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티 오브 걸스 - 강렬하고 관능적인, 결국엔 거대한 사랑 이야기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아리(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평점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영화로 만들어졌고, 소설도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영화도 소설도 보지 않았다. 언젠가 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 바로 이 소설이다. 1940년대 뉴욕의 화려하지만 쇠락한 극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이야기에 끌렸다. 전작의 성공도 나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며칠만에 끝냈다. 가독성이 좋아 큰 부담이 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놀랐다. 어떻게 보면 통속적이고 관능적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들이 녹아 있다.
2010년 여든아홉 살 노인인 비비안 모리스가 안젤라라는 여성에게 회고록 형태로 쓴 글이다. 처음에 비비안이 안젤라 아버지의 불륜 상대가 아닐까 생각했다. 쉽게 생각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그녀가 어떻게 뉴욕에 오게 되었고, 안젤라의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 그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풀어낼 것이란 도식적인 예상이었다. 실제 이 부분도 나오고 그렇게 이야기도 흘러간다. 하지만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비비안이 뉴욕에 왔고, 고모 페그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는지, 그 욕망 때문에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 이후 삶의 모습을 직설적이면서 노골적으로 그려내었다.
페그 고모가 운영하는 극장 릴리 플레이하우스는 동네의 작은 극장이다. 비비안은 이곳에서 쇼걸 셀리아를 만나 함께 뉴욕의 밤을 즐긴다.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놀랍지만 그녀가 비비안과 함께 보낸 수많은 밤들이 내가 상상했던 1940년의 풍경과 너무 달랐다. 비비안은 거침없이 남자들을 만나고, 섹스를 한다. 사고를 친 후 이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간 곳에서 그녀가 술을 얼마나 마셨고, 남자들에게 얼마나 쉬웠는지 보여준다. 매혹적인 셀리아와 쌍둥이처럼 다니면서 남자들을 후리고 다녔다. 그러다 고모의 친구이자 배우인 에드나 파크 왓슨이 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제목인 <시티 오브 걸스>도 에드나 때문에 만들어진 뮤지컬 제목이다.
고모부 빌리는 바람둥이에 무책임한 남편이지만 글과 연출에 대한 재능은 탁월하다. 한 여성에 차인 후 릴리 플레이스로 온다. 에드나와 빌리의 결합과 좋은 대본과 훌륭한 노래는 성공을 보장하지만 가는 과정은 삐걱거린다. 극장을 관리하는 올리브의 반발 때문이다. 뮤지컬이 성공하면 돈방석에 앉게 되지만 실패하면 작은 재산마저 사라진다. 이런 와중에 비비안은 매력적인 안소니를 만난다. 그를 통해 처음으로 절정을 맛보고, 그의 곁에 붙어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놓치고, 보통의 여자처럼 그를 소유하려고 한다. 뮤지컬은 흥행에 성공하고, 배우들도 유명해진다. 이 순간을 작가는 평론가의 글을 통해 보여준다.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질투와 방탕한 생활의 연장선이 그녀를 추락시킨다. 이 장면을 보면서 작가에게 놀랐다고 하면 내가 너무 보수적인가?
유럽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전쟁에 참여하길 바라지 않는다. 이 분위기를 바꾼 것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다. 오빠 월터가 해군 장교로 입대하고, 그녀가 친 사고는 더 이상 고모와 함께 살 수 없게 만든다. 그녀의 삶을 오빠가 알게 되면서 보여주는 장면은 도덕적인 평범한 오빠의 행동이다. 집에 돌아와 향수병 때문에 돌아온 것처럼 연기하면서 조용히 살지만 그녀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약혼자에게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때 장면은 내가 알던 그 시절의 모습이다. 그녀의 삶을 변하게 만든 것은 역시 전쟁이다. 고모가 그녀의 도움을 바라고 오면서 상황은 또 바뀐다.
한 소녀가 여자로 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과격하면서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실수도 하고, 실패도 경험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기술을 가진 그녀는 기존의 도덕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 움직인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은 그녀를 홀로 서게 만들었다. 극장의 의상 감독이 되었다가, 친구들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주었다가, 결국 웨딩드레스 제작 업체까지 차린다. 안젤라에게 자신의 삶을 하나씩 풀어내는데 도덕적 가치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삶이다. 과거와 현재의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마주보면서 나아갈 때 그녀는 어른이 된다. 사랑은 그렇게 찾아온다. 그 시대와 삶이 가진 아픔과 상처를 껴안고 받아들이면서 그녀와 친구들은 성장하고 앞장섰다. 매혹적인 인물과 상황들이 무겁지 않은 이야기로 나를 끌어들였고, 머릿속에서 그들이 춤추게 만들었다.