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가족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4
김하율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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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낯선 작가다. 최근 낯선 작가들의 단편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앤솔로지를 통해서인데 가끔 그들의 단편집을 읽는다. 이 앤솔로지들의 특징은 장르소설이란 점이다. 오래 전에는 쉽게 만나볼 수 없었던 여러 작가의 단편모음집이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특정 작가의 단편이 궁금해서 선택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작가의 단편에 눈길이 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좋은 현상이다. 사실 이 낯선 작가의 단편집에 눈길이 간 것도 sf장르의 앤솔로지에 실었다는 글을 본 다음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취향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모두 일곱 편이 실려 있다. 황당하고, 기발하고, 웃기고, 슬프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란다. 설정 자체가 황당해서 뭐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심어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표제작인 <어쩌다 가족>과 <판다가 부러워>이다. 이 두 작품은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전세난은 소재로 삼고 있고, 마지막 장면은 예상하지 못한 임신 상황을 만들면서 마무리한다. 결국 이 임신이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한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축하받아야 할 임신이 상황에 따라 결코 축복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지만 보는 순간 이 웃픈 장면이 가슴에 푹 박혔다.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둘 있다. 하나는 <마더메이킹>이고, 다른 한 편은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이다. <마더메이킹>은 화학반응으로 모성을 만들어내겠다는 회사의 상품명이자 모성애에 대한 현실적 관찰을 다룬다. 실험 단계에서 이 주사는 개발자인 남성에게 주입된다. 그 결과는 예상한대로다. 모성에 대한 환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돌아본다.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는 장기이식과 엄마와 딸 사이에 낀 엄마의 이야기다. 뇌사로 판명되면 딸에게 장기 이식이 가능하다. 무능력한 아버지와의 일화가 주로 나온다. 그럼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해 정신없이 일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낯선 이름’이라고 했을 때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엄마는 이름보다 엄마란 호칭이 더 익숙하다.


<바통>의 바통은 우리가 릴레이를 할 때 주고받는 그것이 아니다. 은박지에 포장된 김밥이다. 취업난과 생계 문제가 엮이고, 그 사이에 연인의 배반과 실직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다. 자신들이 바라는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하철 역사의 풍경 속에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발견>은 한 코피노의 아버지 찾기에서 시작해 죽이기로 끝난다. 살인 모의는 코피노 미셸의 생각이 아니다. 이복누나, 아니 이복언니의 생각이다. 이 아버지란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는 장면들을 보면서 나의 윤리의식을 잠시 내려놓았다. 마지막 아버지의 한 마디와 사기 경력자의 의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피도 눈물도 없이>는 예상을 벗어난 장면의 연속이다. 400년 만에 부활한 흡혈귀가 처음 찾아간 곳이 선지국집이라니 기발하다. 하지만 이 선짓국을 즐겨 먹는 흡혈귀의 별명은 선녀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사업 실패 등으로 사채를 쓴 알바다. 서빙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선녀에겐 신선한 피를 일정한 기한 동안 공급한다. 문제는 부쩍 자주 찾아오는 사채업자다. 선녀의 능력이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나의 예상을 넘었다. 아주 멋진 블랙코미디다. 이 간결한 단편 속에 세상의 쓴맛을 가득 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유쾌하게 읽었지만 씁쓸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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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는 도시 - 세상 모든 사랑은 실루엣이 없다
신경진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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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 작가가 낸 책이 세계문학상 수상작 <슬롯>이 유일한 줄 알았다. 7년만의 신작이란 소개가 기억에 혼선을 불러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 개념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 책도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다. 늘 그렇듯이 인터넷서점에서 작가로 검색하니 낯익은 표지가 보인다. 이 소설이 이 작가의 처음 읽는 소설이 아니다. 저질 기억력이 책 내용까지 기억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쓴 글을 보니 작은 기억이 떠오를 뿐이다. ‘희망이 있다면 사랑뿐이다’란 문장을 적어 놓은 것이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오래 전 <결혼은 미친 짓이다>란 소설과 이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었다. 원작은 이만교, 영화감독은 유하였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랑과 결혼의 분리, 사랑의 유효기간 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때만 해도 결혼은 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더 각박해지고 더 힘들어지면서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 자체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도 늘어났다. 결혼 연령도 많이 늦어졌다. 나도 여기에 일조한 사람이긴 하지만. 작가는 이런 세대의 변화를 소설 속에 압축하고 녹여내었다.


일곱 명의 남녀가 나온다. 60년대의 영임과 하욱 부부에서 시작해 21세기 한나와 태영 커플까지 3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90년대의 정우와 2010년대 한나다. 실제 이 두 사람이 교차하면서 현재 자신들의 삶을 연애, 결혼, 섹스 등과 엮어 풀어낸다. 6~70년대 고도성장기에 조금만 이재에 밝았다면 부동산으로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부동산으로 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욱은 명문대 출신 쌍둥이 형 상욱의 도움으로 언론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영임과 결혼 첫날 이 사실을 말하고 그녀의 그늘 밑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그늘 밑이라고 해도 ㄱ 시절 약간의 권력을 가진 남자들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 낯익은 과거의 한 모습이다.


87학번 정우는 소위 운동권이다. 과후배의 초청으로 압구정으로 넘어가 세 명의 여성들을 만난다. 그 중 하 명이 영임과 하욱 부부가 형의 딸을 입양해 키운 태윤이다. 처음 태윤은 영임의 사랑을 덤북 받았다. 이 사랑은 영임이 임신해 아들을 낳으면서 식모처럼 변했다. 공주에서 부엌데기로의 추락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녀의 미모에 혹하거나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우가 그녀에게 빠진다. 그리고 차인다. 이 시기는 압구정 오렌지족의 시대다. 그들의 문화 일부가 나온다. 학생 운동으로 수배자였지만 졸업 후 그는 군대에 간다. 강원도 전방에서 근무하는 그를 면회 온 여성이 있다. 바로 그때 앉아 있던 세 명 중 한 명인 은희다. 복수의 감정을 담고 그를 만나러 왔다. 인연은 이상하게 엮이고 꼬인다.


한나는 미술계 큐레이터였다. 자신보다 어린 남자 준희와 동거한다. 그런데 이 준희란 남자가 상당한 마마보이다. 문어발 연애를 한다. 그녀가 한 말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실천한다. 고객의 성희롱에 가까운 손길에 주저할 때 다른 화가의 도움으로 벗어난다. 그녀가 이 갤러리에 취직하게 된 데는 한 유명 화가의 도움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과신한다. 사표를 던진 후 현실을 마주한다. 삶이 얼마나 힘든 지,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자본으로 너무 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자신에게 손길을 벋친 사람도 있다. 미술품 중개로 상당한 돈을 챙긴 그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실험하고, 나아간다. 그리고 임신한다.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 낳고 나서야 그 아버지가 떠오른다.


정우와 한나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전 세대와 그 세대의 삶이 조각처럼 드러난다. 정우가 과외로 돈을 벌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시대는 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기자가 되지만 적성에 맞지 않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관계가 자신을 옭아맨다. 이 소설에서 정우와 한나가 갈리는 지점은 결혼 유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함께 할 동반자에게 기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우는 다른 386세대처럼 뻔뻔하게 자신의 욕심만 채우지 못하고 방황한다. 힘든 길을 선택했다. 한나는 선택의 순간 좋은 친구가 있었고, 생각과 행동이 맞는 파트너를 만났다.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결혼의 다른 모습은 한나 커플이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는 과대 포장된 제도 찬양에 일침을 가한다. 결혼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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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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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밤의 피크닉>으로 입문한 후 여러 작품을 읽었지만 취향을 조금 타는 작가다. 한참 책을 사 모을 때 상당한 숫자의 책을 집에 쌓아두었는데 늘 그렇듯이 묵혀만 둔다. 그 책들이 이제 재간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시간에 대한 나의 감각이 흐려진다. 온다 리쿠에 대한 설명 중 하나가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란 것이다. 내가 읽은 소설에서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이번 작품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산타와 그 형 다로가 운영하는 것이 골동품점이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오래된 건축물의 크지 않은 물건인 문고리, 맹장지, 들창, 난기둥, 문 등의 자잘한 의장이 들어간 것이다. 읽으면서 내가 무심코 보고 지나간 것, 기억 속 장소와 물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야기의 문을 여는 부분에서 스키마와라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작가가 만든 용어다. 틈 사이에 존재하는 아이라는 의미다. 동창회에서 어릴 때 산타와 함께 걷던 여자를 본 동창이 한 말을 듣고 형이 만든 용어다. 산타에겐 여자 형제가 없기에. 그리고 산타란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어식 표기다 보니 한자의 발음은 같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산타는 散多다. 직관적으로 산타클로스를 떠올린 사람이 많겠지만 말이다. 재밌는 부분은 둘째란 의미를 가진 지로란 이름의 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의미가 모호한 주인공의 이름의 기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책 마지막에 나오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발음과 의미의 차이를 여러 곳에 녹여내었다. 대표적으로 산타가 있고, 스키마와라시로 부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미라고 부르는 소녀 유령(?)이 있다. 한자 문화권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이 마미는 철거 예정인 건물에서 나타난다. 당연히 위험한 공간이다. 여기에 산타에게 초능력을 부여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인데 늘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종류도 아니다. 이야기가 진행함에 따라 이 능력이 발현하는 순간은 많은 경우 타일과 관련되어 있다. 오래된 건물에서 떼어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타일을 만질 때 알 수 없는 환영을 마주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대단한 비밀인 것 같지만 긴박한 스릴러와는 거리가 있다.


작가 취향의 집대성이란 안내글이 보인다. 이 소설 속 산타가 보고 맛보고 경험하는 공간 등이 작가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한다. 여기에 판타지와 미스터리 등을 버무려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상당히 가독성이 좋고,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조금은 느슨한 느낌이라 속도감을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읽다 보니 끝이다. 개인적으로 산타가 경험한 것들이 나의 추억을 불어오고, 주변에서 쉴 새 없이 바뀌는 건물들을 돌아보게 한다. 도시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 속에 과거의 모습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눈 여겨 본 부분이 바로 이 모습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속에서 다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기운을 통해 산타가 환상을 보는 것 같다.


늘 그렇듯이 무심코 표지를 보다 소녀의 모습이 눈길을 끌어 자세히 보았다. 소설 속에 묘사된 그 모습이다. 표지의 짙은 푸름이 이 무더운 여름에 나를 잠시 과거의 한 장소로 데리고 간다. 희미한 추억의 한자락이지만 왠지 아련하다. 형이 모은다는 문고리 등을 떠올리면 한때 나의 수집벽이 스쳐 지나가고, 골동품점을 저녁에 식당으로 운영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젠 사라진 관계들이 떠오른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약간의 어리둥절함도 느끼지만 앞부분에 깐 의혹들이 해결되는 상쾌함도 있다. 화려해지고 거대해진 공간과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낡고 작은 곳에 대한 아련함이 더 샘솟는 것 같다. 어릴 때 그렇게 큰 것 같았던 곳이 어른이 되어 보면 생각보다 너무 작은 것에 놀랐지 않은가. 어떤 대목에서는 일본 애니를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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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 개정판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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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나온 소설의 개정판이다. 사실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하기 전에 이 소설이 개정판이란 사실을 몰랐다. 작가의 신작이라고 생각했다. 구판 표지를 보니 왠지 낮이 익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만약 좋아했다면 그의 소설들을 더 읽었을 것이고, 더 열심히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로쟈가 한국 남성작가에 대한 글을 쓸 때 그를 포함하면서 부쩍 관심이 늘었다. 그냥 무심코 헌책방에서 싼 가격 덕분에 산 <생의 이면> 구판에 자주 눈길을 준 것도 이런 이유다. 뭐 그렇다고 읽을 정도의 열정도 시간도 현재 나에겐 없다. 산 후 바로 읽지 않은 책들의 가능성은 언제나처럼 늘 희미하다.


작가 이승우에 대한 평가가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좋다는 것과 그의 대표작에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관념에 천착했다는 것 정도가 아는 전부다. 그런데 목록을 펼쳐 놓고 보니 읽은 책이 한두 권 보인다. 사놓고 묵혀둔 책도 당연히 눈에 들어온다. 외국 작가의 책을 읽다 펼쳐든 그의 문장은 나의 예상과 달리 가독성이 아주 좋았다.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생각보다 더 빨리 읽었다. 개정판이란 정보 때문에 소설 속에 나온 몇 가지를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확인한다. 혹시 개정판에서 바뀐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이 둘을 천천히 비교할 능력도 마음도 없다 보니 건성으로 확인한다. 나의 기억이 잘못된 것으로.


말테와 로맹 가리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한 권을 내가 읽었고, 한 권은 읽지 않은 작품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에 대한 한승원의 지적을 보면서 왠지 크게 공감을 못한 것은 나에게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가 결핵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요양지를 바꾸게 된 이유를 보면서 그에 대한 평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화자는 편모 밑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가 요양을 온 곳에서 한 노교수의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꿈까지 이어지면서 그는 생부를 찾으려고 한다. 아빠 역할까지 완벽하게 한 엄마에게 물을 수 없어 외삼촌에게 묻는다. 그를 만나러 간다. 삼팔선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소설은 대부분 중요한 인물들을 이름이 아닌 익명으로 처리한다. 자신의 애인도 P라고 부르고, 생부인 듯한 사람도 약력으로 표시하지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그가 지역 선거에 출마했지만 기호로 표기한다. 그가 머문 여인숙 주인이 누굴 만나러 왔냐고 물을 때도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에서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려본다. 적극적으로 만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군사경계선에 가깝다 보니 사람들이 의심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의지가 분명하다면 바로 만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주저한다. 이 주저가 한순간 폭발하는데 그때 엄마의 이름이 나온다. 아버지의 역할까지 아주 잘 한 엄마의 이름이 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감정이 격해지고,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흔히 잊고 있던 아들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란 상상을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의심과 어리둥절함이 같이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상황은 그것과 다르다. 생물학적 아버지란 피할 수 없는 사실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근원적인 의문이 아버지 부재의 인식과 만나 일어나는 상황은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대입이 가능하다. 혈연을 확인하는 것보다 현재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 우선이다. 현재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 이런 현실에서 화자가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당연한 것이었던 존재가 누군가에는 부재였다는 사실과 나의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간 내어 집에 있는 책들 한 권씩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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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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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도심 재난 3부작> 중 한 권이다. 다른 두 작품은 <크래시>와 <하이-라이즈>다. 한참 책을 사 모을 때 <하이-라이즈>는 샀다. 그런데 <크래시>는 잘 모르겠다. 아마 오래전 본 영화 <크래쉬>의 이미지 때문에 사지 않았던 것 같다.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만든 영화는 상당히 난해했고, 개인적으로 취향과도 맞지 않았다.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지구 종말 시리즈>도 뒤늦게 알게 된 작가의 명성 때문에 어렵게 중고책을 구해 놓았는데 최근 개정판이 나왔다. 영화 <태양의 제국>의 원작자란 사실도 이번에야 제대로 인식했다. 알았다면 헌책방에서 샀을 텐데 조금 아쉽다.


지구 종말 시리즈에 대한 서평을 보면 난해하다는 글이 보인다. 내가 이 작가의 작품에 손이 쉽게 나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그렇지만 이런 유명한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다. 실제 이 작품을 읽으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았다. 내용은 가독성과 상관없이 상당히 난해하다. 이 난해함은 주인공이 이름 붙인 ‘교통섬’이란 공간에 떨어지고,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공감을 하지 못한 부분에서 비롯한다. 입체교차로에서 과속으로 떨어진 것은 이해한다고 해도 그가 그곳에서 차에 치여 다시 교통섬에 떨어지는 과정과 생존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 장면을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해석한다면 다르겠지만.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로빈슨 크루소>를 변주해 작품을 내놓았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재밌게 보는데 왜 소설로 재해석된 작품들은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재미를 주지 못할까? 존 쿳시의 <포>도 그런 작품 중 한 권이다. 영화는 오락성에 중점을 두었고 소설은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소설을 SF 장르로 구분한 것을 닐 게이먼의 해제를 읽기 전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SF 장르는 작가가 처음 단편을 쓸 때 유행하던 것들에 좀 더 가까운데 말이다. 밸러드식 내우주 SF란 것을 처음 접하는 나는 조금 혼란스럽다.


건축가 로버트 메이틀랜드는 런던 중심부 웨스트웨이 입체교차로에서 과속하다 가드레일을 박고 추락한다. 다행히 큰 부상이 없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높은 경사면을 올라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가면 상황은 쉽게 끝날 수 있다. 그런데 입체교차로란 곳이 항상 붐비는 공간이다. 과속으로 차들은 달리고, 어떤 차들은 그에게 상처를 준다. 결국 차에 치여 그가 교통섬이라고 부르는 곳에 다시 떨어진다. 다친 몸으로 높은 경사면을 올라가기 힘들다. 차만 다니지 사람은 주변에 잘 보이지 않는다. 교통섬의 사고난 차에 앉은 그를 본 운전자도 그가 자의적으로 그곳에 머문다고 생각한다. 의도하지 않은 고립과 생존의 문제를 마주한다. 그러다 고열에 시달린다. 그의 생존 활동을 지켜보던 두 남녀가 그를 돕는다.


이 두 남녀는 제인과 프록터다.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이렇게 두 남녀로 변주되었다. 프록터는 사고로 지능이 떨어지는 중늙은이다. 젊은 여성 제인은 서서히 그 정체가 드러난다. 이 둘은 자발적으로 이 교통섬에 머문다. 제인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다. 메이틀랜드에게 제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교통섬을 나가고, 차에 치인 부위들도 치료받아야 한다. 프록터는 트라우마 때문에 이 섬에서 나갈 마음이 없다. 외부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면 프록터는 갈 곳이 없어진다. 이 두려움은 메이틀랜드가 이 섬을 나가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음식을 구하는지 보여준다. 생존의 기반 중 하나가 음식물 불법 투기라니.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갈만큼 체력이 되지 않는 메이틀랜드와 결코 밖으로 나갈 마음이 없는 제인과 프록터의 짧은 동거가 이어진다. 읽으면서 그 상황을 떠올리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접근했지만 생각보다 가독성이 좋았다. 로빈스 크루소 변주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 신선했다. 밸러드식 내우주 SF는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난해하다. 이 소설 속 상황과 장면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한데 왠지 그 이야기가 매력적이지는 않다. 잘못 이해하는 것일까? 다만 상황과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되면서 생각의 꼬리를 문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제인이 교통섬을 나가 너머 쉽게 차를 얻어 타는 장면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프라이데이는 과연 누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식적으로만 해석하기엔 상황 등이 고전과 너무 다르다. 다른 작품에 대해 ‘도전’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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