일드카드>가 출간된 후 현재까지 29권이 나온 엄청난 시리즈다. <얼음과 불의 노래>로 더욱 유명해진 조지 R.R. 마틴이 프롤로그와 단편과 막간극을 쓰면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공동편집자로 멀린다 M. 스노드그래스가 보인다. 나에게 익숙한 작가는 로저 젤라즈니 정도다. 다른 작가들의 이력을 보면 상당히 화려한데 익숙한 작품이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SF 장르의 빈약한 시장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대로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과연 어디까지 나올지도 궁금하다. 개인적 바람은 끝까지 나오는 것이다.


이번에 번역된 <와일드카드>는 확장판이라고 한다. 세 작가의 작품이 더 들어 있다. 초판본을 읽은 적이 없으니 소개글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용이다. 이 시리즈에 참여한 작가가 40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단한 협업이다. 1권에만 13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각각의 작가가 다른 캐릭터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 거대한 SF 세계관의 문을 연 것은 조지 R.R. 마틴이다. 하워드 월드롭의 <브로드웨이 상공 30분!>은 이 세계 최고의 영웅인 제트보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전에 지구에 이 바이러스를 보낸 타키온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가 나온다.


타키온의 행성이 지구인을 통해 와일드카드 바이러스를 실험하려고 했다. 이것을 막기 위해 타키온이 지구로 왔는데 이 바이러스가 담긴 캡슐을 놓쳤다. 문제는 이 캡슐을 핵무기로 생각한 악당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협박으로 큰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이들의 공격을 제트보이가 완전히 막지 못하고 공중에서 산화한다. 캡슐은 터져 뉴욕에 와일드카드 바이러스가 퍼진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90%는 죽고, 살아남은 10% 중 9%는 괴물 같은 외형을 가진 조커가 되고, 1%만 초능력을 가진 에이스로 변한다. 이 바이러스 노출에 의한 참혹한 광경은 로저 젤라즈니의 <슬리퍼>에서 잘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 중 한 편이다.


월터 존 윌리엄스의 <증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에이스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매카시즘의 광기가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에이스들을 자신들의 이념과 권력 아래 두기 위해 조작한 여론이 초능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가진 그들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매카시즘 속에 변전한 에이스 골든보이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겠지만 씁쓸하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이들은 계속 나온다. 네 명의 에이스를 다룬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판타스틱 포>가 떠오른다. 또 다른 초능력자 ‘터틀’을 볼 때 머릿속에서 ‘닌자 거북이’가 스쳐지나갔다.


타키온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 <실추의 의식>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사랑의 상실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보여준다. 여기에 조커들을 등장시켜 새로운 사회계층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닥터 타기온의 부활이다. 매카시 광풍이 얼마나 많은 에이스들을 두렵게 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파워스>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던 CIA 정보 분석가가 다른 에이스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알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은 냉전 시대와 엮여 있다. 마지막에 그의 요원명으로 ‘스톱워치’로 불릴 때 잘 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평온한 일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단편이 추가되면서 역사의 흐름을 좇아간다. 60년대 히피 문화가 나오고, 빠르게 70년대로 넘어간다. 한때 악명 높았던 뉴욕 지하철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가 하면, 에이스이지만 자신의 능력을 아주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 악당까지 등장시켜 능력과 행동은 상관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스티븐 리의 <꼭두각시> 속 악당은 등장할 때부터 극악했는데 성장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이용해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인물로 나온다. 초능력과 에로틱한 묘사를 미스터리와 잘 엮었다. 이렇게 이 시리즈는 다양한 캐릭터를 기존 역사적 사실과 엮어 풀어낸다. 그들이 지닌 거대한 능력을 각자의 성향이나 바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사용한다. 적지 않은 분량이라 단숨에 읽기는 힘들지만 다양한 이야기와 무한한 확장성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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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시스터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9
김혜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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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9권이다. 무심코 본 숫자인 89가 천천히 그 의미를 음미하자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 목록들을 대충 훑어보니 읽은 책도 몇 권 보이고, 낯익은 제목이나 표지도 몇 권 보인다. 개인적으로 청소년문학을 즐겨 읽지는 않지만 가끔 읽다 보면 인식의 틀을 깨부수는 글들을 만난다. 나이가 들면서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지는 나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의 환기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소설 속 두 자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가 잊고 있던 가치 몇 가지를 다시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다.


치앙마이와 베를린. 이나와 주나 자매가 엄마와 아빠를 따라 한 달 동안 머문 도시다. 이나는 이모의 출산으로 도와주려고 온 엄마와 치앙마이에 머문다. 주나는 전시회 목적으로 온 아빠와 베를린에 있다. 한때 이 자매는 아주 친했고, 서로 의지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둘 사이는 서먹해지고 함께 있기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하나의 설정을 더 넣는다. 이나의 휴대폰이 물에 빠져 먹통이 된 것이다. 휴대폰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는 이나이기에 고치지도, 새로 사지도 않고 산다. 보통의 소녀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서먹한 두 자매는 이메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다.


치앙마이, 땡모반, 타패 등은 나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치앙마이를 몇 번 여행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치앙마이란 지명인지도 모른다. 이모의 남편은 태국 남자이고, 함께 작은 호텔을 운영한다. 이모와 엄마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다. 적지 않은 나이 차이다. 이모가 우주를 낳은 후 엄마와 이모는 자주 싸운다. 이나가 보기에 이렇게 싸우고도 같이 머무는 두 어른이 신기한 것 같다. 이나는 자신의 일상을 작은 그림으로 그리는데 이것을 본 직원 중 한 명이 그녀를 미술교실로 데리고 간다. 똥소녀 채강을 만나고, 잊고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살린다.


주나. 아빠를 따라 베를린에 간 소녀는 심심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 놀라운 소식을 SNS를 통해 본다. 자신이 짝사랑했던 서준을 절친 라임이 사귄다는 소식이다. 자신이 얼마나 서준을 좋아하는 지 아는 라임이 그 사랑을 뺏아간 것이다. 톡을 차단하고, 다른 친구를 통해 온 톡도 답신하지 않는다. 이 감정을 언니 이나에게 메일을 보낸다. 낯선 이국에서 경험한 일들이 메신저가 아닌 이메일을 통해 한 번 정제된 채 전달된다. 서로 다른 시간대이고, 아직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 방식의 교류는 서로를 조금 떨어진 상황에서 마주 보게 한다. 이 메일의 길이는 뒤로 가면서 점점 길어진다. 감정의 깊이도 더 깊어진다.


방학이라고 하지만 십대 소녀들을 학원에 돌리지 않고 장기간 해외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이 함께 가지 않고 각각의 부모를 따라 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이 이유는 나중에 나온다. 어린 소녀들의 낯선 도시 생활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맞이한다. 이나는 그림을, 주나는 한국어와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주나가 어릴 때 한 수술은 주나에게 부모가 좀 더 관대하게 대하게 한다. 이나가 보기엔 차별이지만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 덕분에 주나는 이나보다 끈기가 조금 더 부족하다. 주나는 이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한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잊고 있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 논다고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그 친구들을 한 명씩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래도 남은 친구들이 많지만 그렇게 절실했던 친구가 어느 순간 잊게 되기도 한다. 십대의 나를 돌아보면 소설 속 소녀들처럼 작은 일에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든다고 이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생활에 파묻혀 살다 보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잠시 잊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내고, 어른들의 관점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어쩌면 이 소녀들의 생각이 작가의 경험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베를린보다 치앙마이에 더 많이 마음이 가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한 여행들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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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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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에드거 상 최우수 장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작가의 이력을 간단히 보면 화려한 수상 경력이 나온다. 이런 화려한 수상 작가도 가끔 나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아니다. 에드거 상을 받아 기대를 하면서도 고딕 문학의 전통이란 대목이 약간 걱정거리를 던져 주었다. 이런 걱정은 진도가 나가면서 점차 사라졌다. 대단히 빠르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천천히 이야기를 쌓아가는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여기에 가상의 작가와 가상의 소설을 만들어 둘의 연관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R.M 홀랜드의 <낯선 사람>이 실려 있다.


이야기는 세 명의 여성 화자를 내세워 진행한다. 홀랜드를 연구하며 교사로 살아가는 클레어, 클레어의 딸 조지아,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 하빈더 등이다. 클레어, 하빈더, 조지아 순으로 진행되다 클레어의 순번이 한 번 빠진다. 왜일까? 고딕 문학의 전통이 3의 반복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옮긴의 말에 나온다. 이런 전통보다 나의 시선을 더 끈 것은 엄마가 잘 모르는 딸의 모습이다. 클레어도 딸 조지아 하얀 마녀라고 부르는 여성에게 글쓰기를 배운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빈더의 엄마도 딸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모른다. 딸들이 사실을 숨겼다고 하지만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인 내 새끼는 내가 잘 안다는 믿음을 그대로 깨뜨린다.


<낯선 사람>의 도입부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그리고 한 여교사의 죽음을 알린다. 클레어의 절친 교사인 엘라가 살해당했다. 엘라는 학교의 학부장 릭과 잠을 잔 적이 있다. 속된 말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처음 이 사건을 맡은 하빈더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절친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처음 클레어를 봤을 때 하빈더는 약간 삐딱하게 쳐다본다. 클레어의 마르고 큰 키와 풍기는 표정이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이 약간의 반감은 사건이 더 일어나고,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면서 어느 순간 사라진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이 생기고, 의심의 씨앗을 사라지게 만들 사건도 생긴다. 가장 큰 역할은 하는 것은 역시 허버트다. <낯선 사람>에도 같은 이름의 개가 등장한다.


친구의 죽음으로 고통을 받는 역할이 클레어라면 하빈더는 드러난 증거를 가지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 증거가 많고 분명하다면 쉽게 범인을 잡을 수 있겠지만 이 살인자는 증거 물품을 남기지 않았다.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났을 때 그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클레어인데 그 과정도 재밌다. 약간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시체가 이 작은 낭만을 산산조각낸다. 두 번째 살인은 <낯선 사람>의 죽음과 동일한 방식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클레어의 일기에 기록된 낯선 사람의 말들. 지옥은 비었다. 서늘한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맥베스>에 나오는 문장이다. 두려움에 떨며 다른 기록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동일범의 소행이다.


클레어가 화자로 나올 때 일기는 또 하나의 도구다. 그녀의 내밀한 기록을 읽은 하빈더가 학교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두 번의 장례식과 새롭게 드러나는 과거의 사실들이 상황을 한 번 꼰다. 조지아의 분량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딸의 시선으로 엄마를 보게 하고, 용의자 중 한 명을 조용히 지우는 역할을 한다. 어른과 다른 위치와 시각에서 상황을 본다. 인도 시크교 신자인 부모와 함께 사는 하빈더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매력이 하나씩 드러난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했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열정이 가득하다. 관찰력이 뛰어나고 영국에서 인도계들이 흔히 겪게 되는 일들을 알려준다. 하빈더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기대해본다.


고딕 문학의 분위기를 풍기다 보니 빠른 전개나 무시무시한 긴장감을 불러오는 부분은 약하다.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이 흡입력을 발휘하고, 각 장마다 나오는 <낯선 사람>에 대한 좀 긴 인용은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범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찾은 방식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 중 범인이 있고, 아닌 사람을 하나씩 지우다 보니 그때 딱 그가 떠올랐다. 작가는 마지막에도 약간의 트릭을 사용한다. 재밌는 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상황이다. 현대 스릴러의 긴장감이나 속도감을 내지는 못하지만 고딕과 견실한 스릴러가 만들어내는 재미는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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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 지음, 이수영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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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재밌게 읽었다. 좋은 작품들을 선별해 번역한 덕분일 것이다. 작가는 인도에서 태어나 대학을 미국에서 다녔고,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다. ‘차세대 줌파 라히리’라는 찬사를 받는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아직 읽지 않았다. 사 놓고 묵혀 두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이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하는 이유는 작가의 시선에 미국의 시선이 혹시 더 많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 번 하기 위해서다. 내가 잘 모르는 인도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볼 때 생길 수 있는 선입견을 주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결국 내가 본 것은 나의 시선으로 해석한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는 크게 세 사람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지반, 러블리, 체육교사 등이다. 지반은 가난한 환경 탓에 중등학교 중퇴한 후 쇼핑몰 직원으로 일한다. 어느 날 밤 그녀 집 근처 기차역에서 테러가 발행해 100명 이상이 죽는다. 그녀는 이 내용을 공유하고, 허세에 차서 정부를 규탄하는 글 하나를 올린다. 그리고 다음 날 경찰이 찾아와 그녀를 테리범의 동료로 간주한다. 그녀가 페이스북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사람이 테러범 모집자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범인으로 지목되자 각종 증언이 쏟아진다. 진실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토해낸 것들이다. 그녀가 범인이라는 물리적 증거가 하나도 없다. 격해진 여론과 그것을 두려워한 경찰이 그녀를 범인으로 단정한다. 여기에 더욱 황당한 것은 그녀의 고백을 왜곡한 언론이다. 이 언론 보도를 보고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우리의 현실 일부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러블리. 여자가 되고 싶은 여장남자다. 히즈라라고 불리는데 구걸을 하면서 생활한다. 러블리가 바라는 것은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다. 수업료를 내고 연기수업을 받는다. 지반은 러블리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왔다. 그녀가 가지고 간 보따리의 정체는 교과서였다. 유명 배우가 되기 위해 러블리는 열심히 노력한다. 돈을 들여 프로필 CD를 만들고, 에이전시에 등록도 한다. 완전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전 동료 한 명이 마취도 되지 않은 불법 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그녀는 이 수술을 받을 마음이 없다. 이 소설에서 러블리는 이전에 몰랐던 인도의 풍습 하나와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녀는 지반을 위해 사실을 증언하기도 한다.


체육교사. 우연히 한 유명 정치인의 연설을 듣기 위해 갔다가 마이크를 고쳐주는 작은 도움을 준 후 정치에 발을 내딛는 인물이다. 그는 지반이 학생일 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도 없이 떠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이 불만을 더 부각해 경찰에 증언한다. 이것보다 더 흥미롭게 진행되는 것은 평범했던 체육교사가 한 정치인으로 자라는 과정이다. 권력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충성해야 하는 대상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그가 현실 문제를 말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관문을 거쳐야 한다. 그 중 하나가 가짜 증언이다.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다. 그 대가 중 하나가 비 올 때 매번 넘치는 학교 앞 하수구를 바로 수리한 것이다.


서로 다른 위치의 세 남녀를 화자로 내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그들과 관계된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를 밀어 넣었다. 사회를 움직이는 수많은 바퀴 중 하나가 살짝 드러난다. 사실보다는 가짜 뉴스가 더 힘을 발휘하고, 물증보다는 심증이 더 앞선다. 인도 사회에 내재한 오랜 문제 중 하나인 종교적 갈등도 드러난다. 이성보다는 군중심리로 대변되는 감정이 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한다. 읽다 보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계급과 부는 감옥마저 차별한다. 순수한 감정은 성공에 대한 욕망에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 서로의 이해가 맞을 때 잠깐 눈을 감는 것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다. 비극의 수레가 너무 빨리 굴러간다. 놀라운 가독성과 낯선 삶의 모습은 나를 이야기 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21세기 찰스 디킨스라는 표현을 보면서 디킨스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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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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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로맨스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띠지를 본 다음에야 오래 전 재밌게 읽었던 작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때도 김혜나가 로맨스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정유정의 추천과 이전에 읽었던 기억들이 책으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리고 더 성숙해진 작가의 이야기를 만났다. 처음에는 약간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밀도 있는 문장과 낯선 이국의 삶 속에서 발견한 일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빠져들었다. 요가 수련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작가도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요가와 글쓰기에 대한 이약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문디 언덕. 인도 마이소르에 있는 곳이다. 한참 여행 서적을 읽고, 여행 팟캐스터를 들었을 때 스치듯 이 이름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낯선 지명이다. 다른 소설인가에서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 어딘가로 와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도시에 오는 이유도 대부분이 요가를 수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나에게 용어나 자세 등은 너무 낯설다. 방송이나 인터넷 짤로 돌아다니는 요가 자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당연하다. 경치로 유명한 차문디 언덕이라고 하지만 좋은 풍경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인도는 여자 혼자 다니기 쉽지 않은 곳이다. 소설 곳곳에 두려움과 성추행에 대해 나온다.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억울하고 분하고 격렬하다.


이야기는 두 개로 진행된다. 하나는 메이의 마이소르 일상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과거사다. 폰트와 굵기를 달리 해서 구분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충격이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돌아봤다. 가난한 일상,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유년기 등은 그녀 삶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고모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모의 자살, 그 후 고모부와 두 딸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찍은 사진 등이 자신의 가족과 이어지면서 큰 충격을 준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사랑의 결핍은 폭식으로 이어진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육체에 큰 상처를 남긴 채 숨었다. 그러다 다시 그 허기가 깨어나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요한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하다. 약해도 너무 약하다.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상당히 부유했던 집안이 요한의 수술과 병원비로 상당히 사라졌다고 한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신자이고, 그곳에서 둘은 만났다. 얼마나 허약한 체력인가 하면 혼자 욕실에서 샤워할 때 수증기가 가득 차면 헉헉거린다. 그래도 사랑은 나눌 힘은 있는 모양이다. 둘이 처음 영화관에 갔을 때 계단에서 주저하는 그를 엎고 올라가는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처음 밖에서 만날 때 그가 내뱉은 평범한 말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요.’ 란 말이 왜 그녀에게 그렇게 강한 울림을 주었는지는 어릴 때 마을버스 사연을 읽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요한과 헤어진 후 마이소르에 요가 수련을 하러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도피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사를 내뱉는 대상은 처음 도착한 호텔의 숙박을 도와준 케이다. 읽다 보면 케이와 진한 사랑을 나눈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만난 시간은 15일 정도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다. 단지 필요한 순간 그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유부남에, 1년의 반을 여행으로 보내는 그다. 사랑의 밀어를 나눌 정도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나가지 못하는 요가의 진도 등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아픔을 느낀다.


삶에서 깨달음은 잠깐 왔다 간다. 그 깨달음을 붙잡고, 파고들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힘들다. 마지막에 메이가 차문디 언덕을 걷고 기어서 올라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믿지 못했고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이다. 자신의 곁에서 울고 있는 신이다. 고모의 자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도 얻는다. 그 결과 중 일부가 그녀의 과거사다. 자신의 삶을 순서에 상관없이 적고 적는다. 이것으로 그녀의 허기와 폭식과 아픔이 해소되었을까? 모른다. 어쩌면 일부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삶은 그 순간을 넘어가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나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사족처럼 하나 덧붙이자면 케이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한 여행작가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말에 그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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