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현 지음 / 마카롱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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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대상 수상작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읽은 수상작 중 개인적으로 최고다. 약간 촌스러운 듯한 제목이지만 이 한 단어가 우리 사회의 가족과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사제 폭탄이 하나 ‘펑’하고 터지면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덮어두고, 묵혀두고, 숨겨둔 감정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고, 사람들은 익명이나 관심이란 가면 뒤에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퍼트린다. 이 소문과 거짓말들도 폭발의 부산물이다. 읽다 보면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들이다. 피해자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들의 시선과 말들은 그 가족을 다시 한번 더 ‘펑’하고 터트린다.


평범한 5인 가족. 그냥 평범하다고 했지만 아빠는 대학교수, 엄마는 약사, 쌍둥이 큰딸은 보조 방송작가, 아들은 스타트업 공동대표이고, 늦둥이 막내는 고등학생으로 강남의 부유한 아파트에 산다. 남들이 보기엔 부러워 보이는 집이지만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면 보통 사람들의 삶보다 결코 낫다고 말하기 힘든 삶들이 드러난다. 비교 당하는 것이 싫어 아등바등 살아온 쌍둥이 남매, 대학생 때 임신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엄마와 그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산 아빠, 친구가 생일날 장난처럼 불러준 노래 ‘왜 태어났니’에 공항장애에 빠진 막내 등의 사연과 감정 등이 폭발한다. 여기에 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음모론 등이 불을 끼얹는다.


배송된 택배 상사를 집안에 들여놓고 막내 승아는 옥상에 올라간다. 잠긴 자물쇠는 유튜브 영상을 따라해 푼다. 그 사이 방송작가 아라는 공모전에 작품을 힘겹게 제출한다. 33살, 독립을 못하고 부모님께 빌붙어 산다. 자신이 한심하다. 그러다 사제폭탄이 터진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문과 집안이 엉망진창이다. 가까운 코엑스에서 인공지능 박람회가 열리면서 테러의 가능성이 주목받는다. 대테러부대와 인근 경찰서가 출동해 가능성을 조사한다. 사건이 생기면 최근에는 어디에나 등장하는 1인 미디어 유튜브도 등장한다. 여과되지 않은 정보들이 흘러 넘치고, 피해자 가족들은 다양한 언론(?)에 의해 재단된다. 폭탄 테러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의심하는 시선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읽으면서 분노한다.


처음에는 방송작가가 의심을 받고, 그 다음은 막내 승아가, 다음은 쌍둥이 현이, 대학교수인 아빠도, 약사인 엄마도 폭탄테러범으로 의심받는다. 경찰의 조사가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향하면서 사람들의 의심도 그들에게 향한다. 작가는 이 다섯 가족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폭발사건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 인터뷰와 경찰의 시선을 넣어 이야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이 인터뷰는 보통 이 가족들의 지인들이 등장하는데 자신의 상황에 따라, 이해에 따라 내용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악의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기에 더 과격하다. 어쩌면 그들도 경찰의 수사 정보 누출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누가, 누구에게, 왜 사제 폭탄을 보냈는지 의문이 생긴다. 범인이 빨리 잡히면 이 가족들이 온갖 음모론에 희생당하는 일이 사라질 텐데 수사가 더디기만 하다. 테러의 가능성이 지워지면서 일선 경찰서가 수사를 하는데 단 두 명이 전담한다. 이 형사들이 이 가족들을 대하는 장면을 보면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 없다. 실제 경찰이 이렇게 접근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말과 시선은 이 가족 중 한 명이 저지른 사건처럼 단정하는 모습이 살짝 보인다. 모든 가능성을 지워가는 것이 경찰의 일이라고 하지만 그 피해가 피해자 가족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경찰과 언론 등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서 왜 이가족은 변호사를 선임해 수많은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확대재생산하는 사람들을 고소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뭐 읽다 보면 이 콩가루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그런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에는 폭탄 테러란 소개에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그 가족들의 비밀이 드러난다고 해도 폭발이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숨에 읽으면서 범인 찾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작가는 부러울 것 없는 듯한 가족의 비밀을 터트리고,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와 경찰의 수사 정보 누출 등을 유기적으로 엮어 이야기의 밀도를 높였다. 부분적으로 가독성이 좋지만 읽으면서 이 가족이 처한 상황과 읽으면서 느낀 감정들 때문에 잠깐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이야기는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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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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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킹의 신작이다. 다른 필명으로 이전에 낸 소설을 최근에 읽었지만 근래 나온 책을 읽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오래 전 킹의 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것도 오래된 일이다. 산 책들이 쌓여만 간다. 그리고 옛날에 읽었던 책들이 재간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약간 안도한다.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킹의 중편집은 <별도 없는 한밤에> 이후 처음이다. 책소개를 보니 닐 게이먼은 “그의 마지막 중편집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 글이 보인다. <피가 흐르는 곳에>가 마지막 중편집이 아니길 바란다.


이번 중편집도 네 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는 빌 호지스 시리즈 속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이다. 이 시리즈도 구해 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 이 중편을 읽으면서 읽어야지 하는 강렬한 압박을 느꼈다. 추리소설가로 첫 발을 내딛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아껴(?)둔다.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의 소장이다. 빌 호지스가 죽은 후 탐정사무소를 인계 받은 것 같다. 이 부분을 알려면 빌 호지스 시리즈를 읽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으로 보려고 하는데 속보가 나온다. 중학교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왠지 모르게 뉴스 특보를 전하는 체트 온도스키란 기자가 눈에 밟힌다. 이 체트가 그녀가 경험한 이방인과 관계된 것 같다고 느낀다.


이방인 부분을 읽으면서 빌 호지스 시리즈가 추리소설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녀가 경험한 이방인은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힘을 키운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체트는 가장 강렬하게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킹 특유의 세밀한 감정 묘사와 더불어 홀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뒤섞이고, 자신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다렸기에 그녀와 같은 의심을 품은 사람을 만난다. 참혹한 사건 현장마다 있었던 그의 존재를 그녀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 있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죽일 때 생기는 문제 등은 서로 엮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홀리는 다르지만 말이다. 가장 긴 분량인데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이 중편만 얇은 책 한 권으로 낼 수 있을 정도인데 이렇게 묶여 나왔다니 기쁘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아이폰1과 관련 있다. 스마트폰으로 처음 세상에 나와 우리의 삶을 바꾼 그 물건 말이다. 주식 투자가 해리건 씨가 글을 잘 읽는 크레이그에게 소설을 읽는 알바를 시킨다. 그리고 매년 복권을 선물로 주는데 이 복권 중 하나가 3천 불 당첨된다. 이 돈으로 그렇게 원했던 아이폰을 사고, 하나 더 사서 해리건 씨에게 준다. 착한 아이다. 신문으로 세상의 정보를 받던 해리건 씨는 이제 손 안의 인터넷으로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이때 흘러나온 몇몇 회사 이름은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다. 해리건 씨가 죽은 후 이 아이폰을 관에 넣는다. 자신이 어렵고 힘들 때 전화해서 해리건 씨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말한 인물이 죽은 채 발견된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전화 한 통, 신세 한탄 한 번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니.


<척의 일생>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3막에서 1막으로. 전 세계가 대규모 지진과 재앙으로 종말을 향해 가는 와중 광고판에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란 광고가 나온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나오는데 척은 누굴까? 3막의 마지막에 척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척의 삶이 하나씩 나온다. 회의 갔다가 버스킹에서 신나는 춤을 추는 척,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은 후 그의 작은 삶과 이후의 삶과 이어지는 추억 등. 마지막 장면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다.


<쥐>는 창작과 생명 거래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편만 여섯 편 발표한 작가가 어느 날 장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 장편을 집필할 장소로 가면서 생긴 일을 재밌게 풀어내었다. 한적한 시골 통나무 집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구성을 받아쓰기와 같은 속도로 집필하는데 심한 독감과 태풍까지 겹치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이때 쥐가 나타나 거래를 제안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때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작품은 완성된다. 소설 창작을 둘러싼 어려움을 악마의 계약과 엮었는데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지, 그 어려움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중편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한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나온다. 그리고 작가 후기에 네 편의 아이디어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라고 느꼈던 것이 거짓이라니 역시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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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틴더 유 트리플 7
정대건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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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나오는 트리플 시리즈 7권이다. 이 시리즈를 이번에 처음 읽었다. 단편소설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시리즈 다른 책들도 같은 구성이다. 많은 분량이 아니라 마음먹고 읽으면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단편들도 상당히 가독성이 좋은데 나의 시선을 끈 이야기는 에세이다. 자신의 삶을 간결하게 요약해서 들려줘서 재미있었다. 이 에세이를 읽다 보면 앞에 나온 단편들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제목을 보고 늘 착각하는 <GV 빌런 고태경>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그가 영화 쪽으로 가게 된 이유를 읽으면서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걸은 그가 살짝 부러웠다.


표제작 <아이 틴더 유>는 ‘I SEOUL U’를 패러디한 것이다. 틴더라는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난 남녀의 가벼운 관계를 다루는데 나에겐 낯선 세계다. 이런 앱에 무지한 나는 검색까지 해서야 실재하는 앱이란 사실을 알았다. 호의 신체 사이즈와 나이가 첫 문장인데 읽을 때 무심코 본 2km가 나중에는 더 늘어난다. 이 늘어난 거리가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한다. 틴더로 만나 하룻밤을 보내지만 연인이 아닌 서로의 스페어가 된 이들이 더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연애에서 상처받고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내게는 낯설게 다가오지만 현실은 이런 만남도 많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 해소하려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것은 그 외로움을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기 전에>는 10년 전 다큐 영화로 인지도를 얻었지만 그 이후 만들려고 한 영화가 무산되면서 삶이 뒤엉킨 승주의 이야기다. 아내와 이혼하고, 10년만에 그 영화를 재상영하는 부산으로 어머니와 내려와 겪게 되는 이야기를 간결하지만 뛰어난 심리 묘사로 풀어낸다.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데 서로가 그 선을 넘지 않기에 연락도 만남도 가능하다. 읽으면서 부산에서 패러글라이딩이 가능하다는 부분에 놀라고, 10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뀌고 성숙해지고 현실적으로 변한 승주의 모습에 살짝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 감정의 일부를 날려버린다.


<멍자국>도 데이트 앱에서 만난 서아와 영선 두 사람의 이야기다. 서아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이 둘은 과거의 기억과 추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남편과 전 여친의 흔적은 이들의 이야기와 만남 속에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둘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들은 과거에 묶여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머뭇거리고, 한 발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 가벼운 1박2일의 여행과 소소한 행동이 잠시 마음의 문을 열지만 그때뿐이다. 거리를 유지했기에 가능했던 만남, 그 거리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두 남녀. 삶은 언제나 기대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들에게 멍은 “아픔에 대한 몸의 기억”일 뿐이다. 과거가 멍자국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흉터만 남는다. 그리고 이 단편 속 영선도 영화판에서 일했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세 남자들이 모두 경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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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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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이다. 한때 이 작가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당시는 한참 책들을 읽을 때라 사고, 읽고를 정말 열심히 했던 시절이다. 최근 떨어진 체력과 시간 부족과 노안 등의 문제로 이전처럼 책들을 읽지 못한다. 이런 저런 집안 행사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물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게으름이다. 집에 콕 박혀 책을 읽으면 되지만 그냥 뒹굴거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아이 핑계도 살짝 가능하다. 예전에 재밌다고 한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뚝딱 읽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시간도 체력도 되지 않는다. 물론 얇은 책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이 책처럼 두껍다면 불가능하다. 실제 이 책은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두툼하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모리미 토미히코는 글을 재밌게 쓴다. 읽지 않고 고이 모셔둔 책들(당연히 여러 권이다) 외에 읽은 책들은 모두 만족했다. 재간되어 나온 책들을 보면서 읽었거나 사놓은 책이란 사실에 괜히 뿌듯해하지만 늘 그렇듯이 기약할 수 없다. 이 책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재밌다는 첫 감탄을 내뱉었지만 두툼함에 다 읽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티브로 가상의 소설 <열대>를 만들어내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이야기의 힘과 재미에 빠져 상당히 허우적거렸다. 작가는 <아라비안 나이트>란 제목보다 <천일야화>란 제목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등장인물 중 한 명도 천일이란 한자로 ‘지요’란 이름을 붙였다.


아주 오래 전 범우사 판 <아라비안 나이트> 10권을 모두 읽은 적이 있다. 이 책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찾지를 못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가 알고 있던 몇 가지 아랍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의아해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리고 천 일과 천 편을 혼동했던 것도 떠오른다. 실제 이야기가 전개된 날짜도 천 일 밤이 아닐 것이다. 이런 기억들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천일야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 방식들이 더 중요하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또 낳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향연들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읽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후대의 편집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은 작가다. 모리미가 등장해 오래 전 읽었던 <열대>란 소설을 떠올린다. 재밌어 아껴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책이 사라졌다. 끝까지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의 기억이 지금 읽고 있는 <천일야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러다 한 독서회에 참석해 한 참석자가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끝을 보고 싶어하는데 그녀가 말한다. 아무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그녀가 <열대>를 만나기 전과 후로 넘어간다. 그녀가 일하는 가게 손님을 통해 <열대>란 책의 내용을 복원하고자 하는 모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의 기억을 통해 책 내용의 일부를 건져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의 편지로 넘어간다. 편지의 내용은 <열대>의 작가를 알고 있던 지요 씨를 찾아가 생긴 기묘한 이야기들이다. 이 여행을 통해 <열대>와 관련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한다. 그 실체가 드러날까 하는 순간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번 이야기는 판타지 속 상황으로 흘러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해저 2만리>와 <신밧드의 모험> 등과 엮여 펼쳐진다. ‘창조의 마법’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파고들고, 이 판타지 속에서 <열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또 다른 단서가 나온다. 마왕의 정체는 너무나도 분명한데 기억을 상실한 인물의 정체는 추측만 가능하다. 여기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솔직히 이 소설에서 내용을 요약하거나 그 이야기들의 실체를 분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누구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는 <열대>처럼 개개인의 독자들은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기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왜곡하고, 저장한다. 다시 그 책을 읽었을 때 과연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책인지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사실과 그 때 놓친 이야기들이 눈에 더 들어올 것이다. 읽었다는 사실과 가장 강렬한 기억은 남겠지만 말이다. 수수께끼의 소설 <열대>의 존재를 통해 <천일야화>와 이야기란 소재를 개인의 경험과 기억 등과 멋지게 연결했다. 읽으면서 다다미 넉 장 반이 나올 때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재밌고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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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로리 - 새장 밖으로 나간 사람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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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버드 박스>를 보지 않았다. 그 제목에 대해서는 어딘가에 자주 본 듯한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버드 박스>를 기억하고 있고, 소개글이 매혹적이라 이 소설을 선택했다. 약간의 지루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쓸 데 없는 기우였다. 몇 곳에서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지만 아주 잘 읽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속도감이었다. 보기만 해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기존에 본 영화 등의 이미지와 결합해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떤 이야기는 읽으면서 가슴 한 곳을 쥐어짜는 듯한 공포와 슬픔을 느끼게 했다.


두 아이들과 맹인학교 머물던 맬로디는 사람들이 미친 것 같은 상황을 듣고 그 곳을 벗어난다. 그 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먼 길을 떠나 그들이 정착한 곳은 여름캠프다. 근처에 사람들이 없다. 항상 눈을 가린 채 힘들게 산다. 맹인학교를 떠날 때 여섯 살이었던 톰과 올림피아는 이제 열여섯 살이다. 사춘기를 보내는 시간이다. 이 아이들의 청각은 구세계의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늘 안대를 한 채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크리처 때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미친다. 맬로리의 언니도 그것을 본 후 가슴에 가위를 꽂고 죽었다.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연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이 자살이다.


톰은 도전적이다. 크리처에 대한 두려움에 안대를 하고 온몸을 가린 채 생활하는 맬로리는 톰이 시도하려는 행위가 아주 위험해 보인다. 당연히 말린다. 톰은 맬로디가 주입한 공포에 짓눌려 있지만 반발감도 가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 남자가 캠프에 온다. 그는 인구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는 맬로디는 이 남자를 믿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이 기록한 자료를 문 앞에 둔 채 떠난다. 그리고 올림피아가 이 기록 중 일부를 읽고 맬로디의 부모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에 눈이 없는 기차 이야기를 읽는다. 모두가 눈을 가린 세계에 기차가 다닌다고? 부모님이 살아 있다고? 맬로디는 다시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눈이 없는 기차는 창문을 모두 가린 기차다. 승객들이 창밖을 볼 수 없다. 물론 객차의 사이를 지날 때 밖을 볼 수는 있다. 만약 그때 크리처를 본다면 미친다. 정해진 선로를 달리는 기차이기에 운행이 가능하다. 선로에 물건 등이 놓여 있으면 치워야 한다. 이 기차의 속도는 현재 우리가 타는 기차의 속도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그 속도를 생각하고 읽다 보니 맬로리 일행이 기차에 탈 때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아주 느리다. 이 느림이 눈을 뜨고 살고 있는 우리에겐 느리지만 눈을 가린 그들에게 엄청난 속도다. 캠프에서 기차역까지 50킬로미터를 가는데 3일이나 걸린 것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 가능할 것이다.


정해진 곳을 오고 가는 기차 안에서 승객들 중 일부는 안대를 벗는다. 창밖을 보는 행동은 아주 위험하기에 하지 않는다. 맬로리는 안전한 기차 안에서조차 안대를 벗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를 완전히 사라잡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닿는 것도 두려워한다. 혹시 크리처가 맨살에 닿았을 때 미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눈을 가린 채 그들이 캠프에서 살 때 줄은 잡고 이동한 것을 생각하면 낯선 곳은 아주 위험하다. 안대를 벗어라는 기차 운행자의 요구도 무시한다. 처음에는 가명을 말했다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 듣고 진짜 이름을 말한다. 상실의 고통과 공포가 연대감을 형성한다.


인구조사원이 남긴 기록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맬로리가 캠프를 떠나게 했고, 톰과 올림피아는 다른 생존자 소식에 매혹된다. 톰이 매혹된 인물은 크리처를 봐도 자살하지 않았다는 여성이다. 그녀가 머무는 곳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주장은 아주 매력적이다. 톰이 생각할 때 억압적인 엄마의 주장에 대한 반발심이 후반부에 긴장감을 높인다. 엄마가 주입한 공포가 조금씩 퇴색한다. 어른에 대한 반발심과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엮여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가진 의문 중 하나가 풀렸지만 다른 의문도 역시 존재한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에 대한 것이다. 전편 <버드 박스>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기는데 영화라도 먼저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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