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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정말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진 SF소설이다. 2020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 등을 모두 수상했다. 이 수상 이력을 보고 SF팬이 그냥 지나가기는 힘들다. 집필과정도 재밌다. 두 작가가 각각 소설 속 주인공 ‘레드’와 ‘블루’를 맡아 서신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이 부분은 사실 문장의 차이 등을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 번역을 한 사람이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미묘한 차이를 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첫 장의 문장을 읽고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은 흥미로운 설정을 몇 개 풀어놓았다. 시간 여행, 다중 우주, 시간을 넘나드는 편지, 두 적대적 집단 등이 서로 엮여 있다. 레드와 블루라고 부르는 두 존재도 서로 적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블루가 레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시간의 가닥을 타고 옮겨 다니면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한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서로가 보낸 편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 이 소설 속 편지는 종이만이 아니라 빛과 나무와 열매의 씨앗, 찻잔 속 찻잎 등 다양하다. 이들이 편지를 교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처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기에는 이 둘은 실력이 너무 뛰어난 스파이들이다.
소설 속 두 진영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가든과 에이전시로 대변되는 두 진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개글에 따르면 가든은 생태학적인 조직이고, 에이전시는 기계적인 조직이다. 가든 이야기를 듣다 보면 판타지 속 세계수가 떠오르고, 에이전시는 인공 배앙된 인조인간이 연상된다. 잘못 이해한 것일까? 솔직히 이 구분은 소설을 읽다 보면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각각 지닌 특성이 이야기 속에서 조금씩 흘러나오지만 이 특성보다 더 중요한 내용들이 편지 속에 풀려나오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전에서 인용한 문장들과 점점 자라라는 감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이 강력한 두 스파이는 서로를 인정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다. 왜 SF 로맨스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책 표지에 실타래가 나온다. 소설 속에서 두 진영은 시간의 가닥을 옮겨 다닌다. 시간의 가닥을 오르고 내리는 묘사가 나오는데 솔직히 이 장면을 이미지 하는데 힘들었다. 쉽게 생각하면 거미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장면인데 시간의 가닥이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혹시 생각한대로일까? 두 스파이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교환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수없이 많은 시간의 가닥과 엄청난 공간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이지 않은가. 시간의 가닥과 장소는 이들의 절실한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배경일 뿐이다. 과거의 공간이나 미래의 공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스파이로 임무에 충실했던 둘이 편지 교류하면서 더 알게 되는 것은 적이나 자기 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서로가 편지로 감정을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인식하지 못한 자신을 더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를 더 알고 싶어 한다. 이 과정에 자기 편의 정보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다. 감정은 이성을 이해할 수 없는 방향을 이끈다. 소설의 작은 재미 중 하나는 이 두 스파이가 활약하는 공간과 시간이다.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이 나오고, 카이사르 암살 현장에서 움직이고, 19세기 런던의 조용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신화 속 공간인 아틀란티스 대륙은 또 어떤가. 이 역사 속 장면에서도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시간의 가닥에 매달려 다른 상황을 연출한다. 멋지다.
묵직하고 간결하게 표현된 장면들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집중을 요구한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낯선 세계와 연출로 머릿속 조립이 더디었다. 시간의 패권을 다툰다고 하지만 그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 부분에서 소설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이 두 작가가 만들어낸 두 존재, 레드와 블루의 편지는 원작은 어떻는지 모르지만 한국판에서는 두 색깔로 표기되었다. 개인적으로 푸른 색 글씨가 더 읽기 힘들었다. 그리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편지를 보고 이전에 읽었던 소설 몇 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소설은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편지가 교류한다. 언제 시간이 난다면 다시 읽으면서 내가 놓친 이야기들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