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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리 dele 1
혼다 다카요시 지음, 박정임 옮김 / 살림 / 2021년 4월
평점 :
정말 오랜만에 혼다 다카요시의 소설을 읽었다. 십 수 년 전에 나온 소설들은 읽은 적이 있지만 최근 몇 년 안에 나온 소설들은 나온 것도 몰랐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읽지 않은 책들이 몇 권 보이고,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도 눈에 들어온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흔적이 보이지 않는 책도 있다. 오래 전 기억이고, 소설들이 누적되면서 기억이 혼란을 일으킨다. 계속 작가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기억이 오랫동안 남는 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이 입에 짝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디지털 장의사란 설정이 나를 혹하게 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나왔는데 1권에는 다섯 편의 연작이 실려 있다. 따로 읽어도 무리가 없는 내용들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두 명이다. dele. LIFE 사무소의 소장인 케이시와 그 사무소의 유일한 직원이 유타로다. 이 사무소가 하는 일은 죽은 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데이터를 의뢰인 대신 디지털 기기에서 삭제해주는 일이다. 이 데이터는 스마트폰 속일 수도 있고, 노트북이나 데스크탑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삭제는 의뢰인이 요청한 시간이 지난 후에 가능하다. 개인에 따라 72시간, 24시간 등으로 모두 다르다. 물론 이 삭제는 의뢰인의 사망 확인을 같이 요구한다. 누군가가 의뢰인의 죽음을 알려주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이것을 위해 최소한의 앱을 깔게 한다. 이 앱을 통해 케이시는 접속이 얼마나 오랫동안 되지 않았는지 알게 되고, 사실 확인을 유타로에게 시킨다. 소설은 이 데이터를 둘러싸고 일어난 의문과 그 죽음 이면의 미스터리를 잘 엮어 풀었다.
<첫 포옹>은 이 연작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것인지 잘 보여준다. 케이시는 의뢰인의 죽음이 확인되면 주저없이 데이터를 삭제한다. 하지만 유타로는 그 데이터의 내용이 유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소장 케이시와 남은 사람들의 삶에 더 관심이 있는 유타로는 작은 충돌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망 확인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의혹들이 의뢰인의 데이터를 열게 하고, 그 데이터와 죽음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강매 사기단의 일원이었던 사람의 데이터와 죽음도 그렇게 해결된다.
<비밀 정원>은 의뢰인의 죽음과 그 죽음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여인과 삭제 요청한 데이터가 엮인다. 우리 삶 속의 진실한 사랑과 비열하고 추악한 욕망이 뒤섞여 있고,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넘은 감정이 담겨 있다. 케이시는 앉은뱅이 탐정의 역할을 하고, 유타로는 발로 뛰면서 알게 된 정보를 케이시에게 전달한다. 하나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어떻게 다르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고, 순수한 감정이 어떤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알려준다. <첫 포옹>처럼 마무리는 남은 사람의 선택으로 남겨둔다.
<스토커 블루스>는 한 사회부적응자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스토커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과 감정을 데이터를 통해 추론하면 순수한 감정들이 녹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고 일상적인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단편은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여동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피규어 등을 사야만 했을 그의 삶이 씁쓸하다. <인형의 꿈>은 데이터 삭제를 요청한 의뢰인의 남편이 그 데이터를 보고 싶어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 데이터 삭제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풀었다. 오해와 이해 사이의 간극은 제대로 된 설명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는데 이것을 알려주는 인물이 케이시다. 아내의 질병과 남편의 성욕에 따른 실수는 현실적이지만 역시 씁쓸하다.
<잃어버린 기억>은 갑자기 죽은 의뢰인의 데이터와 과거사가 오래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의뢰인의 아들은 아버지의 예금에서 사라진 금액의 행방이 궁금하지만 케이시가 이것을 알려줄 이유는 없다. 의뢰인이 무료로 시행하고 있던 교육 등은 현실의 대안학교를 넘어 아주 훌륭하고 멋진 일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잇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돈의 정기적인 이체와 그 이체의 이면을 파헤치는 케이시 등의 활약과 의뢰인의 죽음이 불러온 현실은 서로 엮여 있다. 부모 관계와 용서를 다룬 이 단편을 읽으면서 서로 관계가 틀어진 수많은 부자 사이를 돌아보게 된다. 2권의 경우 단편 수가 적은데 앞에 깔아 둔 유타로와 케이시의 과거가 어떤 식으로 흘러나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