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와 폐허의 땅
조너선 메이버리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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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좀비를 소재로 한 청소년 소설이란 소개에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툼한 분량과 좀비에 대한 색다른 해석 때문에 가벼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소설 속 좀비는 기존에 영화 등에서 본 좀비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히 좀비만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좀비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여기에 열네 살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은 로맨스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과 성장을 같이 다루면서 단순한 오락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뛰어난 가독성과 멋진 설정과 구성은 어느 순간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첫 번째 밤 이후 좀비가 주변 사람들을 감염시켰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터무니없는 행동을 한다. 세상은 좀비로 가득하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좀비 가득한 도시를 떠나 자신들만의 안전지대를 건설했다. 이 마을 외곽은 좀비들로 가득하다. 외부의 위험이 있지만 사람들은 방벽을 쌓아둔 채 삶을 이어간다. 베니는 열다섯이 되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 만약 직업이 없다면 배급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의 형 톰은 좀비 사냥꾼이다. 베니는 형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고, 겁쟁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능력을 무시한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밤 집에서 탈출할 때 기억 때문이다. 여러 가지 직업을 체험하지만 그에게 맞는 일이 없다. 결국 형의 조수가 되기로 한다.


톰은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좀비 사냥꾼이라고 말한다. 어린 베니가 볼 때 가장 멋진 좀비 사냥꾼은 찰리 등이다. 그가 좀비 지대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말할 때 베니는 그를 우르러본다. 형의 조수가 되어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형이 하는 일을 보게 된다. 아기 때 기억 때문에 좀비를 없애야만 할 대상으로 인식하던 베니가 좀비가 누군가의 가족이란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이 과정에 이 소설 속 좀비가 어떤 모습인지 드러난다. 좀비들은 느릿하게 움직이고, 물리지만 않는다면 좀비가 되지 않는다. 공포에 휩싸이지만 않는다면 좀비 한둘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주변에 좀비들이 있음에도 홀로 혹은 몇 사람이 모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으면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그래서 영면을 위해 죽은 자를 슬리버를 사용해 다시 죽인다.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톰이 하는 일은 좀비를 죽이는 일이지만 무차별 살해는 아니다. 좀비를 피해 도망친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 그 좀비 가족의 영면을 바란다. 좀비 초상화를 들고 그들이 예전에 살았던 곳에 가서 가족의 편지를 읽어주고 죽인다. 영결식이다. 좀비 사냥꾼 톰이 다른 좀비 사냥꾼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이런 것을 본다고 해서 금방 지금까지 쌓였던 감정들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작가는 이런 감정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작은 마을에서 친구들이 아는 아이와 연인이 되지 않겠다는 약속은 자신을 옭아맨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닉스가 그에게 다가오지만 이 약속 때문에 한 번 거절한다. 그리고 좀비 카드 속 한 여자 아이가 그의 시선을 끈다. 좀비 사냥꾼 찰리는 이 카드를 베니에게 빼앗으려고 한다. 형이 나타나 험악한 상황은 벗어난다. 하지만 이 일은 후반부에 벌어질 추격과 함정과 반격의 시발점이다. 비가 오고 천둥이 크게 치던 밤 방벽이 무너진 순간 은밀하지만 악의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자신의 악행을 영원히 숨기길 바라는 찰리 일행이 벌인 살인과 납치 사건이다. 이후 벌어지는 빠르고 강렬한 액션은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친다. 그 속에 작은 로맨스도 하나 살짝 집어넣었다.


이 소설 속 좀비를 보면 한국형 좀비들에 비해 너무 느리고 무력해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존재는 이 좀비가 아니라 인간이란 사실을 작가는 아주 잘 보여준다. 느린 좀비를 묶은 채 놀리고 공격하고 살해한다. 수천 좀비를 포박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대표적인 악행으로 아이들과 좀비가 싸우게 하고, 이 처참한 광경에 흥분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번다. 게임랜드다. 좀비 카드 속 사라진 소녀도 그곳에 있었던 아이다. 자신들의 악행이 마을에 알려지지 않길 바란다.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라진 소녀의 행방은 그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폭풍 치던 밤에 일어난 사건은 여기서 비롯했다. 그리고 현재의 삶을 유지하려는 마을 사람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베니 등이 대비된다. 에필로그는 또 다른 영결식이자 성장이다. 색다르고 멋진 좀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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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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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우리가 기존에 누리고 있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여성 비밀요원들은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물론 비밀요원 자체가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지만 이 시대 여성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영국 특수작전국 소속 엘레노어 트리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드러난다. 엘레노어가 여성 비밀요원을 선발하고 관리하게 된 데는 남성 비밀요원들이 프랑스에서 자주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첩으로 취급받을 확률이 낯은 여성 요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녀가 내놓았다. 이 아이디어가 채택되면서 실무 담당자가 되었다. 그 당시는 파격적인 인사다. 그녀가 선발하고 훈련하고 프랑스로 보낸 여성들의 사진을 발견한 인물은 그레이스다.


1946년 뉴욕 출근길에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다. 그레이스는 꽉 막힌 도로를 피해 그랜드센트럴역으로 간다. 그곳에서 갈색 여행 가방을 발견한다. 호기심에 가방을 열고 십여 장의 여성 사진을 보고 그것을 챙겨 출근한다. 그녀는 미망인이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위해 가던 중 과속으로 죽는다. 다른 전쟁 미망인과 다르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한 법률사무소에 취직한다. 그녀가 볼 때 그녀가 없어도 별문제 없는 것 같은 사무소다. 전후 유럽에서 건너온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머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읽다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일하는 자선사업처럼 다가온다.


마리는 엘레노어가 선발한 비밀요원이다. 그녀의 유창한 프랑스어가 선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다. 그녀는 딸이 한 명 있다. 남편은 나쁜 놈이라 헤어졌다. 딸을 친척집에 맡겨 두고 런던에서 돈을 번다. 이런 그녀에게 더 많은 급여를 준다는 엘러노어의 제인은 매력적이다. 스코틀랜드 훈련소에 간다. 이곳에서 그녀는 다른 여성 비밀요원들을 만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조시다. 훈련은 힘들다. 포기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녀들을 감독하는 여성은 꿈도 프랑스어로 꾸라고 말한다. 그녀들은 단순히 비밀전문을 보내는 훈련 외에 간단한 호신술과 총기 등을 다루는 법도 배운다. 이 교육 과정은 엘러노어가 강하게 주장한 부분이다.


이 세 여성이 이리저리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레이스가 현재라면 엘러노어와 마리가 과거다. 힘든 훈련을 받는 마리, 이런 훈련을 받는 여성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엘러노어, 이 여성 비밀요원들의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 등이 주연이다. 현장에서 직접 위험을 겪으면서 활약하는 인물들이 마리 등이라면 그 후방에서 그들을 돕는 인물이 엘러노어다. 열두 장의 사진 속 여자들은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아 실종 상태다. 그레이스는 이 사진들에 담긴 미스터리를 풀려고 노력한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마크다. 우연히 만난 후 원나잇을 하고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로 다른 위치와 시간대 속 여성들의 삶을 통해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숨기고, 왜곡하고,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숨겨진 진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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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제로 철도 네트워크 제국 3
필립 리브 지음, 서현정 옮김 / 가람어린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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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네트워크 제국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권이다. 오랜만에 나왔다. 2권 이후 3년 이상이 시간이 지나 기억이 가물거렸는데 읽다 보니 조금씩 살아났다. 이번 이야기에서 레일창조자들에 대한 작은 의문이 풀리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의문을 타고 들어가면 또 다른 의문과 마주한다. 작가가 새로운 이야기를 내주지 않는 이상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던 세계관이 3부에 오게 되면 완전히 익숙해진다. 물론 과학적 기술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런 SF 장르에 완벽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 소설은 너무 재미없을 것이 분명하다. 과학은 소설의 상상력에 힘을 보태는 부수적인 존재다.


철도 네트워크 제국이 새로운 철도 노선인 웹 월드가 생기면서 둘로 나누어졌다. 구제국의 황제는 이것이 불만이다. 자산의 전투 기차들을 동원해 새로운 제국을 부수고 싶다. 이 일을 하려면 가디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지난 번에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이 가디언들을 보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너무 닮아 보인다. 물론 좀 더 현실적이다. 거대한 데이터 어딘가에 자신들의 본체는 놓아두고 필요에 의해 실제 세상에 분신으로 내려온다는 설정이 신화와 과학의 결합처럼 다가온다. 이 가디언들은 자주 현실 세계에 내려와 인간들과 교류를 하고, 누군가를 은밀하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들이 레일창조자들을 무너트렸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킨다. 그 이유가 마지막에 나온다. 아주 보수적인 이유다.


젠이 평화롭지만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데 한 통의 암호 메시지가 온다. 좌표다. 노바에게서 온 것 같다. 자신이 현재 누리는 것을 모두 버리고 그는 그곳으로 간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그의 외모는 늘 감시의 대상이다. 그가 변장하고 은밀하게 달아난다고 해도 금장 가디언과 기차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챈다. 기차들의 도움으로 좌표가 있는 곳에 도착한 그는 노바를 만난다. 노바는 레일창조자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이 원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그곳은 철도 네크워크의 출발점 스테이션 제로다. 새로운 은하로 철도가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레일창조자들 깨울 필요가 있다. 그 데이터를 레이븐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젠의 모험을 다시 시작한다.


이번 소설에서 트레노디 눈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꼭두각시 황제가 된 그녀가 진정한 황제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려낸다. 연약한 그녀가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찾아가는 과정은 작은 계기를 통해 시작한다. 전편에서 새로운 악역으로 생각한 크레이트들이 트레노디에겐 최고의 병사들이 된다. 혼자 제대로 된 경호원도 없이 도시로 나온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크레이트 스카가 그녀를 구해준 그때부터다. 이 무시무시한 크레이트의 활약은 후반부에 아주 강렬하게 드러난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적들에게 이 크레이트들은 공포이자 재앙이다. 실제 한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시리즈의 마지막이란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은 자라 청년이 되고, 권력은 이제 치열한 다툼 끝에 한 곳으로 집중된다. 철도 네트워크 제국의 진짜 힘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려주는 대목을 보면서 잠깐 생각에 잠긴다. 인공지능을 가진 기차들이 어떤 활약을 펼치는지, 바이러스에 의해 잠식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도 보여준다. 너무나도 방대한 세계이지만 작가의 의해 간결하고 단순하게 그려졌는데 이 부분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확장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우주를 기차로 달린다는 설정은 이미 <은하철도 999> 등으로 본 것이다. 물론 더 빠르고 더 먼 미래를 다루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고 상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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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뒤 맑음 - 하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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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보다 분량이 많다. 하지만 익숙해진 이야기 전개와 문장 덕분인지 진도가 잘 나갔다. 상권 마지막에서 이츠카의 부모가 신용카드 사용을 중지했다. 부모의 바람은 신용카드 사용을 중지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와라는 의도였지만 이 두 소녀는 아직 돌아갈 마음이 없다. 미국을 보는 여행을 더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때 그녀들이 보여준 선의가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면서 조금 더 여행이 가능해진다. 지속 가능한 여행에 가장 필요한 자금을 이츠카의 알바로 모으는 것이다. 숙소 문제는 그들의 선의로 만난 헤일리의 방에서 거주하면서 해결한다. 한동안 이들은 헤일리의 거주지인 내슈빌에 머문다. 이 시기의 그들을 보면 여행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내슈빌의 바에 취직한 이츠카는 자신이 취업 비자 없음을 알린다. 그 사실을 알지만 주인은 이츠카가 속여 몰랐다는 뻔한 거짓말을 사전에 맞춘다. 알바를 두 곳에서 하면서 다음 여행을 위한 경비를 모은다. 아빠의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와 자신이 직접 돈을 벌 때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용카드를 끍을 때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던 것이 자신이 벌어서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비용 지출에 좀 더 신경을 쓴다. 낮에 일하는 곳에서 남자가 데이트를 신청해도 영화 관람료가 아까울 정도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그녀가 세상의 쓴맛을 잠깐 맛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성장도 같이 이루어진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운 이츠카와 달리 레이나는 천진난만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이 둘의 여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한 방식은 이츠카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상권에서 이들이 여행하는 것을 보고 걱정했는데 이 걱정이 약간이나마 문제가 되는 순간이 한 번 일어난다. 변태라고 해야 하나. 레이나의 친화성은 여행이 길어지고 비용 문제가 생길 때 작은 돌파구가 된다.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슈빌에서 일본만화동호회 사람들과의 만남을 보면서 왠지 모를 공감을 한 것은 왜일까?


이들이 다음 여행을 위해 돈을 모을 때 한 달 이상 부모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보고 나라면 어떤 반응을 할까 생각했다. 아마 엄청나게 걱정했을 것이다. 어쩌면 찾으러 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 긴 연락두절을 두고 부모들의 생각과 행동이 갈린다.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실종을 알리고 제보를 기다리는 부모로. 레이나의 아빠인 우루우는 후자다. 어쩌면 대부분의 부모는 우루우처럼 하지 않을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이가 더 멀리, 더 많을 것을 보고 경험하고 오기를 바랄까? 물론 이런 마음도 존재할 것이다. 이 판단은 아마 아이와 함께 살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려운 선택이다.


중간 중간 우여곡절이 있지만 소녀들의 여행은 계속 된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겨울의 느낌이 달라진다. 여행하는 도중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여행을 응원하고 도와준다. 그들이 큰 탈 없이 긴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데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릴러의 장면들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현실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츠카가 크리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작가는 후반부에 한 문장으로 이 특별한 관계를 설명한다. 예상하지 못한 미래의 모습이라 놀란다. 그리고 아이들의 가출이자 긴 여행은 부부가 가진 생각의 틈새를 들여다보게 한다. 사랑과 신뢰를 놓고 고민하는 리오나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천진하고 무모하고 용감한 소녀들의 여행이 코로나 19로 잠시 사라진 여행 세포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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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뒤 맑음 - 상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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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었다. 한때 이 작가의 소설을 열심히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공감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 사이 많은 책을 샀고, 영화를 먼저 보는 바람에 묵혀 둔 책도 있다. 뭐 나에게 흔한 일이다. 상당히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책 뒤 표지의 목록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이 작가의 엄청난 팬이 아닌 관계로 내가 그 책들을 모두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최소한 집에 사 놓은 책은 모두 읽고 싶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바람이지만.


책 표지가 시선을 끈다. 많은 여백과 밝은 색이 왠지 여유롭게 다가온다. 이전까지 본 표지와 다른 느낌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라 선택했는데 실제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조금 곤혹스러웠다. 책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은 탓이다. 17세 이츠카와 14세 레이나, 이렇게 일본 소녀 둘이 부모들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긴 채로 미국을 보는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첫 장을 펼쳐 읽을 때만 해도 레이나의 엄마가 나와 어른이 주인공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큰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녀들의 여행을 보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들은 내가 읽었던 수많은 스릴러의 장면들이었다. 나만 그런가?


사촌인 두 아이가 사라졌을 때 부모는 당연히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아이들이 가져 간 신용카드를 중지하라고 말한다. 이 아이들은 뉴욕을 떠나 여행을 하는데 신용카드는 잘 곳, 먹을 것, 이동하는 것 모두 사용된다. 부모는 카드 내역만 보면 이들이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서 잤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일탈을 두 집안에서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이츠카의 아버지는 자신이 20살에 경험했던 세계 여행 때문에 상당히 관대하다. 레이나의 엄마도 관대한 편이지만 남편은 아이들이 빨리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두 부모의 생각들은 두 아이가 여행에서 경험하는 이야기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분량이다.


한도가 많은 신용카드는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숙소에서 잘 수 있게 한다. 이들이 긴 여행을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신용카드의 힘이다. 신용카드가 되지 않아 현찰을 뽑았을 때 그 금액이 3백 불이었는데 이 돈은 그들이 하룻밤 잔 호텔의 숙박비 정도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안전한 잠자리는 그들의 여행을 더 진행할 수 있게 한다. 여행을 하면서 그들은 여러 사람을 만난다. 작은 실수도 있지만 현재까지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라면 미성년자 두 소녀가 운전을 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작은 안전상의 문제라고 할까. 만약 이들이 차를 운전할 수 있었다면 뜨개질남 크리스이나 미시즈 패터슨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은 여행자의 시선을 많이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이 잔잔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읽다 보면 이 아이들의 여행을 어떻게 봐야할 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린 두 소녀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아이들이 경험하는 여행은 무모한 점이 많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행동하고, 용감한 부분도 있지만 세상은 선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불안감은 역시 스릴러 때문일까?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면서 몰입도가 떨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속도가 붙었다. 불안감 뒤에는 이들의 여행에 대한 부러움도 있다. 레이나 아빠 우루우는 아츠카 집이 아이들 신용카드 사용에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생각이 둘로 나누어진다. 아이들의 의지가 얼마나 굳센 것인지에 달려있지만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하권에서 이들의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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