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주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박해로의 공포소설은 언제나 한 공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한다. 바로 섭주다. 가상의 공간인 이곳에서 이전 세 이야기가 펼쳐졌다. 읽으면서 작가가 중간중간 풀어낸 작은 단서를 통해 이전 작품의 한 자락을 살필 수 있었지만 나의 저질 기억력은 그것들을 완전히 떠올리지 못했다. 아쉽다. 만약 이 소설의 제목이 <섭주>가 아니고, 섭주가 무대가 아니었다면 아쉬움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한 지역을 배경으로 연작소설을 쓰게 되면 그 공간이 현실처럼 다가오고, 그 지명이 하나의 공포로 각인된다. 최소한 현재 나에게 섭주는 그런 곳이다.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바로 앞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표자가 섬뜩하다. 다섯 마리의 뱀이 다섯 색깔로 그려져 있다. 이 뱀들의 정체는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보면 볼수록 섬뜩하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 뱀들의 악의 상징처럼 다룬다.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뱀에 대한 평가와 대우가 달라지는데 작가는 사악하고 나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뱀들은 영성을 가지고 있지만 물리적 힘은 절대적이지 않다. 은밀하게 적은 적을 상대할 때는 이 힘이 대단하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되면 물리적 타격이 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고전 전설이나 민담에서 본 것처럼 무찌를 수 있는 존재다.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고, 뱀들을 아주 쉽게 부려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최영우가 우연히 상갓집 돈을 훔쳐 달아나 흉가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일어난다. 흉가에 간 이유는 출소 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흉가에서 거울과 방울을 발견한다. 그가 돈을 훔친 곳은 다흥이고, 경찰이 수사망을 쪼여오자 달아난 곳은 섭주다. 최영우가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면 본격적인 이야기는 서경을 통해 일어난다. 서경은 노처녀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별명이 B사감이다. 얼마 전 사귀었던 남자가 아버지와 정치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이 무산되었다. 둘만의 살림을 살 만도 한데 서경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쓸 힘이 없다. 학교에서는 거의 왕따다. 그러다 엄마 꿈을 꾼 후 제석정이란 곳에 간다. 이곳에서 방울과 거울을 줍는다. 이때 거대한 뱀이 나타난다. 이 뱀은 그곳에 살고 있는 굶주린 고양이들과 격렬한 싸움을 하고 결국 죽는다. 이 장면을 읽을 때 서늘했다.


이 제기를 가지고 온 이후 서경은 이상한 꿈을 꾼다. 몸에 열은 나는데 체온을 재면 정상이다. 무병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의정부에서 양어머니가 내려와 그녀와 잠시 머문다. 아픈 그녀 대신 학교에 전화를 하는데 선생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 전화로 드러난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갔을 때 모습은 또 어떠한가. 언어 폭력, 뒷담화, 갑질 등의 다양한 저질 행위들이 벌어진다. 위축된 삶을 산 그녀에게 최악의 환경이다. 결혼이 무산된 아픔과 이 억눌린 감정들 틈새로 어두운 기운이 침입한다. 그녀가 꾸는 꿈은 현실과 환상이 엮이고 꼬인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을 그녀가 받아들이면서 성격이나 행동 등이 변한다. 이후 이 힘을 발현하는데 조금의 거침도 없다. ‘폭주’란 목차가 나올 정도다. 이제 뱀이 사방에서 꿈틀거리고 나타난다. 죽음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언제나처럼 가독성이 좋다. 한국 무속을 바탕으로 서서히 젖어드는 서늘함은 이번에도 유지된다. 중간에 사파왕와 우녀의 전설은 민담의 공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설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박해로의 전작들에 나온 이야기들이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말해진다는 점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하나씩 찾아보면 재밌을 것 같다. 소설 중간에 추락한 소설가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전작처럼 무녀들이 등장해 거대한 힘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무녀와의 대결은 예상 외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보여주는 정통 무속신앙과 호러의 결합이 이번에는 더욱 부드럽게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살> 이후 최고다. 책 마지막을 덮으면서 아직도 ‘섭주’ 이야기가 끝날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또 어떤 섭주 이야기로 돌아올지 다음 여름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상 살인 - 죽여야 사는 변호사
카르스텐 두세 지음, 박제헌 옮김 / 세계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다. 엄청나게 가독성이 좋다. 우연히 살인을 하고, 이것이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소설도 그런 종류다. 다만 살인과 명상을 엮어 잠시 숨을 고르게 한다. 형사 전문 변호사 비요른이 업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아내가 권한 명상 수업을 들은 후 삶의 변화가 생긴다. 그의 주 고객은 드라간이라는 조폭 두목이다. 이 두목이 평범한 조폭이라면 삶과 일을 어느 정도 배분하면서 살 수 있겠지만 드라간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수많은 사고를 치고, 이 뒤수습은 변호사가 맡아서 한다. 고액의 수입을 보장하지만 업무 스트레스는 최고치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딸과는 만남이 제한된다. 최악의 상황에서 명상은 그에게 새로운 해결책이다.


긴 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장면을 보면서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피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호흡으로 감정을 조절한 결과 살인으로 이어진다. 이 살인은 딸과 함께 주말 여행을 떠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드라간이 아이스크림을 말하면서 시작했다. 이 암호는 아주 급하다는 의미다. 딸에 대한 협박도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참는다. 그가 그렇게 급하게 그를 찾는 이유는 드라간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스쿨버스에 탄 아이들이 봤고, 영상이 공개된 탓이다. 회사 지하주차장에서 아이스크림 차에서 만난 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비요른의 차 트렁크에 몸을 숨긴 채 밖으로 나간다. 드라간의 소리를 아이가 듣지 못하게 음악을 크게 튼다. 여행지 호텔에 도착해서 트렁크를 열어놓아야 하는데 평화로운 명상의 힘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인다. 무더위에 트렁크 안 온도는 엄청나다.


이 첫 살인이 있은 후 사체 처리를 하는 장면은 끔찍하다. 사체가 발견되면 그는 중요한 용의자가 된다. 처음이라 작은 실수가 생긴다. 드라간의 반지를 낀 손가락을 새가 물고 간 것이다. 드라간의 부하들에게 그가 살아있는 척해야 한다. 잠적한 드라간의 엄지에 묻은 D과 타블로이드 신문은 암호문으로 작용한다. 드라간의 운전수 사샤에게 그날 밤 사건의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누가 봐도 함정을 판 것이다. 이 위험은 비요른에게도 계속 일어난다. 누가 이런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드라간이 살아 있는 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의 죽음이 드러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사건은 꼬이고 꼬인다.


요쉬카 브라이트너가 준 책과 그의 수업은 비요른이 마주하는 위기 때마다 좋은 안내서 역할을 한다. 이 책의 목차는 모두 명상 책과 연관 있다. 조폭의 무시무시한 살인 행위에 대비해서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 중심에는 유치원이 있다. 비요른도 딸 에밀리를 유치원에 입학시켜려고 한다. 30곳이 넘는 곳에 신청서를 넣었다. 그 중 한 곳이 드라간이 매춘시설로 바꾸려고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빠가 조폭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란 이유로 입학 거절 편지를 보낸다. 아내가 크게 노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드라간의 손가락이 있다. 건물에 대한 드라간의 용도를 바꾼다. 그리고 유치원 재단의 비리를 발견해 드라간 조직이 인수하게 만든다. 그 과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작은 폭력(?)이 있었다. 이 소설은 이렇게 곳곳에서 살인과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 무섭기보다 코믹하다. 블랙 코미디의 진수를 보는 느낌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이어가는 것도 있지만 캐릭터의 반전도 무시할 수 없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조폭이 유치원 입학 문제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 경찰은 또 어떤가. 이 상황을 보면서 한국에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보내기 위해 몇 년 동안 대기를 타야 하는 현실이 떠올랐다. 자신의 딸을 입학시키기 위해 한 행동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황당하지만 웃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명상을 수련하면서 그가 마주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약간은 도식적인 느낌도 있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마주한 마지막 장면은 기대했던 반전으로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많다. 당연히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 후속작들이 나왔다고 하니 빠른 번역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르노빌 히스토리 -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기억하는 체르노빌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체르노빌 방사능 누출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계속해서 원자력 발전소를 유지하고 운영했다는 점이다. 완전히 멈춘 것이 2000년이라고 한다. 이 책은 체르노빌의 건설부터 시작하여,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던 밤과 그 이후 일어난 대응과 수습 등을 다루고 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 순으로 하나씩 따라가는데 읽다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방사능 누출이 인류 최초의 사건도 아니라는 점도.


우리에게 다시 방사능 누출 문제가 다가온 것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무너진 때다. 얼마 전에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체르노빌 이전에 미국에서 핵발전소 문제가 있었지만 큰 이슈가 되지 않았고, 가장 안전하고 저렴한 전력 생산설비로 각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도 원자력발전소 홍보를 할 때면 언제나 안전하고 저렴하다는 것을 내세운다. 하지만 매몰비용이 얼마나 들지 모른다는 것과 향후 수만 년 동안 방사능 누출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가린다. 저자가 체르노빌 사고 이후 유럽의 핵발전소들이 불안해한 것을 지적한 것도 이 누락되고 가려진 정보 때문이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정기점검을 위해 원자로 4호기 가동을 중지한다. 원자로의 결함으로 핵분열 반응이 증가하고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원자로가 폭발한다. 원자로를 덮고 있던 200톤의 콘크리트 덮개가 날아간다. 방사능이 열린 하늘로 분출한다. 사상 처음 겪는 사건에 원전 직원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사고가 일어난 후 방사능 누출 정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데도 실패한다. 화재가 발생했다고 소방대원들이 달려와 불을 끄려고 한다. 이들은 고농도의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방사능 피폭이 많이 된 이들은 나중에 사망한다. 핵분열 반응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 사실은 소련은 국제사회에 숨긴다. 방사능은 바람을 타고 스웨덴까지 날아갔고, 그곳 직원들이 이상 상황을 알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체르노빌의 원전은 RMBK원자로 사용한다. 물이 아닌 흑연으로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원전 설립 비용이 적게 되는 장점이 있지만 안정성 문제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소련은 자신들의 기술을 서방에 알리기 위해 더 빠르고 싸게 원전을 건설한다. 빠른 속도와 싼 비용은 원전의 안전을 갉아먹는 요인이다. 한 겹 더 씌워야 할 콘크리트 벽을 세우지 않는다. 건설과정에도 수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넘쳐난다. 원자로 설계의 문제도 있지만 건설, 운영, 관리 등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고 이후 이 문제를 처리할 때 각자의 계산에 의해 표면적 원인이 다르게 부각된다. 소련 입장에서는 설계 문제보다는 운영의 실수를 더 부각한다. 역사의 기록은 이 차이를 놓치지 않는다.


사고 이후 핵분열 반응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방사능의 유출도 심해진다. 원자로가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잘못하면 방사능이 지하수로 흘러갈 수 있다. 이것을 막고, 원자로의 폭발도 멈춰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모래를 원자로 속에 붓는 것이다. 헬기를 동원해 붓는다. 쉬운 일이 아니다. 헬기 조종사들이 방사능에 노출된다. 만약 해당 원자로뿐만 아니라 옆의 원자로까지 폭발한다면 유럽 전체가 방사능에 완전히 오염될 수 있다.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원자로를 멈출 방법도,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사능 누출이 줄어든다.


이 사고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곳은 체르노빌이 있는 우크라이나와 원전과 가장 가까운 나라인 벨라루스다. 저자의 재미 있는 관점 중 하나는 구 소련의 해체의 시발점으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말하는 부분이다. 원전 폭발 이후에도 제대로 된 정보를 시민들에게 전달하지 않은 관료들은 이 피해 규모를 더욱 키웠다. 이때 방사능 피폭 당한 피해자 등을 처리하기 위해 국가 예산의 10퍼센트까지 사용해야 했다는 부분은 이 사고가 얼마나 거대하고 지속적인지 알려준다.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해당 원자로를 덮는 것인데 두 번이나 진행했다. 유럽의 지원으로 두 번째 덮은 보호막에서 최근 핵분열 반응이 감지되었다는 소식은 공포 영화의 클리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은 준다.


저자는 체르노빌 사고의 근원적 원인으로 “소련 정치 체제의 중대한 결함과 원자력 산업의 중대한 결함의 상호작용에 있었다.”고 말한다. 발전소 직원의 절차와 안전 규칙 위반도 말하는데 이 부분은 나의 이해 부족이 조금 있다. 사고 이후 체르노빌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유럽이 폐쇄를 둘러싼 밀당을 한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곳은 역시 유럽의 원자력 발전소들이다. 원전 산업이 사라질 위협을 제거해야만 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유럽에서 원전은 퇴출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 순으로 사건의 진행과 의사 결정 과정을 멋지게 그려내었는데 머릿속에서 이 정보를 소화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계인 게임
오음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년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대상 수상작이다. 파키스탄 훈자를 배경으로 배낭여행 온 다섯 명의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다섯 명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고,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각자의 사연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다른 사람과의 접점들이 생긴다. 각자의 과거가 흘러나오고, 현재가 겹쳐지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 다섯 명은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르다. 한국에서 만난 적도 없다. 같은 것이라면 각자의 사연을 안고 훈자에 여행 왔고, 장기 체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읽다 보면 의외의 과거가 흘러나온다. 그 과거가 시선을 잡아당기고, 현실의 관계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김설. 28세 중학교 국어 교사다. 그녀는 오후를 좋아한다. 술은 마시면 후를 보는 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휴가 기간 동안 여행하다 훈자로 흘러와 장기간 머물고 있다. 그녀의 과거는 유부남 연극배우와의 사랑이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교대를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권위적인 남자였다. 여행과 후와의 만남이 과거와 떨어지는데 도움을 준다. 설과 함께 도미토리에 자는 언니가 32세 영상 번역가 남하나다. 훈자에서 노브라도 돌아다니면서 남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는다. 한국에서 키스방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이곳에서 단순히 키스만 한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노골적인 행위가 많다. 유학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여행과 돈벌이가 가능하게 한다. 그녀가 마지막에 보여준 장면은 섬뜩한 미래의 한 모습이다.


40세 소설가 최낙현은 몇 권 소설을 내놓았지만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소설가의 아내라는 사실을 좋아했던 아내가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남편을 떠났다. 떠나기 전 기숙사 야간 사감을 했는데 그는 사고와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하나의 몇 가지 모습에서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고, 약에 취해 하나에게 실수한다. 그의 이야기 몇 개는 출판계의 병폐를 드러내고, 소설가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보여준다. 훈자로의 여행은 출판사의 소설가 여행 에세이 기획 때문이다. 가장 어린 22살의 전나은은 대학생이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고 평범한 여대생이지만 그녀가 살아온 삶과 속내를 들여다보면 위태위태한 모습이 가득하다. 손목의 자해자국을 가리기 위해 문신을 했다. 남들처럼 보이기 위해 그녀는 연기한다.


29살 여행자 오후. 외계인 게임을 만든 인물이다. 그도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약에 취해 하나와 자고, 나은과는 같은 호텔에서 머문다. 설의 감정이 부담스러운 인물이다. 그가 만든 외계인 게임은 하나의 상황을 만든 후 다수와 소수를 가리는 것이다. 소수가 외계인이다. 다섯 명의 여행자가 낸 섬뜩하고 기발한 몇 가지 상황과 설정은 서늘하고 선택의 극단으로 몰아간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선택의 이유로 흘러나올 때 이들의 삶이 조금씩 보인다.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후와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후의 과거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지만 그가 선택한 세계 여행의 길은 힘겨워 보인다. 그가 해시시를 피우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다섯 여행자의 평이한 일상을 나열한 것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과거사가 교차한다.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고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들은 아주 가독성이 좋다. 예상 외의 과거가 흘러나오지만 그 과거가 모든 것을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당사자에겐 다르겠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여행을 간 그들이 결코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다시 현실이다. 만남을 통해 그 과거의 한 자락을 벗겨낼 힘을 발견한다. 지속가능한 여행을 꿈꾸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지금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다. 이 소설을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훈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오래전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 태국의 작은 마을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그들의 사연이 뒤섞이고, 에필로그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시선 452
정현우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랏빛 표지가 인상적이다. 한 꺼풀 벗고 나면 기존의 창비시선과 닮은 모습이 나온다. 이 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집을 받은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며칠 전 겨우 시집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시어들도 많지만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시인의 감성이 조금씩 가슴에 와 닿는다. 분명 오독도 많을 텐데 가슴 한 곳이 무겁다. 그가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일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들이, 그 때문에 겪어야 했을 상황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성 정체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시집의 1부와 2부에서 가장 많이 느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시의 제목이 아니다. <귀와 뿔>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성 정체성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독교다. 성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면 무속 신앙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 가족의 종교가 서로 갈리는 것일까? 그가 성당에 가는 이유는 신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강권이 더 큰 이유라고 분명히 말한다. 시집 속에서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들은 신앙이 없거나 약함을 보여준다. 섬세한 감성이 담긴 시어들은 단어들을 곱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한 번, 대충 읽은 듯해서 한 번. 이렇게 시를 읽다보면 어떤 시에서는 슬픔이란 감정이 전해지기도 한다.


“잘못이 들키면 잘못이 되고,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라는 문장을 계속해서 읊조린다. 이 미묘한 말의 차이가 마음에 와 닿지만 머릿속에서는 정확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을 지우고 나서야 나는 / 웅덩이 속, / 나무를 베고 잠이 들었다”<달팽이 사육장 1>고 말할 때 그의 아픔이 가슴에 문을 두드렸다. <인면어> 속 이야기는 단순한 카스트라토 사연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가 경험한 일이 아닐까?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용서>고 하면서 “견딜 수 있는 것들만 고통을 준다는 / 신은 / 없다.”라고 말한다. 이 용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엄마가 시에서 자주 보이는 반면에 아버지는 그 빈도가 훨씬 떨어진다. 첫 시에 잠시 나왔다가 다시 나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내가 놓친 것이 아니라면. 제4부에 등장한 아버지는 낚시와 사냥 같은 행위의 선배 역할을 한다. “천사가 오기까지 내기해 / 눈을 감은 사람이 지는 거야 / 먼저 죽으면 안 되니까 / 누구라도 따라 울어버리면 안 되니까” <여름의 캐럴> 이 시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어디서 이 슬픔이 온 것일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정말 자유롭게 형식을 변주한다. 기존 형식을 깨트리고 자신의 슬픔과 기억을 풀어내는데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 관심을 둬야 할 시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