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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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 이전에 읽었던 제시 버튼의 책들에 대한 서평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나의 저질 기억력이 내용에 대한 많은 부분을 빼앗아갔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읽다 보면 몇 가지 키워드가 눈에 들어온다. 성차별, 피부색 등 시대의 한계들이다. 이 소설의 두 시점 중 하나는 현재와 같은 인식이 제대로 확산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불과 40년 전인데. 읽으면서 동성애와 모성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잠시 잊고 있던 그 시절의 인식을 떠올린다. 그리고 단숨에 읽지는 못했지만 읽을 때마다 순식간에 이야기에 빠져들어 그녀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전작 <뮤즈>처럼 두 개의 시간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1980년의 엘리스와 2017년의 로즈다. 로즈는 엘리스의 딸이고, 이제 그녀의 나이는 35살이다. 35살은 엘리스가 콘스턴스 홀든과 사귀던 시절 콘스턴스의 나이다. 이 나이에 눈에 들어온 것은 23살의 어린 나이였던 엘리스의 선택과 35살의 로즈의 각각 다른 선택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책을 다 읽고 그들의 선택을 돌아보면서다. 21살에 콘스턴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엘리스는 그녀와 동거한다. 이 동거는 행복했다. 그러다 콘스턴스의 소설 <밀랍 심장>이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잠시 삶의 무대를 옮긴다. 평탄한 삶에 큰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로즈는 엄마 없이 자랐다. 그녀의 상상력은 엄마의 부재를 다른 환상과 모험으로 채워 놓았다. 크게 엄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남자 친구 조와 동거하고 커피숍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이 일상에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 생긴다. 바로 아버지 맷이 전해준 두 권의 책과 그 작가와 관련된 엄마 이야기다. 콘스턴스가 엄마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란 사실이다. 현재 시점의 로즈가 이 사실을 알고, 그 책을 읽고, 엄마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다면 1980년의 앨리스 이야기는 그녀가 어떻게 로즈를 낳고, 사라졌는지를 다룬다. 이 두 가지 시점은 각각 진행되는데 흥미로운 지점은 마지막 장의 인물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성애자인 엘리스는 코니와 그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젊다고 말하는 것에 불만이다. 개인적으로 공감한다. 내가 이십 대였을 때 이 말이 불쾌했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십 내는 젊기에 맞는 말이다. 영화 때문에 코니를 따라 할리우드에 왔지만 그녀가 할 일은 없다. 무료함은 젊은 시절에 견디기 힘든 일이다. 사랑하는 코니가 자신을 더 많이 보아줘야 하고, 자신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과 새로운 인물과 관계를 맺는 일을 즐기고 있던 코니에게 엘리스의 이런 행위들은 투정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잠깐 사랑이 식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매력적인 여배우 바버라와 점점 가까워지는 관계도 한몫했다.


현재 시점의 엘리스는 자신의 현재가 불만이다. 남자 친구 조는 뜬구름 잡는 사업 이야기만 하고, 그의 엄마는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나이도 이제 적지 않다. 경제력이 담보되지 않은 결혼은 고난일 수 있기에 결혼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그녀에게 엄마와 콘스턴스의 관계는 묻어두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밖으로 드러내게 한다. 우연과 노력이 겹쳐 코니의 집 도우미가 된다. 그녀가 처음 바란 것은 엄마의 마지막 행방에 대한 정보였는데. 가명을 사용했고, 이력을 위조해서 잠입했지만 점점 그녀는 코니에게 빠진다. 엘리스와 같은 사랑은 아니다. 이때 코니는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다. 30년만의 신작이다. 로즈는 소설 속 인물 속에서 엘리스의 흔적을 찾는다.


시대를 달리한 두 모녀의 삶을 다룬다. 다른 나이와 다른 선택을 보여주고, 그 과정을 섬세한 심리 묘사와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두 모녀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스는 코니를 만난 후 자신의 일을 포기했고, 로즈는 조와 사귀면서 그와 침몰하는 중이었다. 이런 삶과 비교되는 인물이 콘스턴스다. 60년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힘들게 산다. 소설의 성공은 그 과정 중 하나다. 성공은 그녀를 잠시 흔들어 놓는다.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오만하고 상처주기 쉬운지 잘 보여주는 것이 코니와 엘리스의 마지막 만남을 다룬 장면이다. 나이와 상관없다. 진심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진실한 감정을 감추고 두려워하면서 생긴 돌발적인 상황이다. 그 결과가 로즈의 현재 삶으로 이어진다.


60년대에 레즈비언이 보통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었다면 80년대 산모의 산후우울증이 낯선 병명이었다. 이 두 가지 낯섦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두 여인의 삶이 갈라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엘리스와 그녀의 딸 로즈는 또 다른 선택을 한다. 작가는 콘스턴스의 작품들 속에 페미니즘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시대의 한계 속에서 싸우고 노력한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마 로즈가 그 속에서 코니와 엘리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최대한 본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 내용도 어느 정도 담겨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모녀의 삶을 엮어 재밌고 단순하게 풀어낸 것 같지만 세밀하게 파고들면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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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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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공포 게시판에 처음 공개된 이야기가 소설로 출간되었다. 소설의 도입부만 놓고 보면 소위 말하는 진짜 경험담 형식을 담고 있다. 파커라는 이름의 정신과 의사가 한 정신병원에서 경험한 일을 풀어놓는 방식이다. 아주 흔한 형식이다. 가독성이 좋아 잘 읽히는데 분량도 많지 않다.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어진다. 아마 이 부분이 이 소설의 흥행에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 취향과 동떨어져 있는 소설이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도입부나 초반 진행은 상당히 시선을 끈다. 뻔한 이야기지만 정신병원의 괴담 같은 환자에게 끌리고, 그 환자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과 가장 오랫동안 담당했던 직원 네시의 자살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환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본다. 어린 나이에 병원에 입원한 후 바로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했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퇴원하지 않았고, 그 환자를 담당했던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나쁜 일들이 생겼다. 자신만만한 파커는 더 많은 기록을 보게 되면 자신이 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환자의 이름은 조셉 E.M이다. 그의 상사인 브루스는 파커의 시도를 보고 화를 낸다. 이때 병원장 로즈가 나타나 그에게 그 환자를 치료하게 해준다. 로즈는 누군가가 조셉의 파일을 요청하면 자신에게 통지하게 만들어 놓았다. 몇 개 숨겨둔 파일도 그에게 전달한다. 파커는 의욕적으로 그 환자를 치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환자와의 첫 만남 이후 그는 환자가 부당하게 오랫동안 병원에 감금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를 감시하는 듯한 간호사들이 주변을 맴돈다. 조셉을 병원에서 탈출시키려는 시도를 하는데 간호사에게 잡힌다.


그가 그 환자에게 농락된 것이다. 병원장 로즈뿐만 아니라 그 이전 병원장까지 나타나 조셉이 어떤 환지인지 말한다. 그 환자를 담당했던 의사 등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아이였던 그 환자가 묘사한 설명과 인터뷰 테이프를 다시 듣고 병원장들의 가설을 다시 검토한다. 이 과정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심리학 관련 소설의 전개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야기 사이 사이에 뭔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의 나이와 행동 등이 이상하다. 병원장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조셥의 집을 방문한다. 거기서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마주한다. 소설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파국의 수레는 바쁘게 굴러간다. 이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소설이 아닌 영화라면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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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검은 강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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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리죄 시리즈 3번째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은 아직 읽지 않았다. 최근에 읽은 중국 추리소설에 상당히 만족했고, 이 시리즈의 평이 좋아 역주행하려는 마음으로 선택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역주행하고 싶은 시리즈다. 팡무란 인물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와 그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몇몇 인물들은 이전 작품에 등장해서 같이 사건을 수사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읽을 때 이번 소설 때문에 감정이 격해주는 순간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그리고 대단한 가독성을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내용의 잔혹함을 생각하면 가볍게 읽지는 못할 것 같다.


한 남자가 호텔에 들어가서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그 살인자를 좇아간다. 칼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총을 쐈는데 숟가락이다. 그리고 공안들이 바로 온다. 이 남자가 바로 C시 공안국 부국장 싱즈썬이다. 소설은 이렇게 문을 열고, S시로 출장을 간 팡무의 대활약을 보여준다. 여배우 페이란 납치 사건이다. 납치범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고, 페이란의 알몸을 자극적으로 찍은 영상을 보낸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팡무를 보고 있으면 냉철하고 담대한 진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이미지가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면서 팡무란 인물의 이미지가 많이 흐트러졌다.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S시의 사건 해결 후 싱 부국장의 살인 사건 이야기를 듣는다. 현직 공안 간부가 호텔에서 무기도 없는 민간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가 주장하는 여성의 시체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호텔의 CCTV는 그날 점검으로 꺼져 있었다. 어디로 보나 수상한 상황이다. 이 사건을 안 언론이 공안을 질타한다. 그를 법정에 세워 법 앞에 심판받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팡무는 싱 부국장을 면회 간다. 구치소 안에서 폭행을 당해 얼굴이 엉망이다. 현직 공안이 들어왔으니 범죄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구치소 소장도 살인으로 들어온 그를 특별 대우할 마음이 없다. 싱은 팡무에게 한 사람을 찾으라고 말한다. 잠입수사를 지시한 딩수청이다.


딩수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인맥을 통해 그 흔적을 좇는다. 이 과정에서 팡무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폭압적이기보다 온정적이다. 물론 돈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팡무가 사건의 피해자나 연락책 등에게 주는 돈은 그 당시 돈으로 생각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중국에서 출간된 연도가 2012년이다. 그의 월급을 생각하면 과도한 지출이다. 그가 S시 사건 해결 후 샤오왕이 전달하는 돈을 거절한 것을 생각하면 그가 지출한 돈은 그의 월급을 초과한다. 그의 정확한 월급을 모르니 그냥 지나가자. 돈과 인정으로 작은 단서 하나를 얻는다. 그곳에서 딩수청과 한 소녀를 찾아낸다. 그곳에서 그는 죽을 위험 속에 놓인다. 나중에 이 소녀의 이름이 루루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를 피신시킨 후 그녀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단서를 얻는다. 이 단서가 거대한 음모의 한 자락을 발견하게 한다.


싱 부국장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장면 하나는 너무나도 끔찍하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간들의 탐욕은 보고 있으면 그 잔인함과 참혹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 중 최악 중 하나를 이 속에서 본다. 돈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윤리나 도덕은 중요하지 않다. 한 마을 전체가 범죄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거나 돕고, 권력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범죄자들의 방어막이 된다. 평범한 공안 팡무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관료들이다. 팡무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와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공포는 읽을 때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더 강하게 느낀다.


어린이 성매매를 둘러싼 글은 언제 읽어도 끔찍하다. 처음에는 ‘중국이니까’ 라고 생각했다가 N번방 사건이 떠오르면서 우리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N번방 사건이나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판결 등을 보면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범죄의 검은 강이 우리의 삶 이면에서 흘러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해도 최소한 밝혀낸 사건에 대한 처벌은 엄정해야 하지 않는가.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진 팡무를 일깨운 것은 피해 아동의 고맙다는 말 한 마디다.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설정이지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멋진 반전을 만들어내었다. 한국이라면 솜방망이 처벌로 용두사미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말이다. 책에서 경찰이 충성해야 할 대상이 법인지 양심인지 묻는데 이 질문을 한국의 검찰과 사법부에 그대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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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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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란 이름을 발표한 소설 중 한 권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 <롱 워크>를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의 <런닝 맨>도 이전에 재밌게 봤다. 지금처럼 스티븐 킹이 꾸준히 나오기 전부터 킹의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그래서 구작들은 많이 읽었는데 신작들은 비교적 적게 읽었다. 어떤 작품은 제목이 바뀌어 나와 읽은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집을 뒤지면 구판이 여러 권 나올 것이다. 킹에 대한, 리처드 바크만에 대한 작은 기억은 이 정도만 말하자. 이제는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이란 사실이 잘 알려졌으니까. 스티븐 킹의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니까.


나에게 킹은 언제나 쥐기 힘들지 읽기 힘든 작가는 아니었다. 집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 많은 작가들이 읽고는 싶지만 읽기 힘들어 포기한 책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손에 들면 재밌게 읽을 것이 분명하지만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 작가들도 많다. 이런 증상이 시초 중 한 명이 스티븐 킹이다. 헌책방을 돌면서 책을 살 때 킹의 소설을 바로 사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주저함 때문이다. 그래서 놓친 좋은 작품들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런데 지금은 황금가지에서 꾸준히 책을 내어주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지만. 킹이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꾸준히 소설을 내었는가 생각하면 그의 작품들을 따라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속도로 공사 예정지를 WHLM 방송국 기자가 취재를 한다. 이때 인터뷰 한 인물 중 한 명이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바튼 도스다. 작가는 프롤로그에 이 사실을 살짝 말하고 지나가는데 생각보다 이 장면이 중요하다. 모두 읽고 난 후 다시 앞으로 돌아와 확인했을 때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바튼은 세탁회사 중간 관리자다. 고속도로 건설로 회사를 이전해야 한다. 그의 집도 역시 공사의 여파로 옮겨야 한다. 이런 현실이 바튼 도스를 화나게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좋아하면서 옮겼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추억들이 뒤섞여 있는 곳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한계시점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버틴다.


아내에게는 새로운 집을 보러 갔다 왔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가보지 않았다. 아내도 같이 가자고 말하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다. 회사 이전 예정 부지의 계약 마감 시한이 다가왔을 때 사장에게는 그 건물이 가진 문제들을 만들어 내어 더 낮은 가격으로 옮길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상당히 그럴 듯하다. 하지만 사실을 바로 알려주면서 이런 위험한 일을 저지르는 이유를 묻게 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니라는 직원에게 자신의 과거와 이전 회사 사장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이야기에 나온다. 아주 인간적인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회사가 자본에 팔리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이것을 잘 알려주는 장면들이 곳곳에 나온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중동 전쟁에서 비롯한 제1차 석유 파동이다. 기름 값이 올라가면서 절전 등을 외치던 시기였다. 바튼이 분노해서 고속도로를 과속해 달릴 때 사람들은 그에게 욕을 하고, 주유소에는 기름이 없을 때도 있었다. 높아지는 원유 가격에 기름을 많이 먹는 자동차 값이 똥값으로 떨어지던 시기다. 불안감을 엄청나게 고조시켰던 모양이다. 현대 사회가 석유를 기반으로 성장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듯하지만 그 뒤에는 미국 정유회사의 조작들이 숨겨져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먼 훗날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절전 등을 외칠 때 이것과 상관없다는 듯이 고속도로를 짓는다. 고속도로 건설과 유지는 기름을 엄청나게 먹는 일인데 말이다.


작가는 그냥 보면 왜라고 묻게 되는 질문을 촘촘하게 엮어 놓고 마지막에 한방에 터트린다. 그 속에 가려진 것을 더 발견하는 것을 독자의 몫이다. 곳곳에 블랙유머와 비판의식을 드리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튼이 중화기를 사는 장면에 나오는 문구다. ‘총이 불법화되면 범법자들만이 총을 갖게 된다.’ 총기협회가 내세우는 표어다. 이것을 뒤집어 보여주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이다. 사냥용 총이 보여준 위력은 끔찍하다. 총을 누가 샀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총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안다. 서부 개척 시대도 아니고 일반 시민들이 총을 소유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범법자들이 총을 쉽게 못 가지게 하고,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 강한 처벌을 한다면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정치 로비는 이것을 힘들게 한다.


자꾸 다른 길로 빠진다. 이 작품이 지닌 매력 중 하나다. 읽을 때는 그냥 한 중년 남성이 추억 등으로 심리적 갈등을 겪고 파국으로 치닫는 내용인 것 같다. 실제 그의 정신 분열적인 상황과 뒤틀어지는 관계, 이전 부지 미계약 등으로 인한 회사 폐업 등을 보면 그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고 회사가 주장할지 모르지만 과연 그럴까 하고 묻게 된다. 회사가 문을 닫은 후 몇 사람의 새로운 직장 이야기는 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특히 바니의 경우가 그렇다. 미래가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튼은 아들이 뇌종양을 죽은 후 그 아픔을 털어내지 못했다. 울고 슬퍼하고 그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했는데 그 감정이 자신 속에 고였다. 밖에서 보기에 미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성은 날카롭게 살아 있다. 거리의 신부와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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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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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시리즈 4번째 작품이다. 앞의 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아마 집에 한두 권 정도 더 있을 것이다. 이 책도 사 놓고 상당히 묵혀 두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첫 연애소설이란 홍보문구를 기억하는데 작가는 이 연애도 미스터리처럼 풀어놓았다. 일곱 편의 연작 단편을 실고 있는데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은 첫 번째 실린 <곤돌라>인데 바람 피는 남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아주 스릴 있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 하나로 모든 것을 뒤집는다. 이번 단편집을 읽으면서 예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이 단편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 단편집에 나오는 남녀는 모두 아홉 명이다. 이 중에서 한 명만 이 단편 속 커플과 관계가 없다. 커플은 셋이고, 한 커플은 가능성만 남겨둔 상태로 끝난다. 그 가능성을 풀어낸 단편이 <곤돌라 리플레이>다.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려는 순간 첫 단편의 남녀 커플이 등장해 상황을 이상하게 이끈다. 이 작품에서 여자가 느끼는 감정이 폭발할 때 웃고,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 두 작품 사이에 낀 다섯 편의 단편들은 커플이 이루어지거나 <스키 가족>처럼 작은 반전을 품은 이야기들이다. <스키 가족>은 스노보드를 싫어하는 장인을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인데 이 편견을 살짝 깨부수는 훈훈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리프트>의 커플이 결혼한 후 이야기다.


<리프트>는 도쿄 한 호텔에서 근무하는 남녀 직원들이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에 보드를 타러 오면서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다룬다. 이 단편집에서 불운의 아이콘 같은 히다의 존재가 드러난다. 자신이 관심 있는 여자에게 바로 달려들지 않고 주변에 머물면서 기회만 노리는 인물이다. 연인보다는 친구나 믿을 수 있는 동료로 인식된다. 그의 옆에는 동기이자 바람둥이인 미즈키가 있다. 미즈키는 아키나와 사내 연애 중이지만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히다가 관심을 둔 마호에게 미즈키가 작업을 거는 듯해 충고를 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긴다. 이 일이 있은 후 히다는 호텔에 취직한 미유키와 만남을 이어가면서 프로포즈를 하려고 한다. 멋진 프로포즈 계획을 세웠는데 갑자기 나타난 전 남친이자 <곤돌라>의 주인공인 고타가 나타나 그녀를 휙 채어간다.


히다의 불운은 <겔팅>에서도 계속된다. 그런데 그가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아 단편이다. 히다는 여자를 재미있게 만들지도, 여자가 관심 있어 하는 대화도 제대로 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미식축구만 열심히 떠들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미즈키는 여전히 바람 필 생각만 하고, 모모미는 미즈키에게 끌린다. 이 미팅은 히다를 위한 것이고, 그는 가벼운 만남만을 원할 뿐이다. 모모미가 히다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한 순간이 마지막에 나오는데 그것은 히다가 일하는 호텔에서 그의 모습을 봤을 때다. 이후 이 둘의 관계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데 <곤돌라 리플레이>에서 그 방법을 찾아낸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는 고타 부부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힘을 잃지만 말이다.


이 단편 속 남녀들은 스노보드를 상당히 좋아한다. 일년에 몇 번이나 이 스키장에 와서 보드를 탄다. 각각의 커플들과 함께 오는데 두 명의 남자만 그렇지 못하다. 히다와 미즈키다. 히다는 연애에 서툴러서, 미즈키는 히다를 도우면서 자신의 바람기를 채우기 위해서다. 다시 한 번 더 미즈키 등이 히다의 프로포즈를 돕기 위해 작전을 펼치는데 히다가 부상을 당한다. 뭐지? 역시 불운의 아이콘인가 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웃게 된다. 연애하는 남녀의 심리 표현을 간결하지만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이상하고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모두 다 읽은 지금 갑자기 이 훈훈함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떠올린 것은 왜일까?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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