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룸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7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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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17권이다. 오랜만에 이 시리즈를 읽었다. 집에 이 시리즈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이 시리즈가 나오길 그렇게 바랐던 순간이 이루어지자 책에서 멀어졌다. 나쁜 습관이다. 얼마 전 시리즈 초기작 중 한 권을 읽었는데 시대가 묻어나왔다. 가독성은 여전히 좋았다. 물론 이 작품도 말할 필요 없이 가독성이 좋다. 다만 초기작을 읽은 나에게 해리의 나이든 모습이 낯설다. 그리고 읽지 않은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들에 대한 관심이 또 불쑥 생긴다. 시간이 되면 올해가 가기 전 한두 권 이상 읽고 싶은데 다른 시리즈도 많이 밀려 있어 자신할 수 없다. 오래된 시리즈의 최신작들을 읽을 때면 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정년퇴직을 앞둔 해리의 모습이 낯선 것은 중간에 읽지 않은 시리즈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시리즈 중 한 권이 <드롭>인데 이 소설을 읽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조금은 더 낯익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딸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해리가 어떻게 미제사건을 전담하는 부서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새로운 파트너 루시아 소토를 맞는다. 범죄자와의 총격 사건으로 영웅이 된 그녀다. 새 파트너와 함께 맡게 된 사건은 10년 총격 사건으로 몸에 탄환을 가지고 있다가 얼마 전 죽은 메르세드 사건이다. 그는 마리아치 연주단의 일원으로 연주를 하던 중 어딘가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고 불구가 되었다. 10년만에 죽었는데 해부를 통해 그의 척수에 박혀 있던 탄환을 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탄환 적출이 도입부다.


전 시장은 자신의 선거에 메르세드를 이용했고. 두 번이나 당선되었다. 메르세드가 죽은 지금 범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 현상금 5만 불을 주겠다고 말한다. 경찰 담당자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다. 현상금을 노린 거짓 전화가 빗발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해리와 소토가 미제사건 담당자가 되어 사건을 파헤치려고 한다. 그런데 늦은 밤 소토가 다른 사건 파일을 복사한다. 20년 전 무허가 어린 집 아이들이 방하로 죽은 사건이다. 불법 복사다. 아직 소토가 낯설고 믿을 수 있는 경찰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녀가 왜 그 사건에 관심이 있는지 듣게 되면서 도와주려고 한다. 이제 사건은 두 개가 되고, 해리의 거짓말 덕분에 이 두 사건 모두 해리와 소토가 맡는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흔적을 따라 가면서 미제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시신의 몸에서 뽑아낸 탄환 하나가 사건 해결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다. 피해자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동네 갱들이 저지른 행위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그런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쫌 읽은 독자들이라면 대충 범인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범인상이 그려진다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확한 증거가 더 모여야 한다. 과학의 발전은 이전에 놓쳤던 증거물에 대한 자료를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다. 메르세드를 이용해 시장 선거에 당선된 전 시장 세야스는 이제 그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주지사 당선을 꿈꾼다. 소설에서 이 부분은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변하는 LA의 모습을 이것으로 조금씩 알 수 있다.


소토가 복사한 미제사건은 어릴 때 소토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역시 동네 갱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 사건 해결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이해하게 된다. 두 사건이 교차하고, 비중이 거의 비슷하게 다루어진다. 해리가 다양한 경험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단서들 사이의 관계를 추론한다면 소토는 젊은 형사답게 인터넷과 경찰 내부의 자료 등을 통해 단서들 사이를 채운다. 탄환 하나와 기술의 진보로 CCTV의 화질을 개선하면서 알게 된 정보가 한 발 더 나아가게 한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추리력과 뛰어난 인맥이다. 당연히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노련한 형사가 왜 필요한지 잘 보여준다. 만약 모든 형사가 해리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찰도 많다. 형사가 아닌 관료가 된 경찰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 소설 속에서 꾸준히 모습을 보여준다.


소토가 경험한 미제 방화사건의 단서도 경험과 대담한 추론을 통해 찾는다. 자신이 겪은 일이라 소토는 더 열심히 일한다. 소설 속에서도 작가가 말했듯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서 그 사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시각도 이전 경찰들이 기록하고 모은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담당 형사들의 기억도 좋은 자료다. 열린 자료는 소토가 찾아내고, 닫힌 자료는 해리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얻는다. 멋진 콤비다. 이제 겨우 근무연장프로그램(DROP)이 1년 남은 해리는 몸을 사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해리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남자다. 차근차근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그 과정은 아주 현실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다. 이 작품이 2014년 출간임을 감안하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다음 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 전에 나는 이전 작품을 더 읽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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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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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일본 미스터리다. 제20회 본격미스터리대상 수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2019년 애플북스 베스트북, SR회 미스터리베스트 10 1위 등 다양한 미스터리 분야의 1위 상을 휩쓸었다. 대단한 수상 이력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상당히 좋아 큰 기대를 했다. 솔직히 말해 최종화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흔하게 보는 일본 추리소설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점이라면 영매와 논리를 조합해 범인을 찾아내는 것 정도랄까. 영매가 답을 제시하면 추리 소설가가 현실에서 그 과정을 풀어내면서 증거를 찾아내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의 무게도 상당히 가볍다. 그런데 최종화가 이런 인식을 완전히 깨트렸다.


프롤로그에서 사건을 의뢰받는 장면이 나오고, 영매와 추리 소설가가 이전까지 해결한 3개의 살인 사건들이 한 편씩 나온다.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면 그 사이에 프롤로그에서 의뢰받은 사건의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이것이 최종화를 더욱 빛나게 한다. 무심코 읽었던 대목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복기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다면 그 풀이를 하나씩 검증하고 싶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읽으면서 왜 영매탐정이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모두 읽고 난 지금은 완전히 동의한다. 물론 여기에 태클을 걸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녀가 영매탐정이냐고? 끝까지 읽은 후에도 이 물음은 이어질 수 있다.


첫 이야기는 추리작가 고게쓰 시로는 대학 후배 유이카의 부탁으로 영매를 찾아간다. 영매의 이름은 조즈카 히스이다. 이 영매가 진짜인지 알고 싶은 마음과 고게쓰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영매와 추리작가의 첫 만남은 유이카의 죽음으로 연결고리가 강하게 묶인다. 조즈카는 죽은 곳에 가면 그 영혼이 빙의해 마지막 순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히스이는 영시로 여자가 살인자란 것을 본다. 이때 독자는 그 살인자가 누군지 금방 안다. 범인이 누군지 쉽게 알게 되지만 증거가 없다. 여기서 논리를 세우고, 증거를 찾는 활약을 고게쓰가 한다.  다음 이야기인 수경장도 마찬가지다. 이 반복이 두 번 이어지는데 생각보다 범인 맟추는 것이 쉽다. 다만 어떻게 죽였는지와 그 알리바이를 깨트려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히스이가 영시한 장면이 작가의 논리를 통해 깨어진다. 멋진 콤비다.


이 콤비가 약간의 실수를 저지른 사건이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이다. 이 이야기에서 히스이가 가진 매력이 폭발한다. 이국적인 미모의 여성을 여고생 사진가들이 멋지게 찍는다.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도 않고, 친구도 없는 것 같은 그녀가 새롭게 어린 친구들을 사귀는 순간이다. 이 행복한 순간은 이 사건에 발을 내딛게 한 여고생의 죽음으로 멈춘다. 처음에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대신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떠오른다. 이 이야기의 가장 섬뜩한 점은 연쇄살인범이 고게쓰에게 자신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살인자의 말은 인터루드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의 독백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여기서부터 작가는 단서를 하나씩 본격적으로 흘리기 시작한다. 내가 범인을 알게 된 순간은 최종화에서 한 대사를 읽는 순간이었다.


전반적으로 최종화 전까지만 해도 소설은 가벼운 느낌이었다. 연쇄살인이 있다고 해도 히스이의 존재가 순진하고 어리숙하고 밝아 전혀 무겁지 않았다. 흔하게 본 추리소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의문이 사라지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최종화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읽으면서 가졌던 제목에 대한 의문도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앞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의 탄생에 감탄하게 된다. 누가 조즈카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왜 이 소설인 본격추리인지 알게 되고, 다음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인다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에 포기하면 분명한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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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1-07-1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인님을 믿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중간에 책 던지고도 남았을;;; 꾸역꾸역 참고 포기하지 않길 잘했습니다. 추천 감사해요!
 
빛그물 창비시선 451
최정례 지음 / 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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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51권이다. 오래만에 시집에 필이 꽂혀 선택했는데 읽다가 소설들에 밀려 중단했던 시집이다. 시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중단한 것이면 이해하겠는데 아주 재밌게 읽다가 흐름이 갑자기 끊어졌다. 그 사이 시집들은 눈에서 멀어졌고, 몇 개월 만에 다시 끄집어내어 읽었던 뒤부터 시작했다. 여전히 이 시집이 마음에 든다. 앞에 마음에 든 시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졌지만 좋았던 느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 그때 끝까지 읽었다면 더 재밌고, 그 감정을 이 글 속에 잘 녹여내었을 것이다.


시집을 읽다 보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어 몇 개가 있다. 일상, 추억, 시간, 현실 등이다. 읽을 때 몇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어는 이것들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 산문처럼 시로 표현되는데 상당히 재밌다. <이불 장수>의 시어들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들을 잘 보여준다. “시장에서의 현금 결제는 반품이 안 된다고 했다.”(<이불 장수>) 단지 시가 여기서 멈추었다면 그냥 그랬을 것이다.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끌고 와 알 수 없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삼단어법으로>에서 염소들이 나무에 올라가 있는 이유를 “올라가기 위해 그냥 / 올라가서는 / 내려오지 못해 / 매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장면이다. <개미와 한강 다리>에서 개미 한 마리가 한강을 휘게 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한강이 휘는 것을 보려면 엄청난 개미들이 필요할 것이다. 시인이 주목한 부분은 이 엄청난 개미들이 아닌 개미 한 마리로 시작하는 작은 변화다. “존재의 무게가 거의 없는 것이, 생각의 무게 같은 것이 지나간다. 방금 한강 다리가 아주 약간 휘청했다.” 관념적인 관찰이지만 세상의 변화는 바로 이 부분을 인식할 때 일어난다.


<나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같은>은 인터넷 스팸 메일을 시로 재밌게 녹여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받았을 그 금융사기 메일 말이다. <모래와 뼛가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과 대국민 사기극 평화의 댐을 두 독재자의 거짓말과 재밌게 엮었다.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는 졸업 삼십주년 동창회에서 일어난 과거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과 자신들만의 기억이 뒤섞여 흘러가는데 ‘우겼다’와 ‘치자’는 단어가 너무나도 낯익다. 누구나 경험한 일일 것이다. “눈도 눈썹도 검은 꽃잎처럼 깜빡이고 / 너의 손등이 내 입술에 닿을까 조바심치던 비 / 어디 가닿지 못하고 / 국지성 호우 속에 / 수십년 갇혀 있는 비”(<입김>일부)를 읽으면서 그 느낌이 가슴에 조용히 와닿았다.


“안 보이는 것은 / 보이는 것이 가린 것이고 / 보이는 것은 / 보이기로 한 것이고” (<안개의 표현> 일부)이라고 말할 때 내 삶 속의 안개들이 잠시 흔들했다. <물고기 얼굴>에서 “유사성이란 별똥별처럼 휙 지나며 눈앞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란 대목에 고개를 끄덕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속 두 개의 기억은 부모라면, 자식이라면 한 번쯤 느꼈을 감정이다.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된 후 자식을 낳고, 늙은 부모를 마주할 때 경험하는 일들이다. <원격조종>은 작은 미스터리가 일상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순간들의 생각과 감정이 가슴속에 작게 울린다. <1mg의 진통제>는 시인의 현재 모습일까? 단순한 경험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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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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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작가 하승민의 신작이다. 600쪽이나 되는 분량이지만 가독성이 좋아 읽는데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전작에서 아쉬운 점이 조금 있었는데 이번 작품도 그런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인물을 만들고, 어두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은 탁월한데 전체적인 균형감은 이번에도 아쉽다. 개인적으로 조병준의 캐릭터가 무미건조한 느낌이다. 인터넷서점 소개글에 작가와 편집자가 박해일을 가상캐스팅했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박해일 이외 다른 배우들을 계속 떠올려봤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 이 부분은 잘 모른다. 아마 조병준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A급 배우를 허접한(?) 조연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오급 출연이라면 잘 어울릴 것 같지만.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 중 하나가 대상이다. 아버지가 일터에 간 사이 군인에게 쫓기는 청년을 숨겨주었다가 딸의 실수로 엄마가 군인에게 죽는다. 아이는 이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격이 생긴다. 지아에게 생긴 혜수란 인격은 지아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다. 그 중 하나가 엄청나게 먹어 살을 찌운 것이다. 광주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 아버지와 군인에게 쫓기던 청년 재필은 지아와 함께 서울로 이사한다. 힘들게 혜수와 인격 교대를 하면서 지아는 자란다. 이 이중인격을 보고 아버지는 지아인지 혜수인지 묻는다. 아내 잃은 슬픔을 딸에게 푼다. 가정 폭력이 난무한다.


소설의 첫 장면은 산에서 시체를 묻는 것이다. 19년 만에 정신을 차린 지아가 파묻힌 시체와 자신이 든 삽을 보고 그 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19년이란 시간 안에 아버지는 재혼했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는 36살 취준생 병준이란 양아들까지 생겼다. 그녀가 뱀이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간결하게 흘러나온다. 죽음의 공포가 지아로 하여금 혜수가 전면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 시간은 무려 19년이나 이어진다. 어떻게 지아는 한 번도 혜수의 의식을 뚫고 나오지 못했을까?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지아는 항구도시 묵진으로 간다. 동행자는 의붓동생 조병준이다. 이때만 해도 병준이 상당한 비중으로 활약을 할 줄 알았다. 전직 형사이자 이제는 르포 기자가 된 강규식보다 비중이 없을 것이라곤 생각 못했다.


지아가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끈다면 다른 한 축은 장관훈이 맡았다. 물론 비중은 차이가 많이 난다. 한때 잘 나가는 해운회사 사장이었지만 이제는 정신 나간 딸 진희와 함께 절의 처사로 살고 있다. 미친 진희가 지아의 서울집을 찾아와 빨간 수염에게 가자고 한 것 등이 지아의 잃어버린 19년에 하나의 단서가 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들의 관계가 하나씩 풀려나온다.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을 찾아내는 단서 중 하나가 지아가 가지고 온 디카 속 사진 세 장이다. 그 중 한 곳은 지아의 의식이 돌아온 산 속 시체와 관련된 살인이 벌어진 현장이다. 장소와 상황 등을 보면 혜수가 살인을 저질렀다. 이런 그녀의 뒤를 좇으면서 방송 취재거리를 찾는 인물이 규식이다. 규식은 한때 묵진에서 형사로 일한 적이 있다.


읽다 보면 작가가 풀어낸 이야기 속에서 왜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는지 쉽게 알게 된다. 피의 고리로 만들어진 복수의 시발점을 말이다. 지아에게는 순삭된 19년이지만 그녀가 살았던 묵진에는 그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지아에게는 알고 싶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시체와 살인 장소 등을 생각하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을 뒤집어 쓴 채 경찰에 잡히고 싶은 마음이 없다. 했다면 혜수가 했을 일이다. 살인의 흔적을 없애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려 그 이유를 찾는 것도 연약한 삶을 산 그녀에겐 작은 생존의 몸부림이다. 자신의 다른 인격이 이전까지 자신에게 저지른 행동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규식과 관훈이 무거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끈다면 병준은 가볍다. 이 가벼운 병준의 어떤 일의 연결고리 이상의 활약을 펼치지 않는다. 병준의 비중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 것은 가상캐스팅 때문이지만 말이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삶이 만들어낸 비극은 이 소설 곳곳에 나온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 부분이다. 누가, 왜라는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삶의 회오리 속에서 허우적대고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는 삶이 만든 상황은 반복되고 강한 인상을 준다. 혜수도, 관훈도, 진희도 이 회오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잃어버린 19년의 기억 복원이란 설정을 다루고 있는데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인 혜수의 삶이 전면에 부각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리고 묵진이란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재밌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언젠가 이 공간과 사람들이 다시 나오는 작품을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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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물거품 안전가옥 쇼-트 8
김청귤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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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쇼-트 8권이다. 세어보니 이 시리즈도 반 읽었다. 두툼하지 않아 마음먹으면 금방 한 권씩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처럼 읽지 못하고 있다. 묵혀 두고 있는 책들이 너무 많다 보니 더욱 그런 모양이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경장편의 작가를 안전가옥 <미세먼지> 앤솔로지에서 만난 적이 있다. <서대전네거리역 미세먼지 청정구역>이란 단편이다. 남성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낸다. 전작처럼 비현실적인 상황과 설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불의 마녀와 물의 인어가 사랑하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마리는 작은 섬의 무녀다. 어느 날 바다에서 한 존재를 보고 사랑하게 되고 이름을 붙여준다. 그 이름은 수아다. 이 섬의 무녀는 바다와 관련된 안전을 기원해주는 존재다. 흔히 알고 있는 권력의 상위 존재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무녀일 뿐이다. 섬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홀로 살기도 힘들다. 나이가 들면 남성의 씨를 받아 다음 대 무녀를 낳아야 한다. 이런 그녀에게 수아의 존재는 위안을 주고 사랑의 감정을 깨닫게 한다. 처음에 수아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외모로 보면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섬 마을이란 공간으로 한정시켜 놓았지만 이 작은 섬에서 남자와 여자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시대의 모습은 단순화한 것이다. 마을 무녀를 대상으로 성희롱을 하는 마을 남자들, 이것을 알면서 묵인하다 문제가 생기자 무마하려는 여자들이 나온다. 동성끼리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 대부분의 모습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과연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둘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고 남성들이 보여주는 몇 가지 반복되는 행동은 결코 낯선 장면이 아니다. 읽다 보면 낯이 붉어진다.


이 소설에서는 섬의 이름도, 지명도, 시대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수아가 인어로 섬의 사람들을 지켜주고, 마리가 불의 기운을 각성해 사람들을 자연 발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단지 이 둘이 사랑하고, 재와 물거품이 되었다가 다시 만나고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 마리의 변한 모습은 다음 만남에서도 이어진다. 불완전한 기억은 다시 만남으로 명확해지고, 둘의 사랑은 더욱 굳건해진다. 다만 이 동성애적 모습을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몇 번의 재생을 거친 후에도 변함이 없다. 마지막 장에서 화자가 바뀌면서도 남성의 성희롱과 성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 단지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인어공주>와 퀴어 로맨스를 결합해서 풀어낸 소설인데 왠지 모르게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앞에서 말한 정확한 지명, 시대, 상황 등에 대한 설명 부재다. 차분하게 문장을 음미하면서 읽어야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재와 물거품’이란 제목처럼 마리는 타서 재가 되고, 인어인 수아는 물거품이 되어 죽는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세상에 나오면서 그들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면서 이야기에 무게를 더한다. 그리고 물과 불이 상극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의 사랑은 이것을 뛰어넘었다. 사랑과 성차별 등의 문제를 진한 로맨스에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녹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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