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일기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지나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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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싼마오의 에세이를 읽었다. 인터넷 서점 기록을 뒤져보니 2009년에 <사하라 이야기> 2권인 <흐느끼는 낙타>를 읽었었다. 2권을 재밌게 읽어 1권은 사 놓았는데 역시 쌓아두기만 했다. 어딘가에 묵혀 두고 있는 모양인데 현재 찾을 수 없다. 전작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재미있다. 사하라를 떠난 후 카나리아 섬의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터를 잡고 사는 이야기다. 열두 편의 에세이는 이 알콩달콩한 부부의 삶과 이웃 이야기를 맛깔나고, 현실적으로 풀어낸다. 읽으면서 1970년대를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는데 이질감이 전혀 없다.


이 부부가 카나리아 섬으로 오게 된 이유는 사막의 내전 때문이다.  섬에 집을 구한 후에도 호세는 사하라에서 한동안 일을 한다. 위험의 정도가 심해지자 그 일을 그만 두는데 그들의 친구는 아내의 닦달에 계속 그 위험한 일을 한다. <대부여 돌아와요>에 실린 이야기다. 친구가 자신의 모습을 잃고 누군가의 남편으로 변했다고 지적한 부분을 읽고 안타까웠다. 이 이야기를 한국의 수많은 엄마에게 적용한다면 누구 엄마로 전락한 여성들이 떠오른다. 싼마오는 부부가 누군가에 종속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그녀도 시어머니와 시누이 부부가 왔을 때 보여준 모습은 문화적 차이와 함께 시대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호세와 그 누나 등이 보여준 행동은 놀라울 정도로 이기적이다.


<플라스틱 아이들>을 읽으면서 현재 아이들이 유튜브와 게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과 겹쳐졌다. 나라고 뭐 특별히 달랐겠는가 말이다. <수호천사> 이야기는 자신이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는 순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에피소드다. 호세의 비중이 가장 많은 이야기는 아마도 <가출한 아내에게>일 것이다. 대만으로 온 싼마오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호세의 절실한 마음과 예상 외의 전략이 읽는 재미를 북돋아준다. 아내의 답장이 없어 괴로워하다 낸 작은 잔략은 아내의 화를 북톧고, 온갖 욕설을 내뱉게 한다. 덕분에 집ㅇ로 돌아오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단축되었다. 그 전략은 이 에세이를 천천히 읽으면서 반전 같은 재미를 누리면서 즐기길 바란다.


이 책에서 가장 먹먹한 이야기는 <작은 거인>과 <어느 낯선 사람의 죽음>일 것이다. <작은 거인>의 마지막 장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열두 살 아이가 엄마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 일하고, 가정폭력을 견뎌내는 모습은 대단하다는 감탄을 넘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 낯선 사람의 죽음>은 카나리아 제도에 온 수많은 북유럽 남성 중 한 명의 죽음을 다룬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의 마지막 모습은 씁쓸하다. 하지만 이 모습보다 이 노인의 최후를 대하는 이웃들의 너무나도 개인적인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싼마오와 호세가 이 노인을 병원에 데리고 가고, 장례식까지 처리한다. 영사관마저도 노인의 병원 문제는 관여하지 않았다.


<상사병>은 호세의 입을 통해 싼마오가 꿈꾸는 미래의 한자락을 풀어낸다. 뭐 거기에 살짝 호세의 바람도 묻어있지만 구체적이고 꼼꼼한 계획은 ‘뭘 그렇게까지?’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카나리아 제도 유람기>는 두 부부가 카나리아 제도를 돌면서 각 섬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섬의 관광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대목과 관광지로 발전한 섬으로 이탈하는 다른 섬주민들 이야기가 각 섬의 특징들과 함께 어우러져 잘 요약되어 나온다. <털보와 나>는 간략한 그들의 결혼 에피소드다. 이 이야기에서 여성이 독립된 존재란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아마 이런 사실들이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한 에세이 속에 다양한 형식으로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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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 크리 오늘의 청소년 문학 31
일요 지음 / 다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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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끌린 이유는 보통의 좀비물과 다르다는 것과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 소설은 기존의 좀비물과 다른 것은 맞지만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했다. 먼저 기존의 좀비물처럼 이성을 상실하고, 사람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가 등장하지 않는다. 블루Z바이러스가 등장하는데 증상도 다르다. 오히려 최근에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이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들을 잠복체라고 부르고, 없는 사람들을 건강체라고 부르면서 차별하는 미래 사회를 그렸다. 가독성은 좋은 편이지만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는 조금 밀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크리는 지하 17층에서 세탁 등의 노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냥 보면 평범한 아이다. 할리 아줌마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란다. 이들이 사는 곳을 생츄어리라고 하는데 밤이 되면 선전노래와 함께 분리정책 홍보 영상이 나온다. “태양은 잠복체를 죽여요.”란 문구는 왜 이들이 밤에 일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표어다. 잠복체는 밤에 열심히 일하고, 아주 열악한 음식을 배급받고, 아침이 오면 잠자리에 든다. 이에 반대편에 서 있는 아이가 홍보 영상에 나오는 로미다. 건강체이면서 지상층에 살고 있다. 프레지덩의 아이로 늘 영상에 나와 홍보를 한다. 단순 비교하면 더 행복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크리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밝다면 로미는 훨씬 좋은 환경이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고 작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단순한 이분법 속에 작은 차이를 집어넣었다.


크리는 파드라는 초능력을 가진 아이다. 이 능력을 알고 있는 인물이 바로 라키바움이란 타워 중앙컴퓨터와 연결된 사람이다. 크리가 자신의 초능력을 발현한 것을 발견하고, 몰래 타워로 데리고 온 인물이다. 그녀가 바란 것은 크리가 파드를 사용해 블루Z바이러스를 없애는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생츄어리에서 글자를 배우지 못한 크리는 파드를 이용해 책 내용을 알게 되고, 염동력도 사용 가능하다. 목욕이란 것도 타워에 올라와 처음 해보고, 맛있는 음식도 처음 먹는다. 크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을 돌보아준 할리 아줌마를 찾는 것이다. 타워를 돌아다니려면 피부색에 파란 반점이 없어야 한다. 이 반점은 잠복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잠복체들이 잠을 잘 때 쏘는 빛에 의해 이런 파란 반점이 생긴다. 재밌는 설정 중 하나는 건강체들이 홀로그램으로 자신의 피부색을 옷처럼 여러 색으로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도구의 도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속인다.


두툼하지 않은 분량에 체제 전복을 그린 소설을 다루긴 쉽지 않다. 몇몇 곳에서 디테일이 살아 있다고 해도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 보니 이야기의 비약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 소설도 그런 비약이 심하다. 잠복체와 건강체의 차별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식으로 유지되는지 간결하게 나오지만 이 차별을 이용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부각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설정으로 타워를 조정하는 시스템의 핵심으로 라키바움을 두고, 파드란 초능력을 이용해 단숨에 전복시키는 장면들은 통쾌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는 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혁명 같은 일을 한 명의 소녀가 초능력으로 이룬다는 전개는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시리즈로 나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르게 크리와 로미의 대화에 어색함을 느낀다. 꼰대라서 그런지 크리가 로미에게 반말하고, 내뱉는 어투가 남자 같고, 로미가 여성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울 태생이 아니기 때문일까? 로미의 비중이 뒤로 가면서 줄어들고, 비밀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크리가 보여준 잔혹한 진실 부분은 생각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하지만 기존의 좀비물과 다르게 접근한 부분과 이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더 강화시킨 사람들이란 설정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실제 현실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 문제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과 현실을 깨달았다고 그 현실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내가 시리즈를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난관과 문제들은 이야기를 더욱 확장시켜주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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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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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작가 이름을 보았을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작품은 이선영 작가의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고 기억을 조정했다. 집에 있는 소설이다. 언제나 나의 저질 기억력은 작품과 작가를 헷갈린다.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매칭이 이루어진다. 이 틀린 매칭이 맞다는 기억으로 출력되고, 사실 확인 전까지 공고해진다. 가끔 틀린 기억은 합리화란 이름으로 사실을 왜곡하려고 한다. 사실을 확인해도 시간은 이 사실을 잊는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나의 저질 기억력처럼 작동한다. 이 소설 속 학교 성폭력도 그 중 하나다. 가해자가 보여준 발언과 행동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경기도 가평 청우산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된다. 투신 자살로 보이지만 백규민 형사는 이질감을 느낀다. 신원을 확인하다 사망자가 오기현이라고 확인한다. 그녀의 언니 윤의현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마지막 확인 작업으로 의붓아버지 오창기를 데리고 온다. 그를 데리고 온 파출소 순경의 모습은 너무 공손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의문 하나 왜 지문 확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시체의 부식 정도나 상처 때문에 지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한국은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 모두 지문을 날인하고 그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데 말이다.


첫 장에서 백규민의 과거사가 간략하게 흘러나온다. 경찰대학 출신이라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데 한 사건 때문에 좌천되어 가평으로 온 것이다. 아내와 이혼했고, 부모와도 좋지 않게 헤어졌다. 가슴 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기현의 언니 윤의현을 봤을 때 끌린 것은 그녀 속에 깔린 어둠과 상처 때문이다. 그리고 자매라고 하는데 둘의 성이 다르다. 출생연도도 1년 차이가 난다. 의현을 낳고 재혼해 기현을 낳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렇게 자매의 과거사를 조금씩 쌓아 올리고, 기현의 죽음에 의문을 던진다. 실족사나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부검을 해야만 이 사실이 명확해진다. 법적으로 부검을 하려면 부친 오창기의 동의가 필요하다.


오창기의 꽃새미 마을은 대지주의 권세 안에 자리잡고 있다. 파출소 경찰이 왜 그렇게 굽신거렸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마을 앞 꽃가게들의 실제 주인이 누군지 알려줄 때 바로 나온다. 세상이 서울의 부정부패에 눈길을 줄 때 지방 토호들은 자신의 이익을 착실하게 챙긴다. 자신의 비리를 조력자들을 통해 덮는다. 오기현과 오창기의 사연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마을 여자들을 달뜨게 하는 남자 신명호가 등장한다. 시력을 잃었고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그다. 시선을 이 두 남자에게 가져간다.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다른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책을 덮기 전 그 가능성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교묘한 트릭을 사용해 독자의 시선을 가렸다. 이 사실이 풀려나올 때 장면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진 채 다가왔다.


학내 성폭력과 성추행,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등을 소재로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엮었다.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학내에서 어떻게 처리하고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장면과 가해자의 말과 행동은 역겹지만 사실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는 현실은 비정상적이지만 현실의 실제 모습이다. 오창기와 오기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론에 드러나는 사건들은 피해자의 상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 피해자의 사연을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는 언론들이 얼마나 많은가. 탐사보도란 이름으로 공익을 위하는 척하지만 속내는 시청률이라는 점을 작가는 그대로 지적한다. 좋게 보면 공생이지만 결국 언론은 이 사실을 빨아먹으면서 기생한다. 공생이 되려면 지속적이거나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어야 가능하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상처를 봉합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진실의 무게가 주는 무거움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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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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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향이나 독서법과 잘 맞지 않은 작가들이 상당히 있다. 작가의 유명세나 작품의 호평에 끌려 이 소설들을 읽었을 때다. 물론 반대의 경우가 더 많지만 이런 작가나 작품을 만날 때면 한두 번 더 시도하고 긴 세월 그 작가와 떨어져 지낸다. 그레이엄 그린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권력과 영광>이란 작품이 워낙 유명해 읽었지만 솔직히 어떤 재미도 누리지 못했다, 아마 다른 작품도 그후 한 권 더 읽은 것 같은데 역시 난해하고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절판된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발견하고 사 놓았지만 오랫동안 묵혀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긴 시간이 흘렀고, 좀더 다양한 책을 경험했기에 이번에는 하는 심정으로 도전했다. 결론만 말하면 절반의 성공이다.


영국추리작가협회(CWA)와 미국추리작가협회(MWA)에서 선정한 세계 추리소설 100선에 동시에 올라 있다는 정보는 나 같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선정에 실패를 경험한 적도 여러 번 있지만 그래도 이런 리스트는 그 장르를 이해하고 즐기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작품을 가장 잘 소개하는 것은 역시 책 소개의 한 문장이다. ‘작가는 선악, 천국, 지옥, 구원과 같은 가톨릭 교리와 도덕과 신앙에 대한 물음들을 담아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소설로 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이런 주제를 좋아하지 않고, 예상과 너무 다른 전개로 이어지면서 상당히 나의 집중력을 깨트렸다. 물론 부분적으로 재밌고 빠르게 읽은 부분이 있지만 긴 시간을 집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힘들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완독하게 된 이유다.


브라이턴이 영국의 화려한 휴양지라고 하지만 나에겐 낯설다. 이 낯선 곳에서 갱들은 영역 싸움을 한다. 패배한 조직은 승리한 쪽으로 흡수되거나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열일곱 살 소년 핑키가 조직을 이끈다. 이런 정보가 나오기까지는 지면이 더 필요하다. 신문 기자 출신 헤일이 이벤트 작업을 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를 위협하는 조직이 바로 핑키 등이다. 카드를 발견한 사람에게 10실링을 주는 행사 때문에 그는 브라이턴을 돌면서 살짝 카드를 놓아둔다. 그러다 매력적인 아이다를 만나 호의를 배푼다. 그녀에게 경마의 승리마를 알려주는 일까지 한다. 이 짧은 만남이 헤일의 죽음을 파헤치는 탐정 역할을 그녀에게 맡긴다.


헤일의 검시 결과는 심장사이지만 그를 죽인 핑키는 완벽하기를 바란다. 헤일이 거쳐간 곳을 돌아보고 죽은 후에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발견한다. 스노 식당이다. 이 식당에 카드를 회수하러 간다. 없다. 이미 로즈라는 웨이트리스가 그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를 놓아둔 사람도 기억한다. 경찰이 헤일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이 사건을 파헤치면 이 일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핑키는 로즈가 불안하다. 그녀의 증언이 나오면 자신이 살인자로 지명되고 교수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이 불안감이 그녀에게 호의를 배풀게 하고, 로즈는 핑키에게 끌린다. 이 둘의 나이를 보면 핑키는 17세, 로즈는 16세다. 로즈의 증언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핑키와 결혼하는 것이다. 아내의 증언이 효력이 없다는 변호사의 의견이다.


미성년자의 결혼이란 문제와 함께 이 소설에서 핑키와 로즈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카톨릭의 죄의식이다. 핑키는 어릴 때 부모의 성교를 보고 자랐고, 이것을 끔직한 대죄로 여긴다.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와도 거부한다. 술도 마시지 않는다. 그에게 각인된 교리가 그의 살인과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한다.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란 불안은 현실이 지옥이란 속된 말에 묻힐 수 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핑키가 저지르는 살인 등을 보면서 왜 그렇게 로즈에게 집착하고 불안해하는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마 종교적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런 이 커플에게 계속해서 압박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아이다다.


아이다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대응한다. 그녀가 헤일을 위해 살인자와 증거와 증인을 찾는데 이때의 감정은 핑키 등과 다르다. 사회적 법률과 작은 도움에 대한 호의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이성에 의해 움직이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분신사바 같은 판을 이용해 정보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아이다가 로즈를 만나 그녀의 순수함에 경험이란 독을 던지는 장면은 현실이 지옥이란 말과 이어진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두 여자의 대화는 작가가 이 소설 속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순수한 사랑에 믿음과 열정을 가진 그녀가 앞으로 마주할 핑키의 욕설을 작가가 지옥이라고 표현한 것도 강한 여운을 준다. 읽기 쉽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 설정과 장면들이 많지만 곱씹어야 할 대목들이 많다. 언젠가 다시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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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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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수집한 티셔츠에 대한 에세이다. 그가 소장한 수백 장의 티셔츠가 열여덟 편의 에세이로 살짝 흘러나왔다. 사진과 함께 그 티셔츠에 대한 간결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티셔츠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대학 때 만들어 입었던 동문 티셔츠에 대한 나의 애정은 상당했는데 너무 입다보니 낡고 더러워 버려졌다. 하루키도 자주 입는 티셔츠는 버렸다고 한다. 책 속에 나온 티셔츠 중 자주 입는 것도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한 번도 입지 않은 티셔츠도 있다. 사실 이 에세이는 바로 ‘이런저런 이유’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상당히 좋아한다. 에세이의 매력에 빠진 것은 소설보다 훨씬 뒤인데 사실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가 에세이에 보여준 삶과 내가 읽은 한도 안에서 알 뿐이다. 마라톤, 철인3종 경기, 위스키, 재즈 등의 음악, LP판 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본 것이라 알고 있지만 그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한 것이나 그곳에 몇 년이나 머문 것 등은 낯선 정보다. 개인에 대한 덕질을 했다면 이런 정보들이 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사소한 정보들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되면서 휘발성 정보가 되었다. 물론 <먼 북소리>나 음악 대담을 다룬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같이 책으로 나왔다면 다른 문제다.


하루키가 자신의 컬렉션 중에서 가장 아끼는 티셔츠라고 말한 것은 ‘TONY TAKITANI’ 티셔츠다. 마우이 섬 시골 마을 자선 매장에서 1달러에 샀다고 한다. 토니 타키타니가 어떤 사람인지 맘대로 상상하다 단편 소설을 썼고, 이것이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에피소드다. 하루키가 결코 입지 못하는 티셔츠 중 하나가 바로 자신과 자신의 책을 소재로 한 티셔츠다. 하루키의 인기가 세계적이다 보니 많은 나라에서 굿즈로 제작된다. 이 중 하나가 티셔츠인데 그가 자신의 이름이 나온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 부끄럽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입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너무 유명한 작가이지만 개인 사생활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니 이 부분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서핑 티셔츠에서 시작해 동물, 대학교, 록 가수, 차량, 홍보용, 위스키, 맥주 등에 대한 티셔츠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직접 산 것들 대부분은 싼 가격에 산 것들이다. 지역 할인 매장을 이용해 1달러 대에서 산다. 물론 록 가수의 콘서트 장에서 산 것은 다르다. 선물로 받은 티셔츠도 대단히 많다. 에피소드 중 하나는 서점에서 티셔츠를 사려고 했는데 그를 알아본 직원 때문에 수많은 책에 사인을 열심히 해주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때 받은 티셔츠는 선물로 공짜. 특별 인터뷰를 보면 그의 책이 처음 나온 후 하와이의 중고 티셔츠 가격이 두 배 이상 뛴 모양이다. 이 책의 효과라고 진단하는데 어느 정도 동의한다. 에세이에 실리지 못한 수많은 티셔츠들이 이 인터뷰에 실려 있다.


이 에세이를 읽다 보면 하루키의 일상이 조금씩 나온다. 그의 에세이 특유의 매력적인 문장과 함께 어우러져서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나온 티셔츠는 입기 어렵다고 하면서 다른 록 가수의 티셔츠는 입는 것이나 어떤 특정 단어가 프린팅 된 티셔츠는 좋아하는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옷은 자신이 입는 것인데.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 무지 티셔츠를 입게 된 사연을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나의 저질 기억력을 떠올려봐도 하루키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라톤 등을 할 때 입은 옷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어쩌다 모였다고 하지만 자신이 좋아해야만 그것이 가능한 것을 떠올리면 그가 평생 읽지 않을 책이나 듣지 못할 음반에 대한 이야기가 왠지 나의 수집욕을 연상시킨다. 나도 평생 읽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자료들을 얼마나 열심히 모았는가.  아내가 낡았다고 버리려고 한 물건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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