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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ㅣ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평점 :
<콘크리트>의 작가 하승민의 신작이다. 600쪽이나 되는 분량이지만 가독성이 좋아 읽는데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전작에서 아쉬운 점이 조금 있었는데 이번 작품도 그런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인물을 만들고, 어두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은 탁월한데 전체적인 균형감은 이번에도 아쉽다. 개인적으로 조병준의 캐릭터가 무미건조한 느낌이다. 인터넷서점 소개글에 작가와 편집자가 박해일을 가상캐스팅했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박해일 이외 다른 배우들을 계속 떠올려봤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 이 부분은 잘 모른다. 아마 조병준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A급 배우를 허접한(?) 조연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오급 출연이라면 잘 어울릴 것 같지만.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 중 하나가 대상이다. 아버지가 일터에 간 사이 군인에게 쫓기는 청년을 숨겨주었다가 딸의 실수로 엄마가 군인에게 죽는다. 아이는 이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격이 생긴다. 지아에게 생긴 혜수란 인격은 지아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다. 그 중 하나가 엄청나게 먹어 살을 찌운 것이다. 광주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 아버지와 군인에게 쫓기던 청년 재필은 지아와 함께 서울로 이사한다. 힘들게 혜수와 인격 교대를 하면서 지아는 자란다. 이 이중인격을 보고 아버지는 지아인지 혜수인지 묻는다. 아내 잃은 슬픔을 딸에게 푼다. 가정 폭력이 난무한다.
소설의 첫 장면은 산에서 시체를 묻는 것이다. 19년 만에 정신을 차린 지아가 파묻힌 시체와 자신이 든 삽을 보고 그 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19년이란 시간 안에 아버지는 재혼했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는 36살 취준생 병준이란 양아들까지 생겼다. 그녀가 뱀이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간결하게 흘러나온다. 죽음의 공포가 지아로 하여금 혜수가 전면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 시간은 무려 19년이나 이어진다. 어떻게 지아는 한 번도 혜수의 의식을 뚫고 나오지 못했을까?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지아는 항구도시 묵진으로 간다. 동행자는 의붓동생 조병준이다. 이때만 해도 병준이 상당한 비중으로 활약을 할 줄 알았다. 전직 형사이자 이제는 르포 기자가 된 강규식보다 비중이 없을 것이라곤 생각 못했다.
지아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끈다면 다른 한 축은 장관훈이 맡았다. 물론 비중은 차이가 많이 난다. 한때 잘 나가는 해운회사 사장이었지만 이제는 정신 나간 딸 진희와 함께 절의 처사로 살고 있다. 미친 진희가 지아의 서울집을 찾아와 빨간 수염에게 가자고 한 것 등이 지아의 잃어버린 19년에 하나의 단서가 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들의 관계가 하나씩 풀려나온다.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을 찾아내는 단서 중 하나가 지아가 가지고 온 디카 속 사진 세 장이다. 그 중 한 곳은 지아의 의식이 돌아온 산 속 시체와 관련된 살인이 벌어진 현장이다. 장소와 상황 등을 보면 혜수가 살인을 저질렀다. 이런 그녀의 뒤를 좇으면서 방송 취재거리를 찾는 인물이 규식이다. 규식은 한때 묵진에서 형사로 일한 적이 있다.
읽다 보면 작가가 풀어낸 이야기 속에서 왜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는지 쉽게 알게 된다. 피의 고리로 만들어진 복수의 시발점을 말이다. 지아에게는 순삭된 19년이지만 그녀가 살았던 묵진에는 그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지아에게는 알고 싶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시체와 살인 장소 등을 생각하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을 뒤집어 쓴 채 경찰에 잡히고 싶은 마음이 없다. 했다면 혜수가 했을 일이다. 살인의 흔적을 없애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려 그 이유를 찾는 것도 연약한 삶을 산 그녀에겐 작은 생존의 몸부림이다. 자신의 다른 인격이 이전까지 자신에게 저지른 행동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규식과 관훈이 무거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끈다면 병준은 가볍다. 이 가벼운 병준의 어떤 일의 연결고리 이상의 활약을 펼치지 않는다. 병준의 비중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 것은 가상캐스팅 때문이지만 말이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삶이 만들어낸 비극은 이 소설 곳곳에 나온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 부분이다. 누가, 왜라는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삶의 회오리 속에서 허우적대고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는 삶이 만든 상황은 반복되고 강한 인상을 준다. 혜수도, 관훈도, 진희도 이 회오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잃어버린 19년의 기억 복원이란 설정을 다루고 있는데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인 혜수의 삶이 전면에 부각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리고 묵진이란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재밌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언젠가 이 공간과 사람들이 다시 나오는 작품을 만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